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color: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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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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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아베 노부유키 | 요나이 미쓰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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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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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가타야마 데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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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히토시 |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이시바시 단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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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다나카 가쿠에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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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다케오 | 후쿠다 다케오 | 오히라 마사요시 | 스즈키 젠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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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편 | → | 제41-50대 아소 다로 | → | 현직 |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940년 9월 20일 ([age(1940-09-20)]세) | ||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 |||
현직 | 제50대 중의원 의원 일한협력위원회 회장 자유민주당 최고고문 | ||
재임기간 | 제92대 내각총리대신 | ||
2008년 9월 25일 ~ 2009년 9월 16일 | |||
홈페이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 <colbgcolor=#fff,#1f2023>부친 아소 다카키치(1911 ~ 1980) 모친 아소 가즈코(1915 ~ 1996) | |
형제자매 | 3남 3녀 중 장남 남동생 3남 아소 유타카[1](1946년생) 여동생 3녀 노부코 비[2] | ||
배우자 | 아소 치카코[3] | ||
자녀 | 장남 아소 마사히로[4] 장녀 아소 아야코[5] | ||
친인척 | 외고조부 오쿠보 도시미치(1830 ~ 1878) 고조부 미시마 미치쓰네 증조부 아소 다키치(1857 ~ 1933) 외증조부 마키노 노부아키(1861 ~ 1948) 조부 아소 다로[6](1887 ~ 1919) 외조부 요시다 시게루(1878 ~ 1967) 장인 스즈키 젠코 처남 스즈키 슌이치[7] | ||
학력 |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8]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 ||
신체 | 175cm, A형 |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프란치스코)[9] | ||
정당 | |||
파벌 | 지공회 (회장) | ||
지역구 | 후쿠오카 8구 | ||
의원 선수 | 15 (중) | ||
의원 대수 | 35, 36,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 ||
약력 | 아소시멘트 대표이사 사장 몬트리올 올림픽 일본대표 (클레이 사격) 중의원 의원 제17대 자유민주당 청년국장 문부정무차관 제53대 경제기획청장관 제11대 일본클레이사격협회 회장 제2대 내각부특명담당대신 (경제재정정책담당) 제44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3-5대 총무대신 제138-139대 외무대신 제40·42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23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92대 내각총리대신 제17대-20대 재무대신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스가 내각) 자유민주당 부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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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이시바 내각이 들어선 이후에는 당 최고고문[10]을 맡고 있다.2. 생애
2.1. 집안 배경과 정치 행적
청년 시절의 아소 다로 |
증조부 아소 다키치가 1872년 규슈에서 탄광사업을 개시하여 1918년 아소상점으로 법인화[12]한 이래 재벌인 아소그룹[13]을 일궜다. 규슈에서 시작했고, 현재도 규슈에 본사가 있다. 아소 가문이 운영하던 아소 탄광은 일제 시절에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착취한 전적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
아소 다키치의 3남인 조부 아소 다로[14]와 카노 히사아키라(加納久朗) 자작[15]의 여동생 나쓰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는 아소광업 사장, 아소시멘트 사장, 규슈전력 회장, 중의원 3선의원, 일본석탄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요시다 시게루의 3녀 가즈코와 결혼하여 사이에 자식으로 아소 다로를 비롯해 3남 3녀를 두었다.[16] 아소 다카키치는 요시다 시게루를 돕기 위해 중의원 의원이 되어 정계와 재계 간의 연락선 역할을 했으나 요시다 내각 총사퇴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재계로 돌아왔다.
아소 다카키치와 가즈코의 3남 3녀 중 아소 다로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첫째 남동생 지로는 가쿠슈인대학 재학중 요트 사고로 22세에 요절, 둘째 남동생 아소 유타카는 현재 (주)아소 회장, 아소그룹 CEO를 맡고 있다.
여동생들은 모두 명문가에 시집갔는데, 첫째 여동생은 구 화족 자작가문인 소마(相馬) 가문의 33대 당주에게, 둘째 여동생은 주스페인 대사를 지낸 외교관에게 시집갔다. 셋째 여동생은 천황가에 시집갔는데,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 토모히토 친왕에게 시집간 노부코 비[17]이다. 즉,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아소 다로의 조카이다.
한편 아소 다로는 스즈키 젠코 前 일본 총리의 딸과 결혼했다. 스즈키 총리가 총리대신에 재임중이던 1980년대 초, 당시 신진 의원이었던 아소가 스즈키 총리의 집에 갔다가 총리의 딸인 10살 연하의 치카코와 만나 1983년 결혼[18]하였다.
화족의 후예인 재벌가 장남에 황실의 인척이며, 외가와 처가에는 전직 내각총리대신이 둘이나 있으니 혈연과 인맥이 엄청난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으나[19], 그런 것 치고는 정치 역정이 순탄치 않았다. 1979년 중의원 초선, 1980년 재선에 성공하고 1982년 자민당 청년국장에 취임했는데, 1983년 스즈키 치카코와 결혼한 해에는 그런 지역 기반을 갖춘 정치인으로선 흔치 않게 낙선하여(5인 선거구에서 일본공산당 후보에 밀려 6등) 3년간 야인 생활을 했다. 첫 입각도 1996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했는데 이미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2001년엔 누카가 후쿠시로의 후임 경제재정정책담당상에 취임했다.
그리고 2001년 4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자민당 총재선에 4번을 출마했지만 첫 3번의 선거는 세이와 정책연구회 소속 의원에게 연달아 패배했다.[20] 우선 2001년 총재선거에선 고이즈미, 하시모토, 가메이 4명 중 3등을 했고, 이후 고이즈미 내각 및 총재 하에서 정무조사회장, 총무대신,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2006년 자민당 총재선에 또 출마했으나 아베 신조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낙선한다. 제1차 아베 신조 내각 하에서는 외무대신에 유임되었고, 동년 12월 새로이 파벌 위공회를 결성했다.
2007년 8월 개각시엔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아베가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사퇴하고, 다시 총재선에 출마했으나 후쿠다 야스오에게 패했다.
2008년 8월 개각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재기용되었으나 후쿠다가 한 달만에 사퇴하여 치러진 2008년 자민당 총재선에 다시 출마했다. 선거 결과 4수만에 드디어 당선되어 자유민주당 총재 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2.2. 총리 재임 시절
후쿠다 야스오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한 아소는 "경제 대책 최우선"이란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한 국가를 대표하는 자로서 자질을 의심케 하는 망언과 한자 기초실력 부족 등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공식 석상에서 한자 단어를 잘못 읽어 나라 망신을 당할 정도였다. 아소가 잘못 읽은 단어들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며 중학생만 되어도 제대로 읽을 단어가 많다. 백괴사전의 아소 다로 항목에 한자를 잘못 읽은 예시가 아래 사례 말고도 더 기록되어 있다.- 훈독과 음독을 헷갈린 경우
- 답습(踏襲): 둘 다 음독으로 토-슈-(とうしゅう)라고 읽어야 옳으나, 踏의 훈독인 후무(ふむ)와 섞어 후슈-(ふしゅう)로 읽었다.
- 전장(前場): (증권거래소에서 오전에 열리는 거래) 주바코요미(重箱読み)인 젠바(ぜんば)를 훈독인 마에바(まえば)로 읽었다.
- 상처(傷跡, 상적): 두 자 모두 훈독으로 키즈아토(きずあと)로 읽어야 하는데 음독으로 쇼오세키(しょうせき)라고 읽었다. 웬만한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이면 훈독으로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하는 단어를 음독으로 읽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 완수(完遂): 칸스이(かんすい)로 읽어야 하는데 遂를 훈독으로 읽어 칸츠이(かんつい)라고 읽었다. 연탁 현상이 일어나는 단어라고 착각했더라면 칸즈이(かんずい)라고 읽어야 한다.
- 음독을 잘못 안 경우
- 저조(低迷, 저미): 테에메에[21](ていめい)라고 읽어야 할 것을 테에마이(ていまい)라고 읽었다. 마이고(迷子, 미아)처럼 迷를 마이라고 읽는 경우가 없진 읺지만, 이건 예외이고 迷의 원칙적인 음독은 메이이다. 일본어를 몰라도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 보았을 메이와쿠가 대표적인 예이다.
- 파탄(破綻): 하탄(はたん)인데 한자 모양이 비슷한 破錠(はじょう)로 잘못 읽었다.
- 상처(怪我, 괴아): 케가(けが)라고 읽어야 할 것을 카이가(かいが)라고 읽었다. 역시 초등학생이면 알 만한 단어를 잘못 읽은 케이스이다.
- 궁상(窮状): 큐-조-(きゅうじょう)인데 슈-조-(しゅうじょう)라고 읽었다. 게다가 窮는 대표 음독으로 '큐-'로 읽는 법 하나밖에 없다.
- 난독증(?)
- 빈번(頻繁: ひんぱん): 번잡(煩雑: はんざつ)과 헷갈렸다. 頻과 煩의 오른쪽 부분인 頁(머리 혈)을 제외하면 한자 모양의 공통점이 없다.
- 채우고(詰めて: つめめて): つめて를 잘못 읽었다. 詰를 つめ로 읽는 경우는 詰め의 め를 생략하는 경우이다.
더 이상한 것은 저런 간단한 단어는 잘못 읽어 놓고서 乾坤一擲(건곤일척), 窶し(분장), 畢竟(필경) 같은 잘 쓸 일도 없는 어려운 단어는 올바르게 읽었다는 점. 여기에 예로 든 세 단어의 한자들 중 乾와 一을 빼면 모두 상용한자 범위 밖이다.
거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08년 4/4분기에 경제 침체가 버블경제 붕괴시보다 심각한 -12% 성장률을 기록한 것이 최악의 악재로 작용했다. 결국 2009년 1월 12일 아사히 신문이 조사한 내각 지지율에서는 19.3%, 2009년 2월 니혼 테레비에서 조사한 내각 지지율이 9.7%라는 충격적인 수치에 그쳤다.
2009년 초 도쿄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가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의 '불법 정치헌금 의혹'을 조사하며 아소 내각의 지지율은 잠깐 반등했지만 몇 달 안에 지지율이 떨어졌다. 끝내 총리 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조기 중원선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자민당 소장파 의원들과 야당들은 너도나도 아소를 비난할 정도로 지지율이 바닥을 쳤다.
결국 제45회 중원선에서 자민당이 전체 480석 중 역대 최저 의석인 119석을 획득하며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주게됐다.
퇴임 당시 아소 내각 지지율이 NHK는 15%, 아사히 신문에서는 21.5%였다. 이후 총리 지명선거에서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가 총리로 취임했다.
2.3. 아베 신조 내각
2012년, 46회 중원선에서 자민당이 다시 정권을 탈환하고 열흘 뒤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총리 겸 재무대신[22]을 맡게 되어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23][24]아베 내각에서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 기시다 후미오 외무대신과 함께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고정 멤버이다. 과거에는 나카타니 겐 방위대신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최근 개각에서 이나다 도모미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 나카타니 겐 후임으로 선임되어 새 NSC 멤버가 되었다.[25][26][27]
2017년 10월, 자신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중의원 해산이라는 정치적 승부수가 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오랜만에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쓸만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런데 그새 또 참지 못하고 "북핵 위기 덕분에 대승을 거뒀다." 하는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2018년,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에서 재무성에서 공문서들을 조작했다는 것이 폭로되고 재무성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크게 궁지에 몰렸다. 여당인 자민당에서도 "해당 공문서 조작 폭로가 사실이라면[28], 아베 총리를 실각시키는 것은 과하지만, 적어도 아소 다로는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을 정도.[29]
거기에 재무사무차관인 후쿠다 준이치의 여기자 성희롱 의혹이 한 주간지를 통해 불거진 데에 대해, '본인이 직접 피해 청구를 하지 않고 제3자인 변호사를 통해서 했다면 어쩔 수 없다.'며 안일한 대처를 하며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까지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사실 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징계를 하지 않겠다거나 "그가 충분히 반성했다."라고 했다가 철회하는 등 망언을 쏟아내느라, 이미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데에 불을 지피는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해당 재무사무차관을 해임한다고 아소 다로가 직접 발표하였지만 야당은 그의 사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거기에 그 이후로는 "성희롱은 죄가 아니다."라는 등 낡은 여성관을 보여줘서 더더욱 지탄을 받았다.
자민당 총재 선거를 통해 아베가 재집권하면서 부총리로 유임되었는데, 이에 대해 '논공행상 절차로 인해 자질 없는 자를 유임했다.'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시 선거에서 지공회가 아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으로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겪는 가운데, 지공회에서 한국과의 타협론이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30]
이런 지공회 각료들의 미묘한 뉘앙스가 아소 다로의 지휘 하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각에서는 아소 다로가 한일관계 악화를 기회로 아베 신조 내각을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추측했다. 사실 아소 다로 본인의 지역구인 후쿠오카도 한국 관광객 감소의 피해를 입는 곳이기 때문. 물론 이 모든 사항은 추측의 영역이지만 이후 아소의 행보를 지켜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2020년 6월 4일에는 '일본의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외국에서도 일본의 사망자가 적은 이유를 묻는 전화가 걸려온다면서 “그러면 나는 ‘당신네 나라와 우리나라는 국민 민도의 레벨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 모두 말문이 막혀 다른 말을 못한다.”라고 말했다.
2020년 중반 아베 신조가 후임 총리로 다시 한 번 아소 부총리를 지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일본 내에서 제기됐다.# 아베 신조 내각 지지율이 연일 하락세를 치면서 사퇴 압력이 강해졌는데, 그 와중에 자신이 후임 총리로 밀던 기시다 후미오의 입지가 좀처럼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당내 가장 큰 정적인 이시바 시게루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아소라는 극약 처방을 생각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과거 총리 시절의 각종 기행과 선거 참패의 쓰라린 경험 등으로 아소의 대중적 이미지가 처참하기 때문에 정말 최악의 경우에나 논의될 법한 일이다.
8월 28일, 아베가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해 다시 한번 중도 사퇴를 선택하자 차기 총리 후보로 이름이 잠시 언급되었으나 아소는 뜻을 접었고, 지공회 소속 고노 다로 방위대신의 출마도 만류했다. 결국 총재 선거에선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을 지원하기로 했다.#
2020년 9월 15일, 스가 요시히데 자유민주당 총재에게 "2021년은 도쿄 올림픽이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중의원 해산 및 중원선은 조기에 치르는 것이 좋을것 같다." 라는 조언을 했다.
2.4. 스가 내각
2020년 9월 16일, 공식 출범한 스가 내각에서도 부총리 겸 재무대신으로 유임되었다.#이후 스가 총리가 올림픽 개최 강행 및 코로나19 확산 저지 실패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해 총재선에 불출마함에 따라, 차기 총재 및 총리 선출이 불가피해졌는데 고노 다로가 출마 의지를 밝히며 아소 부총리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더니 출마는 허용하되 지원은 하지않는 방식으로 대응했는데 이는 일본 현대 정치사상 유례없는 경우라 주목받았다.#
결국 고노가 사실상 지공회에서 축출되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이번 총재 선거가 지공회 회장 자리를 둔 아소와 고노 간 맞대결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왔다.[31]
2021년 9월 29일,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결국 지공회의 지원을 받지 못한 고노는 지방 당원 투표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의원 투표에서 참패하며 패했다.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대신이 승리하면서 기시다 내각 재무대신에 지공회 소속 스즈키 슌이치가 내정된 바 아소는 최장기 부총리 겸 재무대신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대신 2018년 이후 공석인 부총재에 내정되었다.#
10월 4일, 부총리 겸 재무대신에서 퇴임하는 자리에서 아베노믹스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던 물가 상승률 2%를 자신의 임기 중 달성하지 못한 것을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2.5. 부총리 겸 재무대신 퇴임 이후
기시다 후미오 총리 취임 이후 사실상 명예직인 부총재로 자리를 옮겼다. 너무 오래 하기도 했고, 고령인지라 슬슬 권한과 책임을 내려놓는 모양세. 그러나 자신의 파벌이 건재하고, 기시다 후미오의 총재 당선은 사실상 아소의 지원으로 가능했던 것이라 당 내의 권력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 부총재라는 직책이 실질적으로는 명예직으로 취급받긴 하지만 아소가 이끄는 파벌 지공회가 건재하고 아소의 강한 영향력을 고려하면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직책이다. 애초에 말이 명예직이지 자민당 부총재를 아무나 시켜주지 않는다. 한 파벌의 주인이면서 입각도 여러 번 하고 자민당의 중책을 맡았던 이가 말년에 추대되는 자리이기에 원로로서 권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10월 31일, 49회 중원선에서도 당선되어 14선 고지에 올랐다. 다만 득표율이 2005년 이후 처음으로 50%대에 그치는 굴욕 아닌 굴욕을 맛봤다. 다만 야권표 역시 일본공산당과 레이와 신센구미로 양분되면서 비례부활은 발생하지 않았다.
11월 2일, 일한협력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방한해 윤석열 대통령을 비공개 접견한 후 중절모를 쓰고 조용히 서울광장에 있는 이태원 압사 사고 조문을 했다.
2023년 5월 11일에는 서울-도쿄 포럼 참석차 방한해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 한남동에 있는 대통령 관저에서 만찬 회동했다. 아소 부총재는 만찬에서 “최근 한·일관계 진전 과정에서 보여준 윤 대통령의 결단과 리더십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윤 대통령의 노력으로 양국 관계가 일 년 남짓만에 전혀 다른 국면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2023년 10월경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정계를 은퇴하고 장남인 아소 마사히로에게 지역구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2월에 불거진 자민당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다음 해 1월에 신설된 자민당 정치쇄신본부의 고문으로 취임하였는데 #, 파벌 해체에 부정적인 아소의 존재로 인해 기시다 총리는 지공회와 헤이세이 연구회를 제외한 나머지 파벌만 해산시켰다. # 정치자금 문제에 대해 "민주주의에는 비용이 든다. 그냥은 안 된다."라고 반응했다.#
2.6. 이시바 시게루 총재 당선 이후
2024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또 고노 다로를 지지하지 않고[32] 출마 후보 중 가장 강경 보수파인 다카이치 사나에 지지와 투표 유도를 이야기하며 막후 정치력을 펼쳤으나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고이즈미 신지로를 필두로 한 反아베-아소 세력이 결집해 이시바 시게루를 총재에 당선시켜 일격을 먹었다.[33] 아소의 나이가 84세라 차기 중의원 선거에는 장남 아소 마사히로를 출마시킨 뒤 본인은 불출마, 킹메이커로 계속 활동한다는 구상이었는데 완전히 빗나간 것. 안 그래도 지공회 해체를 거부하고 존속시켜 욕을 사방에서 먹고 있었는데 그 지공회 파워조차 꺾여 버렸으니 개인으로는 몰라도 파벌 수장으로서는 향후 행보가 순탄치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총재선 이후 이뤄진 당5역 등 집행부 및 주요 당직 인사에서 부총재직에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가 선임되면서 아소 본인은 최고고문으로 밀려났고 측근 중 처남 스즈키 슌이치 재무대신만이 총무회장에 선임되어 집행부에 들어갔다. 이시바 내각에서 무토 요지 전 경제산업부대신과 아사오 게이이치로 참의원 운영위원장이 각각 경제산업대신, 환경대신으로 입각한 것을 제외하면 지공회와 세이와 정책연구회 출신들이 주요 당직 및 내각에서 대다수 제외되면서 아베-아소파는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아소파는 상술한 인물들이라도 기용되었으나, 구 아베파는 내각에는 단 한명도 선임되지 못했고 당 지도부에서 통일교 발언 논란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다 총무회장에서 경질되었던 후쿠다 다쓰오가 유일하게 집행부의 말석인 간사장 대행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제50회 중원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정계 은퇴는 거의 확정적이며, 이를 반영하듯 자민당 임시총무회에서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기념촬영도 거부하며 나갔다. 이시바 총재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것은 덤. 당연히 나이 여든씩이나 되면서 참 유치하다는 비판이 도배되었다.
총재선을 통해 확인된 줄어든 입지와는 별개로, 총재선 이후 제50회 중원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후쿠오카 8구 자민당 후보로 공인된 것이 확인되면서 정계은퇴는 미뤄진 것으로 보였고, 84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야권 후보들을 상대로 넉넉한 표차를 과시하며 당선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최고령 당선자로 기록되었다.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과정에서도 자공 연립 여당의 중의원 과반 의석 미달로 결선투표까지 가게 되자 피곤했는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조는 모습을 보였고, 아소가 뒤에서 이를 한심하다는듯 노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향후로도 두 사람의 냉랭한 관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3. 망언 제조기
간략한 망언 모음일본은 다테마에라고 하여 상대방에게 본인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고, 드러내더라도 최대한 남의 기분을 고려하여 완곡어법으로 말하는 편이지만 일본 정치인들만은 예외로 일본 자민당의 극우 정치인들, 예를 들어 아베 신조, 이시하라 신타로 등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상당한 망언을 쏟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소 다로의 경우 단순히 일본을 넘어 정치인이라고 여기기 힘들 정도의 극언을 쏟아부은 적이 많기에 한국은 물론 미국, 심지어 일본 내에서도 지탄받는다. 어느 정도냐면, 북한 정도를 제외하면 그의 망언을 능가하는 국가나 정치인은 거의 없을 정도.
아소 다로의 발언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극우적인 색채를 넘어서서 정치인의 발언에 대한 잣대가 엄격한 대한민국은 물론이요 발언의 자유도가 높은 미국에서조차 욕을 먹고 매장당할 수위의 발언도 일부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나 적절한 다테마에를 중시하는 일본 특성상 절대로 이런 모습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나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역시 극우 정치인으로써 발언 논란이 따라다니지만 이들이 전략적으로 극우 발언을 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면, 이쪽은 본인의 발언을 주체하지 못해 다테마에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지지율을 왕창 깎아먹었고 결국 이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자민당 선거 대패라는 대참사를 가져오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망언 논란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는데, 일본에서는 망언사고가 나면 아예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멸칭인 아호 다로(阿呆太郎/바보 다로)를 직설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아소는 본류 출신 정치인이지만 정치적으로 방류에 가까운 극우 성향이며, 이에 따라 극우 발언을 잦게 하기도 하였다. 대동아전쟁이니, 천황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하느니[34] 창씨개명이 조선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느니 등. 다만 아소는 가톨릭 신자인지라, 총리 시절 8월 15일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에 참례했다.[35]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행해진 것.
또한 혈통 관련 차별 발언까지 하였다. 아소는 선술했듯 혈통만으로 치자면 일본 정치판에서 손에 꼽는 인물인데, 문제는 이에 대한 프라이드 때문인지 혈통 관련하여 남을 헐뜯은 적이 있다는 것. 대표 사례로 자신의 계파로 분류되는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에게 "부라쿠민 같은 천한 (집안 출신) 놈을 총리로 세울 수 없다"는 말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참고로 부라쿠민 차별 발언은 일본 내에서는 거의 미국에서의 흑인 인종차별 발언 수준으로 하면 매장되는 발언이다. 이 말을 들은 노나카는 매우 분노하며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総務大臣に予定されておる麻生政調会長。あなたは大勇会の会合で『野中のような部落出身者を日本の総理にはできないわなあ』とおっしゃった。そのことを、私は大勇会の三人のメンバーに確認しました。君のような人間がわが党の政策をやり、これから大臣ポストについていく。こんなことで人権啓発なんかできようはずがないんだ。私は絶対に許さん!
총무대신에 예정된 아소 정조회장[36], 당신은 대용회 모임 자리에서 "노나카 같은 부라쿠민 출신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지"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대용회 구성원 세 사람에게 이미 확인했다. 너 같은 인간이 우리 당의 정책을 펼치고, 장차 차기 (총리)대신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딴 걸로 인권 계몽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
아소는 이 말에 반박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다테마에를 기조로 삼는 고로 오사카나 후쿠오카를 제외하면 웬만해서는 화가 나도 돌려서 말하지만, 노나카는 너무나 부아가 치밀어서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총무대신에 예정된 아소 정조회장[36], 당신은 대용회 모임 자리에서 "노나카 같은 부라쿠민 출신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지"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대용회 구성원 세 사람에게 이미 확인했다. 너 같은 인간이 우리 당의 정책을 펼치고, 장차 차기 (총리)대신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딴 걸로 인권 계몽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
특히 노나카의 출신지가 교토인데 다테마에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일본 전체를 통틀어도 교토만큼 다테마에가 심한 지역은 없다.[37] 즉 노나카가 이 정도로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는 건 "야 이 씨발새끼야", "너 죽든 나 죽든 사생결단을 내자!"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당시 노나카는 산전수전 다 겪은 77세의 노회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노나카의 반응에 아소는 "그런 적이 없다." 하고 변명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는데, 위에 노나카가 아소에게 한 일갈을 좀 읽어보면 이미 다른 의원들로부터 확인까지 끝냈다고 확실하게 언급했다.
심지어는 선거철에 유권자들에게 한국어로 "쌍놈들아"에 필적하는 말까지 농담조로 했다가[38] 욕을 대판 쳐먹었던 적까지 있다. 게다가 상술했듯 노나카 히로무에게 부라쿠민 운운한 사건으로, '집안발로 어릴 적부터 잘 먹고 잘 살아서, 고생 자체를 모르고 서민들을 천민 보듯 하는 천룡인이다.'라는 비아냥도 가득한데 이 사건으로 스스로 불을 지핀 셈이다.[39]
3.1. 2000년대
2005년 5월 6일, 총무대신 시절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강연에서 전후 경제 재건이 최우선 과제였는데 "운이 좋게도, 정말 운이 좋게도 6.25 전쟁이 발발했고, 그 덕분에 일본 경제 재건에 가속도가 붙었죠.(Fortunately, fortunately The Korean War start, and that accelerated Japanese economy reconstruction.)"라고 말했다.#2006년에는 "대만의 높은 교육 수준은 일본의 식민 지배 덕분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다만 일본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을 위해서라지만 대만 식민지의 원활한 통치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여 현지에서도 여론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본인 역시 60대를 훌쩍 넘은 노인임에도 노인 관련 망언이 가장 많다. 2008년 11월에는 노인 의료비를 언급하면서 "마냥 먹고 마시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료비를 내가 왜 지불해야 하느냐. 노력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을, 노력하지 않아 병든 사람이 축내고 있다"라고 했으며, 아베 내각에 입각해서도 2013년 1월에 "노인이 어서 죽을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망언을 했다.#[40]
정확히는 "노인이 적당히 살고 이제 죽고 싶다고 생각해도 '살 수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다. 더불어 정부 예산으로 (고액 치료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어서 죽을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발언인데, 이후 "공식 발언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을 말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정확히는 나이 든 중증 환자들 즉 안락사를 지지하려고 한 발언으로, 자신은 "나이 들어서 아프면 고통스럽게 연명하느니 죽는 게 낫다"는 의도로 말한 발언이지만, 아소 본인의 부족한 어휘 실력이 작렬해 저런 망언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의도로 말했건,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기엔 심히 영 좋지 않은 표현이라 후에 거듭 사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회고록에도 당당히 망언 제조기로 이름을 올렸다. 라이스 장관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식에서 만나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승국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는 것. 2007년 포츠담에서 열린 G8 외무장관 회의에서 벌어진 촌극이었는데, 아소의 망언과 달리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승산 따위는 전혀 없었고,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해만 눈덩이처럼 커졌으며, 일본 열도를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려는 몰락 작전까지 구상되고 있었다. 심지어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처참히 무너졌다. 원자폭탄 두 방 맞고 패전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정도다. 애당초 실상은 차치하더라도 일본의 만행에 수많은 국민을 잃고 와신상담하여 정의구현한 미국의 국무장관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실례를 넘어서 도가 넘은 발언이다.
또한 "일본을 돈 많은 유대인들도 살고 싶어할 만한 나라로 만들고 싶다"라는 말도 남겼다. 대놓고 나치 독일을 찬양하는 망언을 한 탓에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 거세게 항의하였다.
3.2. 2010년대
박근혜 대통령과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회담" 자리에서 느닷없이 "미국의 남북 전쟁을 알고 있습니까.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바로 그런 식인데…"라는 장광설을 늘어 놓아서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학생을 훈계하는 교사같은 태도였다고. 이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듯한 행태이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 역시 3.1절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며 응수했을 정도다.경제 관련 인물도 아닌 아소가 아베 내각에서 재무대신이 되면서, 경제에 대한 무식함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2013년 6월 17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일본의 천문학적인 국가부채 문제를 질문하자, 아소는 "그러면 돈을 찍어서 갚으면 그만 아니냐"라는 대답을 해서 국민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돈 찍어내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지는 초인플레이션 항목 참조.[41] 아소가 말한 것은 일본에서 불법인데도 천연덕스럽게 저런 말을 해서, 역시나 무개념자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42]
그리고 이번에는 "일본은행들이 금융위기를 피한 건,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의 금융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못해서 파생상품을 구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희대의 발언을 했다.
2013년 7월 29일. 한 강연회에서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어느 틈엔가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버렸다. 그 수법을 배워 보면 어떨까"라고 말했는데#, 이 수법이란 다름 아닌 나치가 한 짓이었다. 그동안의 망언은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농담으로 치부될 정도로 대차게 한 건 저질렀다. 이로 인해 미국의 유대인 권리 단체중 하나인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도 아소 망언에 대해 항의 성명을 냈다. 일본에서도 선거 패배로 침체되어 있던 야당에게 좋은 비판거리로 작용해 민주당, 모두의 당,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 생활당이 연합해서 사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런 사퇴 압력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발언은 철회하겠지만, 사퇴하지 않겠다"며 버텼고 아베 총리가 직접 각의까지 내 가며 프렌드 실드를 쳐 줬다. 관련 기사
그리고 2014년 2월 19일 중의원 예산위에서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해외의 반응을 묻자 아소는 "외무성에서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고 밝혔다. 문제는 한국과 중국은 자국 주재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했고, 일본 주재 자국대사관에서도 일본 외무성을 방문해 항의했다는 것이다. #
4월 24일 방일 중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향해 망언을 내뱉었다. 내용인 즉, "미국 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TPP 관련 이해관계를 하나로 정리해낼 만한 힘은 없는 것 아니냐" 며 "어찌되건 11월의 미 중간선거 전까지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다.관련 기사 TPP 협상이야 자국의 이익이 걸려 있다 보니 그렇다 쳐도 이건 현재 미국 내에서 풍파를 맞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대놓고 조소한 것이다. 이 발언이 공개되자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을 비꼰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43]
사실 그 이전인 4월 13일에 아베노믹스는 기대한 것보다 효과가 없다고 한 적도 있었다.
총리 시절 안락사 발언은 생각치도 않고 "노인이 나쁜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가 "왜 저출산 현상이 오는지는 생각도 않는다"며 까이자 부랴부랴 "보육시설의 부족으로 인한 저출산이 문제"라며 진압에 나섰다.
2015년 4월 3일 재무대신 기자회견을 하면서 홍콩 봉황위성TV(이하 피닉스TV) 기자가 손을 들고 본인의 소속을 밝히자 "응? 피닉스??"라면서 대폭소. AIIB에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해 야당에서 비판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우리는 야당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공산주의가 아니니까. 공산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중국과는 다르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국가다, 일본은. 이런 걸로 보복 당하는 일도 없고, 정말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며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홍콩 언론이라고 신났는지 본격 중국 디스 시전.
주간지 "아에라"(AERA)에 의하면, 열받은 기자가 웨이보에 올렸고, 약 180개국 2.5억명의 중국어 화자 중화권 피닉스TV 시청자들에게 글로벌하게 까이고 있다고 한다.관련 기사 참고로 피닉스TV는 홍콩 방송이고, 신화사 같은 중국 관영미디어와는 다르다고. 그러나 피닉스TV도 FOX 계열이긴 하지만 중국 본토에 허가를 받고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준 관영 미디어 취급을 받고 있다.
2016년 6월 17일, 자민당 집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고령화 사회에서 돈을 쓰지 않는 노인들을 보고 "언제까지 살아있을 셈이냐(いつまで生きるつもりなのか)"라는 유행어를 날렸다. 일본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밈(meme)처럼 등극. 정작 자기도 2020년에 80세가 되었기 때문에 90세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는 건 함정.[44][45]
조선 시대 "전황(錢荒)"처럼 재화를 쌓아 두기만 하면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적절한 소비는 시장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단어선택이 지나치게 과격했다는 게 문제. 더군다나 이번 정권에서 최대한 노년층의 편의를 봐주기나 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라는 것도 문제가 됐다. 사실 자민당 쪽에서 생각하는 것과 달리, 현 아베 내각의 지지율 등락은 엔화 환율 추이가 아니라 최근에 벌어진 연금 사태의 수습 상황에 훨씬 강한 연관성을 보여왔다. 그런데 그런 정권의 재무대신이란 사람이 저런 발언을 했으니 적반하장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위안부 평화비 건립 보복으로 한일 통화 스와프 협상이 중단되자 "(통화 스와프 협상은) 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뢰관계로 이뤄지는 것"이라며 "신뢰관계가 없어지면서 (협상 재개가) 어려워지고 있다. (한일 합의라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빌려준 돈도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며 "스와프 따위도 지켜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주장했다.#[46]
8월 말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무리 동기가 옳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망언을 하여 전세계적인 지탄을 받았다. 그 뒤에 발언을 철회하기는 했으나, 이 망언으로 인해 야당으로부터 비판받았다.
2017년 9월에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으로 북한 무장 난민이 올 경우 대응할 방법 중 하나로 ‘사살’을 언급했다. 한반도 위기론을 부채질 하는데 더해, 난민에 대해 사살까지 언급한 것은 일본에서조차 지나치다는 평가가 나왔다.
2018년 5월 7일에 아소는 후쿠다 준이치 前 재무성 사무차관[47]의 성희롱 사건에 대해 "성희롱은 죄가 아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해서 시민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성희롱은 성립 요건이 까다로워서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비난받을 수 있는 행동인 성희롱을 함부로 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 문제.
5월 16일 도쿄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6·12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북한의 외관이 안 좋은 비행기가 싱가포르까지 무사히 비행하길 바라지만, 도중에 (비행기가) 떨어져버리면 얘기가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상 "낡은 비행기를 탔다가 죽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인데, 북한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도 외교적으로 상당한 결례가 되는 말이며, 개인끼리도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그럼에도 "가뜩이나 긴장 국면인 상황에서 쓸데없이 북한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냐"는 시선도 있어 관방부장관이 주의를 주는 등,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더욱이, 아베 내각은 북한문제에서 패싱당하지 않고 중국과 더불어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북한 외교 라인과 끈임없이 접촉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발언은 북일관계에 찬물을 끼얹은셈이다.
2018년 9월 5일 "일본이 G7중 유일한 유색인종 국가다"라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관련기사 위 발언은 3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첫째, 미국과 캐나다 같은 서구 국가들은 대부분 다인종 국가인데 백인들만의 국가인 것처럼 표현했다. 둘째, 유색인종은 영어 coloured people의 번역어로 백인의 타 인종 차별을 은근히 드러내는 단어인데 이것을 아시아 국가의 각료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데 쓴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일본은 비록 아시아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서구권에 맞먹는 국가로서 한국, 중국 등과는 궤를 달리한다."라는, 은연 중에 다른 아시아 국가를 깔본 의미로 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 8일 아사히 신문에 그가 작년 8월 파벌 모임에서 "(정치인은) 결과가 중요하다"며 "몇백만 명을 죽인 아돌프 히틀러는 아무리 동기가 옳았어도 안 된다"라고 말했던 것 때문에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아소 부총리와의 관계가 파탄이 났고, "2017년 10월 이후 미일 간의 경제대화가 중단된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 이 사람의 망언이 미일관계를 꼬이게 한 원인들 중 하나였던 셈.
2019년 1월에 일어난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 내부 회의에서 "한국의 무비자를 폐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간혹 나오고 있는데, 의외로 이 관련해서는 나름 침묵하고 있다. 하필 아소 다로의 지역구가 한국인 관광객이 줄어들면 제일 큰 타격을 입게 될 후쿠오카이기 때문인데, 실제로 무비자 폐지를 할 경우 후쿠오카 뿐만 아니라 규슈, 시코쿠 등 한국과 근접한 일본 지방 주민들이나 지자체 입장에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일이다.[48][49] 한국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데다가 여러가지 관광지들이 많아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아주 많은 편인데,[50]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는건 관광산업을 정부가 스스로 박살내 지역경제를 나락으로 떨어트릴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3일 한 강연에서 일본 내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에 대해 2014년에도 언급했던 "아이 낳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물론 그 이후인 2월 4일 국회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해당 발언에 대해서 "그러고도 당신이 재무를 담당하는 장관이냐"는 등의 힐난을 퍼부은 일본 야당의원 지적에, 아소는 "해당 발언은 오해를 불러올 여지가 있다"면서 발언을 철회했다.
2019년 3월 12일, "한일 징용공 소송으로 인해 일본 기업 자산을 강제로 매각할 시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써, 한국인의 비자 발급 중단과 한국으로의 송금중단을 가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51] 때문에 이 발언이 나오자마자 일본 경제계와 후쿠오카 현민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52][53]
아소는 17일 아베 총리가 참석한 공식행사에서 과거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대해 ‘대동아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했다고 도쿄의 외교소식통이 18일 전했다. 아소는 자위대 지휘관을 육성하는 현재의 방위대학교 설립에 기여한 이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전쟁에서 불필요한 피해를 입은 최대의 이유는 육군과 해군간 소통 부족이었다. 그래서 (육·해·공을 통합해 교육하는) 방위대학이 만들어졌다","육·해·공이 함께 밥을 먹는 게 중요한데 오늘 이처럼 함께 건배를 할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는 취지의 건배사를 했다.
2019년 12월 문예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아소는 "만약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 자산 매각을 강행할 경우 한국과의 무역을 재검토하거나, 금융 제재에 착수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다." 라며 한국을 협박하였다.[54] 그리고 그는 이어서 "무슨 방법을 쓰든 간에 일본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은 한국이 먼저 피폐해질 것이다. 그러니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관련기사라며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였다.
3.3. 2020년대
2020년 1월에도 "2000년 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왕조"라는 발언을 하다가 비판받고 사과했다.#[55]3월에는 부총리 겸 재무대신 자격으로 참의원 재정금융위원회에 출석하여 "40년마다 올림픽 위기가 찾아온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연결하자면 2020 도쿄 올림픽 역시 소위 본인 말대로 '저주받은 올림픽'이란 얘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범 지구적 확산으로 인한 우려에도 불구 올림픽 정상 개최를 강행하려던 아베 총리에게는 팀킬 발언이 되어버렸다.
아소는 1940년 겨울 삿포로올림픽과 같은 해 여름 도쿄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됐고,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도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서방국가들이 대거 참가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아소 부총리의 발언은 도쿄올림픽을 오는 7월 예정대로 개최하려는 일본 정부와 대회 조직위원회, 도쿄도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는 비판이 일본 내에서 제기되었다.
2020년 4월 10일, 정부의 휴업권고에 응한 사업자에 대해 지원금을 지불하는 것에 대해서 도의 재정력을 언급하면서 "도쿄는 돈이 많지만 다른 현들은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또 한번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았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에서 휴업 권고를 해놓고 보상은 생각한 적 없다는 소리다.
2021년 스가 내각에서 후쿠시마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이 반발하자, "마셔도 별일없다", "중국이나 한국이 바다에 방출하는 것보다 낫다"고 발언하며 망언제조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당연히 한국과 중국 양측에서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
2021년 도쿄도의회 선거를 앞두고도 요양 중이었던 고이케 유리코도지사에게 "아픈 건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망언을 했다가 결국 역풍이 불어 자민-공명이 목표로 했던 과반의석 달성에 실패하는데 그야말로 일익을 담당했다.
2023년 10월 12일에는 "한국 대통령은 퇴임 후 살해 당하거나 체포된다. 이웃 국가로서 어떻게 사귈 수 있겠나."고 발언했다.## 해당 주장 자체의 논란 거리와는 별개로[56], 현직 대통령인 윤석열도 퇴임 후에 살해 당하거나 체포당할 거라고 넘겨 짚는 발언으로 해석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외교적 결례가 되는 발언이다. 그러나 윤석열이 임기 중에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고,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 긴급 체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외교적 결례와는 별개로 저 말이 사실이 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임기가 끝난 후에 체포되는 것이 아닌 임기 도중에 체포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정작 일본이야말로 아소 본인이 부총리로 입각했던 시절 총리로 모셨던 사람이 퇴임 후 자국민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점에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이 나와도 할 말이 없다. 이에 관해 외교부 당국자는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국 정상과 관련한 언급은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본다"라고 에둘러 답변했다.
내각에서 물러나고도 망언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49회 중원선 선거운동 기간 중인 2021년 10월 25일 홋카이도에서 "지구온난화로 인해 홋카이도 쌀이 맛있어졌다"는 지역드립성 망언을 하여 지역 비하 및 홋카이도 농업 비하 논란, 지구온난화 문제 희화화 논란에 휩싸였다.# 다만 이후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아소의 망언이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한 모양이다.[57]
이렇듯 계속 망언들을 쏟아내자, 2023년 11월 25일 요미우리 신문이 한 미디어 연구소에 의뢰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이후의 총리들의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9명 중 뒤에서 2번째, 그것도 다수의 일본인들이 부정적으로 보는 민주당 정권 시절 총리들인 노다 요시히코와 간 나오토 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 참고로 꼴찌는 하토야마 유키오. 절친이자 비슷하게 통일교 게이트와 연루된 아베 신조가 공동 2위를 차지한것과 대조 된다. 끊임없이 망언들을 내뱉은 결과 짧은 총리 시절의 무능했던 면까지 드러난것도 재조명 되어, 여전히 아소를 찬양하는 온라인 상의 넷 우익들이나 오타쿠들을 제외하면 호감도가 바닥을 찍은걸 반증한 결과다.
2024년에도 망언은 계속되어, 1월 28일 후쿠오카의 한 강연에서 가미카와 요코 외무대신을 "가미무라"라고 잘못 지칭하면서 "그리 아름다운 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돌연 외모에 대해 지적했다. 아소는 이어 " 하지만 (가미카와 대신은)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영어도 제대로 해 외교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만나야 할 사람과 미리 약속을 잡았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외무대신은 지금까지 없었다. 새로운 스타가 자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내 "'이 아줌마 잘하네'라고 생각했다"고 가미카와 대신을 '아줌마'라고 지칭하기도 했다.#이에 가미카와 외무상은 특별히 문제 삼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58]
4. 여담
- 1970년대의 아소 부자.
- 일본에서 몇 안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 클레이 사격 선수 출신이다. 그것도 22살에 전일본선수권 대회에서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고 나서, 1974년 멕시코 국제사격대회에서 우승했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도 일본 국가대표로 참가했던 프로 선수였다. 현재는 일본 클레이사격협회 회장으로 재임 중이다. 한편 당시 일화로는, 몬트리올 올림픽을 준비하던 사격 대표팀이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의 아소 가문 대저택에 있는 사격장에서 전지훈련을 했다고 한다. 후쿠오카 아소가문 저택에는 사격장이 무려 두 개나 있다고.
- 젊은 시절의 그는 완전 스나이퍼 이미지로 지금의 막장과는 좀 다르다.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외모도 나름 번듯한 편. 가수 설운도를 닮기도 했다. 키도 젊은 시절 기준이겠지만 175cm로, 1940년생 일본인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키이다. 이를 반영한 탓인지 개그 마작만화인 헛쯔모없는 개혁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저격한 김정일의 스나이퍼를 역저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골프도 좋아한다고 한다. 보통 내로라하는 명문가는 이른 나이에 정략 결혼을 시키는데 긴 해외 유학 생활에 외부에 알려질만큼 취미까지 다양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게 이해가 가는 케이스.
- 엄청난 규모의 저택을 보유 중이다.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의 아소 가문 본가는 숲으로 둘러싸인 장원 수준으로, 대지넓이가 66,000㎡에 달하며 건물만 다실과 창고 등을 포함해 29동이다. 위치 역시 변두리가 아니라 신이즈카역으로부터 200~300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정도로 이즈카 시내 중심에 있다. 구글 지도 링크
- 한편, 시부야구의 가미야마(神山)에도 대지넓이 2400㎡에 달하는 서양식 3층 저택을 보유하여, 땅값만 한화 55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59] 더 무서운 점은 동생이 바로 옆에 부지 넓이가 비슷한 저택을 소유 중이라는 것.
- 가쿠슈인대학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스탠퍼드 대학교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런데 요시다 시게루가 아소의 캘리포니아식 영어 발음을 마음에 안 들어해서 석사학위 따기 직전에 요시다의 엄명으로 런던정경대로 보내졌다고. 이후 그의 영어 발음은 코크니 억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덧붙여서 발음과 별개로 영어 실력 자체는 유학파 출신답게 뛰어난 편이다. 공무상 외국에서 연설을 할 일이 있을 때는 통역 없이 본인이 영어로 직접 했고 내각총리대신 시절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영어로 회담하기도 했다.
- JTBC가 취재한 아소 가문의 모습. 그 엄청난 저택의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 이즈카시가 아소 가문의 영지나 다름없다는 것 또한 밝히고 있다.
- 다 정리하기도 힘들 정도로 끝없이 이어져 국제급 논란을 일으키는 수준 이하의 발언들과 총리 시절의 실적을 보면 아무리 집안 배경이 짱짱해도 그렇지 어떻게 총리까지 올라가고 총리 퇴임 이후로도 저렇게 승승장구 했는지 의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민당 내에서 두번째로 큰 파벌인 지공회 영수고 줄곧 장악력을 잃지 않으며 당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것을 보면 사람을 모으고 파벌 간을 조율하는 능력은 뛰어난 것 같다.[60]
- 페도라을 즐겨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끔 방한할때도 페도라를 쓰기도 했다.
4.1. 덕후
아소 부총리가 이 만화를 좋아합니다.만화를 너무 좋아해서[61] 1주일에 10-20권씩은 꼭 읽고 유학시절에도 매일 만화를 주문해 봤다고 한다. 당 대표 선거 때 아키하바라에 가서 "아키하바라의 오타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며 '오타쿠들의 대표'를 자처하며, 한때 오타쿠 사이에서 인기가 급증하는 일도 있었고, 외무대신 재직 시절, 일본인이 아닌 훌륭한 만화가를 지원하는 '국제만화상'을 만들기도 했다. 로젠메이든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읽는 것이 목격된 적도 있어 그때문에 얻은 별명이 로젠 아소, 로젠각하 등. 또 일본의 전후 비참한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맨발의 겐'을 영역해서 돌린 적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맨발의 겐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만화다.[62] 덧붙여 작가가 히로시마 원폭 체험자이기도 하다. 실로 오덕이 충만한 오덕군자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사람.
아소가 총리 물망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던 2007년, 일본의 만화ㆍ애니 관련주 주가가 수직 상승하는 일이 발생했다. 안녕 절망선생에 의무로 등장하는 로젠메이든을 읽고 있는 아저씨가 이 사람. 또 노기자카 하루카의 비밀에서 잠깐 찬조출연하기도. (정확히는 나나시로 나나미의 변장이었지만) 아, 학원 키노에도 등장해주셨다. "아, 펭귄아가씨♥하트"에는 아예 로젠메이든의 "신쿠" 복장을 입고 나와서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 주기도 했다. #
2006년 자민당 총재선 당시 아키하바라에서 연설한 영상. 1분 16초경에 아베 신조가 잠시 카메라에 잡혔다.
자캐인증
총리가 된 후, 니코니코 동화에 "아소 자민당 채널"이라는 것을 만들어 홍보에 힘쓰기도 했다.
사실 아소 부총리가 까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만화만 보는데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지원 정책에만 힘을 쓴다는 점도 한몫한다. 만화 잡지는 몇 권씩 보면서 정작 외교나 경제, 정치쪽 물건들은 잘 손을 안 댄다나. 일본 애니메이션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터뷰 도중 이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비판적 의견을 내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반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 아소 다로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관련 뉴스 경제불황 속에서도 건설비가 117억엔으로 계획된 애니메이션 미술관 또한 비판받고 있다.
더불어 일본 만화에 대한 자부심이 다소 지나칠 정도이다. 캡틴 츠바사를 보고 라울 곤살레스와 지네딘 지단이 축구선수의 길을 걸었다고 주장한 것은 2ch을 통하여 잘 알려져있다. 물론 이들을 포함한 여러 유명 선수들이 어린 시절 캡틴 츠바사를 보고 자랐고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소년이 유명한 축구만화를 즐겨보는 건 이상할 것 없는 일이며, 무엇보다 축구 인프라가 엄청난 유럽에서 만화를 보고 감명받아서 축구선수가 됐다는 건 완벽한 헛소리이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후쿠오카 2구 | | 71,041 (12.9%) | 당선 (4위) | 초선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5,826 (15.5%) | 당선 (2위) | 재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412 (13.8%) | 낙선 (6위) | [63]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4,179 (23.7%) | 당선 (1위) | 3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9,876 (17.8%) | 당선 (2위) | 4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1,080 (19.3%) | 당선 (1위) | 5선[64]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후쿠오카 8구 | 114,408 (50.49%) | 6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0,178 (49.91%) | 7선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2,646 (57.72%) | 8선 | |||
2005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5,229 (56.89%) | 9선 | |||
2009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5,327 (62.21%) | 10선 | |||
2012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6,712 (68.36%) | 11선 | |||
2014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6,684 (71.32%) | 12선 | |||
2017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5,334 (72.23%) | 13선 | |||
2021 |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4,924 (59.63%) | 14선 | |||
2024 |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2,534 (56.97%) | 15선 |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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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소그룹 중심인 (주)아소 회장 겸 아소시멘트 대표이사 회장. 그의 아들(아소 다로의 조카)로는 아소 이와오((주)아소 대표이사 사장)와 아소 다케시(학교법인 아소학원 이사장)이 있다.[2] 미카사노미야 토모히토 친왕비.[3] 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딸.[4] 1984년 12월 29일생([age(1984-12-29)]세). 게이오기주쿠 내부진학을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졸업 후 도요타 규슈에 입사했다가 이후 (주)엑스톤 대표를 거쳐 현재는 (주)아소 이사 겸 아소상사 대표이사 사장. 이즈카시 청년회의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출연한 리크루트 페이지.[5] 1988년생([age(1988-12-31)]~[age(1988-01-01)]세). 세이신 여학원 내부진학을 거쳐 도쿄대학 문학부 졸업 후 프랑스인과 결혼.[6] 이름이 같다.[7] 제3, 4차 아베 내각 국무대신, 기시다 내각 재무대신을 역임중인 10선 중의원 의원. 지역구는 이와테현 제2구.[8] 3학년 때까지는 아소 다로를 위해 아버지가 특별히 만든 초등학교에 다녔으나# 가쿠슈인에 편입. 학교 자체는 다로가 가쿠슈인에 편입한 후에도 1972년까지 운영되었으며 학교법인은 조카 다케시가 경영하는 학교법인으로 현존한다.#[9]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서 단 1%뿐이기 때문에 일본 기준으로는 특이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역사적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 규슈 지역은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덜란드와의 유일한 교역장이 있던 영향으로 가장 서양에 친숙했으며 카쿠레키리시탄이 자생할 정도로 기독교 탄압 이후로도 기독교 잔존 세력이 일본 전 지역 중 가장 크기도 했는데, 이 서양 문물에 친숙한 규슈 세력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이후 일본 권력층으로 자리잡았기에 일본 상류층 중에는 오랜 기독교 신자가 많다. 아소는 규슈 세력의 직계 후손이며 아소의 외조부인 요시다 시게루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다 임종의 순간 임종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자민당 정치인 중 또다른 천주교인으로는 가미카와 요코가 있다.[10] 처음으로 만들어진 자리이다. 일종의 예우를 위한 자리로 보인다.[11] 메이지 유신 삼걸인 오쿠보 도시미치의 현손이다.[12] 해당 법인은 1941년 아소광업을 거쳐 1954년 시멘트사업을 개시하여 '아소산업'으로 바꿨다가, 1966년 시멘트사업부문을 '아소시멘트(현 아소)'로 분리하고 1969년 청산되었다.[13] 규모는 2021년 기준 102개 계열사에 연결매출 5,139억엔, 종업원 14,548명을 고용하는 기업집단이다.출처[14] 이름이 같다. 3남이지만 첫째 형은 병약하고 둘째 형은 요절하여 아소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주식회사 아소상점 이사 역임.[15] 그의 아버지는 최후의 가즈사국 이치노미야번주였다.[16] 요시다 시게루가 마키노 노부아키 백작의 사위이고, 마키노 백작은 메이지 유신 삼걸, 일본 초대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이다. 따라서 아소의 친모 가즈코는 오쿠보의 증손녀가 되니 피가 이어지게 된다.[17] 아소 다로와 15살 차이가 난다.[18] 둘 다 당시치고 결혼이 상당히 늦었다.[19] 일본 정치인들이 전통적인 상류층 출신이 많다곤 하나 실제로 화족/재벌급 집안 출신인 경우는 거의 없다. 화족들은 정치는 야쿠자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중의원이 실권을 쥐게 된 뒤로는 더욱 그랬을 법하다. 자작의 외증손인 아소 정도만 해도 전통 신분제 기준 최상위권이고, 아소보다 뚜렷하게 혈통이 우월한 경우는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외손자이자 호소카와 후작가 장손인 호소카와 모리히로 정도뿐이다. 호소카와는 자기 동생이 현재 코노에 가문 당주이니 적통 중의 적통이다.[20] 아소 다로는 이 당시 군소 파벌의 영수였다.[21] 혹은 테이메이[22] 원래 일본의 총리 유고시 대리서열 1위는 우리나라의 대통령비서실장 역인 내각관방장관이 맡는 게 관례다. 하지만 내각관방장관이 아닌 다른 국무대신이 중량감있는 인물이라 그 사람을 대리서열 1위로 지정할 때 그 국무대신은 부총리 겸 OO대신이 되는 것이다.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출범 당시 관방장관인 스가 요시히데(자수성가, 무파벌, 아베 심복)보다 재무대신인 아소 다로(금수저, 파벌 영수, 전직 총리)가 중량감이 훨씬 높기에 아소가 부총리가 되었다.[23] 비록 총리 시절 정권을 민주당에 넘겨줬으나 여전히 아소 다로는 자민당 내에서도 3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권력 서열/파벌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아베 이후 스가로 총리가 교체되어도 아소의 지공회의 조력이 집권에 필수적이었기에 재무대신에 유임됐다. 결국 아소는 부총리 겸 재무대신을 무려 9년을 지내며 권력이 정권 상실 이전 수준으로 복구했다. 기시다 후미오를 총리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하여 자기 후임 재무대신으로는 본인 파벌 소속 의원이자 본인의 처남인 스즈키 슌이치를 지명한 정도.[24] 일본 내각총리대신 출신이었던 정치인들은 보통 새로운 내각이 성립되어 내각 국무대신 자리를 요청 받으면 거부하고 당 부총재 같은 명예직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이 재무대신 자리를 요청하면 받는 경우(다카하시 고레키요, 미야자와 기이치, 아소 다로)가 있을 만큼 정계, 관계에서 알아주는 최요직이다.[25] 이나다 도모미는 아베 신조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자민당 내 극우 성향 인사중 그 정도가 심한 인물로 아베가 적극 푸쉬해주는 정치인이다. 현재 '포스트 아베' 즉 차기 총리를 노리는 정치인은 앞서 언급된 자민당 내 정치파벌인 굉지회를 이끌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 그리고 이나다 도모미가 있다.[26] 재미있는 것은 이시바 시게루의 경우 확실한 독자노선을 가기 위해 "내각에 남아달라"는 아베 총리의 요청을 거부하고 당원으로 돌아가 아베 총리에게 비판적인 언론 인터뷰나 라디오 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인 아베 총리의 대항마로서 포지션을 가져간 반면, 기시다 후미오는 내각에 남아 자신의 강점인 외교 부분에서 가시적인 실적을 쌓아 자연스럽게 차기 총리감이 될 만한 인물로서 대외적으로 인정 받으려 노력하는 등, 두 차기 총리후보가 상반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27] 물론 현재로선 아무리 아베 총리가 이나다 도모미를 밀어준다고는 하지만, 군 관계자가 방위대신을 맡는 것에 대한 일본 내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인사라는 것이 지배적이며, 실제로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 부상한 굉지회의 영수인 기시다 후미오가 현실적인 '포스트 아베'로 거론되고 있다.실제로 그렇게 되었다.[28] 이미 사실로 밝혀졌다.[29] 문제는 부총리 겸 재무대신으로서 현재 일본 자민당과 아베 내각의 주요 실세 인물인 아소 다로가 형식상 사임의 형식으로 경질되면 아베 총리에게도 크게 타격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미 재무성에서도 해당 의혹을 사실이라고 시인하고 아베 총리도 본인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한 만큼 누군가는 공문서 위조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다.[30] 사실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등을 주도한 것은 아베 총리와 호소다 히로유키인 세이와 정책연구회로, 이들은 한국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화조차 거부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고수했다.[31] 차기 총재가 2달도 남지 않은 중원선의 공천권을 쥐기 때문이다.[32] 당초 지공회에는 자유 투표를 지시했지만 본인은 지지하겠다고 입장을 내기도 했거니와 고노는 마이넘버 실책으로 당내든 국민이든 상당히 지지를 잃어버린 상태지만 아소파의 중역이라 이번에는 밀어주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많았다.[33] 이시바의 당선이 확정되고 그의 표정이 완전히 굳은 것이 포착되었다.[34] 그런데 문제는 나루히토 천황의 할아버지인 쇼와 덴노(히로히토)부터가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된 후로는 한 번도 참배를 한 적이 없다는 것. 전쟁범죄자들이 합사되기 전에는 자주 참배했다고 하나, 합사된 후로는 한 번도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거나 한 적이 없다. 지금 상황인 아키히토 역시 마찬가지. 게다가 현 덴노인 나루히토 역시 성향을 따지면 같을 듯. 애초에 황가 입장에서 보면 야스쿠니 신사의 영새부에 이름이 올라가거나 순국칠사묘 같은 곳에 묻힌 작자들은 마쓰이 이와네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천황의 명예에 손상이 가게 만든 당사자들이다. 쉽게 말해 황가의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긴커녕 역적인 셈. 그리고 일본 역시 정교 분리의 원칙을 갖고 있는 나라인지라 천황 쪽에서도 이것을 명분으로 들고 나온 것이니, 극우들이 천황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셈이다.[35] 역사적으로 크리스트교에서는 8월 15일에 성모 마리아의 죽음과 성모몽소승천을 기념해 왔다. 일명 '성모 승천 대축일'. 일본 가톨릭에서는 이날 고해성사를 보는 풍습이 있다.[36] 정책조사회장. 당 정책위원회 의장쯤 되는 자리다.[37] 어느 정도냐면 같은 일본인조차 교토 사람이 하는 말의 속 뜻을 알아듣기 어려워할 정도이다.예를 들어서, 이웃 집에서 밤 늦게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거슬리면 오사카나 후쿠오카 같은 곳은 "밤 시간에는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대부분 "어제 밤에 피아노 연습을 하셨나 보네요. 피아노 소리가 들리던데…"라는 식으로 어느 정도 돌려서 말한다면, 교토는 "피아노를 정말 잘 치시네요. 실력이 아주 좋으신데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래서 교토 사람에게 칭찬을 들었다면 곧 욕을 먹은 것이라는 인식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많이 통용된다.[38] 일본인들보다 더 표현이 직설적인 경향이 있는 한국인으로 치자면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한(예컨대 손바닥으로 상대 가슴팍을 밀친) 수준이다.[39] 한국에서도 정치인들이 민생행보/서민행보를 하기 위해 재래시장에 방문하고, 포장마차 음식을 시식하는 먹방 퍼포먼스를 하는데, 일반 시민들이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먹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실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인지 장관이나 국가기관 수장에 임명되어 청문회를 받을 때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버스나 지하철 요금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는 거의 대부분이 오답을 말해 질타를 받았다. 최근에는 맞춤형 공부를 미리 해오므로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40] 언뜻 보면 노인 혐오같기도 하지만, 본인처럼 부유한 노인들은 해당이 안 되는 말들이기 때문에 서민/저소득층에 대한 혐오발언이 본질이라고 볼 슈 있다.[41] 애당초 초인플레이션이라는 개념은 경제학 공부를 1도 안 한 사람조차 대충 설명만 들어봐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개념이다. 그런데 재무대신씩이나 된 사람이 이런 개소리를 하는 것은 경제 문외한의 정도가 아니라 그냥 기본 상식조차 없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게다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짐바브웨의 사례도 모른다니, 이건 사실상 초현실주의나 다름이 없다. 또한 실제로 별다른 후속조치 없이 양적완화만 대대적으로 시행한 결과 일본의 신용등급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42] 돈을 찍어내서 빚을 갚는다고 해도 이상한게 당연히 지폐를 만드는 데도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똑같이 돈이 든다(...).[43] 하지만 실제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는 올해 2016년까지 TPP문제는 미국 국회인준에서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있으며,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2명의 대선후보들의 먹잇감이 되어 즉시 무효로 하겠다고 언급되는 등 오바마의 정치력 한계를 보여주고는 있다. 현재 아베 신조 총리가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의에서 TPP 조기발효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현재 TPP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임을 보이는 국가는 일본뿐이다.[44] 일본의 경제력은 대개 50대 중장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긴 한다. 문제는 이들의 소비가 극히 적다 보니 전반적으로 돈이 잘 돌지를 않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이들 중장년층은 일본이 극호황기던 6~70년대의 높은 이자율을 주는 금융상품에 가입해 현재까지도 그 높은 이자율의 혜택을 보고 있기 때문에, 소비 대신 저축으로 고이자를 받고 있다. 아소 부총리가 한 말이 맥락상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표현이 지나치게 저속했다는것이 문제. 그리고 저 90세 할머니가 했던 발언도, 본인에겐 정말 절박했기 때문이다. 연금액수는 그대로인데 아베노믹스로 인해 물가가 올라간 마당에 소비세도 8%로 인상되었는데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정책을 시행한 정권의 부총리나 된다는 사람이 저런 소릴 하니까 어그로를 끌 수밖에.[45] 그런데 최근 일본 정부에서 10년 이상의 휴면 계좌에 대해 계좌 내 금액을 강제로 몰수하여 비영리 민간 단체나 복지담당 국가기관에 기부형식으로 지급하는 법안이 추진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젊은층이나 중장년층에서 10년 이상의 휴면계좌를 보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노년층이 보유하고 있는 계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법률적으로는 휴면계좌의 경우 해당 계좌의 은행에서 관리하는데 이 계좌를 국가가 관리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므로 큰 문제는 없지만, 나쁘게 보면 국가가 멋대로 몰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론의 반응은 나쁜 편이다. 실제로 전후인 1946년, 태평양 전쟁 당시 발행한 국채를 갚기 위해 특별조치령을 발동하여 휴면계좌의 돈을 압류한 적이 있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국가 부채는 204%에 달했다.[46] 일본 내부에선 65년 한일협정 때 일본 외환보유의 40%가 넘는 6억 달러 지급, IMF때는 미국보다 더 많은 2조 원의 긴급 지원대출, 김대중 정부 때 한일 우호기금으로 적지않은 돈을 지금까지 지원해 왔는데 한일관계가 계속 나빠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한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의 한일 위안부 협정 때 10억엔의 우호금을 지원한 것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100억 원으로 퉁치려 하냐"는 비난이 빗발쳤지만, 일본 여론은 "예전에 돈을 그렇게나 퍼주고도 또 돈을 주냐"며 일본 나름대로 극심한 반발에 시달렸다. 일본이 협정문에 반드시 최종적, 불가역적이란 외교적으로 가장 강력한 구속어구를 원한 것 역시 일본 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함과 동시에 "더이상 한국에게 성과 없는 우호적 메시지를 보이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협정 이후 일본은 전례없이 노골적으로 한국을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47] 한국의 차관급이 일본에서는 부대신이고, 대신정무관과 사무차관은 차관보에 해당한다.[48] 당장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의 여파로 한국인 관광객이 급격히 감소한 것만으로도 규슈 지방도시들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있다. 특히 쓰시마 섬, 오이타현과 사가현의 상황은 정말로 심각하다. 그런데 여기에 무비자까지 폐기된다면? 한국인이 시간과 비용을 들며 일본을 방문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규슈가 입을 타격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코로나19 사태로 일시적으로 한국인 무비자가 폐지되면서 현실이 되어버렸다.[49] 공교롭게도 2019년 말 한-ASEAN 특별정상회의가 열렸을 당시, 같은 기간 부산에서 열린 ASEAN 푸드 페스티벌에서 각국이 자국의 관광 홍보 영상을 엄청나게 틀었다(...). 당연한게,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 관광이 불편해지면 무비자가 되는 동남아 국가들에 놀러가면 그만이고, 각국 입장에서도 일본 불매운동을 하는 한국 관광객들이 자국에 관광을 오게되니 서로 윈윈하는 셈이다.[50] 특히 부산에서 규슈 관광지까지의 거리는 서울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훨씬 가깝다.[51] 근데 일본/비자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러면 한국 정부도 일본에 똑같이 비자 발급 중단과 송금중단 등의 온갖 보복을 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로 인해 (아소 입장에서) 최악의 경우 일본 국민 절반이상 실업자가 되게 생길 판.[52] 부산에서 빠르면 1시간이면 가기에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여행하러 오는 곳 1•2위를 다툰다.[53] 그러나 비자 발급 중단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이미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쓸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한국으로의 송금 중단 뿐이다. 문제는 이랬다간 동인계 등 일본의 문화산업 밥줄이나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도 틀어막아버리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초래하게 되어버린다.[54] 아마, 아소 다로는 한국에 투입된 일본 자금을 전량 회수하여 제2의 외환위기 사태를 일으키는 것이 목적일 듯 하다.[55]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총무대신으로 있던 시절에도 같은 발언을 했다가 똑같이 아이누 등 일본 내 소수민족의 비판을 받고 사과한 적이 있었는데 15년만에 똑같은 짓을 했다.[56] 한국에서는 해당 문제를 '존경 받는 전직 대통령이 없다'는 자조적인 뉘앙스로 언급하는 편이지만, 일본에서는 어째선지 '한국 정계는 정치보복이 당연시 된다'는 증거라면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하나하나 따져보면 노태우까지는 독재와 연루된 대통령이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자신의 임기중에 가족의 비리가 밝혀졌을 뿐이라 본인은 평범하게 여생을 누렸으며,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는 자명한 의혹에 대해 수사를 받은 것 뿐이기에 정치보복으로 볼 여지가 없다. 그나마 표적 수사 논란이 있었던 노무현 정도가 예외일 뿐이고, 실형을 선고 받은 전 대통령들도 몇 년 안 가 전부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사실 관계도 틀렸다. 역대 한국 대통령 중 퇴임 후 살해당한 대통령은 없다. 박정희는 임기 중 살해당했기 때문에 퇴임 후 살해당한 것은 아니다.[57] 홋카이도 소선거구 결과, 자민당 6석, 입헌민주당 5석, 공명당 1석으로 연립여당이 가까스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58] 그리고 그 망언의 피해자인 가미카와 대신도 시즈오카현지사 선거에 출마하고 자민당의 추천을 받은 후보의 지원 유세 중 '낳지 않는 것이 무슨 여자냐'라는 망언을 하여 비판받았다.[59] 정작 신고 자산은 5억엔 내외인데, 정치인의 재산 신고 룰은 실제와 다르게 누락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과세표준액으로 신고한다거나, 주식을 제외한다거나.[60] 이런 면에서 보면 대통령이 되는데 부친의 후광이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역시 조직을 꾸리고 협상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숱한 망언을 남겼으며, 행정수반으로써는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조지 W. 부시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61] 21대 내각총리대신인 가토 토모사부로도 만화를 좋아했던 총리였는데,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만화를 스크랩해서 가족들에게 보여주거나 만화를 품평하곤 했다.[62]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극우라고 알려진 아소의 이미지와 달리, 아소는 자민당 내에서 온건파 보수본류에 속하는 지공회의 영수로, 그가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내각때부터 항상 붙어 다녔던 인물들이 강경파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같은 인물들이였어서 극우라는 이미지가 씌여진 것이다.[65] 사실 같은 온건파에 속하는 굉지회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아소가 내세운 인물이다. 원래 아베는 자기를 열렬히 지지해주는 일명 아베빠 다카이치 사나에를 총리로 원했었다고.[63] 지금까지 치른 16번의 선거 중 유일한 낙선.[64]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65] 한국에 관한 막말들은 아베가 2012년 재집권을 하면서 기존 1차 내각 때의 온건적 노선에서 극우적인 노선으로 갈아타며 아베에 동조하기 위해 그러한 발언들을 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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