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6:12:32

알베르토 후지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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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페루 공화국 제54대 대통령
알베르토 켄야 후지모리 후지모리
Alberto Kenya Fujimori Fujimori
파일:Alberto_Fujimori.jpg
<colbgcolor=#b70415> 출생 <colcolor=#000000,#b70415>1938년 7월 28일 ([age(1938-07-28)]세)
페루 리마
국적
[[페루|]][[틀:국기|]][[틀:국기|]] |
[[일본|]][[틀:국기|]][[틀:국기|]][1]
재임기간 제54대 페루 대통령
1990년 7월 28일 ~ 2000년 11월 22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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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70415><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무쓰에 이노모토 데 후지모리
어머니 나오이치 후지모리
배우자 수사나 히구치 (1974 ~ 2004)
사토미 카타오카 (2006 ~ )
자녀 2남 2녀
장녀 케이코 후지모리
장남 히로 후지모리
차녀 사치 후지모리
차남 켄지 후지모리[2]
종교 가톨릭
학력 페루국립농업대학교 (농업공학 / 학사)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물리학 / 학사)
위스콘신 대학교 (수학 / 석사)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약력 Cambio90 대선 후보
페루 54대 대통령
}}}}}}}}}

1. 개요2. 성장 배경3. 정치계 입문 이후
3.1. 대통령이 되기 전3.2. 대통령 재임3.3. 대통령 재임 이후
4. 선거 이력5. 가족 관계6. 창작물에서7. 여담

[clearfix]

1. 개요

페루일본계 정치인이자 54대 페루 대통령으로, 1990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10년의 재임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후지모리즘의 원조.

남미로 대거 이주한 일본인 이주자의 자손으로, 일본명은 후지모리 켄야(藤森謙也). 그래서 공식적인 이름은 알베르토 켄야 후지모리 후지모리(Alberto Kenya Fujimori Fujimori)가 된다. 스페인어권에서는 보통 부모의 성을 같이 쓰는데[3], 근대 이후 일본에서는 부부동성을 적용해왔기 때문에 어머니 성도 후지모리이니 후지모리가 이름에 두 번 들어가게 된 것. 'Fujimori'는 '藤森'을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표기한 이름인데, 스페인어권에서는 이를 스페인어식으로 읽어 '푸히모리'/fuxiˈmoɾi/라고 읽는 경우가 대다수이다.[4]

집권기간 동안 독재정치를 펼쳤고 부정축재도 많이 하여 페루 국내에서 지탄받기도 하였지만 페루에선 가치가 폭락한 잉티에서 으로의 통화개혁으로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등 경제를 살렸고[5], 공산 반군의 세를 약화시켜 치안도 안정되었다는 이유로 후지모리를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후지모리의 자식들인 케이코 후지모리와 켄지 후지모리가 페루 정계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2. 성장 배경

1938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태어났다. 후지모리의 부모는 후지모리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페루로 이민왔다고 한다. 후지모리의 출생 당시 부모는 일본 국적이었고, 페루는 출생지주의 국가로서 페루 영토에서 태어나면 페루 국적을 부여하기 때문에 출생 시부터 일본페루이중국적이 되었다. 이후 성인이 되면서 1958년에 일본 국적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페루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출생 당시부터 페루 국적을 보유한 사람만 페루 대통령 출마 자격이 있고, 페루 태생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페루 국민이었던 후지모리는 대통령 출마 자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런데 실은 일본에서 태어나 출생 당시에는 페루 국적이 없었다는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페루에서 태어난 것으로 출생기록을 조작했다는 의혹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페루 헌법상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게 되는 것인데, 아무튼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후지모리가 대통령이 되면 일본의 지원으로 경제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감에 자세한 조사 없이 그냥 묻혔다.

페루 리마의 일본 이민가정에서 자란 후지모리는, 페루 국립농업대학교와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페루로 돌아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페루에서 농업경제 전문가로 유명해졌고, 1985년 페루 국영 텔레비전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다.

3. 정치계 입문 이후

3.1. 대통령이 되기 전

이후 후지모리는 1989년에 개혁정치를 내세우는 정치단체 Cambio90이라는 정당에 참여하면서 199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자신의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검소하게 선거운동을 치렀다. 사실 선거 초반에는 전임 알란 가르시아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인한 IMF와의 갈등으로[6] 외국기업들이 대거 철수하고 물가가 과도하게 상승하는 김을 보이자 은행국유화 정책을 실시했다가 오히려 역풍을 타서 때문에 안 그래도 외채문제와 원자재값 하락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신음했던 페루의 경제가 악화일로에 빠졌기에[7] 1989년 지방선거에서 우파진영이 압승을 거두웠고, 마오주의 게릴라들도 판을 쳤기에 은행국유화 반대운동을 펼쳤던 세계적인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여유있게 압승할걸로 예측이 되었다.

그런데 이미 70년대-80년대에 걸쳐 중남미 상당수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했기에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있었고, 알란 가르시아가 경제를 망쳤다고 해도 그 이전의 벨라운데 테리가 경제적으로 잘한것도 아니긴 했다.[8] 그래도 사실 이때는 연간 인플레이션 300%였으니 그나마 상처가 덜 했긴 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장 먼저 실험된 곳이 바로 칠레나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의 남미 국가들이다. 이로 인해서 페루 원주민들은 바르가스 요사의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공약(이른바 충격요법)과 호화판 선거운동에 불안감을 느꼈고 반면 소박하게 선거운동을 하던 후지모리에게 호감을 느꼈던데다가 정당제도에 대한 불신감 증폭,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걸로 예측되었던 일본에게 대규모로 경제지원을 이끌어낼수 있다는 기대감까지 겹쳐지면서 후지모리를 찍어대었고 후지모리는 결선선거에 진출하게 되었다. 여하튼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후지모리는 '치노체트(chinochet)'라는 별명이 붙었다.[9]



그리고 결선투표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무소속이었지만 당시 우파정당들의 선거연합체였던 민주전선에도 참여[10][11])를 압도적인 격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62.4% VS 37.6%)

3.2. 대통령 재임

재임 중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적극적 외자유치(대부분 일본)로 재정적자 개선에 성공[12], 국민의 지지와 함께 경제발전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좌익 게릴라들인 투팍 아마루 해방운동이(MRTA. Movimiento Revolucionario Túpac Amaru) 일으킨 일본대사관 인질사건 때 단호한 대처로 강인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재임 중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며 국회를 해산, 독재의 문을 열었다.[13]



후지모리는 쿠데타의 이유로 헌법 개정을 들먹임으로서 부르주아 일색인 의회에 반감을 가진 서민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새 헌법이 통과되면서 당시 지지율은 73%까지 찍기도 했으나, 이때문에 외교와 외자유치에서 벼랑끝으로 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보였다. 이 때 그의 부인인 히구치 후지모리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사람이 변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폭로하며 이혼을 했음에도 1995년 대통령 선거에 64.4%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어 2차까지 가지 않고도 재선에 성공했다.



여하간 그 정도로 인기가 높았기에 90년대 중반 정도에 페루에 가면 동아시아인에게 무조건 곤니찌와가 늘 나왔다. 당시 페루를 여행간 사람이 책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후지모리에 대한 대다수 지지층 인기가 엄청났다. 그러나 2000년 초반에 다시 페루를 갔을 때에는 후지모리에 대한 인기는 온데간데 없었다고 한다.

헌법으로 3선을 금지하면서도 자신은 구 헌법을 통해 3선 대통령이 가능케 하는 추태를 저지르는가 하면 좌파 및 반대자에게는 구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탄압을 하여 추락을 거듭했다. 후지모리도 정작 1990년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좌파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으니 일종의 배은망덕이다. 근데 그럴만도 한게 임기 초기 의회와 갈등을 엄청 빚으면서 탄핵직전에 갔다가 의회해산으로 선제공격을 한 것이니. 1997년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외환위기와 외자이탈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콜롬비아 등 중남미 주요국의 경제가 줄줄히 파탄상태에 직면하면서[14] 페루도 영향을 받아 그나마 성과로 내세웠던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어버렸고, 그 동안 시행했던 정책에 대한 반발감이 거세져서 후지모리의 입지도 좁아졌다.

결국 지지율이 급속도록 떨어진 후지모리는 야권에 대한 공작과 선거인 명부조작 등 부정선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톨레도가 치고 올라오고, 선거인 명부조작으로도 1차 투표에서 과반이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지못해서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출구조사에서 모두 톨레도가 앞섰던데 비해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2위로 뒤쳐졌던 상황이었고, 결국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야당후보인 톨레도 후보가 항의차원에서 사퇴한 상황에서 치러진 2차 투표에서 과반을 겨우 넘는 51.7%의 득표율(32%가량이 무효표였고, 16%는 톨레도 후보의 표)을 얻었다.

이렇게 3선에 간신히 성공했지만 그 직후 영구집권을 기도하며 야당의원을 매수한 스캔들이 폭로되어,[15] 국민의 지탄을 받았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오얀타 우말라가 정권을 규탄하며 쿠데타 시도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 경제 포럼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출국한 뒤 일본으로 도주했다. 이미 가망이 없어진 후지모리는 일본에서 팩스로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거부당했고, 국회는 '영구적 도덕 장애'라는 명분으로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탄핵하였다.[16]

3.3. 대통령 재임 이후

페루는 일본 측에 후지모리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서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국민인 후지모리를 보호하기 위해 송환할 수 없다"고 하며 송환을 거부했다. 일본은 1985년 국적법 개정 이후 복수국적을 불허했으나 84년까지 이중국적이었던 사람들은 묵인해주고 있는데,[17] 후지모리는 일본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이중국적 상태를 숨기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

결론적으로 이중국적자가 페루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다가, 비리를 저지르고 체포당할 처지가 되자 또 다른 국적국(사실상 모국)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러고도 한 번 맛 본 권력을 잊지 못 해 2005년 칠레를 통해 우회하여 페루로 밀입국하기 위해 칠레로 입국했는데, 칠레 당국은 후지모리를 체포해 가택연금시켰다. 그 와중에 일본의 보수정당인 국민신당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참의원 선거에도 출마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다시말해 한 나라의 국가원수까지 지냈던 사람이, 국가원수였던 시절의 비리 혐의를 받고 수배 중이면서 다른 나라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동서고금을 불문한 역사상 전례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18] 그러나 아소 다로 당시 외무상이 후지모리의 입국을 전면적으로 불허했고 선거에서 낙선했다.

시간이 지나 마침내 2007년 칠레 정부에 의해 페루로 압송, 구속되었다. 그리고 2010년 재임 중 저지른 각종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인권침해 및 국고유용, 야당 후보 도청, 부정선거 등등. 특히 특수부대를 동원한 반대파 주민(원주민 인디오) 수십 명 살해 관련 혐의가 문제가 됐다. 이후 고령을 이유로 사면 이야기가 나왔지만 워낙 잘못을 많이 한 탓에 국민들 상당수는 사면을 반대하고 있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076536-00021B8900000258-198_468x337.jpg

후지모리에게 전성기는 1996년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 인질사건에 직접 방탄복까지 입고 선봉에 나서던 일이다. 그러나 페루인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지금 이 일은 더이상 회고되지 않는다. 이 시절 한국에서도 이름세를 떨쳤고 페루에서도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며 연구하고 있다고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후지모리의 몰락 이후 새마을 운동과 묶어서 보도하는 일은 일절 없다.

게다가 이 사진 자체가 포퓰리즘의 극치이기도 하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실무책임자가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최고책임자이며 후지모리 본인이 인질협상이나 구출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인질극 현장에 직접 갈 일이 없으며 이는 그 어느나라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며 설사 해당 직무에 종사하다 대통령이 된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냥 여느 독재자들의 종특인 보여주기식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대통령이 현장에 와버리면 아무리 대통령 본인이 특별 대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의전이나 경호를 거절한다고 해도 법으로 정해진 의전이나 경호 등은 무조건 할 수 밖에 없기에 실제로 해당 작전을 수행하는 특별팀에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게이코 후지모리라는 딸이 있는데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 재임 도중에 부인이었던 수사나 히구치와 이혼하면서 19세부터 실질적으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래저래 한국박근혜의 젊었을 적 시절과 유사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전처인 수사나 히구치가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이혼한 이유는 남편인 후지모리와 시부모, 시누이가 부정부패범이라고 대놓고 말했기 때문. 이 딸이 2011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당시 만 35세[19]에 안되던 소피아 후지모리는 1차 투표에서 23.6%의 득표율로 2차 선거에 진출한 뒤, 선거초반에 오얀타 우말라를 앞서는 맹활약을 하여 후지모리의 후광은 여전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선거과정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이 1990년대빈곤층 여성에 행한 강제불임수술 시행 문제가 드러나면서 게이코 후지모리는 선거에서 낙선했고, 이후 우말라 정권은 이 문제를 공소시효 만료도 무시할 인권문제로 규정해서 파고들었다. 뭐, 동시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어차피 별 도움은 못되는게 좌파든 우파든 후지모리에게 당한게 많은지라... 그래도 48,4%라는 만만치않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사실 이건 페루 정계에서는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며 1기 집권 당시에 개혁미흡이나 경제파탄 등으로 엄청난게 까였던 벨라운데 테리나 알란 가르시아도 선거를 통해 대통령 직에 복귀한 사례가 있었으니... 그리고 2015년부터 페루 경제가 저성장기에 들면서 게이코 후지모리의 인기가 높아져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선거기간 막판에 측근이 파나마 페이퍼즈에 연관되어있다는게 드러나면서 지지율을 다소 깎아먹었지만 어쨌든 1위는 지켜냈다.

여하튼 1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기록했기에 케이코 후지모리가 넉넉하게 과반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선거운동기간중에 여러 악재가 터졌고 3위 후보인 베로니카 멘도사가 쿠친스키를 지지하는 등의 돌발변수로 판세가 역전되어 쿠친스키가 50.1%의 득표율로 정말로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면서 케이코 후지모리는 낙선했다.

그리고 현재는 수감 도중에 병원에서 신병 치료를 받고 있다.#

그리고 2016년 말부터 사면 얘기가 돌고 있기는 하는데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이 경기침체와 브라질 건설회사와 관련한 부패의혹으로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데다가 케이코 후지모리가 주도하는 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것을 이용하여 쿠친스키를 견제하면서 내각 각료들이 대거 낙마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다가 쿠친스키도 여당 의석수가 적기 때문에 안정적인 정권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사면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도 많이 나온다.

2017년 7월 들어서 켄지 후지모리에 의해서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오얀타 우말라가 꽤나 친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얀타 우말라 자신이 알베르토 후지모리에 대항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진압당한 경력이 있기도 한데다가, 게이코 후지모리와도 직접 맞붙어서 이겼던 만큼 사이가 매우 안 좋은 정적이었지만 퇴임후 브라질 건설회사로부터 정치자금을 불법적으로 송금받은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동변상련의 처지가 되어서 감방에서 빵을 나눠먹을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다고.[20]

이후로 사면에 대해 설왕절래가 나오다가 쿠친스키 대통령이 압도적인 여소야대 상황속에서 브라질 건설회사로부터 수백만 달러 가량의 로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탄핵직전에까지 갔다가 켄지 후지모리와 그 일파가 탄핵안에 대해 기권표를 날린 덕택에 겨우 살아남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기를 대통령직에 남게 도와준 켄지 후지모리에 대한 보은차원에서 알베르토를 사면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201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결국 사면을 받았다.# 물론 반발도 적지 않은 편인데 그 동안 PPK를 지지했던 계층에서 반발이 커서 사실상 지지자들을 배신한 것이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 다만 후지모리 사면 찬반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기는 한다. 여하튼 후지모리는 1월 5일에 감옥에서 공식 출소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걸려있기 때문에 다시 감옥에 들어갈 가능성도 남아있다.

결국 2018년 10월, 후지모리의 사면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것이 판명되어 사면이 취소되었고, 비슷한 시기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후지모리파 정당들이 정부여당과 동반 참패하고 게이코 후지모리가 부패혐의로 구속되는 등의 악재가 터져서 결국 감옥에 다시 들어가서 남은 형기를 살게 되었다... 였지만 페루 의회에서 제동을 거는 바람에 어떻게 될지 다시 한번 미지수가 되었다.

현재는 감방과 병원을 오가고 있다. # 한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을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비참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21]

2022년 3월 17일. 인도주의적인 사면을 받았다.#

2023년 12월 7일. 공식적으로 사면을 받아 완전히 석방되었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1차 득표수 (득표율) 2차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0 제54대 페루 대통령 선거 페루 1,932,208 (29.09%) 4,478,897 (62.32%) 당선 (1위) 초선
1995 4,645,279 (64.28%) -[22] 재선
2000 5,528,568 (49.87%) 6,041,685 (74.33%) 3선
2007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비례대표
1,269,209 (2.15%) - 낙선 (4번)

5. 가족 관계

  • 수사나 히구치 - 전 아내. 아이러니하게도 이혼 이후 후지모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저항하면서 후지모리 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 산티아고 후지모리 - 남동생이며, 게이코/히로/사치/겐지 후지모리의 작은아버지
  • 게이코 후지모리 - 장녀. 수사나의 폭로 사건 이후 만 19세의 나이로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으며, 2022년 현재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민중권력당 당 대표이자 대권 주자로 활동하며 3번 모두 근소한 차이로 패하며 낙선하였다.
  • 히로 후지모리 - 장남
  • 사치 후지모리 - 차녀
  • 겐지 후지모리 - 차남. 민중권력당 유력 정치인이었으며 2016년 민중권력당의 당 대표이기도 하였으나, 2017년 쿠친스키 정권 탄핵 국면에서 누나 게이코 후지모리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주동하여 출당당하였다. 콩가루 집안 이후 쿠친스키 정권 지지로 돌아섰다.

6. 창작물에서

7. 여담



[1] 속지주의 국가인 페루 태생이며 일본은 1985년 이전까지 부계주의 국적법을 택하여 아버지가 일본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일본 국적을 부여했다. 이후 일본 국적은 자동 소멸되었고 단독 페루 국적이라고 주장했지만, 비리로 인한 수배령이 떨어지고 일본으로 도망간 이후 비공식적으로 일본 국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이중국적자였던 것이 드러났다.[2] 사업가 겸 페루 국회의 국회의원이다. 1980년 출생.[3] 이름1 + 이름2(써도 되고 안써도 된다) + 아버지 성 + 어머니 성[4] 일본어 '후지'의 '지'는 [d͡ʑi\]~[ʑi\]로 발음되며,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에서는 이를 비슷하게 발음되는 j를 이용해 'ji'로 표기한다. 그러나 스페인어에서 'j'는 [x\]으로 발음되며, [d͡ʑ\]나 [ʑ\]와 유사한 음운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콜롬비아 등 남미 일부 지역에서 ll이 [ʒ\]로 발음되는 이른바 제이스모(zheísmo) 현상이 존재하긴 하는데, 페루 지역 스페인어에서는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5] 물론 후지모리 후반기 들어서 빈부격차는 세계 최악을 달렸고, 여러 민영화 조치들을 단행하면서 공공요금은 엄청 비싸지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후지모리 이후의 대통령들도 빈부격차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후지모리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다.[6] 사실 초기에는 9%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시원하게 출발하였다. 알란 가르시아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고 연설이나 토론 실력도 발군인데다가, 미모의 아내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페루의 케네디"라 볼리며 재임 초기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보이며 재임 초기에는 9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고, 채무문제에서 페루의 비참한 현상를 가지고 연설하고 채무협상에서 큰소리 떵떵치면서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은행국유화 선언으로 우파진영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고, 든든한 뒷배경없이 협상에 나서다보니까 외환보유고는 계속해서 줄어들며 말 그대로 DTD 테크를 탔고, 초기에 공약으로 내걸었던 빈부격차 문제 해소 공약도 경제성장률의 급감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날라가는 바람에 집권 말에는 페루 각지에서 공산반군들이 페루 각지역을 점령하며 내전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임기 중반에 60%까지 낮아졌던 인플레율이 7000%를 넘어가고 부정부패도 판을 치며 지지율이 10% 아래로 떨어지며 폭망하였다. 그러나 알란 가르시아는 그의 정적인 요사가 결선에 올라가자 후지모리를 지원하며 복수(?)에 성공했지만, 후지모리가 개헌을 시도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역으로 털릴 위기에 처하자 1993년에 콜롬비아로 망명을 갔고,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이 무너지자 페루로 복귀하면서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이후에 대선에 나서고 곧 이어서 톨레도가 후지모리적인 정책을 펼칠것이라고 공격하면서 2001년 대선에서 46%의 득표를 확보하며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후에 톨레도 저격수로 활동하다가 2006년 대선에 나서서 우파 후보가 전부 떨어져나간 반사시익으로 보수표를 끌여안으면서(바르가스 요사도 알란 가르시아를 울며겨자먹기씩으로 찍엇을 지경이니.) 재 당선되었다.[7] 사실 이러한 경제문제는 알란 가르시아의 전임인 벨라운데나 1970년대 군사정권 시기때에도 있어왔고, 그로 인해 군사정권이나 벨라운데도 쓸쓸하게 정권을 내줘야되었을 정도지만, 알란 가르시아 1기 집권 후반기의 초 인플레이션(연간 7000%대)은 페루 역사에서도 그야말로 기록적인 일이었다.[8] 벨라운데 테리는 1970년대 후안 벨라스코 정권 당시에 독재정권에 대대적으로 저항을 한 민주화의 영웅이라 할만한 사람이었지만 1기 집권기(1963-1968) 당시에 미국 석유업체와 결탁해서 열받은 후안 벨라스코에 의해 쫓겨난 경력도 있는데다가 1980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복귀한 뒤에는 군부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군인들이 반군을 퇴치하겠다시고 일반인들을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데다가 마오주의 게릴라(빛나는 길) 퇴치에 실패하면서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져나갔다. 더군다나 경제자유화를 추진하다가 고이율로 인한 외채문제로 인플레율이 300%를 넘기면서 페루의 경제상황은 거의 폭망지경에 이르렀다. 알란도 그래서 집권한거고 정작 알란도 경제를 말아먹었긴 했지만.[9] 중국인에 대한 멸칭인 '치노(chino)'와 세계 최초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한 칠레의 군사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합한 말이다. 페루의 동아시아계 이민자는 중국계와 일본계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페루에서는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멸시하는 이름으로 chino를 사용한다.[10] 아래 각주에 언급되는 벨라운데 테리(1912-2002, 1963-1968, 1980-1985년 대통령 재임)가 소속되어있었던 민주행동당도 민주전선에 참여하였다.[11] 바르가스 요사는 1960년대에는 쿠바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전형적인 좌파 지식인이었고, 군사독재와 부정부패를 격렬하게 까던 작품을 썼지만 1970년대의 여러 일들을 거치면서 점차 보수적이 되었고 이후에 온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다가 1980년대 페루 귀국때부터는 아예 우파로 전향하였다. 이후에 여러 괄목할만한 활약과 흑역사를 쌓다가 80년대 중반에 총리직 제의를 거절하고 은행국유화 반대 운동을 펼치며 대대적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후에 알란 가르시아 저격수로 나서게 되면서 1990년 대선에 출마한 것. 물론 네임밸류가 있어서 선거운동 초기에 압도적으로 지지받을것으로 예측되었지만 토론회에서 초긴축 정책을 해야하느니 인원감축을 해야하느니라는 식으로 발언하고 수백만 달러를 쓰자 빈민층 사이에서 지지율이 폭망하는 바람에 결국 2차 선거에서 후지모리에게 처참하게 밀리며 낙선하고 말았다. 대선 패배이후 대선과정을 적은 책을 냈는데 욕을 실컷 얻어먹었고, 이후에 1993년에 후지모리의 친위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면서 스페인 국적을 취득하며 스페인에 머무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반 후지모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후지모리가 물러난 이후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있다. 대체로 反 쿠바 성향을 띄고 있으며 2009년 칠레 대선에서 우파 후보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다.[12] 하지만 실제로 긴축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물론 타 국가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한 과정을 거치긴 하였지만 집권 후반기 들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거세졌다.[13] 이 친위쿠데타가 차후의 페루 정치가 막장이 된 원인이 되었다. 이후의 대통령들이 수틀리면 친위쿠데타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14] 이때의 경제난이 21세기 초의 중남미 좌파천하의 원인이 되었다.[15] 야당 의원에게 뇌물을 건내주는 모습이 무려 CCTV 영상으로 찍혔다. 빼도박도 못할 증거였던 셈.[16] 이런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사실 페루 자체가 21세기 초 기준으로 중남미에서 정권교체가 자주 일어나는 국가이고, 정당들 자체도 대개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데다가(전통적인 정당들까지도 그렇다. 그래서 선거때만 되면 정당 물갈이가 이루어진다.) 선거때만 되면 당적을 변경하거나 정당연합을 구성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후지모리 대통령도 기존의 정당이 아닌 개혁 90이라는 신생정당에 입당해서 선거를 치렀다.[17] 복수국적을 명시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나, 1984년까지 복수국적이었던 사람은 본인이 의사 표명을 하지 않아도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일본의 국적법은 복수국적을 원칙적으로 불허하고 선천적 복수국적자의 경우는 일본 국적 선택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일본 국적이 박탈되지만, 복수국적자가 일단 국적 선택 의사를 밝혔다면 그 이후에 타국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국적을 박탈하거나 처벌 또는 불이익을 주는 내용의 조항은 없기 때문에, 법률의 허점으로 인해 일본 국적 선택 의사를 밝힌 선천적 복수국적자는 자발적으로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복수국적 상태가 유지된다. 그런데 1984년 이전에 복수국적이었던 사람은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국적 선택 의사를 밝히지 않더라도 일본 국적이 박탈되지 않아 본인이 하나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복수국적이 유지된다.[18] 이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조지아의 전 대통령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조지아에서 부정축재 혐의를 받고 우크라이나로 도피한 뒤 뒤 다시 우크라이나 국적으로 정치활동을 해서 오데사 주지사까지 오른 사례가 있다.[19] 사실 이전에 알란 가르시아도 만 36세에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당선된바 있으니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었다.[20] 2018년 4월에 보석으로 석방되면서 일단 자유의 몸이 되었다.[21] 이는 전적으로 본인의 멍청한 행동 때문이니 동정의 여지조차 없다. 잘 도망쳤음에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지로 기어들어간 것이니까.[22] 과반득표로 결선투표 미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