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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덴 전투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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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국-프로이센 왕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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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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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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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헨바흐 전투
,1762년 8월 16일,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프라이베르크 전투
,1762년 10월 29일,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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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민덴 전투
Schlacht bei Minden
Battle of Minden
<colbgcolor=#ABCDED,#0E0F37> 시기 1759년 8월 1일
파일:4-AAA-37th-foot-580.jpg
장소

민덴
교전국 <rowcolor=black> 프로이센-하노버 연합
(공세)
프랑스-작센 연합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페르디난트
파일: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국기.svg 조지 사크빌 (기병 사령관)
지휘관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콩타드 후작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브로이 공작
병력 연합군: 42,000명
대포: 170문
연합군: 57,000명
대포: 162문
피해 사상자: 2,797명
- 전사자: 618명
- 부상자: 2,179명
사상자: 4,278명
포로: 3,963명
결과 프로이센-하노버 연합의 승리
- 프랑스 왕국의 대패
- 7년전쟁의 서부전선에서의 종료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프랑스군의 진군과 페르디난트의 대응3.2. 전투 초반3.3. 전투 중반3.4. 전투 후반
4. 결과5. 프랑스군은 왜 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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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8월 1일 하노버-영국-헤센 연합군이 프랑스-작센 동맹군과 맞붙은 전투. 하노버-영국-헤센 연합군이 완승을 거뒀으며, 프랑스군은 이 전투의 패배로 하노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에도 하노버-영국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고전하며 프로이센을 거의 위협하지 못했다.

2. 배경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의 3국 동맹과 대립했다. 이때 하노버 왕국은 1714년 선제후 게오르크 1세가 조지 1세로서 영국의 왕이 된 이래 영국과 동군연합이 되었기에 영국을 따라 프로이센과 연합했다. 그후 하노버는 프랑스군의 침략에 맞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덕분에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퇴각하면서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은 프랑스군이 점령했던 하노버 영토를 회복하고 1758년 6월 라인강 서쪽까지 진군해 크레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지만 뒤이은 잔더스하우젠 전투미어 전투에서 보급로가 위협당하자 철군을 택했다.

그 후 1759년 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공작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처남인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연합군이 공세를 개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풀다와 마이닝겐을 함락시켰다.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이 보헤미아로 철수하기 시작하자, 연합군은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합류하는 것을 중도에서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하노버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작센군과 함께 프랑크부르크 근처의 베르겐에 주둔한 채 연합군이 오길 기다렸다. 1759년 4월 13일, 연합군은 베르겐 전투에서 프랑스-작센 연합군에게 패퇴했고, 그해 7월 초엔 프랑스군이 민덴을 기습 점령하고 베이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확보한후 하노버에 접근했다.

페르디난트는 베르겐 전투의 패배로 크게 상심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자 마음을 추스린 후 프랑스군과 전면 대결하기보다는 민덴 근처의 베저강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후 휘하 부대를 여러 개로 나누고 일부 분견대로 하여금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교란하게 했다. 이에 프랑스군 총사령관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슴는 하노버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진군했다. 이리하여 하노버-영국-헤센 연합군과 프랑스-작센 동맹군간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전투 경과

3.1. 프랑스군의 진군과 페르디난트의 대응

7월 31일 저녁, 콩타드 후작은 프랑스군 5만여 명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19개의 가교를 통해 베저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그는 민덴 평야에 진을 치고 적을 격멸할 생각이었다. 8월 1일 자정 무렵, 콩타드 후작의 군대는 8개의 대열로 진영을 떠났다. 또한 브로이 공작은 마을의 다리를 통해 베저 강을 지나 프랑스군의 우측에 9번째 대열을 형성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다음날 새벽 1시에 군대를 진군시킬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다가 8월 1일 새벽 1시경, 프랑스 탈영병 2명이 하노버군 진영에 투항해 프랑스군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새벽 3시경 전령이 이 소식을 가지고 안할트에 있는 연합군 본부에 도착했다. 페르디난트는 전령의 보고를 받고 즉시 전 병력을 소집해 지정된 위치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새벽 3시가 조금 지났을 때 프랑스군 전진 포대가 힐레에 있는 적군에게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적의 시선을 힐레 쪽으로 돌리기 위해 힐레에 거짓 공세를 가하면서 주력군을 연합군 좌익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힐레에 중포 2문을 배치하고 그곳에 배치된 군대에게 자기 위치를 사수하라고 지시했을 뿐 섣불리 힐레에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왔지만 안개가 자욱했다. 프랑스군은 새벽 5시에 연합군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할 계획이었지만 콩타드의 군대는 베저강을 건넌 후 전투 대형을 형성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한편 브로이 공작은 베저 강을 건너서 정해진 지점에 빠르게 진형을 갖추었지만 나머지 군대가 대형을 형성할 때까지 감히 단독으로 적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동안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동쪽으로 진군해 8개 대열을 형성해 콩타드의 프랑스군을 저지하려 했다. 이 8개 대열 중 7개는 매우 신속하게 행동했지만, 조지 사크빌의 부대의 행군은 지연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사크빌의 부대 기동이 지연된 것을 만회하기 위해 하툼으로 달려가 그곳에 주둔하고있는 병력을 즉시 하트렌으로 옮기라고 명령한 후 할렌 마을을 서둘러 확보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이 이미 점거했다는 나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편 그의 부관 반게하임(Wangenheim)이 이끄는 군대는 브로이 공작의 군대와 대치하면서 전투 대형을 편성하고 있었는데, 브로이 공작이 3시간 동안 포격을 퍼붓게 한 지라 대형 편성에 어려움이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반게하임이 자신에게 어떠한 보고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 보좌관 토텐하우젠(Todtenhausen)을 보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확인하게 했다.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 연합군은 하툼과 하알렌에 우익을 배치하고 스템므렌에 좌익을 배치했다. 또한 안할트 왕자 휘하의 연합군 병력은 하알렌 근처의 우익의 기병대 앞에 배치되었다.

3.2. 전투 초반

오전 7시경, 프랑스군의 좌익 전방 포대가 포격을 가해 연합군의 전방 포대를 침묵시켰다. 이에 영국 여단이 반격해 10분 만에 그들을 격파했다. 한편 콩타드 후작의 프랑스군은 7시부터 8시까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의 전선은 볼록 튀어나와 있어서 어떤 대열은 너무 가까웠고 어떤 대열은 너무 멀었다. 양쪽 측면의 지면은 거칠어서 기병 기동에 상당히 부적합했다. 따라서 콩타드 후작은 그의 기병 전체를 중앙에 배치했다. 이 만여 명에 달하는 기병대는 프랑스 육군의 핵심으로, 이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히든카드였다. 그러나 프랑스 좌익 보병대는 정해진 위치에 뒤늦게 도착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군의 본격적인 공세는 지연되었다.

오전 8시, 조지 사크빌 휘하의 영국 기병대가 마침내 하툼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브로이 공작은 자신이 보유한 포대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자신과 대치한 반게하임의 군대가 예상보다 더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깨닫고 콩타드 후작에게 증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우익은 쿠텐하우젠을 공격했고, 연합군은 할렌의 프랑스군 좌익에게 맹포격을 퍼붓고 뒤이어 안할트 왕자의 군대가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할렌에서 벌어진 육탄전 끝에 프랑스군이 할렌 마을에서 밀려나 습지를 따라 뒤첸으로 후퇴했다. 할렌 마을을 점령한 후, 페르디난트는 전방 포대를 마을 앞의 언덕에 설치하고 군대가 대열을 새로 형성하는 걸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토텐하우젠이 그에게 돌아와서 반게하임이 비록 적에게 측면이 찔리는 형국이긴 하지만 아직 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전황이 괜찮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한 페르디난트는 중앙의 영국 보병 여단에게 전방으로 진군해 새 대형을 형성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9개의 대대로 구성된 영국 보병 여단은 이 명령을 잘못 전달받았거나 오해했는지 적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적의 맹포격을 받으면서도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참모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서둘러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이 워낙 거셌던 지라 그들에게 다다르지 못했다. 이러한 영국 보병 여단의 무모한 진군을 목격한 콩타드 후작은 중앙에 배치된 프랑스 기병대에게 저들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3. 전투 중반

영국군 보병 여단은 적의 사격과 포격 세례에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대열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러던 8시 30분 경 프랑스 기병대가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오자, 그들은 방진을 형성한 후 기병대를 향해 머스켓 사격을 가했다. 이 보병과 기병간의 접전 끝에, 프랑스 기병 제1선이 붕괴되었고 영국 보병 여단은 계속 전진했다. 영국 보병 여단의 이러한 무모하면서도 용감한 행동으로 프랑스군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고 있다는 걸 파악한 페르디난트는 참모를 조지 사크빌에게 보내 영국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의 전면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사크빌은 이 명령의 의미에 대해 잠시 이의를 제기했다가 복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짧은 거리를 전진하더니 갑자기 진군을 멈췄다. 이에 두번째 전령이 왜 진군하지 않느냐는 페르디난트의 질책을 가지고 왔지만 사크빌은 꼼짝 않고 있다가 적을 궤멸시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편, 콩타드 후작은 중앙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는 영국 보병 여단을 섬멸하기 위해 좌익에서 3개 대대의 보병대를 차출하여 그들의 측면을 치게 했고 야포 24문이 전진해 이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명령에 제대로 복종하지 않는 조지 사크빌 대신 필립스의 중포 여단을 진군시켜 영국 보병 여단을 지키게 했고, 아울러 하노버 왕국 근위대를 출격시켜 영국 보병 여단을 지원하게 했다. 얼마 후, 프랑스 기병 제2선이 영국 보병 여단을 향해 돌격했다. 영국 보병 여단은 그들의 기세에 잠시 주춤하는듯 했으나 곧 방진을 결성하고 결연한 자세로 맞서 싸웠다. 그 순간 바켄하임의 일부 보병대와 셸레의 보병 여단이 그들과 합류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이에 색슨 연대가 출격해 이들을 잠시 밀어냈지만 곧 반격에 직면하자 패퇴했다. 이에 프랑스 예비군이 세번째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 용맹한 9개 영국 보병 대대는 하노버군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했다.

상황이 점차 호전되어가자, 페르디난트는 한 보좌관을 조지 사크빌의 영국 기병대에게 보내 적을 공격하지 않을 거면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사크빌의 기병대가 물러나서 공간을 내주는 즉시 추가 병력을 투입해 대열이 흐트러진 프랑스군을 섬멸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사크빌은 후퇴 명령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재차 전령을 사크빌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조급해하며 참모들에게 물었다.
저 기병대는 언제 오나? 우익의 저 기병대를 본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기병대가 좀처럼 물러나지도 않고 진군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있자, 페르디난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탄했다.
맙소사! 저 기병대를 진격시킬 방도가 없단 말인가?

마침내 페르디난트는 다섯번째 전령을 보내 사크빌의 두번째 전선의 분대들을 그랜비 후작 존 메너즈의 소속으로 편입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랜비 후작이 명령을 집행하려 하자, 사크빌은 말을 탄 채 그를 제지한 후 페르디난트에게 다가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는 경멸조로 대답했다.
이제 기회는 지나갔소.

한편, 프랑스 기병대는 영국 보병 여단을 향한 돌격을 재차 감행했으나 이번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패퇴했다. 그러는 사이, 헤센 척탄병과 연합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의 전진 야전포대를 공략하고 최전선의 여러 마을을 점령했다. 그 결과,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바겐하임의 군대와 연결되어 적의 진영 근처에 새로운 대형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연합군 좌익이 포격을 퍼부은 뒤 공세를 취했고, 하노버 기병대는 그들에게 저항하려는 프랑스 보병 전체를 분산시켰다.마침내 오전 9시 즈음 프랑스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3.4. 전투 후반

오전 10시경, 전 프랑스군은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그들은 민덴의 언덕으로 피신하거나 다리를 건너 그들의 진영으로 도주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다리들이 무너졌고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압사하거나 익사했다. 콩타드 후작은 2선의 프랑스 우익 보병대를 보내 퇴로를 엄호하게 했지만, 연합군 기병대는 다시 이들을 휩쓸었다. 한편, 브로이 공작은 반케하임의 군단을 포격하면서도 한 번도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있다가 본대가 궤멸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자 기병대를 급히 파견해 본대를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이 기병대는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지휘하는 기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에 브로이 공작은 프랑스 우익의 후퇴를 엄호한 뒤 민덴으로 철수했다.

한편 색슨 여단은 프랑스 좌익의 퇴로를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페르디난트는 영국군 포병대에게 가능한 전선 가까이 진격하여 진영으로 도주한 프랑스 부대를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영국 포병대는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프랑스군은 민덴의 진영에서도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그날 밤 전장에 진을 쳤다.

4. 결과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7,086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 포로를 기록했다. 이리하여 콩타드 후작은 33%의 손실을 입었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브로이 공작에게 지휘권을 내준 후 직임에서 물러났다. 이때 라파예트의 아버지 미셸 루이 크리스토프 뒤 모티에도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반면 연합군은 2,822명을 잃었는데 그 중 절반인 1,252명은 무모하면서도 용감하게 적의 중앙으로 진군한 6개 영국 대대에서 발생했다. 이후 연합군은 카셀, 마르부르크, 뮌스터 등을 탈환하여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한편 조지 사크빌은 명령 불복종을 저질렀다는 문책을 당하자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군사법정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이에 군사법정은 그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상당히 많다고 판단해 그의 불명예 제대를 승인하고 ‘영국군의 임무에 부적합하다’라고 판결했으며, 이 판결문을 영국군 모든 연대가 열람할 수 있도록 기록했다. 또한 국왕 조지 2세는 추밀원 지도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제외시켰다. 훗날 그는 미국 식민지 담당 장관이 되었으나 미국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강경책을 밀어붙였다가 미국 독립 전쟁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5. 프랑스군은 왜 패했을까?

위의 전투 경과 내용을 쭉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민덴 전투 당시 연합군의 작전은 별로 매끄럽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9개 보병 대대는 지시를 잘못 이해해 프랑스군의 중앙을 향해 무모하게 진군해버렸고 조지 사크빌의 영국 기병대는 명령 불복종이나 일삼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적으로도 우세한 프랑스군은 적을 압도하긴 커녕 시종일관 밀리더니 마침내 패주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어째서 이런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을까? 이는 당시 프랑스군의 지휘부가 전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만큼 무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이 처음 도입하고 오스트리아 등이 뒤늦게 도입한 사관학교 제도가 없었고 유력 귀족들이 대군을 지휘하는 전통적인 관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루이 14세 시절엔 이 귀족들 중 많은 이들이 군사적으로 유능했고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으니 큰 문제는 없었지만 7년 전쟁 시기엔 이 관행이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능화를 초래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루이 15세에게 총애받는 퐁파두르 부인에게 잘 보이는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첨에는 능했지만 군사적 역량은 형편없는 자들이었다.

민덴 전투의 패장인 콩타드 후작 역시 그 부류 중 하나였고 적이 실책을 연이어 범하는 상황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게다가 그는 영국 보병 여단이 무모한 진군을 벌이는 상황에서 기병대만 단독으로 파견해[1] 그들을 격퇴시키려 하는 어리석은 짓을 범했고 전군에 대열을 유지하라는 명을 내렸을 뿐 그 외에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은 채 상황을 관망했다. 반면에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난트는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참모와 전령들을 사방에 파견해 전황을 시시각각으로 파악하고 상황에 맞는 전략을 구상하고 집행했으며 본인 스스로 각 전선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이러한 지휘부의 차이는 전투의 승패를 가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1]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기병을 전면 돌격시키는 것이 아니라(진격해오는 영국군의 보병 수가 적으면 또 모르나 당시 진군해오는 영국군 보병 전력은 기병대가 전면 돌격으로 붕괴시킬 만한 수가 아닐만큼 많았다.) 기병으로 계속 보병의 진군을 늦추면서 포격을 지속적이게 가하고 같은 보병대를 진군시켜 맞불을 놓아야한다. 적 전열이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균열될 조짐이 보일 때가 바로 기병대가 출격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