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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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02대 대장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33-42대 중의원 의원 미쓰즈카 히로시 三塚博 | Mitsuzuka Hiroshi | |
출생 | 1927년 8월 1일 |
미야기현 토다군 키타우라촌 (현 토다군 미사토정) | |
사망 | 2004년 4월 25일 (향년 76세) |
도쿄도 주오구 | |
학력 | 미야기 현립 코고타 농림 학교 (졸업) 구제도쿄 고등 수의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10 (중) |
의원 대수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
지역구 | 舊 미야기 1구 → 미야기 3구 |
악력 | 국회의원 비서 미야기현 현의원 제111대 외무대신 제57대 운수대신 제48대 통상산업대신 제102대 대장대신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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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대장대신, 외무대신, 통상산업대신 등의 직책을 역임 했으며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회장을 맡았다.2. 생애
1927년 8월 1일 일본 미야기현 토다군 키타우라촌에서 7남 8녀의 대가족 중에서 7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미야기 현립 코고타 농림학교를 거쳐 도쿄 고등 수의학교 (현 니혼대학 생물자원과학부),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대학 졸업 이후 미야기현 제1구 국회의원인 혼마 슌이치, 호리바 젠시로의 비서를 맡았고 1959년 자민당 소속으로 미야기현 현의원 선거에 입후보 하지만 낙선했다. 그 뒤 권토중래 하며 1963년 현의원 선거에 도전해 당선되었다. 1970년에는 자민당 미야기현지부의 요청으로 센다이시 시장 선거에 입후보 하였으나 현직 시장인 시마노 타케시에 밀려 낙선했다. 1972년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인으로 미야기 1구에 입후보해 첫 당선을 장식한다.
당선이후 후쿠다파에 참가했으며 나카가와 이치로와 이시하라 신타로가 결성한 강경우파 파벌 청람회(세이란카이)에도 참여한다. 이때 나카가와 이치로의 신임을 얻었고, 후쿠다파 소속으로 1979년 설립된 나카가와파(자유혁신동우회)의 간사장을 맡았다.
자민당 내 에서는 같은 후쿠다파의 가토 무쓰키[1]와 함께 운수족 의원으로 활동했고, 당시 막대한 적자로 몸살을 앓고있던 일본국유철도를 JR로 민영화 시키는 계획을 적극 추진했다. 1985년 제2차 나카소네 제2차 개조 내각에서 운수대신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으며, 상기한 국철민영화와 재정구조개혁 노선 추진에 임했다.
1986년 전 외무대신인 아베 신타로가 후쿠다 다케오의 후임으로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회장에 오르자 미쓰즈카는 파벌의 간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가토 무쓰키, 모리 요시로, 시오카와 마사주로와 함께 아베파 4천황으로 불렸고, 파벌의 실력자로 성장했다.
1988년 일본 정치계를 뒤흔든 리쿠르트 사건이 터지면서 파벌 회장인 아베와 사천황의 일원인 가토와 모리가 거액의 뇌물을 받은것이 드러나 여론의 큰 비판이 들끓었고, 결국 리쿠르트 사건과 관련이 없던 미쓰즈카가 기존 아베파의 일원들이 실각한 틈을 타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자민당 정조회장 등 중요직책을 역임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더욱 높여나갔다.
1991년 아베파의 리더였던 아베 신타로가 췌장암으로 사망하면서 세이와회 차기 회장 자리를 놓고 미쓰즈카와 가토는 치열한 당권 싸움을 벌였다.[2] 그 당권 싸움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모리 요시로의 지지를 받은 미쓰즈카가 승리, 파벌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3] 그해 10월 미쓰즈카파의 대표로서 총재 선거에 출마했지만 미야자와 기이치와 와타나베 미치오에게 밀려 낙선하였고, 미야자와 총재 자민당에서 정무조사회장에 임명되었다.[4]
고노 요헤이 총재 시절 자민당 간사장과 정치개혁 본부장직을 맡았고, 무라야마 개조내각에서 자민당 간사장을 맡고 있던 모리가 건설대신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그 후임으로 자민당 간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1996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제102대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경제불황이 심각해지고 있던 시점이었고, 97년 4월 일본이 타국에 대해 UN의 결의에 근거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경제제재 등의 조치를 강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환 및 외국무역법을 개정시켰다. 그러나 그해 연말 일본 굴지의 증권회사 였던 야마이치 증권의 파산과 홋카이도 신탁 은행 파산 사태에서 눈에 띄는 대처를 보이지 못했고, 1998년 대장성의 직원들이 은행으로 부터 접대를 받은 대장성 접대 부패사건에[5] 대해 모든 책임을 지고 불명예스럽게 사퇴했다.
그리고 1997년 미야기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이 추천한 이치카와 이치로 참의원 의원이 야당 추천의 현직 아사노 시로 지사에게 패배하자 미야기현에서의 정치력 영향도 저하되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내각총리대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1998년 12월 파벌을 모리 요시로에게 넘겨주고 미쓰즈카 자신은 파벌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2001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지지했고, 이후 세이와회 고문직을 지내다가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지병으로 인해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다.[6]
그리고 2004년 4월 25일 폐렴으로 투병 중 도쿄 주오구 성 누가 병원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59 - 197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0 | 시장 선거 출마로 인한 탈당 |
| 1970 - 2004 | 복당 정계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9 | 미야기현의회 현의원 선거 | 미야기현의회 | | ? (%) | 낙선 | |
1963 | ? (?%) | 당선 (?위) | 초선 | |||
1967 | ? (?%) | 당선 (?위) | 재선[7] | |||
1970 | 센다이시 시장 선거 | 센다이시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낙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미야기 1구 | | 91,361 (13.7%) | 당선 (2위) | 초선 |
198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2,771 (11.4%) | 당선 (3위) | 재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751 (12.9%) | 당선 (2위) | 3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7,704 (14.3%) | 당선 (4위) | 4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4,369 (15.7%) | 당선 (2위) | 5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59,417 (20.83%) | 당선 (1위) | 6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8,949 (15.81%) | 당선 (4위) | 7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4,076 (16.63%) | 당선 (2위) | 8선[8]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야기 3구 | 81,784 (53.14%) | 당선 (1위) | 9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4,278 (51.99%) | 10선 |
5. 기타
- 일본의 신흥종교인 행복의 과학과 연관이 있었다. 행복의 과학 총재 오오카와 류호는 미쓰즈카를 철인 정치가로 평가하며 칭송했고, 아예 미쓰즈카를 총리로 옹립하자는 내용의 책들을 여러번 출판한 적이 있다.#, # 하지만 미쓰즈카 본인은 "행복의 과학과 자신은 1991년에 아내를 따라 정회원 명단에 이름만 올렸을 뿐이며, 행복의 과학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거의 대다수가 과장됐거나 거짓말이다" 라고 사실을 부인했다.
- 성인 잡지 등 유해도서의 규제를 주장해, 청소년 유해 간행물 폐간등 규제 법안을 제출한적이 있다. 1984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 출판사 아스카 신사에서 발행한 소녀잡지 Popteen[9]을 비롯한 유사 잡지들을 "성욕 강좌물 내지 유사 포르노" 라고 비판해 #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던 잡지들이 휴폐간 내지 대폭적인 노선 변경을 강요당했다. [10]
- 만성 적자로 허덕이고 있던 일본 국철을 분할 민영화 시키는 계획을 주도하였으며, 분할 민영화의 방안이 상정되고 있었던 당시, 혼슈의 JR 분할에 관해서, 당시 자민당에서는 동일본과 서일본으로 2분할론을 시키는 방안이 주류였으나, "간사이 회사에 도카이도 신칸센을 두는 것은 어떨까" 라는 의견을 내, 3분할론을 강경하게 추진한 중심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11]
- 하마다 고이치가 쓴 저서 "일본을 망친 9명의 정치가"에서 엄청난 비판을 당했다. 하마다는 미쓰즈카에 대해 제네콘 부패 의혹이나 나카가와 이치로 의문사 사건을 언급하며, 미쓰즈카가 총리에 오르게 되면 그날로 일본은 멸망할 것이다라는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1] 가토 가쓰노부의 장인.[2] 이 당권 싸움은 이른바 산로쿠 전쟁(三六戦争)(삼육 전쟁) (미쓰즈카 히로시의 三(산), 가토 무쓰키의 六(로쿠)) 이라고 불렸다.[3] 가메이 시즈카의 회고에 따르면, 모리나 가토보다 미쓰즈카가 더 리더십이 있는것을 확인한 고이즈미가 그를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자고 제안했고, 모리도 이에 수긍하며 미쓰즈카에게 "미쓰즈카, 너가 회장직을 맡아라." 라고 말해 미쓰즈카가 회장에 오르게 된 경위를 밝혔다.[4] 한편 미쓰즈카에게 밀려 파벌 회장 자리를 놓친 가토는 그해 총재선때 미야자와를 지지했다가 파벌에서 제명당했고, 소규모 파벌인 개진회를 결성했지만 당 내 영향력은 미미했다. 결국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에 입당하였다.[5] 이른바 노팬티 샤브샤브 사건이 이때 일어났다.[6] 미쓰즈카의 지역구인 미야기현 제3구는 미쓰즈카의 비서를 지냈던 니시무라 아키히로가 이어받았다.[7] 1970. 사퇴 (센다이 시장 출마)[8]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9] 1980년 10월 부터 2023년 2월까지 발행된 10대 여성 청소년 대상 잡지로, 이 당시는 여성 청소년의 성관계 체험담이나 체위(!), 낙태와 같은 10대 소녀 대상 잡지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수위가 높았었다.[10] 그러나 이 당시만 (1980년대 초중반) 하더라도 페도필리아와 같은 로리콘물 잡지 등 이상성욕을 다룬 서적들이 일본에서 대놓고 출판되었으나 1988년 미야자키 츠토무로 대표되는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이 발생한 이후 험악해진 여론과 강화된 규제의 철퇴를 맞고 사라졌다.[11] 그 결과 일본 도카이 지방을 관할하는 JR 도카이에는 도카이도 신칸센이, 간사이 지방을 관할하는 JR 서일본에는 산요 신칸센이 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