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1979년 | 12월 7일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2024년 | 11월 16일 | 디나 볼루아르테 | 대통령 | 페루 | }}}}}}}}} |
출생 | <colcolor=#000000,#ececec>1949년 5월 23일 |
페루 리마 | |
사망 | 2019년 4월 17일 (향년 69세) |
페루 리마 | |
국적 | 페루 |
재임기간 | 제53대 대통령 |
1985년 7월 28일 ~ 1990년 7월 28일 | |
제57대 대통령 | |
2006년 7월 28일 ~ 2011년 7월 28일 | |
정당 | 미주혁명인민동맹 |
서명 |
[clearfix]
1. 개요
페루의 53대, 57대 대통령. 가히 정치인이 경험할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그것도 여러 번 경험한 사람일 정도로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보냈다.[1] 일단 정치력만큼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 중에서도 가장 발군이었다.[2]2. 생애
2.1. 대통령 취임 전
알란 가르시아는 페루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지만 집안 자체가 정치인 집안인지라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의 페루 정국이 혼돈과 독재를 겪고 있던 참이라서 부침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미주혁명인민동맹(APRA)의 당원이 되었고 파리에서 몇 년간 유학을 다녀왔다가 1978년 군부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총선을 재개했고 페루 의회선거에서 당선되어 고작 만 29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3] 1982년에 미주혁명인민동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티토주의와 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에게 영감을 얻은 정책들을 선보였는데 당시 페루는 민주화 이후로도 구리와 은 가격 폭락[4]과 엘니뇨 현상으로 인한 어업 경제 파괴, 리마에 불어닥친 파괴적인 홍수와 가뭄으로 경제 기반이 무너진 데다가 폴 볼커의 금리 인상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야기한 외채난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 상승[5]과 치안 공백으로 인한 치안 불안에 허덕이고 있었고 민주화 직후에 집권한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이에 대해 무능한 대처로 일관하면서[6]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잘생긴 얼굴[7]과 뛰어난 연설실력을 발군 삼아서 지지율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이윽고 1985년 대선에서 53%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당시 가르시아의 나이는 고작 만 36세에 불과했다.[8]
2.2. 1차 대통령 집권기
재임 초기에는 외환보유고의 감소를 막기 위해 외채동결 조치를 취하고 동시에 환율 안정화 및 물가통제와 임금인상 정책 등을 폈는데 이러한 조치는 초기에는 큰 효과를 내서 1986년에 경제성장률은 9%대까지 치솟았다. 또한 당시 페루군이 반군을 척결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광범휘한 인권침해를 저지르는 문제도 있었는데 초기에는 인권침해를 저지른 군인이나 부패한 경찰관을 해고시키는 개혁정치를 펼쳤다. 지지율 최고치가 무려 96%(!!!)[9]에 달해서 페루의 케네디라고 불릴 정도였다. 여기서 끝났다면 페루를 안정화시킨 인기있고 유능한 대통령으로 남았을 것이다.허나 이러한 경제정책은 탄탄한 경제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삐그덕거리기 시작했고,[10] 1987년도부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잡힐듯 보였던 물가상승률도 다시금 오를 기미를 보이자 경제를 부양하려고 은행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우익진영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은행국유화 법안은 논란 끝에 의회에서 부결되며 이후로 알란 가르시아는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은행국유화 법안 파동 이후로 기업들의 투자는 급속히 위축되고, 물가상승률은 1987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다시 급속히 치솟기 시작하여 1988년에 1,722%, 1989년에 2,775%까지 치솟았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률도 1988년 -9.3%, 1989년 -12.4%를 찍었으며,[11] 실업률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4.8%에서 8.6%로 기존의 80% 가까이 폭등했고[12], 빈곤층 비율은 55%, GDP 대비 정부 부채는 190%, 외채는 77%[13]를 찍으며 국가경제는 마비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총 GDP는 365억 달러에서 154억 달러로, 1인당 GDP는 1767달러에서 730달러로 단 1년 만에 절반 미만으로 폭락해 하루아침에 중진국 일보직전 수준[14]50%를 넘겼다.]에서 최빈국을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작살이 났다.[15] 당연히 당시 페루에서 식량 등 필수품들이 풍족할 리는 전혀 없었으며, 이 와중에 광부들의 장기 파업까지 겹치며 수출이 감소함과 동시에 무역 적자는 증가했다.
이 틈을 타서 지방에서 빛나는 길이 페루 전역에 위세를 떨치며 리마 근교지역까지 진출했고, 이들은 정부 관리들과 페루를 위해 원조 등으로 일하는 외국인들을 암살하거나[16] 페루의 인프라 시설에 폭탄 테러를 가하며[17] 치안은 다시금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당시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정부는 외진 시골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페루의 모든 지방에서 유엔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빛나는 길도 빛나는 길이지만 인권을 중시했던 초기 행보와는 다르게 반군을 진압할 대책으로 강경책을 쓰면서 페루군이 일반 민간인을 임의적으로 살해하는 등의 인권침해적인 작전을 벌여도 이를 방조하거나 조장하기 시작했고, 1986년 6월 18~19일에는 300명의 수감자가 사망한 페루 교도소 학살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또한 경제가 나빠지던 상황속에서 가르시아의 측근들이 부패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지지율은 최암흑기(1989년 초반)에는 9%[18]로 추락, 이미지는 만신창이가 되기에 이른다. 이런 혼란상을 틈타 군부는 가르시아의 무능을 핑계로 쿠데타를 계획하기도 했으며, 페루에서 19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Década perdida)으로 불리고 있다.
1989년 지방선거에서는 쌓아놓은 조직력을 통해 세를 확보해나갔지만 그럼에도 당세의 쇠락은 막을수 없었고,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당선될것으로 예측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란 가르시아는 여기서 머리를 잘 써서 TV방송 진행자이자 농업전문가 정도로 알려졌던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지지율이 올라가며 결선에 진출하자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일본이 한창 경제적으로 호경기를 누렸던 시절인지라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것이라는 예측이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난무했었던 점을 이용한것인데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2.3. 과도기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알베르토 후지모리와의 관계는 나빠졌고,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페루 의회를 해산하고 알란 가르시아의 비리를 조사하려고 하자, 알란 가르시아는 콜롬비아로 망명을 갔고, 반 후지모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2001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추문끝에 탄핵되고, 페루 대법원에서 알란 가르시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며 페루로 귀국했다. 당초 대통령 선거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적극적으로 맞서던 톨레도가 대통령에 당선될것이 확실시 되었던 상황이었고 알란 가르시아는 이전의 반군이 판치고 물가상승률은 극도로 높아졌던 악몽같던 시절을 대표하던 대통령으로 잡룡으로 취급되었지만 뛰어난 선거운동 능력을 선보이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2001년 대선에서 석패했지만 그럼에도 46%라는 무시할수 없는 득표율을 확보하며 선전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로 톨레도가 지지율에서 지속적으로 죽을 쓰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알란 가르시아가 약점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이 와중에 오얀타 우말라가 경제성장에도 빈부격차는 여전히 컸던 페루의 상황을 비판하며 급속히 치고 올라오자, 보수파의 표를 얻기 위해 골몰했고, 이를 위해 노선을 온건화했다. 2006년 대선에서 우고 차베스와 오얀타 우말라를 연계해 실컷 까대면서 언론사들의 지원을 얻었고 우파의 표를 획득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
2.4. 2차 대통령 집권기
2기 집권기 때는 페루의 경제는 보수적인 재정운영을 하며 우려를 불식시키고, 미국과도 어느 정도 친해졌으며 매년 연 7~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라틴아메리카 최고치를 기록하고 빈곤율도 48%에서 28%로 감소시켜 금융위기에 휘말린 2009년도를 제외하면 평온하게 경제관리를 잘했다는 평을 들었지만 사회운동에 대해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렇다고 복지를 획기적으로 늘린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집권기간 동안 사회정책에 대한 평은 영 꽝이었고 그 때문에 지지율은 낮았다. 1기 집권기보다는 성과가 낫다는 평을 듣기는 했지만 2011년 퇴임한 이후로는 퇴물로 전락했다.2.5. 말년과 비극적인 최후
이후로 오데브레시 뇌물수수 사건[20]에 연루되었고, 또 2015~2016년에는 가르시아 시절 총리와 최주요 장관 4명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물론 2016년 대선에서 6%의 득표를 확보하는데 그쳤다.이 와중에 우루과이로 망명을 가려고 했지만 우루과이 정부에서 거부하고 페루 정부에서도 가르시아의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2018년 기준 전직 대통령이었던 그의 지지율은 박근혜의 최저 지지율과 완전히 판박이인 긍정평가 4%, 부정평가 93%였다고 한다.[21][22] 이후 2019년 4월 17일에 뇌물 혐의를 조사하던 경찰이 가르시아 전 대통령의 집에 들어오자 총을 들고 스스로 총을 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마침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가 건강이 썩 좋지 않은데다가 한때의 정적이었지만 동병상련의 처지인 톨레도와 우얀타 우말라도 알란 가르시아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했다. 사실 알란 가르시아의 자살이 가져올 파장이 페루 정치권에서 만만한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23][24]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이 이끌던 페루 정부에서 3일간의 애도기간을 가졌다.
[1] 특히 지지율 면에서는 최대 96%, 최소 4%(심지어 후자는 부정평가가 93%였다. 다만 후자는 퇴임 후에 기록했다)라는 최고치, 최저치 모두 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보유했는데, 과장 한 마디도 안 보태고 나이브 부켈레와 탄핵 전 박근혜를 모두, 그것도 판박이로 경험한 수준이다! 그리고 그의 집권기가 페루 역사에서 안 좋게 기억됨에도 불구하고 퇴임 16년 후 재선에 성공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퇴임 후 뇌물수수 혐의가 제기되면서 모든 명예를 잃고 권총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2] 지지율이 100%를 목전에 둔 수준에서 한자릿수로 떨어져서 정권교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대선 과정에서 자신이 밀어준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며 간접적으로 정권연장에 성공했으며, 전술했듯 그의 집권기가 페루 역사에서 안 좋게 기억됨에도 불구하고 정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기는커녕 퇴임 16년 후 재선에 성공했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 중 가르시아만큼 정치력이 탁월한 정치인은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대통령 정도밖에 없는 수준.[3]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처음 국회의원이 된 나이(만 26세, 이하 만 나이 기준)보다도 고작 3살 많다. 지도자 중에서도 가르시아가 국회의원이 된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집권한 지도자는 새뮤얼 케니언 도(28세), 김정은과 무아마르 카다피(각각 27세), 장클로드 뒤발리에(18세. 참고로 이쪽은 퇴임 당시 나이도 겨우 34세였다.)밖에 없고, 그 중에서도 김정은과 뒤발리에는 아버지의 권력을 세습받은 케이스라 논외로 봐야 한다.[4] 4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구리 가격은 톤당 3000달러에서 1300달러로 폭락했다.[5] 1983~1984년에는 물가 상승률이 110%를 넘겼고, 1985년에는 163%였다.[6] 이미 1기 집권기 때에도 토재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미국기업과 이면합의를 했다며 군부에게 쫓겨났던 경력이 있었다.[7] 대통령 당선 당시 사진[8] 피델 카스트로가 32세, 훈 센이 33세, 토마 상카라와 바샤르 알 아사드가 34세, 리콴유가 만 35세에 집권했다.[9]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이 90%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르시아가 임기 초반에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나이브 부켈레와 비교해야 하는 수준.[10] 특히 국제통화기금의 큰 빽이 미국이었는데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페루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11] 페루 역사상 이 정도 마이너스 성장을 찍어본 적은 1983년(-10.4%)와 2020년(-10.9%)밖에 없다.[12] 1988년과 1989년 페루의 실업률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1990년 지표조차 1988년, 1989년보다 양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13] 사실 1983년에도 GDP 대비 외채 비율은 81%에 달했다.[14] 1986년 1인당 GDP는 1078달러로 세계 평균의 35% 미만이었는데 1987년 1인당 GDP는 1767달러로 세계 평균의[15] 물론 당시 페루의 실질 임금은 기존 대비 50% 미만으로 삭감되었다. 덤으로 페루의 전체 GDP와 1인당 GDP는 모두 가르시아 퇴임으로부터 4년이나 지난 1994년에야 1987년 수준을 회복했다.[16] 당시 페루의 치안이 어느 정도로 개판이었냐면 그의 임기 말에는 리마 중심부 거리에서 전직 국방부장관이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에게 암살되었을 정도였다.[17] 수도 리마의 인프라조차 예외는 아니었다.[18] 참고자료 가르시아 1차 집권기 지지율이 나오는데, 여기 따르면 역대 최고 지지율은 90%다.[19] 임기 초반에 엄청난 범국민적 인기를 누렸으나 내전을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인기가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초라하게 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알바니아의 살리 베리샤와도 유사하다.[20] 퇴임 후인 2012년 5월 가르시아가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기업 지도자들에게 연설을 하기 위해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21] # 이후 후배인 디나 볼루아르테도 롤렉스 게이트에 연루되어 2024년 11월 기준 가르시아와 박근혜마저 기록하지 못한 긍정평가 3%, 부정평가 94%를 기록하게 된다.[22] 2018년 페루 경제성장률이 가르시아 지지율과 판박이인 4.0%였다. 물론 경제성장률보다도 지지율이 낮았던 미셰우 테메르보다는 양반이다.[23] 한국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이 일으킨 파장을 생각하면 된다. 이쪽은 페루와 한국의 경제력, 국제적 위상 차이가 있어서(노무현 시기 한국은 김대중 정부 말기(2002년) 진입한 선진국, 지역강국 지위를 확고히 했다) 국제적으로도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르시아의 생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일이기도 하며, 가르시아의 지지자들도 무리한 검찰 수사가 가르시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검찰을 비난했다. #[24] 국제적으로도 노무현 전 대한민국 대통령 이후 10년 만에 자살한 국가원수 출신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