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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2대 문부대신 | |
일본 제국 제20대 사법대신 오자키 유키오 尾崎行雄 | Ozaki Yukio | |
<colcolor=#fff> 출생 | <colbgcolor=#fff,#1F2023>1858년 12월 24일 |
사가미국 츠쿠이군 마타노촌 (現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미도리구) | |
사망 | 1954년 10월 6일 (향년 95세) |
도쿄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 | |
묘소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엔가쿠지 |
재임기간 | 제14대 문부대신 |
1898년 6월 30일 ~ 1898년 10월 27일 | |
제2·3대 도쿄시장 | |
1903년 6월 29일 ~ 1912년 6월 29일 | |
제20대 사법대신 | |
1914년 4월 16일 ~ 1916년 10월 9일 | |
학력 | 게이오기주쿠 (중퇴) 공학료[1] (중퇴)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지역구 | 미에 2구 |
의원 선수 | 25[2] (중) |
의원 대수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약력 | 제14대 문부대신 제2·3대 도쿄시장 제20대 사법대신 중의원 의원 도쿄도 명예 도민 세계연방건설동맹 초대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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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현 일본국의 정치인.일본에선 "헌정의 신(憲政の神様)", "의회 정치의 아버지(議会政治の父)"로도 불린다. 언론인 출신으로 선거는 30대 초반인 1890년 열린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처음 출마[3], 당선되어 이후 1953년 94세에 낙선하기까지 총 25번 연속 당선, 63년 의원근속이란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일본이 의회 해산이 잦고 만연한 지역구 세습으로 인해 다선의원들이 많은 것을 감안해도 영원히 깨기 어려운 기록이다. 그가 1954년에 사망했기에 만약 26회 중원선에서도 당선되었다면 살아서 임기를 마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955년 2월 26회 중의원 임기 만료 시까지 살았으면 96세가 된다.
원래는 청일전쟁 같은 주전론도 불사하던 강경파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평화주의로 신념을 바꿔 1920년대부터 무소속으로 군부가 주도하는 정부를 비판하고 군국주의에 저항했다.
1.1. 공화연설 사건
의회 정치의 아버지로 불릴만큼 오랜기간 정계에서 활동한만큼 일본 근·현대사에도 여러 굵직한 사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공화연설 사건이다.1898년 3월에 열린 제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자유당과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끄는 진보당이 합당해 헌정당을 구성하고, 동년 6월 오쿠마가 총리에 취임하고 일본 역사상 첫 정당내각을 구성하면서 당시 진보당 출신이었던 오자키 유키오가 문부대신으로 취임했다.
오자키 유키오는 취임 이후 교육 및 학문개혁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억압 정책을 전환해 교육과 학문의 자율화를 내세웠지만 메이지 덴노와 번벌의 반발로 개혁 추진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1898년 8월 22일, 제국교육회에서 열린 교육·학문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학문의 자유 강조, 배금주의 풍조 비판, 외국인 아이에 대한 왕따 문제에 대한 비판을 담은 연설을 했다. 간담회 자체는 박수가 7차례나 나오는 등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배금주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일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전제로 "일본이 만약 공화정 국가라면 미쓰이나 미쓰비시가 대통령 후보자를 배출 할 것이다."라며 정경유착 문제를 꼬집어 풍자했는데, 이 발언이 결국 이후에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내각서기관장, 농상대신을 역임한 이토 미요지가 대표로 있는 도쿄니치니치신문[4]이 다음날 이 연설을 보도하면서 일본은 만세일계의 제국인데 공화정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오자키 유키오를 공화주의자로, 오쿠마 총리가 이끄는 정당내각이 공화정을 추진한다고 소위 기레기질을 시전하며 그야말로 정계에 폭탄을 터트렸다.
이에 오자키는 1898년 10월 21일 사임했는데, 자유당 계열은 오자키가 진보당 계열임을 들어 오쿠마에게 책임을 물으며 신임 문부대신으로는 자유당계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쿠마는 다시 진보당 계열인 이누카이 쓰요시를 문부대신에 올렸고, 자유당계는 이에 반발해 헌정당을 사실상 탈취한 후[5] 내각에서 총사직, 1차 오쿠마 내각을 붕괴시킨다.
오쿠마는 결국 10월 30일 사의를 표명하고 11월 8일 퇴진해야 했으며, 진보당계는 따로 헌정본당을 결성하고 자유당계 헌정당은 이후 번벌 내각에 비교적 협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자유민권운동 정당 진영은 다시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2. 여담
- 1912년 3월 27일, 도쿄 시장 재임 중 '미일우호(美日友好)'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왕벚나무 3000그루를 기증한 바 있다. 이후 워싱턴 D.C에서는 1935년부터 해마다 3월 말~4월 초가 되면 화려한 벚꽃 축제(Cherry blossom Festival Washington DC)를 개최하고 있는데,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 1919년 3.1 운동 이후 월남 이상재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상재는 집 뒤의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그를 맞이하였다. 오자키가 "일본과 조선은 부부와 같은데, 남편이 좀 잘못했다고 아내가 너무 심하게 들고 일어나서는 되겠느냐"라는 식의 말로 공격해오자 이상재는 "부부가 화합하는 것은 옳지만 정당하게 맺어진 것이 아닌 폭력으로 맺어졌으니 아내가 당연히 들고 일어날 수 밖에 없다"로 응수해 오자키를 벙찌게 만들었다. 이후 오자키는 돌아가면서 이상재를 '조선 제일의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
- 그의 딸 소마 유키카는 덕혜옹주와 가쿠슈인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유키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3.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2f328e><rowbgcolor=#2f328e><rowcolor=#fff>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890 |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에현 5구[A] | ''' 입헌개진당 ''' | 1,772 (46.1%) | 당선(1위) | 초선 |
1892 |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04 (31.0%) | 당선(2위) | 재선 | ||
1894 | 제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74 (29.0%) | 당선(1위) | 3선 | ||
1894 | 제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18 (32.2%) | 당선(1위) | 4선 | ||
1898 | 제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진보당 ''' | 1,455 (47.0%) | 당선(1위) | 5선 | |
1898 | 제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헌정당 ''' | 1,461 (38.9%) | 당선(2위) | 6선 | |
1902 | 제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에현 군부[B] |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ff0000,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입헌정우회)] | 2,174 (7.6%) | 당선(6위) | 7선 |
1903 | 제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무소속 ''' | 4,377 (15.8%) | 당선(1위) | 8선 | |
1904 | 제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무명구락부 ''' | 3,347 (15.6%) | 당선(1위) | 9선 | |
1908 | 제1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유흥회 ''' | 5,116 (13.1%) | 당선(3위) | 10선 | |
1912 | 제1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291 (14.1%) | 당선(3위) | 11선 | |
1915 | 제1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중정회 ''' | 8,432 (21.1%) | 당선(1위) | 12선 | |
1917 | 제1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252 (13.9%) | 당선(2위) | 13선 | |
1920 | 제1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에현 8구[C] | 6,354 (98.5%) | 당선(1위) | 14선 | |
1924 | 제1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혁신구락부 ''' | 6,611 (66.7%) | 당선(1위) | 15선 | |
1928 |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에현 2구[D]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070 (25.0%) | 당선(2위) | 16선 |
1930 | 제1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8,414 (22.3%) | 당선(1위) | 17선 | ||
1932 |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5,324 (19.1%) | 당선(2위) | 18선 | ||
1936 | 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2,598 (26.2%) | 당선(1위) | 19선 | ||
1937 |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71 (24.5%) | 당선(1위) | 20선 | ||
1942 |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비추천 '''[10] | 14,525 (17.3%) | 당선(3위) | 21선 |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에현[E] | ''' 무소속 ''' | 163,084 (16.1%) | 당선(1위) | 22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에현 2구[D] | 57,800 (27.6%) | 당선(1위) | 23선 |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34,495 (14.9%) | 당선(2위) | 24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34,888 (12.9%) | 당선(3위) | 25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7,021 (10.3%) | 낙선 | [13] |
[1] 공부성에서 세운 공학학교였고, 이후 공부대학교로의 개편을 거쳐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이 되었다.[2] 역대 최다선 의원이다.[3] 그는 고향인 가나가와현이 아닌 미에현에서 출마하였다. 참고로 이때 선거는 지금의 보통 선거는 아니었다. '1년 이상 일본 본토에 거주하고 15엔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내는 25세 이상의 남성'만이 선거권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전체 인구의 1.13%에 불과했다.[4] 현 마이니치 신문.[5] 자유당계 대의원들이 헌정당 해산안을 날치기시키고 곧바로 자유당계를 지도부로 해 새 헌정당을 결성했다.[A] 소선거구제. 2인 선출 선거구.[B] 대선거구제. 7인 선출 선거구[C] 소선거구제. 1인 선출 선거구.[D] 중선거구제. 4인 선출 선거구.[10]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전체 당선자의 81.8%가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은 후보들로 구성되었지만, 오자키 유키오는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았다.[E] 대선거구제. 9인 선출 선거구.[D] 중선거구제. 4인 선출 선거구.[13] 정계은퇴. 이후 중의원의원 재임기간이 50년이 넘었다고 하는 이유로 중의원 명예의원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