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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1847-1849), 황제(1849-1859) °°: 아이티 대통령은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제국 · 왕국 | }}}}}}}}}}}} |
<colbgcolor=#262A9A><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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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7년 4월 14일 | ||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 |||
사망 | 1971년 4월 21일 (향년 64세) | ||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 |||
재임기간 | 제34대 대통령 | ||
1957년 10월 22일 ~ 1971년 4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62A9A><colcolor=#fff> 배우자 | 시몬 오비데(1939년 결혼) | |
자녀 | 장클로드 뒤발리에 외 4명 | ||
최종 당적 | |||
학력 | 아이티 국립대학교(의학) | ||
종교 | 가톨릭 → 부두교 | }}}}}}}}} |
1. 개요
아이티에서 세 번째로 오랫동안 집권한[1] 대통령이자 독재자, 의사, 문화인류학자. 통칭 파파 독(Papa Doc)으로 불렸다.
집권 기간 동안 수많은 야권 인사들을 탄압하며 3만 ~ 6만 명[2]에 달하는 국민들을 학살한 것은 물론 부두교를 이용해 아이티를 사실상의 제정일치 사회로 만들었으며 집권 하에 부정부패까지 만연해 안 그래도 사정이 좋지 않았던 아이티의 경제를 망쳐 놓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 오늘날의 아이티를 파탄국가로 고착화시킨 원흉으로 평가받는다.[3]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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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평가
북한의 백두혈통, 시리아의 알 아사드 부자와 함께 최악의 세습 독재자이며, 1930년대부터 서서히 쇠락하던 아르헨티나를 결정적으로 박살내버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나 비델라와 함께 2차 대전 이후 존재했던 반공, 우파 성향의 독재자들 중에서는 그 잔혹성이나 악행이 한 손안에 반드시 들어갈 정도로 포악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회자된다.[4]또한, 정적들을 탄압할 때 직접 고문 장면을 보며 흐뭇해하는 것은 물론 어린아이를 본인의 손으로 살해하거나 갓난아기를 산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는 등, 인격적 면모에서도 인류 역사상 존재하였던 모든 독재자들을 통틀어서 한 손에 꼽히는 수준의 악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악마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의사로써의 선행으로 국민들에게 슈바이처와도 같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 실제로 저 이상의 일화를 보여준 독재자는 고의적 음주운전으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을 깔아뭉개죽인 보카사 1세와 연쇄 아동 성폭행범이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정도가 전부이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면 장기려 박사가 김일성 수준의 독재자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5] 집권할 때 즈음부터 정신질환을 앓아서 미쳐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까지 나왔을 정도이니.
뒤발리에가 시행한 정책들은 반인륜적이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심지어 이디 아민과는 달리 세습까지 성공하여 사망 15년 후인 1986년까지 우상화되는 등 다른 독재자들과는 그 질이 차원이 다르다. 실제로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한 1986년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묘지는 아이티 국민들에 의해 즉시 파괴되었으며 에이즈 환자 운운이 가장 양호한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뒤발리에에 대한 증오가 가득찬 온갖 욕설로 완전히 도배되었다.
사망 이후에도 뒤발리에의 학정의 악영향은 계속되고 있는데, 일단 뒤발리에 부자 집권 당시 극악한 부정부패로 인하여 국가 재정이 파탄난 것은 물론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만든 통통 마쿠트 대원들은 아이티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에도 살아남아 육군과 민주주의 세력에 온갖 테러를 자행하며 외국에서도 반 뒤발리에 성향의 아이티인들을 암살하고 그 잔혹성은 현 아이티의 악명 높은 갱단들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최빈국으로 거덜난 아이티는 2차례의 대지진을 겪고 21세기에 현직 대통령이 암살된 데다가 나라에 갱단이 판치며 무정부 상태 + 사실상 내전 상황에 들어선[6], 그야말로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생지옥이자 파탄국가가 되고 말았다. 김일성, 아돌프 히틀러, 블라디미르 푸틴, 마오쩌둥, 시진핑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독재자로 불리는 인물들이 저지른 악행들을 모두 저지른 것이며, 악행의 수준이 유송의 전폐제 유자업과 후폐제 유욱과 비교가 가능할 정도이다.
이로 인하여 뒤발리에는 로버트 무가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셰이크 하시나와 함께[7] 독재자가 된 영웅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4. 가족
4.1. 부인 시몬 뒤발리에
Simone Duvalier(1913.3.19 ~ 1997.12.26)
그녀는 1939년 12월 27일에 프랑수아와 결혼하였으며, 남편의 생전에는 남편처럼 부두교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아이티인들이 그녀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후 1980년에 아들이 물라토 출신의 여성 미셸 베네(Michele Bennett)(1950 ~ )와 결혼하자 '뒤발리에 혁명의 수호자'로 강등되고는 1982년에 미셸 베네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파리로 추방되었었으며, 아들이 1986년에 축출되고 1990년에 이혼한 후에는 아들과 함께 비교적 가난하게 살다가[8] 1997년 12월 26일에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는 망명 생활을 했을 때에 "정치적 상황이 허락될 때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1]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대통령은 1818년부터 1843년까지 집권한 장 피에르 부아예이며 두번째는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다.[2] 그가 사망한 해인 1971년에는 아이티 인구가 477만 명도 되지 않았다. 뒤발리에는 집권 기간 동안 인구의 0.62~1.26%를 학살한 셈이다. 심지어 이것보다 더 높은 추정치도 존재하는데, 1986년 뉴욕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뒤발리에는 집권기간 동안 10만 명을 학살했다.#[3] 아이티는 뒤발리에 이전에도 세계 최빈국이었다.[4] 사실 학살 면에 있어서는 뒤발리에도 능가했던 인물로는 이승만과 수하르토도 있지만, 적어도 이들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인 데다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큰 업적도 있어서 나름대로 재평가 여론도 있다. 물론 학살 규모가 악명 높은 공산권 독재자들에 비견될 수준으로 너무 크기에 악평이 더 많긴 하지만. 사생활로만 따지면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뒤발리에, 비델라도 울고 갈 수준의 인간 말종이라고 할 수 있다.[5] 전술했듯 대한민국의 군사정권 독재자들과 이승만도 집권기 상당히 악랄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지도자로써는 굵직굵직한 업적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린다. 사실 전두환같은 경우 대부분 부정적 평가를 받으나 이쪽도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이라는 장점이 있고 그걸 다 빼고 순수한 통치 체제의 억압성으로만 봐도 뒤발리에보다는 한참 낫다. 집권 과정에서 뒤발리에와 비슷한 잔혹성의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고국이 세계적으로도 주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21세기에 90세까지 천수를 누리고 편히 사망해서 그렇지. 애초에 뒤발리에는 같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는 비델라, 전세계 역사를 다 통틀어서는 북한과 비견되는 인류 역대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6] 2024년 5월 1일 한국 정부는 아이티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다.[7] 그나마 무가베는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아페웨르키는 독립운동을 할 적에는 군인들에 대한 처우를 잊지 않던 덕장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북한을 동경해서 그들을 따라하면서 나라를 망친 케이스다.[8] 아들이 집권할 동안 '마마 독'의 사치벽은 틈만 나면 파리와 뉴욕에 가서 고급 의상과 보석을 사는 것을 즐겼다는 미셸 베네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망명 생활 동안 이전보다 가난하게 살았다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