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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1847-1849), 황제(1849-1859) °°: 아이티 대통령은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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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공화국 제35대 대통령 장클로드 뒤발리에 Jean-Claude Duvalier | |
출생 | 1951년 7월 3일 |
사망 | 2014년 10월 4일 (향년 63세) |
직업 | 정치인 |
최종 당적 | |
재임기간 | 제35대 대통령 |
1971년 4월 22일 ~ 1986년 2월 7일 | |
부모 |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 어머니 시몬 뒤발리에 |
배우자 | 미셸 베네트(1980년 결혼, 1990년 이혼) |
자녀 | 아냐 뒤발리에, 니콜라스 뒤발리에 |
학력 | 아이티 국립대학교(법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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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베 독(Bébé Doc) 또는 베이비 독(Baby Doc)이라는 별명들로 불리며 아이티의 독재자였던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뒤를 이어서 아이티의 제35대 대통령을 지낸 중미 카리브해 섬나라인 아이티의 세습 독재자. 15년간 집권하다가[1] 대통령직에서 쫓겨났지만 아이티로 돌아와 재판 중에 사망했다. 흑인 우월주의, 보수주의, 반공 우익대중주의 등을 추구하는 유사 파시즘 정당 국민통일당(National Unity Party)을 이끌었다.인류 역사상 최연소 비왕실 지도자이자 가장 어린 나이에 퇴진한 독재자이기도 한데 집권 당시의 나이가 만 19세이고 퇴진한 나이도 만 34세다.[2][3]
2. 아이티의 대통령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일부 정치범을 석방하고 폐교된 육군사관학교[6]도 재건하며 언론 검열을 완화하는 등 처음에는 유화책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곧 본색을 드러내 15년간 집권하면서 반정부 인사에 대한 납치와 고문, 암살을 실시하다가 1986년 민중 봉기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이러한 독재정치로 뒤발리에 부자의 집권 기간 동안 아이티에서는 무려 3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당제 하의 의회는 말로만 존재했지 실질적인 기능은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백여 명의 정치범들이 악명 높은 아이티의 ‘포트 디망슈(Fort Dimanche)’ 교도소와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교도소들에 수감되었고 목숨을 잃어야 했다. 뒤발리에 정부는 독립적인 신문사와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시켰으며 기자들은 구타를 당하고 고문당하거나 투옥되는가 하면 강제로 해외로 떠나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뒤를 이어서 집권한 그는 아버지가 조직한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s)’를 이용하여 수많은 범죄들을 저질렀는데 그의 통치 아래 수천여 명의 아이티인들이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수만여 명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 더불어 외국 투자자들을 위해 시간당 11센트라는 살인적인 저임금 정책을 고수했다.
결국 이러한 독재정치,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로 이어지는 1957년부터 1986년까지 30년간의 독재 기간 동안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아이티의 경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막장 부자의 집권 기간 동안 아이티의 대외 부채는 무려 17배나 증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국가 부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스위스 은행 계좌에 비자금으로 보관했다는 점이다. 유엔과 세계은행이 2007년에 가동한 ‘은닉재산환수이니셔티브(StAR Initiative)’에 따르면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1971년부터 1986년까지의 집권 기간 동안 매년 국내 총생산(GDP: 약 12억 달러)의 1.7 ~ 4.5%를 빼돌렸으며, 그가 16년간 챙긴 돈은 아이티의 국가 부채보다도 훨씬 많은 3억 ~ 8억 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활 수준이 나빠진 아이티에서는 이 무렵부터 진흙으로 만든 빵이 등장했고 그 유명한 진흙쿠키도 이 때 등장했다.
이런 뒤발리에 부자의 막장 정치로 인해 아이티의 산업기반이 붕괴되면서 아이티의 국민들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팔아야 했고 결국 무분별한 벌목이 시작되었다. 울창하던 숲에 있던 나무가 97%나 잘려서 해외로 수출되었고 현재 아이티에는 약 3% 정도의 나무만이 남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무분별한 벌목이 아이티의 자연피해가 커지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점이다. 똑같이 허리케인이 비슷한 카리브해 섬나라인 쿠바나 자메이카, 아이티를 덮치면 쿠바와 자메이카는 큰 피해가 없는 반면 아이티에서는 해마다 수천 명씩 사망자가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무차별적인 벌목 때문이다. 심지어 훗날 엄청난 피해를 입힌 2010년 아이티 지진의 피해가 컸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무차별적인 벌목이 원인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 와중에도 부정부패가 엄청나서 아이티의 인구 6백만 중에서 무려 80%가 연간소득 1백 30달러로 살아갈 정도로 가난했지만 국부의 50% 이상은 5% 미만의 뒤발리에 일가와 그 추종자들이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티 국민의 절반 이상이 실업자가 되었으며 아이티의 문맹율은 무려 90%나 될 정도였다. 거기다가 영부인 일가는 자국의 항공사의 비행기로 마약을 밀매한 것은 물론이고(?) 외국의 의과대학에 자국민의 시체와 장기까지 밀매했다고 한다.
다만 의외로 경제 면에서는 치적이 있었다. 1971년 3.63억 달러였던 아이티의 GDP는 1986년 23.2억 달러로 15년 동안 6.4배 성장했는데,[7] 이는 당시 세계 평균 경제 성장 수준(4.6배)보다 높은 것이었다. 물론 성장의 결과물은 고위층이 다 가져갔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
3. 몰락
그러다가 1985년 11월 28일 고나이브시에서 시위를 하던 대학생 3명이 아이티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뒤발리에 부자의 오랜 독재정치와 경제난에 고통받던 국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대대적인 반정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민생고의 해결과 노동자의 봉급을 인상하자는 경제문제 때문에 시위를 시작했지만 뒤발리에가 통통 마쿠트와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실시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바뀌었다.사태가 긴박해지자 뒤발리에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1986년 1월 31일 30일간에 걸친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아이티인 70여명이 사망했다. 반정부 데모를 주도한 세력은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가톨릭 세력이었다. 특히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뒤발리에의 독재정권을 비난하자 인구의 80%가 가톨릭 교도인 아이티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게다가 1986년 1월 말에는 카파티엥 성당의 일요일 저녁 미사에서 한 신도가 "아바, 뒤발리에"(뒤발리에, 물러가라)를 외치자 모두 이 구호를 합창하면서 뒤발리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1985년 10월 식량난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했는데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뒤발리에에게 선거 실시 등 개혁을 요구했다. 근데 뒤발리에는 “종신 대통령제인데 선거는 무슨 선거냐”며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시위가 격화되자 버틸 수 없던 뒤발리에는 1986년 2월 미국과의 타협으로 6인 평의회에 전권을 이양한다는 조건으로 미공군 비행기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장 클로드가 1986년 2월 7일에 퇴진한 후에는 민과 군의 대표로 구성된 6인 평의회가 아이티를 통치하게 됐다. 참고로 뒤발리에가 대통령직에서 퇴진한 나이도 겨우 만 34세였다.
미국이 뒤발리에에게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는 요구도 뒤발리에의 몰락에 일조했다. 1985년에 5천 4백만 달러를 지원한 미국은 1986년에는 원래 원조액인 5천 2백만 달러를 주려고 했지만 뒤발리에가 저지르는 인권탄압을 빌미로 약 7백만 달러 이상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하자 경제난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던 것이 시위의 원인 중 하나였다. 미국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견제하기 위하여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정권을 여러 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다가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하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에 거주하는 아이티인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뒤발리에의 미국 망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뒤발리에에게 프랑스로 가는 것을 제안했고 프랑스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라는 조건으로 뒤발리에의 입국을 승인했다.
뒤발리에가 쫓겨나자 29년간의 부자의 폭정에 시달린 아이티 국민들은 쌓여 있던 원한을 모조리 풀듯 통통 마쿠트 대원들은 물론이고 가족을 몰살했으며[8] 뒤발리에 본인과 장인, 처제의 집을 때려부쉈고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영묘를 부순 뒤[9] 그 폐허에 '뒤발리에는 에이즈 환자'라는 말이 점잖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뒤발리에 일가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가득찬 말을 쏟아부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eeing_Duvaliers.jpg |
1986년 2월 7일 아내 미셸 베넷과 함께 도주 |
아내 미셸 베넷(Michele Bennett, 1950년 1월 15일~) |
뒤발리에는 재임 기간 동안 미국에서 지원해준 해외 원조 자금을 빼돌려서 이 돈으로 엄청난 수준의 비자금을 마련한 후 튀르키예의 술탄으로 변장해 손님에게 만 달러 정도의 보석을 건내주는 호화로운 의상으로 가득찬 파티를 하거나 고급차와 오토바이를 사들여 고속으로 질주하는 것을 즐기는 등의 사치를 했다.
게다가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에다가 엄청난 양의 돈을 빼돌린 것으로 확인되는데 그 금액은 가장 적은 금액이 300~800만 달러 정도 또는 1억 달러가 넘어갈 것이라는 추정치까지 있었다. 결국 그는 9억 달러를 챙겨 프랑스로 망명해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고 하는데 9억 달러는 당시 아이티의 외채보다도 많은 돈이었다고 하며 뒤발리에가 쫓겨난 1986년 시점에 아이티의 GDP는 23.2억 달러도 되지 않았다.
참고로 2004년자 글로벌 부패 보고서에 따르면 뒤발리에는 3억~8억 달러를 착복한 것으로 조사되어 '세계에서 6번째로 부패한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10]
아내 미셸 베넷은 틈나는 때마다 프랑스 파리나 뉴욕의 보석상에 들러서 고급의상과 보석들을 쇼핑했는데 그 금액이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아이티 국민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비난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티의 무더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밍크 코트를 유독 좋아해서 파리에서 구입한 밍크 코트를 입는 동안 더위를 피하기 위해 대통령궁 내부에 값비싼 냉각 시스템을 설치했는데 베넷이 얼마나 밍크 코트를 입어댔는지 에어컨이 꺼질 틈이 없어 대통령궁 직원들이 감기에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남편도 페라리 등의 고급 승용차를 보유하고 그 차들로 아이티 유일의 아스팔트 도로였던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공항 활주로를 질주하는 등 사치를 부렸다. #
심지어 훗날 권좌에서 쫓겨나서 프랑스로 망명할 때도 미국이 제공해준 화물기에 자신의 사치품들을 가득 실었는데 고가 미술품과 각종 보석과 루이뷔통 핸드백으로 비행기가 가득 찼을 정도라고 한다. 1980년 결혼식에는 프랑스에서 매우 비싼 옷을 사들이고 자신의 전용 미용사도 데려왔는데 당시 결혼식에 퍼부은 돈은 불꽃놀이에만 10만 달러가 들었고 총 금액은 당시 기준으로만 무려 200~300만 달러였다고 하며[11] 이 결혼식은 기네스북에 최고 호화 결혼식으로 등재되기까지 했지만 망명생활을 하는 중이었던 1990년에 아내 미셸 베넷과 이혼했다.
4. 귀국과 최후
사망하기 1년 전인 2013년 모습. |
그러나 집권 기간 저지른 수많은 범죄 혐의로 인해서, 그리고 그가 독재할 때 목숨을 잃은 희생자 가족들과 인권단체들의 제소로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어쨌든 2013년에는 법정에 섰으나 재판 중이던 다음 해인 2014년 10월 4일에 자택에서 편하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13년 3~5월에 걸쳐, 8명의 피해자가 뒤발리에 측 변호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했지만 법정은 뒤발리에에게 형을 선고하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보였으며 질질 재판을 끌어 끝내 그가 죗값을 받지 못하게 했다.
뒤발리에가 사망하자 그와 법정 다툼을 하던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재판을 질질 끌어온 아이티 사법부의 무능 때문에 독재자를 생전에 처벌할 기회를 놓쳤다", "뒤발리에가 재판을 받기 전에 죽음으로써 수백여 정치범의 처형 등 반인도 범죄에 대한 심판의 기회가 사라진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자료
그의 장례식은 국장은 아니었지만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1990년 그와 이혼했던 아내 미셸과 그의 아들 니콜라스와 딸 아냐가 장례식에 참여했다. 미셸은 뒤발리에의 사후에도 간간히 언론에 포착되었다.
[1] 1818년부터 1843년까지 장기집권한 장 피에르 부아예 다음으로 오래 집권했다.[2] 참고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도 만 39세에 대통령으로 집권하고도 젊디젊은 대통령 취급을 받으며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는 만 37세에 암살되어 젊디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지도자로 유명하고, 유명한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조차 만 27세에 권력을 세습받고 무아마르 카다피도 만 27세에 쿠데타로 집권한 것을 감안하면 젊다 못해 아주 새파란 나이에 대통령이 된 셈이다. 참고로 라이베리아의 새뮤얼 케니언 도는 만 29세에 육군 상사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다.[3] 여담으로 역대 최고령 대통령은 만 96세에 퇴진한 말라위의 헤이스팅스 반다이며 최고령 비군주 통치자는 무려 만 97 ~ 98세에 사망할 때까지 베네치아 총독을 역임한 엔리코 단돌로다.[4] 누나 마리 드니즈(Marie-Denise Duvalier)에게 권력을 양도하고 싶었다고 한다.[5]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절 친위대 통통 마쿠트의 수장. 베이비 독 초기에는 국방부 및 내무부 장관, 대통령의 종신 특별 고문으로 일하며 아이티의 실권자로 여겨졌으나, 장클로드의 세습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1972년 12월 미국 마이애미로 추방, 이후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그동안 부정축재한 돈(현재 가치로 천억이 넘는다고 한다)으로 호화롭게 사는 듯 싶었다가 얼마 안 가 파산하고 2006년 사망했다.[6] 참고로 아이티 육군사관학교의 폐교 사유가 걸작인데 1958년에 추방된 육군 장교들과 미국인 용병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아버지가 폐교시킨 것이었다고 한다.[7] 2020년 아이티 GDP가 145.1억 달러, 2022년 아이티 GDP가 202.5억 달러다.[8] 심한 경우에는 통통 마쿠트 대원을 불태워 죽인 뒤 문자 그대로 그 인육을 먹기도 했다. 통통 마쿠트가 어느 정도로 아이티 국민들의 원한을 샀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9] 다만 그 무덤 안에 관은 없었는데 이는 장클로드가 도피할 때 민중들에게 아버지의 무덤이 파괴될 것을 예감하고는 아버지의 관을 몰래 꺼내갔기 때문이다.[10] 참고로 이 조사에서 3위는 50억 달러를 착복한 모부투 세세 세코 자이르 대통령, 2위는 50억~100억 달러를 착복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1위는 150억~350억 달러를 착복한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다.[11] 2023년 환율로는 약 726~1089만 달러나 된다. 원화로 환산하면 무려 약 96~144억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