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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초대 농림수산대신 | |
<colbgcolor=#3CA324><colcolor=#ffffff> 일본국 제30-36대 중의원 의원 나카가와 이치로 中川 一郎 | Nakagawa Ichirō | |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925년 3월 9일 |
홋카이도 히로오군 히로오정 (현 홋카이도 토카치 종합진흥국 히로오정) | |
사망 | 1983년 1월 9일 (향년 57세) |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토요사 소학교 (졸업) 홋카이도 오비히로 농업학교 (졸업) 우츠노미야 고등 농업학교 (졸업) 규슈대학 (농학부 / 학사) |
직업 | 정치인 |
가족 | 아내 나카가와 사다코[1] 남동생 나카가와 요시오[2] 장남 나카가와 쇼이치 며느리 나카가와 유코 |
최종 당적 | |
의원 선수 | 7 (중) |
의원 대수 | 30, 31, 32, 33, 34, 35, 36 |
지역구 | 홋카이도 5구 |
약력 | 홋카이도 개발청 개발 담당관 중의원 오노 반보쿠 비서 대장 정무차관 제35대 과학기술청 장관 제49대 농림대신 초대 농림수산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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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북해의 큰곰 (北海のヒグマ)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등, 자민당을 대표했던 강경파 의원으로 알려져 있었다.2. 생애
1925년 3월 9일 일본 홋카이도 히로오군 히로오정(현 홋카이도 토카치 종합진흥국 히로오정)에서 나카가와 분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나카가와 분조는 농민 출신으로 잡화상 및 가축 매매업에 종사했으며, 히로오정의회 의원을 지낸 지방 정치인이기도 했다.1947년 규슈제국대학 (현 규슈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홋카이도로 돌아와 홋카이도청 공무원으로 사회 경력을 시작한다. 이후 1951년 홋카이도개발청이 신설되자 홋카이도개발청 공무원이 된다. 홋카이도개발청 근무 도중 1954년 1월부터 7월까지 개발청 장관을 지낸 유력 정치인 오노 반보쿠의 비서로 재직했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59년 개발청에서 퇴직하고 다시 오노의 비서가 된다. 이 경력을 발판삼아 1963년 제30대 중의원 선거에 당시 중대선거구였던 홋카이도 5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자민당내 강경우파의 대표적 스피커로 맹활약한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중일국교정상화를 비판하며 친대만(중화민국) 노선을 주장했고, 1973년 박정희 정부의 김대중 납치 사건때도 한국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며 일본에 망명했다 본국으로 납치 후 강제 귀국을 당한 김대중 당시 신민당 전 대선후보를 비판했다. 과거사에 대해서도 수정주의적 견해를 드러냈다.
1973년 7월 이시하라 신타로, 와타나베 미치오 등과 당내 범파벌 강경 정책집단인 '세이란카이'(靑嵐會·청람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자민당은 경제 우선, 대미협조외교를 주창한 보수 본류세력이 주류였고, 세이란카이는 와타누키 다미스케, 야마사키 타쿠, 노다 다케시 등 초재선 의원들이 하나둘씩 이탈하면서 세력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나카가와와 와타나베의 갈등으로 인해 세이란카이의 유지가 어려워졌다. 이후 세이란카이는 정식 파벌인 자유혁신동우회(나카가와파)로 재편성되고, 자유혁신동우회는 나카가와 사후 이시하라파로 불리다가 그나마 성향이 비슷한 보수 방류의 후쿠다파로 편입된다.
1977년 12월 후쿠다 다케오 개조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처음 입각한다. 농업이 중요한 홋카이도의 특성을 고려한 각료 배치였다. 재직 도중 농림성이 농림수산성으로 개편되면서 초대 농림수산대신이 된다. 1978년 12월 후쿠다 총리가 물러나고 오히라 마사요시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서 물러났다가, 1980년 7월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다시 입각한다. 과학기술청 장관으로는 1982년 11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재직하면서 평균 임기가 1년인 일본 장관치고는 꽤 오래 재직한다. 다만 과학기술청 장관직은 비교적 한직이였고, 재직 기간 도중 당이나 내각에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소수파벌 장관이라 어쩔 수 없었다.
3. 말년 및 사망
과학기술청 장관 재직중이며 사망 2개월 전인 1982년 11월에 사실상의 일본 총리가 되는 자민당 총재경선에 출마하나 당시 행정관리청 장관이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보에게 패하며 4명의 후보 중 최하위를 기록한다. 나카소네 내각이 새로 출범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기술청 장관직에서 물러난다.이후 1983년 1월 9일 삿포로 시내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향년 57세이고, 공식 사인은 자살이다. 동료 정치인들에 의해 사망 몇 년전부터 스트레스로 인해 술에 의존하면서 알콜중독 증세를 보였고, 아내와도 매우 사이가 나쁜 등 가정불화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다만 소련과 몰래 접촉하고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CIA에 의해 타살되었다는 등 온갖 의문사를 가장한 음모론들도 제기되었다.[3] 한편 나카가와는 자민당 총재선거가 끝난 뒤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으로 인하여 평소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는데, 이 수면제를 과다 복용 한것이 사망의 원인이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4]
나카가와가 숨진 해 12월에 치러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나카가와의 조직은 나카가와의 아들인 나카가와 쇼이치를 지지하는 측과 나카가와의 비서인 스즈키 무네오를 지지하는 측으로 갈렸다. 나카가와는 자민당 공천을 받았고, 스즈키는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5명이 당선되는 홋카이도 5구에서 아들 나카가와는 1위로 당선되었고, 스즈키도 4위로 당선되었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59 - 1983 | 입당 사망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홋카이도 5구 | | 68,231 (14.6%) | 당선 (2위) | 초선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0,733 (18.0%) | 재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0,074 (16.6%) | 당선 (1위) | 3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5,040 (20.3%) | 4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965 (18.4%) | 당선 (2위) | 5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58,027 (26.37%) | 당선 (1위) | 6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5,801 (24.05%) | 7선[5] |
6. 여담 및 기타
- 살아 생전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였다. 그는 술에 취해 국회의사당 구석에서 방뇨를 할 정도로 취할만큼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6]
- 앞서 서술했듯이 스즈키 무네오가 그의 비서였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 이를 주제로 한 TV 토론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와주던 우쓰노미야 도쿠마 의원과 나카가와 의원사이의 말 다툼이 일었고 여기에 스즈키는 한술 더 떠서 우쓰노미야의 넥타이를 잡고 꽉 조이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한 적도 있다.
- 생전 일반적으로 "밝은 나카가와 이치로와 무서운 나카가와 이치로의 2명이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비서인 스즈키 무네오는 나카가와의 호쾌함과 섬세성이 그의 진정한 이면성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