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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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28대 우정대신 | |
일본국 34·36대 통상산업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4-40대 중의원 의원 고모토 토시오 河本敏夫 | Komoto Toshio | |
출생 | 1911년 6월 22일 |
효고현 아코군 아이오이촌 (현 효고현 아이오이시) | |
사망 | 2001년 5월 24일 (향년 89세) |
도쿄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대학 병원 | |
학력 | 구제 류노 중학교 (졸업) 히메지 고등학교 (졸업) 니혼대학 법학부 (법문학 / 학사) |
정당 | |
파벌 | 번촌정책연구소 |
의원 선수 | 17 (중) |
의원 대수 |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지역구 | 舊 효고 4구 |
악력 | 산코기선 대표이사 17선 중의원 의원 (제25-40대 / 舊 효고현 제4구)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경제기획 정무차관 우정대신 통상산업대신 경제기획청 장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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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기업인, 정치인. 세계 굴지의 해운사였던 산코기선(三光汽船)을 창업하고 이를 배경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한때 총리의 물망에 까지 올랐으나 회사가 부도나며[1]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잃었다.2. 생애
1911년 6월 22일 효고현 아코군 아이오이촌에서 태어났다. 구제 타츠노 중학교를 거쳐 히메지 고등학교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당시 일본군의 전쟁 반대 운동에 참가하여, 1930년 고등학교에서 퇴학처분 당했다. 이후 탄광 노동자와 직공 노동자로 일하다 독학으로 니혼대학 법학부에 합격하였다. 재학 중 그의 형제들과 산코기선을 설립하여 이사가 되었고 1937년부터 대표이사직에 올랐다.1947년 일본민주당 소속으로 구 효고 4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국민민주당과 개진당을 거쳐 1954년 일본민주당에 합류했고, 1955년 자민당 창당시 참여했다.
1958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경제기획정무차관을 지냈고 1968년 기시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우정대신에 임명되면서 첫 입각에 성공한다. 정계에서는 미키 다케오의 측근으로 번촌정책연구소(미키파)의 자금 조달역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본격적인 스포라이트를 받은것은 미키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하고 난 후였다.[2]
1976년 미키 다케오를 총리에서 끌어내리는 "미키 내림(三木降ろし)"이 발생하자, 고모토는 미키파의 중진으로서 미키파의 이당이나 야당 제휴,[3] 신당 결성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판국에서 선거 자금을 모으는 한편, 각료를 파면해도 강행으로 중의원을 해산하도록 미키에게 진언했다.[4]
미키 내각의 뒤를 이은 후쿠다 내각에서도 통상산업대신으로 임명, 이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두 차례 맡으면서 자민당 굴지의 정책통·경제통으로 알려져 미키에게 비판적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와 고토다 마사하루에게 인정 받는 등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켰다. 그리고 스즈키 내각과 나카소네 내각 에서는 경제기획청 장관을 역임했다.
1970년대 일본 정계를 좌지우지 하던 삼각대복중의 후계자 중 한명으로 점쳐지던 고모토는 총재선때마다 소규모 파벌임에도 불구하고 자금과 인맥을 동원해 상당한 표를 끌어모았다. 고모토가 처음 총재선에 출마한것은 1978년으로, 이 당시는 미키가 파벌 회장에서 물러난 뒤 파벌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던 시기여서 차기 총재를 노리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때는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했고, 오히라가 2년뒤인 1980년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급사하자 후계 총재 후보 중 한명으로 거론됐지만 결국 오히라파인 스즈키 젠코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번촌정책연구소는 한차례 해산을 거친뒤 구 미키파의 의원들을 끌어모아 신 고모토파로 개편을 단행했다.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친 이유는 고모토가 미키의 후계자로 인식돼 고모토가 총재에 취임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미키의 의도 때문이었다. 1982년 총재선때도 그는 강력한 후계 총재 후보로 꼽혔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밀려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고 리타이어했다.
1984년 미국-일본 무역 갈등이 심화하자 그해 11월 대외경제문제·민간활력도입담당상이 되었고 이때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을 겸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5년 자신이 오너로 있던 산코기선이 해운 업계 불황으로 인해 도산하며 정치인으로서의 고모토에 대한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고, 결국 책임을 지고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을 사임해야 했다.
1989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해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물러나고 후임 총리인 우노 소스케도 본인의 스캔들과 참의원 선거 참패로 인해 물러나자 고모토가 총리직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당시 자민당의 거물인 다케시타 전 총리와 가네마루 신 의원은 젊고 개혁적인 인물이 당권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고, 고모토파의 2인자인 가이후 도시키가 새 대안으로 부상했다. 고모토는 신예인 가이후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구를 하며 총재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5]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구성될 중의원에서 중의원 의장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이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바람에 이 구상은 무위로 돌아갔다. 1996년 건강 상의 이유로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고, 자신의 고향이자 지역기반인 아이오이시가 포함된 효고현 제12구는 당시 참의원 의원이던 3남 고모토 사부로가 물려받았다.
정계를 은퇴한 뒤에도 번촌정책연구소의 명예회장을 지내는 등 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다가 2001년 5월 24일 심부전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서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7 - 1950 | 입당 정계 입문 |
1950 - 1952 | 합당 | |
개진당 | 1952 - 1954 | 합당 |
| 1954 - 1955 | 창당 |
| 1955 - 2001 | 합당[6] 별세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효고 4구 | | 72,280 (23.0%) | 당선 (1위) | 초선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개진당 | 47,882 (15.9%) | 당선 (2위) | 재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5,486 (15.6%) | 당선 (4위) | 3선 | ||
1952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59,119 (20.0%) | 당선 (3위) | 4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2,280 (23.0%) | 당선 (1위) | 5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5,170 (18.0%) | 당선 (3위) | 6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0,977 (18.5%) | 당선 (2위) | 7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1,173 (18.0%) | 8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0,017 (20.5%) | 당선 (1위) | 9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6,871 (19.4%) | 10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0,389 (20.7%) | 11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5,802 (24.4%) | 12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6,474 (25.6%) | 13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2,085 (23.8%) | 14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5,593 (20.9%) | 당선 (2위) | 15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8,460 (18.4%) | 당선 (3위) | 16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743 (15.4%) | 17선[7] |
5. 평가
자민당 인사 중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에 참여한 매우 드문 이력을 갖고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결국 자민당 내에서도 이단파벌로 불리운 소수, 중도파벌인 미키파에 가입해서 활동한다. 다양한 이력을 바탕으로 여러 내각에서 장관직을 수행했고 평가도 좋았으나, 결국 총리직까지는 못 오른것은 소수파벌 출신이라는 약점 이외에도 자민당 내에서 유독 튀는 배경이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6. 여담
- 자신의 고향인 아이오이시에 위치한 아이오이역이 히메지역과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산요 신칸센 정차역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핌피정치 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사실은 유사시 아이오이 ~ 히메지 ~ 니시아카시역 간의 단선 운행이 예정된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에 따른 용도로 인해 신칸센 정차역으로 결정된 것이다.
[1] 50여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포함하는 그룹 전체의 부채 총액이 1조엔에 달하여 전후 최대 규모였다.[2] 고모토는 통상산업대신 재직 시절 대형공업기술연구개발제도를 입안한 미키의 영향을 받아 1973년 석유 파동에 대응하기 위해 산업 구조 전환의 촉진과 문라이트 계획(에너지 절약 기술 연구개발)을 추진했다.[3] 주로 자민당과 성향이 비슷했던 민사당과의 제휴가 이루어졌다.[4] 그러나 미키는 반대파의 눈치만 계속 살피다 중의원 해산을 하지 못한채로 국회가 산회된 시점에서 1976년 34회 중의원 선거가 치러졌으며, 민심과 당심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한 자민당은 결국 참패했다.[5] 이때 고모토의 불출마 소식을 들은 측근 오시마 다다모리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6] 자유당과의 신설 합당[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민주당(1954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11년 출생
- 2001년 사망
- 아이오이시 출신 인물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니혼대학 출신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일본 우정대신
- 일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종2위
- 욱일대수장
- 기업인 출신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