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국의 군인. 그랜비 후작[1]. 7년 전쟁에서 영국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했다.2. 일생
2.1. 초기 경력
존 메너즈는 1721년 1월 2일 노팅엄셔의 켈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3대 러틀랜드 공작의 장남이었다. 그는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741년, 메너즈는 그란담 자치구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자코바이트 반란이 일어나자, 존 메너즈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걸 돕기 위해 아버지가 기른 연대의 대령이 되었다. 이 연대는 뉴캐슬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메너즈 본인은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의 참모로서 전선에 나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막판인 1747년과 1748년에는 컴벌랜드 공작 휘하에서 플랑드르 전선에 복무했다. 그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의원 활동을 계속하는 동시에 장교로서 복무했고 1755년 3월 18일 소장으로 승진했다.2.2. 7년 전쟁
1758년 5월 27일, 메너즈는 조지 2세의 승인을 받고 로얄 경기병대 대령이 되었다. 그해 여름, 그랜비와 그의 기병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을 보강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군 부대에 속했다. 1759년 중장으로 승진한 메너즈는 그해 봄 연합군의 공세에 가담하였고 4월 13일 베르겐 전투에서 연합군의 세번째 대열을 이끄는 홀슈타인 공작의 부관으로서 활동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또한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조지 사크빌의 부관으로서 영국 기병대를 맡았다가 사크빌이 명령 불복종을 일삼는 것에 분노한 페르디난트에 의해 사크빌 대신 기병대를 이끌었다. 이후 사크빌은 영국으로 소환되었고, 메너즈는 그의 뒤를 이어 독일 주둔 영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1760년 7월 31일, 메너즈는 바르부르크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를 이끌고 2시간 동안 전장으로 신속히 이동해 프랑스 우익 기병대와 마주쳤다. 그는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해 맹공을 퍼붓다가 탄환이 그의 모자를 날려버렸지만 개의치 않고 용맹을 떨쳤다. 프랑스 기병대는 영국 기병대의 거센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고, 메너즈는 즉시 프랑스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으로 진격해 적을 마구잡이로 유린했다. 결국 프랑스 보병대는 견디지 못하고 디에멜을 향해 퇴각했다. 그 후 메너즈는 12월에 그의 군대가 겨울 숙영에 들어가는 동안 획스터 인근에 본부를 설치했다.
1761년 2월부터 3월까지, 메너즈는 헤센에서의 공세 작전을 이끌었다. 그 후 그는 연합군의 독일 서부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7월 16일 빌링하우젠 전투에서 빌링하우젠 마을 수비를 맡아 프랑스군의 거센 공격을 끝까지 버텨내 연합군이 프랑스군에게 역공을 가해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1762년 6월 24일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연합군 좌익 기병대를 이끌고 데른베르크 방면으로 진군해 프랑스군의 포위를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다른 연합군 부대들이 호응해주지 못해 적이 안전한 후방으로 빠져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끈질기게 추격해 많은 타격을 입혔다.
2.3. 말년
1763년 전쟁이 끝난 뒤, 메너즈는 영국으로 돌아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후 그는 조지 사크빌의 신임을 받고 5월 14일 영국 포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762년 2월 21일엔 더비셔 주지사가 되었다. 1766년, 영국군 총사령관이 된 메너즈는 1770년 1월 로얄 기병 근위대 대령 직책만 유지한 채 은퇴를 선언한 뒤 1770년 10월 18일 요크셔의 스카버러에서 사망했다. 향년 49세.[1] 러틀랜드 공작위의 예우 경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