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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儒教社会主義 / Confucian socialism...박노자 교수는 유교의 몸체는 죽었어도 그 영혼은 남아 서양 사회주의가 동아시아식 버전으로 자리잡는데 기여했다고 말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19세기~20세기 초반 활동했던 유교 석학들의 언행을 보면, 사회주의 이념과 유교 이상을 접목하려 한 유교 사상가도 꽤 있었습니다.
한국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의 유림 량치차오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량치차오는 자본가의 폭압이 금수(禽獸)를 능가하는 서구,미국 사회는 사회주의적 개혁이나 혁명만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그의 스승으로 량치차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중국의 마지막 대유학자 캉유웨이는 그의 저서인 대동서에서 어느 서양 철학가보다 훨씬 더 철저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그렸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대동사회는 사유재산 폐지는 물론 결혼 제도가 사라져 배우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서구의 사회주의와 유교의 인(仁) 사상을 접목시킨 캉유웨이 같은 인물은 여성차별 폐지를 과감하게 내세웠던 것입니다.
물론 량치차오는 중국이 아닌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캉유웨이의 대동서는 행동강령이 아닌 미래의 이상향을 서술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성이 결여됐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젊은 시절 두 유림의 저서를 탐독한 마오쩌둥이 중국 사회주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유교적 이상주의는 그와 같은 중국 젊은이의 마음 속에서 정의 사회 구현의 불을 지핀 셈이지요.
유교의 황혼은 곧 극동 사회주의의 여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유교의 몸체는 이미 죽었다 해도 그 영혼은 살아 있는 것이지요.
극동 사회주의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유교적 심성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는 현대 중국 학계의 거두 궈모뤄가 1925년에 쓴 '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 같습니다.
공자와 마르크스의 가상 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텍스트에서 공자가 자신의 착한 정치(仁政), 균등한 분배, 대동(大同) 이념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관념과 대동소이하다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원시 유교를 공산주의로 인정해줍니다.
이 작품은 유교가 반동 사상의 중심으로 지목돼 타파 운동의 타깃이 된 1920년대 중반에 쓰였습니다. 유교를 사회주의의 전 단계(前身)로 인정해주는 사상가들이 있었던 셈이지요.
(100년 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 10. 유교와 사회주의 - 박노자 교수)#
19세기~20세기 초반 활동했던 유교 석학들의 언행을 보면, 사회주의 이념과 유교 이상을 접목하려 한 유교 사상가도 꽤 있었습니다.
한국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의 유림 량치차오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량치차오는 자본가의 폭압이 금수(禽獸)를 능가하는 서구,미국 사회는 사회주의적 개혁이나 혁명만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그의 스승으로 량치차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중국의 마지막 대유학자 캉유웨이는 그의 저서인 대동서에서 어느 서양 철학가보다 훨씬 더 철저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그렸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대동사회는 사유재산 폐지는 물론 결혼 제도가 사라져 배우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서구의 사회주의와 유교의 인(仁) 사상을 접목시킨 캉유웨이 같은 인물은 여성차별 폐지를 과감하게 내세웠던 것입니다.
물론 량치차오는 중국이 아닌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캉유웨이의 대동서는 행동강령이 아닌 미래의 이상향을 서술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성이 결여됐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젊은 시절 두 유림의 저서를 탐독한 마오쩌둥이 중국 사회주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유교적 이상주의는 그와 같은 중국 젊은이의 마음 속에서 정의 사회 구현의 불을 지핀 셈이지요.
유교의 황혼은 곧 극동 사회주의의 여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유교의 몸체는 이미 죽었다 해도 그 영혼은 살아 있는 것이지요.
극동 사회주의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유교적 심성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는 현대 중국 학계의 거두 궈모뤄가 1925년에 쓴 '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 같습니다.
공자와 마르크스의 가상 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텍스트에서 공자가 자신의 착한 정치(仁政), 균등한 분배, 대동(大同) 이념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관념과 대동소이하다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원시 유교를 공산주의로 인정해줍니다.
이 작품은 유교가 반동 사상의 중심으로 지목돼 타파 운동의 타깃이 된 1920년대 중반에 쓰였습니다. 유교를 사회주의의 전 단계(前身)로 인정해주는 사상가들이 있었던 셈이지요.
(100년 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 10. 유교와 사회주의 - 박노자 교수)#
유교적 이념을 토대로 한 사회주의. 유교적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사실 유교 내부에서 사회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적 전통은 적지 않다.
유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많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유교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일부분 종교 성향을 띄기도 한만큼, 불교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이슬람 사회주의처럼 반정도 종교적 성향을 띈 사회주의이기도 하다. 주로 동아시아 및 인근의 중국, 베트남, 북한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2. 역사
제2세계에 속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종교나 옛 문화를 부정적으로 여겼던만큼 유교 문화 역시 동아시아의 제2세계 국가들에서는 죄악으로 여겨졌으며, 중국에서는 악명높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문화 파괴운동까지 나타났다. 중국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는 당시 주변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북한과 북베트남(훗날 통일 이후에는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 역시 유교 문화를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다.[1]그러나 오늘날 북한과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는 유교적 성향을 띄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유교 사회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은 공자학당이라는 공산당 프로파간다 기관을 전 세계에 만들어서 ‘공자’의 사상을 교육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사회주의적 행보를 보면 아이러니하지만[2] 우경화된 현 시진핑 정권의 영향, 동아시아에서의 사회주의가 유교와 연관되었던 역사를 보면 과거와 상반된 행보를 보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북한에서도 유교 이데올로기를 유래만 숨기고 수뇌부는 '이민위천', '이신작칙(자기가 남보다 먼저 실천하여 모범을 보임)'의 정신을 가졌다고 하는 식으로, 이신작칙처럼 남한에서 잘 안 쓰이는 유교 유래 용어까지 동원하여 프로파간다를 하기도 한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교 성향이 강했으나 동시에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반이상 유교적 성향이 옅어져서 서열 관련 사회는 다른 유교권 국가들에 비해 많이 낮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도이머이 정책으로 사회주의, 유교 사회주의 중심의 정책 및 성향 역시 그렇게 세진 않은 편이다.
3. 관련 인물
- 쑨원: 오랜 사회주의에 대한 터부시와 반감, 우익 계열 독립운동가와도 연관성 때문에 한국에선 그가 사회주의자로 인식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많은 서구 학자들은 쑨원이 내세운 초기 삼민주의는 (보수화된 장제스 이후의 삼민주의와 달리)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에 가까웠고, 쑨원 자신도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에 우호적인 민주사회주의자였다. 다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로 분류되는 편이다.[3]
- 장제스 (장제스의 학설): 국부천대 이후에는 전형적인 보수적 독재자에 불과하긴 하지만, 대륙 시절에는 반공적이면서도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적 사상에는 상당히 공감했던 인물이였다. 실제로 장제스는 레닌주의에도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었고, 장제스주의도 서구권에선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 캉유웨이: 그는 기본적으로 왕당파이자 중국의 전통 가치를 지지한 유학자로 보기도 하나 자본주의를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사상으로 간주한 반자본주의자였다. 마냥 반동이라고만 보기 힘든 지점도 있는데 캉유웨이의 경우 서양식 기술 발전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였으며 기술 발전을 통해 미래 사회의 각 개인은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하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로랜스 톰프섬 등 학자들은 캉유웨이가 지향한 사회주의가 중국 전통의 이상적 가치들에 기반했다고 평가했다.
- 호찌민 (호찌민 사상):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였지만, 본인 스스로 식민지 해방운동의 지원을 받기 위해 뛰어들었다 고백한 바 있다.민족주의 성향과 농민 출신이던 마오쩌둥과 개신교 집안인 김일성과 달리 집안이 유학자 가문이어서, 어느 정도 유교적인 성향을 띄었다.
4. 같이 보기
[1] 몇몇 탈북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과거에는 묘소에서 제사지내거나 절하는 것까지도 제한시켰다고 한다. 다만 비교적 최근부터 오히려 묘소에 절하는 걸 복이라고 생각하는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 바뀌었다고 한다(출저: 이제 만나러 갑니다).[2]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은 공자의 무덤을 파헤쳤다.[3] 반공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고 당시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식 사회주의 혁명은 커녕, 자본주의도 제대로 못 되는 반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역사를 돌아보면 (반)식민지, 반봉건(혹은 반자본주의) 상태에서는 우선은 반제국주의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4] 주체사상에서 강조하는 '사람 중심' 개념은 유교에서 말하는 위민정치의 기본 이념인 민본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고 '혁명적 의리'와 '수령론' 등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충효의 덕목과 일맥상통한다. 북한은 이 유교의 가치와 윤리들을 오랫동안 민족 정신의 형태로 뿌리박은 것으로 인정하고 마르크스주의와 통합하여 주체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