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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804년 11월 23일 | ||
뉴햄프셔 주 힐스브로 | |||
사망 | 1869년 10월 8일 (향년 64세) | ||
뉴햄프셔 주 콩코드 | |||
묘소 | 올드노스 묘지 | ||
재임기간 | 제14대 대통령 | ||
1853년 3월 4일~1857년 3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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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7남 2녀 중 5남 | ||
배우자 | 제인 애플턴 피어스 | ||
자녀 | 슬하 3남[1] | ||
학력 |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보든 칼리지 | ||
종교 | 성공회 | ||
신체 | 키 178cm / 체중 65㎏ | ||
소속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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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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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4대 대통령.2. 생애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잘생긴 인물로 꼽히지만,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물론, 불행한 가정사나 인생의 역경만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도 무시할 수 없지만, 링컨은 결과적으로 역사에서 승자로 기록된 반면, 피어스는 대통령으로서도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어 더욱 두드러진다.피어스의 아내, 제인 애플턴 피어스는 남편과 달리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피어스는 사교적이고 인기가 많았으며,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제인은 남편이 정치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여러 번 "콩코드로 돌아오라"며 정계를 떠나기를 권유했다.
부부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둘은 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1852년, 피어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제인과 마지막 남은 아들 벤저민(당시 11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기차 탈선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피어스와 제인은 큰 부상을 입었으며, 벤저민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들들을 모두 잃은 피어스의 백악관은 우울한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제인은 아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남편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백악관 위층에서 은둔 생활을 했고, 죽은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며 눈물을 흘렸다.
공식 석상에서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보다 못한 제인의 이모 애비 켄트 민즈(Abby Kent-Means, 1802~1857)가 제인을 대신해 약 2년 동안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 이후, 이모의 조언을 따라 제인은 1855년 1월 1일 개최된 백악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점차 국정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미국 역대 영부인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인물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피어스가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그녀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1863년, 결핵으로 남편보다 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1. 대통령 당선 전
1804년 11월 23일, 미국 뉴햄프셔 주 힐스브로에서 뉴햄프셔의 주지사를 역임한 아버지 벤저민 피어스(Benjamin Pierce)[2]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드루스(Elizabeth Andrews) 사이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1세에 핸콕 인근에 있는 학당에서 공부하다 1년 후에는 프랜스타운의 학당으로 전학을 가고 이후 필립스 엑스터 학당으로 다시 전학을 갔다. 1820년에 보든 칼리지에 입학한 피어스는 이곳에서 훗날 소설가가 되는 너새니얼 호손과 절친이 된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많은 나날을 학교가 아닌 사회운동 속에서 보내느라 2학년 기말 시험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으며, 자신의 낮은 성적에 놀란 피어스는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정진하여 1824년에는 전교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대학을 졸업한 피어스는 당시 뉴햄프셔 주지사인 리바이 우드버리에게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우드버리와 결별한 피어스는 지역 재판관인 새뮤얼 에드먼드 파커 아래에서 공부한 후 1827년에 콩코드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설한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민주당에 입당하여 앤드루 잭슨을 지지한다.
2년 후에는 뉴햄프셔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2년 후 재선에 성공하고 1836년에는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에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32세에 최연소 미국 상원의원이 된다.
1834년에 자신의 모교인 보든 칼리지의 학장의 딸인 제인 애플턴 피어스와 결혼한다. 제인은 남편이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워싱턴 D.C.에서 지내는 날이 거의 없었다. 결국 피어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제인의 뜻에 동의하며 1842년에 상원의원직을 사퇴하고 귀향한다.[3]
하지만 1846년에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피어스를 육군 대령으로 임관시켰다. 전쟁이 시작되고 몇 개월 후 피어스는 준장으로 진급까지 했다. 하지만 멕시코 시티 원정에서 윈필드 스콧의 휘하에서 복무하던 피어스는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며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다행히도 부상이 심하지는 않아서 다음 날 전투에 복귀하였지만 이때 적들을 상대하다가 다리를 다시 다치면서, 이후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병력 지휘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적들은 피어스의 행각을 두고 겁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종전 후 콩코드로 돌아와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852년에 열린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피어스는 34회의 후보자 선거를 치른 끝에 당원들로부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하지만 선거 당시에도 피어스는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인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선거 내내 논란이 일었다. 한편 평소에 남편이 정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아내 제인은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고 말았다고 한다. 선거에 돌입한 피어스는 휘그당의 대선 후보이자 옛 상관인 윈필드 스콧을 상대로 큰 득표수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피어스가 18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사용한 문구가 나름 유명한데, 자신의 前 민주당 대통령이자 미국-멕시코 전쟁을 통해 미국의 영토를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가 좋았던 제임스 K. 포크의 이름까지 가져다가 섹드립에 가까운 언어유희를 한 것이 눈에 띈다.
We Polked You in '44; We Shall Pierce You In '52.[4]당신을 뚫어드리겠습니다'로 읽을 수도 있다.]
2.2. 대통령 당선 후
프랭클린 피어스의 초상화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랭클린 피어스는 노예제 문제를 어떻게든 회피하려 했지만, 결국 1854년에 통과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피할 수 없었다. 캔자스는 원래 1820년 미주리 타협에 따라 36°30′선 이북에 위치했으므로, 네브래스카와 함께 **자유주(노예제 금지 지역)**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남부는 이러한 결정이 북부와 남부 간의 균형을 깨뜨릴 것을 우려했고, 이에 따라 스티븐 A. 더글러스도[5]의 주도하에 해당 지역 주민들의 투표로 자유주 또는 노예주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으로 인해 캔자스는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내분 상태에 빠졌다. 피어스는 "새로 가입하는 주들이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가 있다"며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을 파기했다. 이를 대체해 새롭게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을 제정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남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을 펼친 셈이 됐다.
한편 노예제 문제로 내분에 빠진 와중,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노예 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 노예 해방운동이 미국으로 확산될 경우, 노예 경제에 의존하는 남부는 심각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남부 세력의 압박을 받은 피어스는 유럽 각국에 파견된 미국 대사들을 소환[6] 하여 조언을 구했다. 그 결과, 피어스 행정부는 1854년 ‘오스텐드 선언’을 발표하며 미국의 공식 입장을 공개했다.
스페인이 미국에게 쿠바를 1억 2,000만 달러에 매각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더라도 정당하다.
오스텐드 선언의 요약문
오스텐드 선언의 요약문
그러나 이 선언이 공개되자 북부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당사자인 스페인은 미국에 강하게 항의하며 쿠바 매각을 거부했다. 결국 오스텐드 선언은 철회되었고, 피어스의 외교 정책은 국내외에서 큰 비판을 받으며 실패로 끝났다. 이처럼 노예제 문제에 대한 일관성 없는 정책과 외교 실패로 인해 피어스는 북부의 지지를 완전히 잃었다. 결국 185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의 자리는 제임스 뷰캐넌에게 넘어갔다.
1856년에는 구아노 제도법을 통과시켜 미국의 영토 확장을 추진했는데 무주지(주인이 없는 섬)에 미국인이 정착하고 실효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여러 작은 섬과 환초들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으며, 일부 지역은 현재까지도 영토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2.3. 퇴임 후
1857년, 후임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피어스는 건강이 악화된 아내 제인의 요양과 자신의 심경 정리를 위해 국외로 떠났다.마데이라 제도에서 2년을 보내고, 유럽을 여행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고향인 뉴햄프셔 콩코드에 정착했다. 하지만 1863년 12월 2일, 사랑하던 제인과 사별했고, 상심한 피어스는 절친인 너새니얼 호손과 어울린다. 1864년에는 투병 중이던 호손을 데리고 요양 목적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 도중 호손이 악화된 병마로 인해 여행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 자녀들을 모두 잃은 데 이어, 퇴임 후 불과 1~2년 만에 아내와 가장 친한 친구까지 잃는 비극을 겪은 후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홀로 돌아와서 술로 슬픔을 달래다가 1869년 10월 8일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생긴 합병증으로 쓸쓸히 사망했다.
3. 평가
그의 초상화는 백악관에 전시된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중 제일 잘생겼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미인 대회의 승리에 필요한 요소와 같은 재능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실수 투성이에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고 만약 알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해리 S. 트루먼
해리 S. 트루먼
형편없는 실력에, 비천한 환경 속에 놓여서는 강자에게 침묵하고 약자에게 비열하게 굴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일을 준비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처럼 후임 대통령들의 혹평은 현대 미국 국민들과 정치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우유부단한 태도로 북부와 남부의 갈등을 급단적으로 심화시킨 시킨 미주리 타협 폐기,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 통과로 그야말로 남북전쟁의 원인을 크게 제공한 격이라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한 국내 논문에서는 피어스 역시 남북전쟁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하기도 했는데, 개인 능력도 부족했고 실질적으로 남부와 민주당의 허수아비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출신 정당과 지역만을 옳다고 여기며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런 편향적인 태도가 미국을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몰아넣었다고 분석했다.
그덕에 미국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나 업적 평가에서 제임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 워런 G. 하딩과 함께 ‘최악의 대통령’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워런 G. 하딩, 21세기에는 제임스 뷰캐넌과 앤드루 존슨이 최하위를 번갈아 차지하는 덕분에, 피어스는 의외로 이 순위에서 최하위를 기록을 한 적은 없다. 존재감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덕인데, 오히려 존재감이 드러났다면 순위가 더 내려갔을 수도 있는 케이스.
덕분에 미국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나 업적 평가 순위에서도 제임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 워런 G. 하딩과 함께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데, 그나마 20세기에는 하딩이, 21세기에는 뷰캐넌과 존슨이 최하위를 번갈아 차지하는 덕에 의외로 최하위를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부족하다 보니 피어스의 정책이 주목받지 못하는 편이다.
오히려 피어스는 미국 문학사에서 더 자주 언급되는 편인데, 대표적인 낭만주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절친으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업적보다는 문학과의 인연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대통령이라는 점에서는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다.
4. 여담
- 임기 중 시애틀 추장에게 토지를 팔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시애틀 추장은 토지 매매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토지를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재산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며, 구입한 토지를 형제처럼 소중히 다루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받고 감명한 피어스는 시애틀 추장의 고결한 성품을 칭송하였다. 이 사연은 꽤 유명해서 영어 원서나 참고서를 찾아보면 가끔 볼 수 있다. 추장의 이름과 편지 내용은 유튜브 등지에서 검색하면 나온다.
- 19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또한 취임 당시 48세로, 당시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현재 최연소 미국 대통령은 42세의 나이로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 위의 트루먼의 말처럼 외모가 잘생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미국에서는 가장 잘생긴 대통령으로도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백악관의 공식 초상화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잘생기게 잘 그려졌다. 미국을 넘어 역대 국가 지도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일 것이다.
- 개즈던 매입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 모두 요절했다.[2]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준장이었다.[3] 아내의 제안 외에도 1840년 양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휘그당에 참패하고 소수당으로 전락하자 이에 큰 좌절을 느끼고 사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Polked'와 'Pierce'를 대통령의 이름을 넣어 해석해 보면 '1844년에는 포크였으니, 1852년에는 피어스입니다'로 의역할 수 있고, 동사로 해석해 보면 '1844년에는 당신을 찔렀으니, 1852년에는[5] 후일 에이브러햄 링컨과 대선에서 맞붙게 되는 인물이다.[6] 피어스가 소환한 대사들 중에는 당시 주영국 대사인 제임스 뷰캐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