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 아키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2000 | 2002 | 2008 |
아시아시리즈 우승반지 | |
2008 |
1993~199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잭 하웰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레오 고메스 (주니치 드래곤즈) |
199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레오 고메스 (주니치 드래곤즈) | →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레오 고메스 (주니치 드래곤즈) |
2000, 200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레오 고메스 (주니치 드래곤즈) | → | 에토 아키라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이와무라 아키노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
199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신도 타츠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3, 1995년 센트럴 리그 최다 홈런 |
1995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타점 |
1996년 센트럴 리그 최고 출루율 |
2000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타점[1]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51번 | ||||
오타 타츠오 (1983~1988) | → | <colbgcolor=#b30000> 에토 아키라 (1989) | → | 마에다 토모노리 (1990~1991) |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33번 | ||||
카와바타 준 (1985~1989) | → | 에토 아키라 (1990~1999) | → | 제프 볼 (2000)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33번}}} | ||||
나가시마 시게오 (1993~1999) | → | 에토 아키라 (2000~2005) | → | 이승엽 (2006) |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33번}}} | ||||
타마노 히로마사 (2000~2004) | → | 에토 아키라 (2006~2009) | → | 호시 히데카즈 (2010~2013)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0번}}} | ||||
나이토 시게토 (2007~2009) | → | 에토 아키라 (2010~2017) | → | 키무라 류지 (2018)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7번}}} | ||||
사이토 마사키 (2016~2017) | → | 에토 아키라 (2018) | → | 모토키 다이스케 (2019~) |
에토 아키라 江藤智 | Akira Eto | |
생년월일 | 1970년 4월 15일 ([age(1970-04-15)]세) |
국적 | 일본 |
출신지 | 도쿄도 히가시야마토시 |
학력 | 간토 고교 (도쿄)[2] |
신체 | 182cm, 95kg, A형 |
포지션 | 3루수, 1루수,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8년 드래프트 5라운드 (히로시마)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9~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2005)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6~2009)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육성담당코치 (2010)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2)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3)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4~2015)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6~2017)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감독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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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고교 통산 61개의 홈런을 때렸다. 투수와 포수를 겸직했지만 타력이 좋은 포수[3]로 스카우트들에게 알려졌다. 1988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의 5순위 지명을 받았고 입단 당시의 등번호는 51번이었다.[4]신인이던 1989년에는 1군에서 뛰지 않았다. 1989년 말에 33번으로 배번호를 변경했다. 1990년에 1군 무대를 밟았으며 우익수 또는 1루수로 38경기에 출장해 5개의 홈런을 날렸다.
80년대를 대표하던 주전 포수 타츠카와 미츠오가 91년에도 안방을 지키자 후보 내야수로 주로 뛰었고 11홈런을 때렸다. 1993년 주전으로 발돋움한 그는 34홈런을 치며 첫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베스트나인에 선정됐다. 1994년에는 동료 마에다 토모노리와 똑같은 타율 .321을 기록했다. 1995년 2번째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6년에는 32개의 아치를 그렸다.
1999년 시즌을 끝으로 히로시마를 떠나 FA권을 행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2000년에는 정규시즌에서 32홈런 91타점을 기록했고 2000년 일본시리즈에서는 4,5차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2006년 1월 5일에는 요미우리가 구원 투수 도요다 기요시를 영입할 때 세이부에 보상선수로 지명되는 신세가 됐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FA이적'과 '다른선수의 FA이적과 관련된 보상선수로서의 이적'을 모두 경험한 선수가 됐다.
세이부에서는 팀내 고참으로서 젊은 선수들을 리드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