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0:03:43

프랭클린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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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파일:Franklin_Pierce.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804년 11월 23일
미국 뉴햄프셔 주 힐스브로
사망 1869년 10월 8일 (향년 64세)
미국 뉴햄프셔 주 콩코드
재임기간 제14대 대통령
1853년 3월 4일~1857년 3월 4일
서명 파일:프랭클린 피어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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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벤저민 피어스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드루스 피어스
형제자매 7남 2녀 중 5남
배우자 제인 애플턴 피어스
자녀 슬하 3남[1]
학력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보든 칼리지
종교 성공회
신체 178㎝ / 체중 65㎏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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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eriodicpresidents.files.wordpress.com/14-fp-portrai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전2.2. 대통령 당선 후2.3. 퇴임 후
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14대 대통령.

2. 생애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인물, 그리고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산 인물로도 유명하다. 불행한 가정사나 인생의 역경만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역사의 승자로 기록된 링컨과 달리 피어스는 대통령으로서도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피어스의 아내 제인 애플턴 피어스는 사교적이고 인기가 많아 주변에 친구가 많았던 남편과 달리 어려서부터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는데, 남편이 정치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도 남편에게 정치를 그만두고 콩코드로 오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피어스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게다가 피어스와 제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둘은 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1852년 피어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에 제인과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 벤저민과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이때 기차 탈선 사고가 발생하면서 피어스와 제인은 큰 부상을 입었고 벤저민은 1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임기 시작 전부터 아들들을 모두 잃는 비극을 당한 피어스의 백악관은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악관에 입주하기 전에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잃어버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제인은 결국 남편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영부인 임기 초반에 심한 우울증을 앓아 백악관 위층의 자신의 방에서 은둔하다시피 한 채로 살았으며 죽은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제인은 공식 석상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런 그녀를 보다 못한 제인의 이모인 애비 켄트 민즈(Abby Kent-Means, 1802~1857)가 제인을 대신하여 피어스의 임기 초반에 2년 가량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였다. 제인은 이모의 조언을 따라 1855년 1월 1일에 개최된 백악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국정 행사에 자주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오늘날 미국 역대 영부인들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인물들 중 하나이며, 피어스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남편보다 6년 일찍인 1863년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2.1. 대통령 당선 전

1804년 11월 23일, 미국 뉴햄프셔 주 힐스브로에서 뉴햄프셔의 주지사를 역임한 아버지 벤저민 피어스(Benjamin Pierce)[2]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드루스(Elizabeth Andrews) 사이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1세에 핸콕 인근에 있는 학당에서 공부하다 1년 후에는 프랜스타운의 학당으로 전학을 가고 이후 필립스 엑스터 학당으로 다시 전학을 갔다. 1820년에 보든 칼리지에 입학한 피어스는 이곳에서 훗날 소설가가 되는 너새니얼 호손과 절친이 된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많은 나날을 학교가 아닌 사회운동 속에서 보내느라 2학년 기말 시험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으며, 자신의 낮은 성적에 놀란 피어스는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정진하여 1824년에는 전교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대학을 졸업한 피어스는 당시 뉴햄프셔 주지사인 리바이 우드버리에게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우드버리와 결별한 피어스는 지역 재판관인 새뮤얼 에드먼드 파커 아래에서 공부한 후 1827년에 콩코드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설한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민주당에 입당하여 앤드루 잭슨을 지지한다.

2년 후에는 뉴햄프셔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2년 후 재선에 성공하고 1836년에는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에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32세에 최연소 미국 상원의원이 된다.

1834년에 자신의 모교인 보든 칼리지의 학장의 딸인 제인 애플턴 피어스와 결혼한다. 제인은 남편이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워싱턴 D.C.에서 지내는 날이 거의 없었다. 결국 피어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제인의 뜻에 동의하며 1842년에 상원의원직을 사퇴하고 귀향한다.[3]

하지만 1846년에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피어스를 육군 대령으로 임관시켰다. 전쟁이 시작되고 몇 개월 후 피어스는 준장으로 진급까지 했다. 하지만 멕시코 시티 원정에서 윈필드 스콧의 휘하에서 복무하던 피어스는 추루부스코 전투에서 여단을 지휘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며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다행히도 부상이 심하지는 않아서 다음 날 전투에 복귀하였지만 이때 적들을 상대하다가 다리를 다시 다치면서, 이후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병력 지휘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적들은 피어스의 행각을 두고 겁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종전 후 콩코드로 돌아와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852년에 열린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피어스는 34회의 후보자 선거를 치른 끝에 당원들로부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하지만 선거 당시에도 피어스는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인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선거 내내 논란이 일었다. 한편 평소에 남편이 정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아내 제인은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고 말았다고 한다. 선거에 돌입한 피어스는 휘그당의 대선 후보이자 옛 상관인 윈필드 스콧을 상대로 큰 득표수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피어스가 18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사용한 문구가 나름 유명한데, 자신의 前 민주당 대통령이자 미국-멕시코 전쟁을 통해 미국의 영토를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가 좋았던 제임스 K. 포크의 이름까지 가져다가 섹드립에 가까운 언어유희를 한 것이 눈에 띈다.
We Polked You in '44; We Shall Pierce You In '52.[4]당신을 뚫어드리겠습니다'로 읽을 수도 있다.]

2.2. 대통령 당선 후

파일:franklin pierce portrait.jpg
프랭클린 피어스의 초상화

대통령으로 당선된 피어스는 노예 문제를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시도하나, 1854년에 통과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은 피할 수 없었다. 캔자스는 원래 미주리 타협에 의하면 36°30′선 이북에 있으므로 본래 네브래스카와 함께 자유주가 되어야 하는 주이나, 남부와 북부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에 급작스럽게 스티븐 A. 더글러스의 주도[5]로 투표를 통해 자유주-노예주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으로 인해 캔자스 주민들은 노예제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서 무장 충돌을 벌이기 시작하고 캔자스는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다. 피어스가 새로 가입하는 주들의 자유로운 결정(소위 '주의 권리')을 옹호한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을 파기했고, 새롭게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이 효력을 발휘했다. 사실상 남부를 지지한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노예제 문제로 미국이 내분에 빠진 와중에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에서 노예 해방운동이 시작된다. 노예 해방운동이 미국에 확산되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중요한 자산인 노예를 잃어버릴 것을 우려한 남부 세력들의 압박을 받기 시작한 피어스는 미국에서 파견한 각국 대사들을 소환하여 조언을 구한다.[6] 대사들의 조언과 국제 정세를 보고받은 피어스는 오스텐드 선언을 발표하면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공개한다.
스페인이 미국에게 쿠바를 1억 2,000만 달러에 매각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더라도 정당하다.
오스텐드 선언의 요약문

피어스의 오스텐드 선언이 공개되자 북부는 물론이요 세계 각국에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당사자인 스페인은 미국에게 강한 항의를 하면서 매각 거부를 선언한다. 그렇게 오스텐드 선언은 없는 선언으로 취급되며 묻히고 말았다.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피어스의 정책과 방향성은 결국 북부의 지지를 잃어버리고 대통령 선거를 위해 출마한 경선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대통령 후보에는 제임스 뷰캐넌이 지명된다.

1856년, 구아노 제도법을 통과시켜 주인이 없는 섬에 미국인들을 거주하고 실효 지배할 수 있도록 해 미국의 영토를 팽창시켰다. 대부분 태평양이나 카리브해의 작은 섬 또는 환초들이지만 몇몇 지역은 현재까지 영토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

2.3. 퇴임 후

후임 대통령제임스 뷰캐넌의 취임식을 마친 후 피어스는 건강이 악화된 아내 제인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국외로 떠난다.

마데이라 제도에서 2년을 보내고 유럽을 돌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와 고향인 콩코드로 돌아간다. 하지만 1863년 12월 2일에 제인과 사별했고, 상심한 피어스는 절친인 너새니얼 호손과 어울린다. 1864년에는 투병 중이던 호손을 데리고 요양 목적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 도중 호손이 악화된 병마로 인해 여행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자녀들을 모두 잃은 것도 모자라, 퇴임 후 불과 1~2년 사이에 아내와 친구마저 잃은 피어스는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홀로 돌아와서 술로 슬픔을 달래다가 1869년 10월 8일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생긴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3. 평가

그의 초상화는 백악관에 전시된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중 제일 잘생겼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미인 대회의 승리에 필요한 요소와 같은 재능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실수 투성이에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고 만약 알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해리 S. 트루먼
형편없는 실력에, 비천한 환경 속에 놓여서는 강자에게 침묵하고 약자에게 비열하게 굴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일을 준비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후임 대통령들의 혹평은 현대의 미국 국민들과 정치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며,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을 급격히 에스컬레이트 시킨 미주리 타협 폐기와 켄자스-네브래스카 법안 통과로 인해 전반적으로 바닥을 기는 형편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 인기 순위나 업적 평가 순위에서도 제임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 워런 G. 하딩과 함께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데, 그나마 20세기에는 하딩이, 21세기에는 뷰캐넌과 존슨이 최하위를 번갈아 차지하는 덕에 의외로 최하위를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부족하다 보니 피어스의 정책이 주목받지 못하는 편이다.

오히려 정치보다는 문학사에서 더 기억되는데, 미국 낭만주의 소설가너새니얼 호손의 절친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4. 여담

  • 임기 중 시애틀 추장에게 토지를 팔라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시애틀 추장은 토지 매매 제안을 수락하면서도 토지를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재산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며, 구입한 토지를 형제처럼 소중히 다루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받고 감명한 피어스는 시애틀 추장의 고결한 성품을 칭송하였다. 이 사연은 꽤 유명해서 영어 원서나 참고서를 찾아보면 가끔 볼 수 있다. 추장의 이름과 편지 내용은 유튜브 등지에서 검색하면 나온다.
  • 19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또한 취임 당시 48세로, 당시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현재 최연소 미국 대통령은 42세의 나이로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 조개 요리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중에서 조개튀김을 좋아했다. 조개 요리 외에도 애플파이도 좋아해서 즐겨 먹었다.
  • 위의 트루먼의 말처럼 외모가 잘생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미국에서는 가장 잘생긴 대통령으로도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백악관의 공식 초상화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잘생기게 잘 그려졌다. 미국을 넘어 역대 국가 지도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일 것이다.


[1] 모두 요절했다.[2]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준장이었다.[3] 아내의 제안 외에도 1840년 양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휘그당에 참패하고 소수당으로 전락하자 이에 큰 좌절을 느끼고 사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Polked'와 'Pierce'를 대통령의 이름을 넣어 해석해 보면 '1844년에는 포크였으니, 1852년에는 피어스입니다'로 의역할 수 있고, 동사로 해석해 보면 '1844년에는 당신을 찔렀으니, 1852년에는[5] 후일 에이브러햄 링컨과 대선에서 맞붙게 되는 인물이다.[6] 피어스에 의해 소환된 대사들 중에는 당시 영국 대사인 제임스 뷰캐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