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6 03:08:15

지나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9월 8일 작센의 지나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한 전투. 프로이센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작센 북부 일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2. 배경

1759년 8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대부분의 프로이센군이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동프로이센으로 출정한 틈을 타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작센을 침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구원하기 위해 요한 야코프 폰 윈치에게 약 8천 명을 맡겨 드레스덴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윈치의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날인 9월 4일에 드레스덴을 함락했다. 윈치는 뒤늦게 드레스덴 근방에 도착한 후 자신이 늦었다는 걸 깨닫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적이 드레스덴 근방까지 이르렀다가 후퇴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다운 백작은 생 안드레의 군단(14,000명)에게 이들을 추격하게 했다. 윈치는 이들의 추격을 피해 토르가우로 후퇴했다. 9월 7일 오후, 토르가우 앞에 도착한 윈치는 적이 근처까지 추격해오자 싸우기로 결심하고 볼프르스도르프 장군에게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토르가우에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볼프르스도르프 장군은 그의 요청을 듣고 9월 8일 새벽 4시에 군대를 출발시켜 오전 10시에 토르가우에 도착했다. 얼마 후, 생 안드레는 토르가우에 도착한 뒤 윈치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적을 공격하기 위해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토르가우의 북쪽 교외인 지나로 진군해 적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사령관: 요한 야코프 폰 윈치
  • 병력: 5,000명, 대포 10문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포병사령관 생 안드레
  • 병력: 보병 12,000명, 그렌저 용병대 2,000명, 후사르 720명, 연대포 18문.

4. 전투 경과

윈치의 군대는 좌측면에 큰 연못인 그로스터 티히를 두었고 좌익의 후방에 지나 마을을 뒀다. 생 안드레의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뢰르 개울을 앞에 뒀고 와일덴헨체 숲에 정박해 있어서 적의 공세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지만 좌익을 신속하게 지원하는 데엔 오히려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이에 윈치는 적의 좌익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중포를 동원해 오스트리아군의 좌익과 중앙에 포격을 가함으로서 그들을 꼼짝못하게 한 뒤 좌익을 향해 밀어붙일 계획을 수립했다.

오후 2시, 두 개의 프로이센 군단이 출격해 랏츠윈베르크 앞에 대열을 형성했다. 윈치 자유 보병대대는 윌메이 근위 보병대대와 함께 랏츠윈베르크의 언덕을 공격하여 그렌저 경기병대와 오스트리아 제국 척탄병 부대들을 몰아냈다. 여기에 프로이센 후사르들이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그들의 대열을 우익을 앞으로 내세움으로서 비스듬히 배치했다. 프로이센 드래곤 분대는 우익에 2개 대열에서 4개 대열로, 좌익에 3개 대열에서 6개 대열로서 대열의 수를 2배로 늘렸다.한편 생 안드레는 그의 군단을 2개의 대열로 구성했다.

윈치는 랏츠윈베르크 언덕을 장악한 뒤 이 언덕에 포대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 제국 기병대에게 포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가 오스트리아군 우익 기병대가 출격해 프로이센 좌익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플레텐베르크 드래곤 3개 대대의 선두에 있는 포그렐 소령은 첫번째 대열을 이끌고 몰려오는 적과 격돌해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다. 여기에 흉갑기병대가 대거 출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 기병대 제 2대열을 교란시켜 적이 반격해오는 걸 사전에 차단했다.

프로이센 포병대의 효과적인 포격과 기병대의 거듭된 교란 작전이 이어지자, 오스트리아 제국 기병대는 패주했다. 이 광경을 본 오스트리아 제국 보병대의 사기는 뚝 떨어졌고, 포그렐 소령은 이들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프로이센 후사르와 드래곤 분대는 적의 좌익 측면으로 돌아가 두 개의 대열을 형성하고 있는 적 보병대 후방에 나타났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동요를 이기지 못하고 적 보병대와 맞붙기도 전에 무질서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군은 추격하지 않고 랏츠윈베르크와 그로스터 티히 사이의 자신들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35명의 전사자와 163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추측되며 11명의 장교와 595명의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고 그들 중 거의 절반이 이후 프로이센군에 복무했다. 또한 프로이센군은 8발의 대포를 포획했다. 윈치는 이 전투의 승리로 적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후 작센 북쪽 지역을 점거했다. 한편 다운 원수는 수적으로 3배에 달하는 아군이 적에게 어이없이 패해버린 것에 당황해 작센 북부 지역으로 진군하려던 계획을 중지했다. 여기에 9월 25일 호이어스베르다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에게 아군 분견대가 농락당하자, 결국 그는 공세를 완전히 포기하고 겨울 월경지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