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9:25:34

오마르 알바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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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7229><colcolor=#fff>
수단 공화국 제7대 대통령
오마르 하산 아흐마드 알바시르
Omar Hassan Ahmad al-Bashir
عمر حسن أحمد البشير
파일:800px-Omar_al-Bashir,_12th_AU_Summit,_090202-N-0506A-137.jpg
출생 1944년 1월 1일 ([age(1944-01-01)]세)
앵글로-이집트 수단 호시 반나가
재임기간 제7대 대통령
1993년 10월 16일 ~ 2019년 4월 11일
국적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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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7229><colcolor=#fff> 학력 이집트 육군사관학교 (학사) (1960년 입학)
수단 국방대학교 (졸업) (-1967년)
종교 이슬람교
근무 이집트 육군, 수단 육군
복무 기간 1960년 - 2019년
최종 계급 원수
소속 정당 [[국민회의|
국민회의
]]
약력 국가구원혁명평의회 의장
제7대 수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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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집권 이전2.2. 쿠데타2.3. 대통령 집권 이후
2.3.1. 무자비한 샤리아 폭정2.3.2. 학살2.3.3. 국제 테러리스트 단체 지원
2.4. 몰락2.5. 2023년 수단 내전
3. 평가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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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masahaa-2023-04-23_21-23-25_303225.jpg
“우리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단 국민을 그들에게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2009년에 자신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나오자 다르푸르에 가서한 말 #
“이 나라를 위해서 새로운 피와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다.”
2015년 대선을 앞두고 한 말.[1]

수단 공화국의 7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수단을 최악의 파탄국가들로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아프리카에 욕 많이 들어먹는 독재자들이 참 많지만 이 사람은 그중애서도 평가가 최악급이라고 할 정도로 독보적인 인물이다.[2]

2019년에 대규모 시위 이후 군부 세력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30년만에 축출됐다. 그가 축출된 후 군부가 차후 2년 동안의 군정을 예고하여 민정을 기대했던 수단 시위대 내에서 불과 몇시간 만에 불만이 터져나왔는데 이 때문에 수단에서는 군부가 수단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부의 새 지도자가 된 이븐 아우프가 바시르의 사촌이기 때문에 사형까지 가진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 편이었다가 이븐 아우프 본인이 이 점을 의식해서 하루 만에 사퇴하는 바람에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었다.

2. 일생

2.1. 집권 이전

1944년 1월 1일하르툼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호쉬 반나가(Hosh Bannaga)라는 마을에서 소규모 낙농업자의 12명의 자식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교육을 그곳에서 마친 그는 하르툼으로 상경하여 중등교육을 마치고 사촌 파티마 할리드(Fatima Khalid)와 결혼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아내인 와이다드 바비커 오마르(Widad Babiker Omer)와 결혼하였으나[3] 두 부인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1960년 수단군에 입대하였고 1966년 이집트 사관학교로 유학을 갔다 오고 수단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 덕분에 공수대원으로 계급이 빨리 올랐고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수단 서부 사령부에 있었다.

1969년 공수부대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알바쉬르에 있는 이집트군에서 복무하였고 1975년 아랍에미리트의 군사 고문으로 재직해 있었고 대령으로 돌아왔을 때인 1981년에 기갑 낙하산 여단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하여 1987년에는 제8보병여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2. 쿠데타

파일:external/www.theinsider.ug/bas.jpg

수단 공화국의 전임 총리이었던 아메드 알미르가니(Ahmed al-Mirghani, 1942~2008)는 1989년 3월 NIF를 제외한 정당연합의 거국내각을 성립시키고 6월 30일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수단인민해방군측과 국민헌법회의 개최, 외국과의 군사동맹 폐기, 이슬람법 적용범위 축소 등에 합의하고 남부와의 협상을 각의에서 통과시킬 예정이었지만 남부 협상에 불만을 가진 국가 이슬람 전선(NIF)이 주동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오마르 알바시르 준장은 1989년 6월 30일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하르툼에 무혈입성하여 아메드 알미르가니 대통령을 축출하였다.

그는 쿠데타 후 구국혁명사령부(RCCNS) 의장을 역임함과 동시에 총리, 국군 총사령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며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켰으며 독립적인 신문을 금지시키고 주요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을 투옥하는 등 언론을 통제했다. RCCNS 구성원 14명은 모두 이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이었으며 이들은 행정 권한은 물론 입법 권한도 행사했다.

1990년에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으나 실패했고 1991년 1월 1일부터 남부 3개 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샤리아가 시행되면서 대통령 중심 연방제와 이슬람 슈라(Shura) 원칙에 따른 인민의회제 등 새로운 정치제도가 채택되고 사법은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민사, 형사 모두 샤리아를 적용시켰다.

혁명위원회는 1993년 10월 16일에 열린 특별회의에서 자진해체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를 혁명위원장 겸 수상을 대통령에 임명시켰다. 쿠데타 배후 세력인 NIF는 정재계, 사법부, 군부, 언론계, 학계 등 요직을 독점하여 수단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NIF는 세력을 확대하여 정통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이에 반대파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등을 탄압했으며 장기적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조치를 강화했다.

2.3. 대통령 집권 이후

파일:external/jamestown.org/Omar_al-Bashir.jpg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1996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75.68%의 득표율로 임기 5년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에 국회의장 하산 알 투라비[4]와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대통령위원회는 새 헌법과 정당의 수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1999년 1월 그는 정치결사법을 발효시켜 1989년 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당활동을 허용하는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 듯 했지만 그해 12월 알 투라비 국회의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불리해진 알 바시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1999년 12월 12일에 자신의 부대와 탱크를 몰고 가 반대하던 하산 알 투라비와 의회를 축출해 해산시켰고 모두 자신들의 지지자들로 갈아치워 버렸다.

2000년 5월 집권 국민회의(NC, National Congress) 사무총장인 알 투라비의 권한을 정지시키는 법령이 발효되자 알 투라비는 그해 6월 지지세력과 함께 신당(PNC, Popular National Congress)을 창당했다. 2000년 12월 그는 비상사태하에 주요 반정부세력들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대선에서 86.5%의 지지율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총선에서는 4년 임기 국회의원 총 360명을 선출했는데 이 가운데 350석이 NC 소속이었다.

2005-2010년에는 그가 소속된 정당과 SPLA(수단 인민 해방군)과의 종전을 선언하고 전력 분담에 합의를 보았다.

10년 만에 열린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68.24%의 지지율로 다시 수단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는 부패, 폭력, 협박 등에 의한 지지율이었으며 UN 관계자들은 그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금한다고 비판하였다.

다만 그가 아주 무능한 독재자였던 것은 아닌데 수단에 매장된 석유를 수출해 수단의 경제 성장을 촉진시켰으나 적도 기니와 마찬가지로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못했다. 특히 2011년 석유가 집중된 남수단이 독립한 후 재정 문제를 겪던 수단 정부가 2013년 9월 23일 연료 및 요리용 가스 보조금을 삭감해 경유 가격을 갤런당 8수단파운드(약 1,950원)에서 14파운드로 인상하면서 공공 교통비는 26%가 올랐고 생필품 등의 물가도 폭등했는데 이에 항의한 수단 국민들이 2013년 9월 23일~10월 4일경까지 정권 타도를 요구하며 수단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일으켰다. 수단 정부는 시위대를 최루탄, 몽둥이는 물론이고 실탄을 동원해 강경진압해서 200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2,000여명이 체포됐다.

시위대는 시체를 들고 장례식을 했는데 하르툼 부리 지구에서는 전날 시위 중에 총에 맞아 숨진 살라 무다티르 산후리(26)를 추모하기 위해 3000여명이 모여 시신을 실은 구급차를 호위하며 “자유, 자유”, “살인자 바시르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수단군과 경찰이 장례식을 치르고 행진하던 시위대를 향해 다시 총을 난사하여 또다시 사람들이 사망했다. 수단 정부는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33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의료단체는 200명 정도로 집계했다고 알자지라가 보도했다. 자료

2014년 5월 18일에는 총리 출신의 야권 지도자 샤디크 알마흐디를 반역죄로 전격 체포했다. 알마흐디는 재판에 넘겨지면 최고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전해졌다.

2015년 대선에서도 야권 주요 후보들의 보이콧 속에서 94.1%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선거감시단은 투표 기간을 하루 연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저조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영국, 노르웨이 등의 국가들은 선거의 정당성 및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수단의 시민활동가들은 26년째 통치중인 바시르 대통령의 집권연장에 항의하는 뜻이라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은 투표거부 뿐이라고 주장하며 투표에 참가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며 TV를 보든 어디든 온통 알 바시르 대통령뿐이며 다른 후보들은 누가 나왔는지 그들의 공약이 무엇인지도 알 수도 없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수단 방송은 모두 정부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선거운동기 간에도 그에 대해서맠 방영했다. 그래서 투표결과가 뻔하다며 투표하러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거기에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에 따르면 그는 막대한 금액을 해외로 빼돌렸는데 이들 중 한화로 약 10조 원에 달하는 무려 90억 달러가 런던 은행에 숨겨져 있었다고 하며 정황상 전쟁을 하면서 병사들이 약탈한 자금일 것이라는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2.3.1. 무자비한 샤리아 폭정

수단을 엄격한 샤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

1989년 쿠데타 직후 그는 수단의 어느 집회에서 한 손에는 쿠란, 다른 한 손에는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을 들고 연설했는데 그 내용이 "나는 우리 내부에 있는 배반자들과 돈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숙청하겠다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한다. 이들은 국민의 적이자 군대의 적이다. 국가를 배신한 사람은 삶의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였다.

그는 이 연설대로 행정기관, 군대, 사법부, 대학, 노동조합, 전문직협회, 준국영기관 등 모든 기관을 상대로 단계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카트미야와 인사르 운동 등 저명한 이슬람 분파의 활동은 금지되었으며 소유물과 자산 사원과 성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활동은 차단되거나 억압당했고 그 다음엔 무자비한 언론탄압이 시작되었고 수백 명의 정치인, 언론인, 박사, 노동조합원이 재판 없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수단 정부는 부인하는 이른바 "유령의 집"으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는데 1994년 국제연합 인권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에 감금된 사람들은 자백을 강요당하며 불고문과 구타, 전기 고문, 그리고 무자비한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1991년 발표된 새로운 이슬람 형법에 따라서 무장강도를 한 사람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간통죄를 범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고 배교자는 살해하였다. 하르툼 당국은 음악과 춤 결혼식을 제한하고 남녀가 함께 섞여서 춤추는 것을 금지하는 공공질서 법령을 시행했는데 이에 따라 경찰은 이 법령을 위반한다며 음악회와 결혼식 피로연을 해산시켰다. 여성들은 공공생활을 전혀 누릴 수 없었으며 1991년 발표된 대통령령에 따라 활동이 제한되었고 국가이슬람전선 소속 기관인 "도덕의 수호자 및 선의 옹호자"가 부과한 엄격한 옷차림만이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다.

1996년에는 대중교통과 극장, 영화관, 잔치, 소풍 등 공개된 자리에서 남녀가 합석하는 행위, 이슬람 신자로서 이성을 마주보는 행위, 남녀가 운동하는 여성을 지켜보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을 실시했다. 한마디로 종교는 억압의 수단이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교육계에서 아랍어 사용을 강요하고 비아랍권의 문화를 격하시키는 이른바 "아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수단에서는 기독교 박해가 매우 심각하며 전세계에서 6위를 기록한 기독교 탄압 국가다. 수단은 2014년 W.W.L.(World Watch List, 기독교박해지수)에서 11위에 올랐으며 미국 국무부는 수단을 기독교 및 인권침해국가로 특별 지정하고 있다.

다른 종교인들이 이유 없이 구금되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수단 정부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목사가 감옥에 갇혀 돌에 맞고 폭행을 당했다. 수단 법원은 2014년 5월 15일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임산부 마리암 이브라힘에 ‘종교 배반’과 ‘신앙심 포기’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강력한 샤리아 법을 적용했다. 무슬림이 개종할 경우 범죄로 규정해 사형에 처할 수 있으며 여성이 타 종교를 믿는 남성과 결혼하면 간통 혐의로 처벌할 수도 있다. 수단 종교부는 2013년 4월 이후 새로운 교회의 구성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고 교회 건축도 불허하고 있다.

2014년 12월 2일에는 수도 하르툼에 있는 바흐리복음주의교회가 무장 경찰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수단 경찰들이 교회 재산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면서 교회 부지를 포위한 채 이를 거부하는 약 40명의 성도들을 폭행하고 체포하였으며 교회를 파괴했다. 2014년 11월 17일에 처음으로 이 교회에 대한 경찰의 단속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에 경찰은 몇몇 가정집과 교회 벽을 불도저로 무너뜨렸으며 목회자의 집과 청소년 센터로 사용하던 건물도 파괴했다. 기사

기독교로 개종한 임산부를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 100대와 이어서 교수형을 선고했다. 같은 달 23일 이 여자는 달수도 채우지 못한 딸 마야를 교도소 안에서 출산했는데 심지어 쇠사슬에 손목이 묶인 채 출산을 했다고 한다. 이에 전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빗발쳤고 이 여자는 딸과 함께 어찌저찌 풀려나긴 했다.

이렇듯 알바시르 치하 수단에서는 샤리아가 무자비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무장 강도의 손과 발 하나씩 절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수단에서는 술을 마셨다고, 복장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그 외에도 별의별 황당한 이유에 대한 형벌로 태형을 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여성 언론인이자 유엔 직원 루브나 아흐메드 후세인도 ‘음란하게’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다른 여성 10명과 함께 현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을 정도다. 수단의 젊은 여성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돌팔매질에 의한 사형 선고를 받게 하는 막장짓도 일어났으며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을 학생들이 곰 인형의 별명으로 쓰도록 허락했다는 혐의로 실형이 선고된 사례도 있을 정도로 수단에서는 샤리아에 의한 독재와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5]

2.3.2. 학살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181065599.jpg
수단 내전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들 중 유명한 사진. 1993년 2월 남수단 아요드 지방에서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찍은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 보도사진부문을 받은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독수리'라는 사진이다.[6]

그는 사실상 제2차 수단 내전을 복잡하게 만든 원흉이며 수단 내전을 처참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이 내전으로 무려 19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 400만 명의 수단인들이 난민이 되어 사막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녔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더불어 이란의 이슬람 혁명 수비대를 본떠서 이슬람 민병대인 국민방위군(PDF)을 조직했다. 공무원과 교사, 학생 그리고 고등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은 국민방위군 입소 훈련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정부는 거리에서 젊은이들을 잡아서 훈련소로 끌고 갔는데 이렇게 끌려가 모집된 국민방위군의 수는 약 1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은 북부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시위를 진압하는 역할로 투입되었으며 남부 반군과의 교전에도 투입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학살을 강요받아서 정신적으로 충격받아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혹행위와 구타로 인해 사망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수단 정부는 이렇게 국민방위군이 벌이는 전쟁을 지하드, 즉 모든 무슬림이 마땅히 지켜야 할 신성한 의무라도 주장했다. 그는 남부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자신들의 피로 남부를 적셔서 그곳에서 존엄과 명예가 싹터오르게 하는 순교자"라고 말했다.

수단에서는 내전 기간 동안 무슬림 정부군들이 종교적 광신에 휩싸여 대부분 흑인들인 비이슬람 아프리카 토착 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을을 무차별로 폭격하고 방화, 약탈, 민간인 살인, 납치, 강간 등을 저지르고 비무슬림 민간인들을 납치하고 구금했다. 이러한 종교 청소가 대놓고 벌어졌는데도 수단 정부와 이슬람권에서는 "서구 사람들도 '옛날에는' 학살을 벌였다"는 식으로 어처구니 없는 뻔뻔한 물타기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다르푸르 학살로 흑인 무슬림까지 죽이는 일이 벌어져 이슬람권에서도 "같은 무슬림을 죽이다니 뭔 짓이냐?"는 비난이 나왔으며 리비아무아마르 카다피도 "나도 국제적으로 욕 먹지만 적어도 바시르 얼간이처럼 같은 무슬림을 학살하지는 않았다"라고 비꼬았을 정도였다.

이러한 학살은 제2차 수단 내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2003년에는 그가 기소되기까지 한 이유인 다르푸르 학살이 터지면서 그 악명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8월에 미국의 수단 연구가 에릭 리브스(Eric Reeves, 1950~)가 추산한 사망자 수만 해도 무려 50만 명이 넘는다.[7]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렇게 내전과 학살이 일어나는 곳에서 당연히 기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 이러한 참상으로 5세 이하 수단 어린이의 38% 가량인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극심한 낙후지역인 수단 동부는 수단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가운데 산모의 조기 수유중단과 위생불결에 의한 어린이 설사 대유행 등으로 영양실조가 만연한 것으로 확인된다.

2003년부터 학살이 벌어진 지역이 수단 서부인데 왜 낙후지역으로는 수단 동부가 거론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실제로 세계 여러 비정부기구들에서는 다르푸르 학살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수단 서부 지역에 대한 경제적 약탈의 성격을 가지고 저질러졌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지역 간의 경제 불균형 문제를 낙후지역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풀지 않고 보다 부유한 지역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풀려고 한 것이다. 이 정도이니 그 카다피한테도 이놈은 그냥 얼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2008년 6월에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파렴치하게도 '다르푸르에서 사망한 사람은 1만 명 이하다'라고 축소해 말했으며# 동년 7월에도 국영 TV에서 "누구든지 다르푸르를 방문하고 관리들을 만나 그들의 민족과 부족을 발견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2016년에도 옥스팜 등의 해외 구호단체들을 쫓아내고 이들을 "인도주의 활동 예산의 99%를 스스로 가져가 다르푸르 사람들에게 1%를 주는 도둑이자 외국 정권의 활동에 개입한 스파이"라고 폄하했다. #

사실 그의 학살은 집권 극초기에도 행해졌으며 다르푸르 학살은 어떻게 보면 그동안 행해 오던 학살이 엄청나게 커진 규모로 행해진 것이다. 1990년 7월 1일에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기도 했다.
제노사이드는 우리 언어에서 가장 추악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의도적으로 인구를 줄이려는 시도는 아돌프 히틀러, 폴 포트이디 아민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독재자 3명(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소말리아시아드 바레)을 위해 이 대량 살인범 갤러리에 곧 새 자리를 예약해야 합니다.

세 나라의 굶주린 대중을 먹여살리는 데 당연히 집착하는 국제 사회는 아프리카의 뿔 세 나라 정부를 너무 강력하게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비판을 받으면 구호 공급관이 폐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살인은 조용히 계속됩니다.

이러한 지역 인구 감소 정책의 근거는 인종주의와 종교적 불관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사악합니다. 사용된 전술은 끔찍합니다.

수단에서는 인종과 종교가 모두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칩니다. 딩카족푸르족이라는 두 특정 민족이 바시르 장군의 정권에 의해 멸족 대상이 되었습니다. 두 그룹의 상황은 다르지만 두 그룹 간의 공통 주제는 둘 다 비 아랍인이며 바시르와 같은 반동이 그의 백성 - 근본주의 이슬람 아랍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근본주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만큼 충분히 큰 그룹이라는 것입니다.

딩카족은 실제로 1980년대 중반부터 정부 정책으로부터 도피해 왔습니다. 딩카족은 1983년부터 연이어 정부에 맞서 싸우는 무장 야당인 수단 인민 해방군(SPLA)의 중추를 형성합니다. 바시르 장군은 이전 정부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확장했으며, 특정 아랍 민족을 무장시켜 딩카족 마을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딩카 지역의 인구를 줄이기 위한 수단 정부의 캠페인의 또 다른 도구는 식량 부족입니다. 식량을 전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수단에서 제도화되었습니다. SPLA와 이전 정부가 식량 분쟁 지역으로의 이동을 허용하기로 합의한 협정은 지난 10월 바시르에 의해 폐기되었습니다. 새로운 협정은 4월 말까지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딩카 지역에 구호품을 배치할 때 다가오는 비를 이겨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정부의 기아 정책은 다양한 형태를 띠며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1988년 이후로 200,000명이 넘는 딩카족이 굶주림이나 민병대 때문에 사망했습니다.

수단 정부가 제거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인종 그룹은 리비아와 차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서부 지역의 아프리카 털족입니다. 푸르족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일한 비아랍인이며, 리비아와 수단 정부는 모두 이 지역을 아랍인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수단 정부가 무장한 아랍 민병대는 푸르족과 초토화 전쟁을 벌이며 마을을 불태우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정부군은 최근 아랍 민병대 편에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지난 3년 동안 수천 명의 모피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이하 생략)[8]
아프리카의 뿔에서의 학살

2.3.3. 국제 테러리스트 단체 지원

수단 정부는 이른바 지하드를 주장하며 전세계적으로 지하드를 하는 단체들을 후원했는데 1991년 말까지 1000명의 이집트 반란군을 맞아들였으며 아부 니달 등 팔레스타인 지도자들도 매우 반갑게 맞아들였다. 카를로스 자칼이라고 불리는 악명높은 테러리스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도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보호를 거부당한 뒤 수단에서 잠시 보호를 받았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심지어 국제테러리스트로 지명된 오사마 빈 라덴에게 5년간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빈라덴의 후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도 알카에다에 들어가기 전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를 이끌 때 알바시르의 도움을 받아 수단에 숨어 지내던 적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단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불량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집트 의회 대변인 살해사건의 범인이 수단에서 암살 훈련을 받았다는 자들이라며 수단을 비난했고 튀니지는 알투라비와 수단의 장부 관료가 튀니지 반정부 활동가와 공모하여 튀니지 대통령의 암살을 위해 무기를 밀반입했다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싸우다가 퇴역한 알제리인들은 수단에서 훈련을 받은 후 알제리로 돌아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수단에서 훈련받은 리비아인들은 1993년 카다피의 암살을 시도했다.

1995년에는 리비아에서 반군 공격을 시작했다. 수단에서 훈련을 받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조직원들은 가자 자구에서 이스라엘 민간인이 탄 버스를 대상으로 한 자살 폭탄 테러를 실시했다. 수단은 소말리아의 아이드 민병대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이슬람 무장투쟁 단체를 후원했다.

그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에 관여했으며 이 사건과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수단인이었고 공모자들을 도와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 중에는 수단 출신 국제연합 외교관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세계무역센터 폭파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뉴욕의 주요 건물 폭파를 포함하여 반미 도시 테러 전쟁을 벌이자는 선동 모의를 한 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국무부는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였다.

수단의 테러 활동 개입은 1995년 6월 호스니 무바라크에 대한 암살 시도로 절정에 달했다. 무바라크는 아프리카통일기구 정상회담 참여를 위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던 중 테러를 당했다. 용의자들은 수단의 "안전한 농장"에서 암살 작전 준비를 마치고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어온 이집트인들이였다. 범인들은 체포되었지만 3명은 수단으로 도망갔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수단이 이 공격을 조직했다고 비난했는데 수단 정보 기관이 개입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에 호스니 무바라크는 격분해서 하산 알 투라비[9]와 그를 두고 "폭력배, 범죄인, 정신 나간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에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입하여 수단에 여러가지 제제를 가한 후 달아난 이집트인 세 명을 에티오피아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렇듯 수단이 테러 행위를 지원한 것이 드러나 이웃 정부들에게 욕을 먹고 왕따 신세가 되었으며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아 가뜩이나 안 좋은 수단의 경제는 추락하고 말았다. 테러지원 중단을 끝까지 거부하자 단단히 빡친 미국이 보낸 미 공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개털리자 무서워서 바로 요구를 받아들이며 테러지원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테러를 후원하던 수단의 정부 기구가 사라졌고 외국 전투원들도 수단에서 전부 추방되었다. 특히 이렇게 해서 나간 사람 중에는 오사마 빈 라덴도 있었다. 그와 절친한 사이인 알 투라비의 말에 의하면 빈 라덴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수단을 떠났다고 한다. 아이만 알자와히리 역시 수단 정보부와 관계가 틀어져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 조직원들과 함께 단체로 쫓겨났고, 이후 그는 빈 라덴에게 의탁했다가 조직을 알카에다와 함친 후 빈라덴을 이은 알카에다의 수괴가 된다.

물론 이후에도 테러 단체 몇몇은 몰래 지원했다. 대표적으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지원하기도 했고 한때 세계 최악의 전범으로 꼽히던 우간다의 도살자 조지프 코니가 이끄는 신의 저항군(LRA)을 지원했는데 이 전범을 지원하는 이유는 우간다의 독재자 요웨리 무세베니가 그가 남수단을 점령하고 나면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우간다가 여러모로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남수단 반군들에게 무기를 지원하자 그가 요웨리 무세베니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참고로 코니는 2005년에 그가 이끌던 LRA가 우간다에서 추방되자 알바시르의 지원을 받아 다르푸르 지역으로 도피한 후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로 철저히 은거 생활을 하며 그의 몰락 후인 2022년에도 많아야 1천 명의 소규모 반군으로 전락한 LRA 병사들에게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는 중이라고 한다.[10]

물론 조지프 코니가 오만 막행을 저지르자 미국 측에선 정반대로 요웨리 무세베니를 지원했다. 정말 우스운 사실은 기독교도들을 학살하던 그가 기독교인인 조지프 코니를 지원한 탓에 아랍권 무슬림 중에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점이다. 사실 신의 저항군 지원도 그렇고 이 학살자의 독실한 무슬림 행세는 무바라크 치하 이집트나 아사드 치하 시리아 같이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이 자신의 정권과 유리된 개별 야권 세력으로 자라는 가능성을 정권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시도란 분석이 주류다.

2.4. 몰락

2019년 4월 11일에 수단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군부는 그를 축출했다고 정식으로 밝혔다. # 군부는 그의 형제 2명도 체포했다. # 그러나 민간 시위대 측에서는 "바시르 개인이 죽어 없어지는 거나 보려고 거리로 나선 게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민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수단 군부가 그의 집에서 거액의 현금이 든 가방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 이후 수단의 현역 판사들까지 민간 정부로의 이양을 요구하는 시위에 가세하면서 그가 권좌에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 # 결국 그가 테러 자금 혐의에 대한 검찰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이후 검찰은 그를 시위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했다.#

2019년 6월 16일에 그는 돈세탁과 거액의 외화소지혐의 등으로 검찰에 출두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수단측에 그의 신병을 인계하라고 촉구했다.# 8월 19일에 그는 법정에 출두했고 경찰조사관은 심문에서 그가 사우디로부터 9천만 달러를 받은 점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비밀금고에서 거액의 돈다발을 쌓아 놓고 뇌물 등으로 활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과도정부가 그의 소속 정당을 전면 해산시킨다고 밝혔다. # 수단 법원은 12월 14일에 그에게 2년형을 선고했다. # 단, 12월 14일의 선고는 위의 혐의들 중 가장 가벼운 혐의에 대한 결정으로 수단 공화국 현지에서는 그에 대한 재판이 모두 끝나려면 2020년 연말까지는 기다려야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8월 22일 함독 총리가 22일 전쟁범죄와 관련해 국제형사재판소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중형을 선고받을 경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최대 규모의 전범 재판이다.

10월 20일에 수단을 방문한 파투 벤수다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은 그를 비롯한 다르푸르 학살 용의자들을 더 이상 지체 없이 재판장에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

결국 2021년에 수단 공화국 정부가 그의 신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

그런데 그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사형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징벌에 처해질 경우 위에도 이미 언급되었듯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로는 최대 규모의 전범 재판이라는 의미가 있고 마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범유행 시기와 겹치기도 해서 일각에서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이름으로 (어쨌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 국가의 수장이었던) 그를 사형시키는 일이 뉴 월드 오더의 시작이지 않겠냐는 묘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그가 남수단다르푸르에서 저지른 만행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오히려 재판에서 본인을 변론할 기회라도 주어지는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의 전횡으로 이미 너무도 많은 이들의 삶이 파괴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형벌에는 사형이 없는 데다 이미 70세가 넘어 샤리아에 의거해도 사형이 불가능하다. 결국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기면 종신형 혹은 그에 준하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유기징역을 선고받아도 고령인지라 감옥에서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5. 2023년 수단 내전

2023년 수단 내전이 발발하자 신속지원군이 교도소를 습격하여 수감자들을 석방시키는 와중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일단 수단 정부군은 군병원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정부군으로 위장한 신속지원군이 탈옥시켰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2019년 수단 쿠데타에서 신속지원군과 수단 정규군이 알바시르를 쿠데타로 축출시켰기 때문에 신속지원군이 알바시르를 탈옥시켰다는 가능성은 없다. #,#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소식이 끊겨서 탈옥한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지만, 실제로는 공식 발표처럼 와다 세이드나 공군 기지의 병원에 있었으며, 2024년 9월 더 나은 치료를 위해 하르툼에서 북쪽으로 약 330km나 떨어져 있는 메로웨의 시설로 이송되었다. 심장 관련 문제는 있긴 하지만 위독한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1 #2

3. 평가

자국민 학살, 테러집단의 지원, 남수단이 분리독립하게 떨어져 나가, 수단을 완전한 파탄국가로 만든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나 그가 본격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탈냉전 시대, 즉 1990년대에는 그만큼 극악한 독재자들의 숫자가 다른 시대에 비해 월등히 적었기 때문에 그의 학정이 더욱 부각된다.

영어 위키백과사망자 수에 따른 인위적 재해 목록 문서에 따르면 그의 학정 때문에 죽은 사람만 무려 1,640,000명에 이르며 그가 축출된 2019년의 수단 인구가 43,230,000명이었으니 어림잡아 국민의 3.8%를 죽인 셈이다.[11]

그가 저지른 학살과 남수단에 대한 차별 정책 때문에 부족 단위로 싸우던 남수단인들이 살기 위해 똘똘 뭉쳐 결국 분리 독립해 영토의 1/4을 잃어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 순위 1위에서 3위로 급락했고[12] 다르푸르 학살 등 다르푸르에서도 지옥도가 펼쳐지면서 그의 몰락 후에도 취약국가지수에서 하위 10위권 내를 항상 유지하는 진정한 취약국가로 전락했는데 실제로 2005년부터 2013년까지는 취약국가지수 Top 3 안에 들기도 했다.[13] ICC가 기소한 최초의 현직 국가원수이기도 하다.[14][15]

통치 기간 동안 경제적 빈곤과 영토 상실 때문에 수단에서도 그에 대한 불만이 많은데 수단 남부에서의 불만을 폭발시켜 수단 남부가 남수단으로 이탈하게 만든 데다 영토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1902년 이래로 수단이 차지하고 있던 할라이브 지역에서 수단군이 철군하면서 이집트에게 공짜로 영토를 내어준 장본인이다. 수단과 이집트는 여러모로 사이가 나쁜 나라다. 그런데 상대국에게 영토를 내어주는 큰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자국에서의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을 더욱 깎아먹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김정일을 누르고 미국 외교 전문가들이 선정한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를 차지했으나 2008년에는 김정일에게 밀려 2위로 떨어졌고 2009년에도 2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009년 순위에서 1위는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16]였고 김정일은 3위였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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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 바시르의 간략한 생애 요약

2012년에는 "나는 가장 큰 프로젝트인 아프리카 우주국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우주국이 있어야 합니다... (아프리카 우주국은) 아프리카를 기술적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것입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아프리카에 대륙 광역 우주국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는데 사실 이는 그의 독자적인 아이디어는 아니고 2010년에 아프리카 연합이 했던 '아프리카 우주국 창설을 위한 로드맵'을 작성하는 타당성 조사를 수행하라는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한편, 실제 범아프리카 우주기구인 아프리카 연합 산하 아프리카 우주국(African Space Agency, AfSA)은 그의 몰락 이후인 2023년 1월에 창설되었다.

쿠테타로 집권한 후에 계속해서 국민들을 통제하고 독재정치와 경제난 등으로 국민들로부터 인기는 없으나 남부 반군의 약화, 반정부세력의 분열 등으로 초기 29년은 꽤나 안정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과격 이슬람화 정책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 인권 문제로 서방으로부터 원조 중단 등으로 수단의 대외적 고립이 일어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여 결국 정권이 붕괴되고 바시르 본인은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난제들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국민과의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남부 반군과의 협상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 같은 건 없었다.

수단의 언론은 1970년에 모두 국유화되었으며 수단의 언론 자유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수단에는 현재 SNBC와 Khartoum TV 등 2개의 TV 방송국이 있으며 라디오 중파방송은 5개 지역에서 방송하고 있다. 4개의 주요 아랍어 일간지와 2개의 영어 월간지는 정부의 통제하에 발행되고 있고 SUNA 통신은 관영 언론이다. 영어 일간지 카르툼 모니터(Khartoum Monitor)는 남부지역을 대변하는 신문인데 이 신문은 세 차례의 폐간과 국유화, 압류, 구금 등 탄압을 겪어왔다. 수단의 독립언론 '알 아얌'지 편집장 마흐굽 모하메드 살리흐는 "수단에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내전이 대재앙으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전 중인 시리아를 방문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 시리아 내전 이후 알아사드와 회담한 최초의 아랍권 정상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미래에 대통령직에서 쫒겨나게 됐다.

5. 관련 문서



[1] 그런데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이 씨가 되었는지 후술할 내용처럼 쿠데타로 축출되어 영원히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되었다.[2] 그와 함께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언급되는 인물은 이디 아민,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찰스 테일러 등이 있다.[3] 얼마 안 가 이혼한 후 재혼한 것은 아니고 일부다처제였다고 한다.[4] Hassan Al-Turabi, 1932~2016. NIF의 지도자로서 '왕좌 위의 권력'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현대 수단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989 수단 쿠데타의 '진정한 설계자'로 알려져 있고 수단 북부에 샤리아를 도입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5] 알바시르가 쫓겨난 후 집권한 군부에 의해 이슬람은 2020년 이후 더 이상 국교가 아니게 됐다.[6] 이 사진 때문에 케빈 카터는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다만 케빈 카터는 자살하기 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각했고 수단 내전 이전에도 세계 각지의 비슷한 사태가 터진 지역들을 다니면서 이미 PTSD에 시달렸다.[7] 물론 수단 정부는 학살 사망자 수를 1만 명, 이재민 수를 45만 명으로 축소 발표했다.[8] 기사 후반에는 멩기스투와 바레의 학살에 대해 다뤘다.[9] 오마르 알바시르와 굉장히 친한 사이로 오마르 알바시르의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인물이며 수단에 샤리아를 적용하게 만든 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0년대 들어 바시르와 사이가 틀어져 두 차례 감옥 생활을 했으며 2016년에 죽었다.[10] 다만 후술하듯 2023년에 수단에 내전이 발생하고 알바시르도 실종되면서 코니가 어떻게 될 지는 미상이다.[11] 그 이디 아민이 국민의 2 ~ 4%를 죽인 것으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시르가 어떤 지도자였는지 쉽게 알 수 있다.[12] 시아드 바레소말릴란드의 분리독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조롱받기는 하나 적어도 소말릴란드는 미승인국이라 공식적으로는 소말리아는 분열된 국가가 아닌데, 남수단은 UN 회원국에 들어간 엄연한 공식 독립국이다. 이 정도면 에리트레아 분리독립에 일조해 에티오피아내륙국으로 만든(때문에 에티오피아는 지부티의 항구를 이용해야 하는 신세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는 수준.[13] 2005/2009~2013년에는 3위, 2008년에는 2위, 2006~2007년에는 1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취약국가지수는 2005년부터 산정이 시작되었고 이전부터 취약국가지수 조사를 시작했으면 수단이 Top 3에 든 햇수는 기존의 통계보다도 더 높았을 것이다.[14] 후대의 무아마르 카다피, 블라디미르 푸틴, 베냐민 네타냐후조차 ICC로부터 체포영장만 발부된 것을 보면 알바시르가 어떤 자인지 알 만하다.[15] 알바시르의 집권기에는 수단에서 이에 관련된 발언을 했다간 최대 사형까지 선고될 수 있었다.[16] 당시 무가베는 짐바브웨 달러로 대표되는 최악의 경제파탄과 대선 과정에서의 폭력 사태로 인해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지탄받았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짐바브웨의 취약국가지수는 문자 그대로 전란 하나 없이 소말리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