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3 06:32:11

하마다 고이치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32-35, 37-39대 중의원 의원
하마다 고이치
浜田幸一 | Hamada Kōichi
<nopad> 파일:하마코.jpg
출생 1928년 9월 5일
치바현 키사라즈군 아오호리정
(현 치바현 훗츠시 아오호리정)
사망 2012년 8월 5일 (향년 83세)
치바현 훗츠시
학력 아오호리 소학교 (졸업)
치바현립 키사라즈 중학교 (졸업)
니혼대학 농학부 (타식학 / 중퇴)
정당

의원 선수 7 (중)
의원 대수 32, 33, 34, 35, 37, 38, 39
지역구 舊 치바 3구
가족 장남 하마다 야스카즈
악력 자민당 청년당원
7선 중의원 의원 (제32-35, 37-39대 / 舊 치바현 제3구)
치바현 현의회 의원
중의원 예산위원회 위원장
자민당 홍보위원장
자유민주당 부간사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1. 개요2. 생애 및 정치경력3. 소속 정당4. 선거이력5. 그에 대한 일화들
5.1. 전직 야쿠자5.2. 라스베가스 도박 사건5.3. 도쿄만 아쿠아라인
6. 그 외의 일화 & 어록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자신의 이름을 딴 하마코 (ハマコー)란 애칭이 있었고, 국회(정계)의 망나니 장군(政界の暴れん坊)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및 정치경력

1928년 9월 5일 치바현 기사라즈군 아오호리정(현 훗츠시)에서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오호리 소학교 시절 현지사 표창상을 수여 받았을만큼 우등생이었고, 1941년 장학생으로 치바 현립 기사라즈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전 일본 군부가 미국을 향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하마다는 군수 항공창에서 비행기 날개를 조립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시절인 1942년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에 가서 해군 비행예과 연습생 입학을 희망했지만 나이가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1945년 조선 출신 동급생과 함께 남만주철도에 입사하는 것이 확정되었지만, 출발 직전 종전 선포와 함께 회사가 해체되었고, 동원처인 제2항공창에서 히로히토옥음방송을 듣게 된다. 이때 전쟁에 참전했던 형의 병사 소식과 함께 대지주이자 대정익찬회 임원이었던 아버지가 공직추방을 당하며 도박에 빠져 모든 재산을 탕진하는 일이 벌어졌고, 하마다의 집안은 크게 몰락했다.

1946년 하마다는 니혼대학 농학부를 중퇴하고 날마다 술가게와 게이샤 업소를 출입했고, 야쿠자들과 패싸움을 벌이며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후술할 이나가와카이 산하 야쿠자 경력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몇년 후 하마다는 방탕한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고 청년단 활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2]

1959년 키사라즈군 훗츠정 의회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중의원을 목표로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치바 3구에 무소속 후보로 입후보했지만 낙선, 1963년 치바현 의회 선거에서 현의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1969년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인을 받아 국회의원 첫 당선에 성공한다.[3] 당선 이후 가와시마 쇼지로 부총재의 교우 클럽(交友クラブ)에 소속 되었다.[4]

1973년 이시하라 신타로, 나카가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결성된 범파벌 강경 정책집단인 세이란카이(青嵐会, 청람회)의 결성에 참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 무렵부터 강경파 의원으로 언론에 다뤄지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수많은 어록과 일화들을 남겼다. 1979년 교우클럽의 회장인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사망하고 파벌이 해체되자 하마다는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고 무파벌로 남았다.

1979년 자민당 비주류 파벌들이 (후쿠다파, 나카소네파, 미키파, 나카가와 그룹) 당시 총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의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사임을 촉구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주류파인 다나카 가쿠에이파 (목요회)와 오히라파(굉지회)는 아예 중도 야당인 공명당, 민사당, 신자유클럽과 함께 신당 결성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이 자민당 최대 위기 중 하나였던 40일 항쟁(四十日抗争)이다.

그해 11월 2일, 주류파인 오히라파와 다나카파는 차기 총리 후보 결정을 위한 양원 의원 총회를 강행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후쿠다파를 비롯한 당 비주류파들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를 차기 총리로 추대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하며 주류파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을 표시했고, 총회가 열릴 예정인 자민당 본부 홀 앞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회의를 저지하려 시도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오히라 총리는 같은날 하마다와의 면담 자리에서 이날 열릴 예정인 양원 의회 총회를 저지하려는 반주류파의 농성을 저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5] 하마다는 오히라의 부탁을 받고 양원총회가 열리는 자민당 본부로 달려갔다.

그러나 본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띄인것은 비주류파들이 총회를 저지하기 위해 본인들 소유의 물건이 아닌 당 소유의 사무용품이었던 의자나 책상 등 온갖 물건들을 홀 앞에 설치해 입구를 단단히 봉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를 본 하마다는 당 소유의 물건을 의원들이 멋대로 쌓아놨다는 사실에 분노가 폭발했고, 비주류파가 설치해 놓은 바리케이드를 일일히 철거했다.
<nopad> 파일:40항쟁 육탄돌파.jpg
비주류파가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철거하는 하마다
이 때 하마다는 바리케이드를 만든 비주류파 의원들과 논쟁을 벌였고, 이들이 쌓아놓은 각종 비품들을 치우는 도중 비주류파 의원들을 향해 일침을 날리기 시작했다.[6]
(いいか断っとくけどな、かわいい子供達の時代のために自民党があるっちゅう事を忘れるな!お前らの為にだけ自民党があるんじゃないぞ!?)
알겠냐, 어리석을지도 모르겠지만, 귀여운 아이들의 시대를 위해 자민당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너희을 위해 자민당이 있는 게 아니라고!?
이 발언은 TV를 통해 전파를 탔고, 이 장면은 그가 사망한 현재까지도 그를 대표하는 어록으로 남아있다. ##

또한 이 장면은 하마다가 의자와 책상을 던지면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비주류파가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를 정리하면서 나온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의 모습만 TV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등에서 반복적으로 방송되었기 때문에, 그가 비주류파에 붙어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는 전자의 사실로 잘못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80년 록히드 사건 수사 중 피고인 오사노 겐지가 록히드 마틴사로부터 받은 20만 달러는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Kㆍ하마다라는 인물이 딴 450만 달러의 할부에 충당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 Kㆍ하마다라는 인물이 하마다 고이치라는게 아니냐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제기되며 순식간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또 언론의 추가 보도를 통해 여당 국회의원이 불법으로 해외에서 도박을 했다는 사실과 국세청의 신고 없이 일본 엔을 미국 달러로 환전한 사실도 폭로되며 국회의원직을 사직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하마다는 그해 4월 국회의원직과 모든 당직에서 사퇴했고, 그해 6월 열릴 예정인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불출마를 선언했다.[7]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1984년 일본 중핵파의 방화로 인해 자민당 본부가 불길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마다는 당 실무 직원 및 비서들과 함께 진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스미 에이사쿠 (住栄作, 1920-1986)가 술에 취한 상태로 나타나 이거 매치 펌프 아님? ㅎㅎ라 비아냥 대자 분노한 하마다는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솔직히 맞아도 싸다 이후 스미는 자신의 발언이 경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마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1987년, 중의원 예산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중량감 있는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2월 6일 예산위원회 본회의에서, 일본공산당 마사모리 세이지 (正森成二, 1927-2006) 의원이 과격 좌파에 대한 정부의 수용방식이 문제라는 질의를 하던 중 자민당 방화사건 당시 하마다가 와이드 쇼에서 "자민당 방화사건의 책임은 신좌파를 적절히 수용치 못한 우리(자민당)의 잘못이 크다" 라고 발언한 내용을 인용했다. 그러나 하마다는 "그때 당시의 발언에 현재 상황을 대입하는건 옳지 못하다" 라며 마사모리의 발언을 불쾌하게 여겼고, 이윽고 당시 일본공산당 의장이었던 미야모토 켄지의 린치 살인 의혹 사건[8]을 꺼내며 질의는 두 사람의 신경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하마다가 상기한 과거 발언을 인정했고, 마사모리도 하마다의 태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두 의원간의 마찰은 잠잠해지는듯 했다.

하지만 위원회 종료 직전, 엔달러 환율 문제를 놓고 마사모리의 일방적인 질의 방식에 불만을 품고있던 하마다는 아까전 린치 사건 관련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
쇼와 8년(1933년) 12월 24일, 미야모토 켄지 외 몇 명에 의해, 당시의 재정부장 오바타 타츠오를 사타구니에……철사로 조여 린치하며 죽였다. 이 일만은 정확하게 말씀드릴 테니까요.
(중략)
내가 말하는 것은 미야자와 켄지군(미야모토 켄지의 오타)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 것 뿐이잖습니까.

이 발언을 들은 공산당 의원들은 격분하며 단체로 항의했고, 특히 싸움의 당사자인 마사모리 세이지는 예산위원회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하마다를 향해 "너(하마다 고이치) 야쿠자가 아닌가, 까불지마! (お前ヤクザじゃないか、ふざけるな!)" # 라고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의사록 삭제 시도 및 위원장 사퇴를 거부했지만, 결국 논란 끝에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9]

1993년 자민당 분당 사태 당시 자민당 정치개혁심사 위원회에서 구 당권파(세이와 정책연구회, 굉지회, 구 경세회를 비롯한 당권파) 위주로 회담이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당파(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등이 소속된 개혁포럼21)가 회담을 저지하려 시도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는 당권파와 분당파가 서로 몸싸움을 하는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 섞여 바닥에 깔리기도 했다(...) # 그해 7월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 지반을 장남 하마다 야스카즈에게 승계했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특유의 쇼맨십과 입담을 살려 TV 탤런트로 전직했고, 여러 프로그램과 광고에 출연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특히 TV 아사히의 시사 프로그램인 "비트 타케시의 TV 태클"에 보수 논객으로 출연하며 자신을 "악당당 간사장"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TV 및 대외 활동을 활발히 해오다가 2012년 8월 5일, 노환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치바현 훗츠시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3세.[10]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55 - 1964 정계입문


1964 - 1980 입당


1980 - 1983 라스베가스 도박 사건으로 인한 탈당


1983 - 2012 복당
정계은퇴
사망

4.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5 치바현 현의회 선거 키사라즈군 훗츠정

- (-%) 당선 초선[11]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치바현 제3구 5,783 (1.65%) 낙선 (5위)
1963 치바현 현의원 선거 키사라즈군 선거구 12,242 (19.46%) 당선 (1위) 초선
1967

23,956 (39.82%)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치바현 제3구 78,128 (20.50%) 초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2,421 (19.36%) 재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2,450 (14.17%) 당선 (4위) 3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0,098 (16.70%) 당선 (1위) 4선[12]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327 (18.25%) 당선 (1위) 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5,908 (23.07%) 6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120 (16.68%) 당선 (3위) 7선

5. 그에 대한 일화들

5.1. 전직 야쿠자

  •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일본 3대 야쿠자 세력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의 말단 조직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었고, 조직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밀접한 커넥션이 있었다. 하마다는 일본의 패전 이후 고향 키사라즈시 - 훗츠시 일대에서 재일 한국-조선인 출신 폭력배들과 집단 싸움을 벌이는 등, 다양한 상해사건을 일으키며 "키사라즈의 진드기"라는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13][14]
  • 일본의 대형 연예 기획사 바닝프로덕션의 초대 사장 스호 이쿠오가 하마다의 운전기사 출신이었다. 사실 둘의 만남도 치바현 현의원 시절 전임 기사가 없던 하마다에게 코다마 요시오가 스호를 추천해줘서 생긴 일이었다.
  • 이렇듯 "전직 야쿠자"라는 사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평이 갈렸던 하마다였지만, 본인 스스로는 "자신은 확실히, 일찍이 그런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과거를 비난받으면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거나, 또 다시 자신과 같은 야쿠자 출신이 사회에 도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야쿠자 시절을 인정하며 그 사실을 지나치게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였다.

5.2. 라스베가스 도박 사건

1980년 3월 6일, 요미우리 신문록히드 사건의 피고인인 오사노 켄지가 검찰 조사에서 록히드 마틴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20만 달러는, K·하마다 라는 인물이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으로 잃은 450만 달러를 갚는데 사용되었다는 보도를 하였고, 이 K·하마다 라는 인물이 당시 현직 중의원 의원이었던 하마다 고이치로 알려져 큰 파란을 일으켰다.

추가로 하마다가 주말 하룻밤 사이 카지노에서 약 4억 6,000만 엔에 달하는 금액을 탕진했으며, 당시의 외환관리법을 위반하여 국세청에 신고없이 엔화를 외국으로 반출해 미국 달러로 환전한 사실 등도 보도되었으며, 또 형법으로 도박을 금지하고 있는 입장의 여당 국회의원이 탈법적으로 해외에서 도박을 한 것에 대한 도의적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은 미국 의회에서도 그의 도박 사건에 대한 증언이 있었을 정도로 파장이 커지자 그는 자민당 국민 운동 본부장을 사임하고 그해 4월 10일 기자회견을 가진 후 자민당 탈당과 의원직을 사퇴한 뒤 차기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로 실업자 신세가 된 하마다는 위에 서술되있듯이 오사노의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며 수년에 걸쳐 토지와 빚을 그에게 상환했다.

5.3. 도쿄만 아쿠아라인

6. 그 외의 일화 & 어록


[1] 하마다는 "만약 이때 합격했다면 전후까지 살지 못했을것이다."라고 회고하고 있었다.[2] 이 시기 청년단 활동을 하며 다케시타 노보루, 노나카 히로무 등과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3] 이 당시 하마다의 당선동기로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모리 요시로, 와타나베 고조, 후와 테츠조, 도이 다카코 등 일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거물 의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이해 총선에서 첫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꽃의 쇼와44년(1969년)조(花の昭和44年組)라는 별칭이 붙었다.[4] 1970년 가와시마가 천식으로 급사하자 후임 회장으로 시이나 에쓰사부로 차기 부총재가 추대되었다.[5] 하마다 본인의 정치적 성향은 강경 우파 계열인 나카가와 그룹, 후쿠다파 쪽에 가까웠지만, 보수본류인 다나카파와 뜻을 같이했고, 자민당 총재인 오히라와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 부탁을 승낙할 수 있었다.[6] 위의 사진에서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은 당시 참의원이었던 에토 세이시로 전 의원이다.[7] 총선 불출마로 수입이 없어진 하마다는, 4억 6천만엔의 돈을 자신이 소유하던 치바의 토지를 팔아 수년동안 걸쳐 오사노에게 전액 상환했다.[8] 1932년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미야모토 켄지가 동료 당원 4명을 스파이로 몰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 미야모토는 일본패전 이후 GHQ에 의해 석방되었지만 석방 이후 미야모토가 동료 당원들을 살해한 동기와 범행의 실존여부가 향후 큰 논란으로 떠올랐다. 자세한 내용은 미야모토 켄지 항목 참조.[9] 이 일이 있은 뒤 훗날 하마다와 마사모리 두사람은 국회의사당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하마다 고이치가 마사모리를 향해 "내 목을 잡아라."라는 발언을 했지만, 정작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다.[10] 그의 말년인 2010년 빚의 담보로 내놓은 전기회사의 주식 800주를 횡령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이었으나, 치매 등으로 인한 기억상실로 인해 공판이 정지상태에 있다가 하마다의 사망으로 인해 공소기각 판정이 내려졌다.[11] 1960.10 사퇴 (중의원 선거 출마)[12] 1980.4.11 의원직 사퇴[13] 하마다는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이나가와카이의 초대회장 이나가와 세이조를 꼽았다. 그 이유는 1950년대 초 그가 소속되있던 조직이 보스의 사망으로 청산되고 하마다의 거듭되는 패싸움으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방탕하기 짝이 없는 야쿠자 생활을 청산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자, 그는 어둠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자신이 평소 희망했던 정치가의 길로 나아가자고 마음을 바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후 하마다는 본인의 폭력배 생활 청산과 정계입문 희망 사실을 이나가와에게 알리자 그(이나가와)와 친분이 있었던 일본 우익 거물 코다마 요시오를 찾아가 도움을 받을것을 추천했다. 그 이후 하마다는 코다마의 저택에서 2-3년간 각종 잡일을 맡았고, 이 인연으로 인해 훗츠정 의원 시절 부터 중의원 초년생 시절까지 코다마를 비롯한 우익단체의 후원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해 나갈수 있었다.[14] 하지만 이나가와는 하마다가 "전직 야쿠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나가와가 한 잡지사에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와의 인터뷰를 가졌을때, 평소 하마다와 친분이 있던 기타노에게 "(하마다 고이치는)연예인 비트 타케시와 대등한 신분에서는 맞지 않기 때문에, 향후 영화감독 키타노 타케시의 처우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 라는 조언을 하며 하마다의 언행을 우려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