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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 텔레비전 심볼.jpg 영화 / 텔레비전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영화: 6225 / 텔레비전: 6335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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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e5f28><colcolor=#fee8e1> 베티 데이비스 Bette Davis | |
본명 | Ruth Elizabeth Davis 루스 일리저버스 데이비스 |
출생 | 1908년 4월 5일 |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우얼 | |
사망 | 1989년 10월 6일 (향년 81세) |
프랑스 뇌이쉬르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활동 | 1929년 – 1989년 |
신체 | 160cm |
배우자 | 하먼 아스커 넬슨(1932년–1938년 이혼) 아서 판즈워스(1940년–1943년 사별) 윌리엄 그랜트 쉐리(1945년–1950년 이혼) 게리 메럴(1950년–1960년 이혼) |
자녀 | 딸 바버러 데이비스 쉐리(1947년생)[1] 딸 마고 메럴[2](1951년생)[A] 아들 마이클 메럴(1952년생)[A]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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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전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한 배우 중 한 명으로, 5년 연속(1939–43년)으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배우일 만큼[5]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2위에 선정되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에 등장한 점이 후대에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거침없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남성 위주였던 당시 할리우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캐서린 헵번과 함께 본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해 인권이 취약하던 시절 소수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다.[6] 1980년대에는 젊은 시절의 악역 이미지와 더불어 말년에 자주하던 과장된 연기와 TV 인터뷰에서의 디바 같은 태도가 일종의 밈이 되었는데, 이 덕분에 주디 갈런드와 함께 게이 아이콘으로도 유명했다.
2. 외모 특징
베티 데이비스 아이즈 |
경력 초기에는 "당시 여배우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얼굴 때문에 줄줄이 퇴짜를 받았다."[7] 영화 속 의상들 역시 데이비스의 몸매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 감추고 보정하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스타일 측면에서 남긴 게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두를 영화를 볼 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데이비스가 전부 연기력 하나만으로 감쪽같이 숨겼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배우의 시초다.[8]
큰 눈으로 유명한데 처음 배우가 된 후 첫 소속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즈에서 배역을 못맡아 거의 짤릴 뻔 했으나 촬영감독이 그 큰 눈이 카메라에 잘 받을거라며 한 영화에 추천했고 그 영화로 데뷔를 한 일화가 있다. 눈이 워낙 유명해져서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1981년도에 빌보드 핫 100 9주 1위와 빌보드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한 킴 칸스의 "Bette Davis Eyes"라는 노래도 있다.[9] 마돈나의 싱글인 "Vogue"의 가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3. 생애 및 활동
1930년 할리우드로 이동했지만 마중 나왔던 유니버설 스튜디오즈의 담당자가 너무 평범하다고 깔 정도로 이후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첫해였다. 1932년 유니버설과의 재계약 실패 후 뉴욕으로 돌아가려다 데이비스를 눈여겨 본 워너 브라더스사와 5년간 계약을 맺고 계약 이후 작은 배역을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RKO 라디오 픽쳐스의 1934년작 <인간의 굴레에서>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 악역은 인물에 배우가 먹히는 경우가 많아 배우들이 맡기를 꺼렸으나 데이비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도전하였다. 철저히 망가져서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는 여주인공 또한 기존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데이비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렸다. 데이비스는 개인 분장실용 트레일러를 받은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고 전문분장사를 시켜 특유의 큰눈을 돋보이게 하는 눈화장에 매일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 되고 있었으나, 막상 후보 지명조차 받지도 못했고, 이로 인해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당시 아카데미 협회는 자그마한 친목 사교 모임 정도였으나 이 스캔들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대규모 전문가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결국 1936년 <데인저러스>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워너의 기존 간판 케이 프랜시스를 누르고 "워너 사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어 소녀가장 소리까지 듣게 됐지만"[10] 워너 사는 데이비스에게 대놓고 "우린 사실 네가 찍는 영화들도, 너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돈만 아니었다면 너랑 함께 할 일은 없었다는 소리를 당사자 면전에서 해버린 것이다. 워너 사는 배은망덕하게도 여신같은 외모가 아닌 데이비스와 그에 맞춰 점잖지 않은 내용들로 이뤄진 영화들이 자사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여겼다. 당시 워너 사에 큰 소속감을 느끼고 있던 데이비스는 매우 상처 받았다.
워너 사의 데이비스에 대한 실질적 대우 역시 형편없었다. 부당함을 느낀 데이비스는 워너 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주위의 지지를 못 받았고 패소로 끝났지만, 7년 뒤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의 계약 무효 소송 승소의 근거가 되었다. 이때 "더 해빌런드 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법은 스튜디오 체계가 붕괴되는 데 일조하였다.
사람들은 이제 데이비스가 워너 사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잭 워너는 곧 데이비스가 실은 옳은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잭 워너는 데이비스의 기지를 높게 평가해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주었고, 데이비스가 그간 요구했던대로 대본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쓰게 되었다.
1938년, <제저벨> |
하지만 이와 함께 경력이 슬슬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우선 1941년 여성으로선 최초이자 최연소로 아카데미 협회의 의장직에 오르지만 협회와의 불화로 사퇴하게 된다. 1940년작 <편지>까지 함께 성공적으로 작업한 윌리엄 와일러와도 불화로 인해 1941년작 <작은 여우들>을 끝으로 같이 작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0여년간의 흥행 연타도 1946년작 <디셉션>의 실패로 끝이 났다. 거기에다가 출산까지 겪으며 활동이 정체되었다.
하지만 1950년작 <이브의 모든 것>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연기를 펼치며 화려하게 재기하는 데 성공한다.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유력시 되었으나,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를 연기한 앤 백스터와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이 함께 후보에 오르면서 삼파전이 펼쳐지면서 표가 갈려 제3의 주자였던 주디 할러데이가 <귀여운 빌리>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할러데이 역시 명연기를 했다. 경쟁자들이 워낙에 대단했을뿐.
이후 다시 침체기를 겪다가 평소 앙숙지간이었던 조운 크로퍼드의 제안으로 1962년작 <제인의 말로>에 출연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제인의 말로>에서 두 주연 배우의 사이가 매우 안 좋다는 점이 서로를 증오하는[12] 두 자매 연기와 영화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가 워낙 기대작이었고 제작 당시 둘 다 경력이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둘은 싸움을 자제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전설적인 일화들이 남았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데이비스는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확실시 되었으나 정작 수상자는 <기적은 사랑과 함께>에서 헬런 켈러를 가르치는 앤 설러번 선생 역을 맡았던 앤 밴크로프트였다. <제인의 말로>의 성공 때문에 1960년대엔 미친 노파 역으로 주로 활동했다.
1964년, <제인의 말로>의 성공을 재현하고 싶었던 워너 사는 심리스릴러 <허쉬 허쉬 스윗 샬롯>을 만들게 된다. 원작 소설가, 이야기 골자, 감독, 두 주역까지 전부 전작 그대로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와 크로퍼드의 사이는 워너 사의 생각보다 훨씬 안 좋았고 크로퍼드는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로 교체되었다.
데이비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1983년 유방절제술을 받았고 결국 1989년 암으로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100만 달러 가량의 유산을 남겼다.[13]
3.1. 조안 크로포드와의 불화
조안 크로포드와는 지독한 앙숙으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로는 불화가 없다고 부정했으나 비공식적으론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시작은 크로포드에 대한 데이비스의 질투였다. 데이비스가 힘들게 오디션을 보면서 배역을 따는 무명 배우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크로포드는 이미 전성기에 돌입해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무용수 출신 크로포드보다 연기 학교에서 공부한 자신이 더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해 크로포드를 질시했다. 데이비스는 사석에서 "크로포드 양은 스타지만, 나는 배우야"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악연이 여러 번 겹치면서 데이비스는 크로포드에게 더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1933년 워너 사는 <Ex-Lady>로 데이비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영화 제목 위로 올리면서 홍보를 야심차게 준비했는데, 하필 워너 사가 언론사에 홍보 자료를 뿌린 날 크로포드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첫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의 이혼을 발표했다. 크로포드의 이혼이 온갖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되면서 데이비스의 신작 소식은 구석진 자리의 단신으로 옮겨졌고 결국 <Ex-Lady>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받고 말았다.
1935년 데이비스는 <데인저러스>를 찍으면서 상대 배우인 프랜쵸우 토운에게 크게 반한다. 그러나 토운은 이미 크로포드와 사귀던 중이었고 둘은 <데인저러스> 촬영 도중에 약혼까지 했다. 데이비스는 당시 토운이 크로포드에게 깊이 빠져있었고 촬영 중 점심시간마다 크로포드와 만났다고 시인했음에도, 크로포드가 자신에게서 토운을 뺏어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말년에도 바로 이 점 때문에 크로포드를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자연히 크로포드 역시 데이비스에게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1936년, 데이비스는 수상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미국 배우 조합(SAG)의 결성에 같이 항의하자며 잭 워너가 억지로 데려간 자리였다. 당연히 SAG를 지지하던 데이비스는 워너에게 시위하는 뜻에서 거의 꾸미지 않은 채로 갔다. 로저 무어에 따르면 데이비스가 시상대에 오르기 전 크로포드가 "옷이 참 예쁘네!"라고 비꼬며 창피를 줬다는 목격담이 할리우드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14]
그래도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건 크로포드였는데, 1943년 MGM에서 워너 사로 이적한 뒤 크로포드는 개인 분장실을 데이비스 옆방에 배정해달라고 요청한 뒤 꽃과 선물을 잔뜩 보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이를 전부 돌려보냈다.
데이비스가 이를 두고 "레즈비언의 (성적) 접근"이라고 뒷담화를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그저 비아냥거리려고 한 말만은 아니었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크로포드가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기정 사실처럼 번져있었기 때문이다.[15] 실제로 크로포드가 반농담식이긴 하지만 데이비스에 대한 성적 호기심이 담긴 발언을 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도 있다.
이후 데이비스가 거절한 영화들에 크로포드가 나와서 줄줄이 고평가를 받자 데이비스가 이를 질투하고 화를 내면서 사이가 더 틀어지게 되었다. 크로포드는 <밀드레드 피어스>(1945)로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Possessed>(1947)로는 후보에 올랐다.
1952년 크로포드와 사이가 틀어진 부부 작가 캐서린 앨버트와 대일 윤슨[16]은 크로포드를 기초로 하여 대본을 쓴다. 데이비스는 기꺼이 주연을 맡았고 보란듯이 인터뷰마다 최고의 대본이라고 극찬하고 다녔다. 이 영화 <스타>에서 여주인공은 명성에 집착하는 한물 간 스타로 묘사된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데이비스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려주었다.
앨버트 부부는 이렇게 크로포드를 모욕해놓고도, 황당하게도 자신들의 딸이며 크로포드의 대녀였던 신인 스타 조운 에번스[17]가 겨우 17살에 자동차 판매사원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크로포드에게 딸의 고집을 꺾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크로포드는 복수를 위해 반대로 아예 자신의 집에 판사와 언론을 부른 뒤 조운 에번스의 결혼식을 열어주었고, 일이 다 끝난 뒤에 앨버트 부부에게 후통보했다. 다행히 조운 에번스는 남편과 백년해로했고 크로포드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제인의 말로>(1962)를 같이 찍자고 제안한 사람은 크로포드였다. 자신이 반드시 제인을 맡아야 한다는 데이비스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데이비스는 수락 전에 감독 라버트 얼드리치가 크로포드와 잠자리를 갖고 있진 않은지 확인하기도 했다. 영화를 찍으며 얼드리치가 크로포드를 더 편애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촬영장에서 일이 터졌다. 당시 크로포드는 네 번째 남편 앨프러드 스틸[18]이 펩시 CEO였던 덕분에 펩시의 이사로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오로지 크로포드를 엿먹이기 위해 크로포드의 분장실에 코카콜라 자판기를 설치했다.
이에 크로포드는 데이비스의 제인 역이 자신의 블랜치 역을 때리는 장면에서 데이비스가 자신을 진짜로 때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대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역을 쓰지 못한 근접촬영 부분에서 실제로 데이비스가 크로포드를 심하게 때리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열받은 크로포드는 데이비스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끌고가는 씬을 촬영할 때 주머니에 돌을 넣어놓았고 일부러 연기를 망쳐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게 해 데이비스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이후 둘은 싸움을 자제했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인터뷰에서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홍보 행사에 크로포드가 불참한 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훗날 크로포드는 내부 시사회가 끝난 뒤 데이비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데이비스가 "나의 훌륭한 연기가 잘 담긴 영화다"라고만 하고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아서 속으로 매우 실망한게 불참한 이유라고 밝혔다.
이후 데이비스는 모든 인터뷰에서 크로포드가 자기가 상을 못 받게 하기 위해 로비를 했다고 말하며 분노했다. 물론 크로포드는 부인했지만 둘의 사이는 겉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제인의 말로>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기획된 <허쉬 허쉬 스윗 샬롯>(1964)에서 또 일이 터졌다. 크로포드보다 촬영장에 먼저 도착한 데이비스가 모든 스태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19] 크로포드를 왕따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이건 크로포드 잘못도 있다. 크로포드는 영화 현장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폭군같은 행동으로 당시 악명이 높았고 결국에는 스태프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크로포드가 열흘만에 병가를 내자[20] 제작사는 크로포드의 병원에 찾아가 데이비스 때문에 꾀병을 부리는건 아닌지 뒷조사까지 했다. 얼드리치는 크로포드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크로포드의 근황을 살폈지만 다른 배우로 교체하지 않으면 영화 제작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워너 사의 협박에 몇 여배우들에게서 거절을 당한 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승낙을 얻어냈다. 제작사가 관여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촬영장에서 데이비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누가 그 뒤에 있었는지 대충 예상이 갈 것이다. 크로포드는 자신이 강판된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1977년 크로포드가 사망한 뒤론 데이비스도 차차 누그러졌다. 크로포드의 연기력만큼은 존경한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고 1978년 크로포드의 입양딸이 그 유명한 "Mommie Dearest"라는 회고록으로 크로포드를 비난했을 땐 배은망덕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훌륭한 내 딸 B.D.가 나에 대해 그런 고약한 책을 낸다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크로포드가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라고도 덧붙였다. 말이 씨가 됐는지 1985년 데이비스의 딸 B.D. 하이먼도 "My Mother's Keeper"라는 책을 내며 데이비스는 "학대하고 군림하는 사악한 어머니"였으며 "역겨운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크로포드의 경우만큼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데이비스는 1987년 회고록 "This 'n That"을 펴내며 반박했으며, 데이비스의 입양아들 마이클 메럴도 사실이 아니라고 맞서며 B.D. 하이먼과 연을 끊었다.
둘의 사이는 이후에도 회자되어서 2017년 수전 서랜던과 제시카 랭이 출연한 미니 시리즈 퓨드로 제작되었다.
3.2. 개인사
- 첫 번째 남편 하먼 넬슨은 고등학교에서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 하먼 넬슨과의 결혼생활 중 윌리엄 와일러 연출작 <제저벨>(1938)에 나오며 와일러와 깊이 사랑에 빠졌다. 와일러는 넬슨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했지만 데이비스는 이를 망설였다. 결국 와일러는 24시간 안에 결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으면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데이비스에게 최후통첩을 내린다. 그러나 하필 그날따라 집안에 처박혀있던 데이비스는 이 전보를 받지 못했고 와일러는 전보를 보낸지 24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자 데이비스를 포기하면서 당시 알게 된지 겨우 3주 밖에 안 됐던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해 사망시까지 함께 했다.
- 1938년 Tailwaggers Society(테일웨거스 소사이어티) 자선행사에서 하워드 휴즈를 만나 말리부에 집 한 채를 대여해 밀회를 갖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여전히 첫 번째 남편 하먼 넬슨과 결혼생활 중이었고, 휴즈는 캐서린 헵번과 그대로 동거하면서 진저 라저스까지 만나고 있었다. 당시 데이비스는 휴즈와의 관계를 언론에 간접 시인하기도 하고 간접 부인하기도 했다.
1938년 테일웨거스 소사이어티 자선행사에서 |
- 하루는 부부 침실에서 휴즈와 성관계를 갖던 중 침실에 미리 도청 장치를 설치해놨던 남편 하먼 넬슨이 쳐들어왔다는 얘기가 있다. 화가 난 넬슨이 입막음 댓가로 휴즈에겐 70,000 달러를, 데이비스에겐 10,000 달러를 요구했으며 결국 휴즈가 이 돈을 전부 지불했다고 한다.[21]
- 결국 데이비스는 그해 넬슨과 이혼했다. 하워드 휴즈는 진저 라저스의 1940년 이혼 때는 본인이 직접 과정에 적극 개입하고 약혼 반지와 신혼집 예정 부지까지 선물하며 결혼을 약속했지만, 데이비스의 이혼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고 끝까지 청혼하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이혼 비용을 워너 사에서 빌려야했다. 그렇게 휴즈와의 관계도 끝이 났다.
- 두 번째 남편 아서 판즈워스는 항공장비 회사 대표였는데, 갑자기 인도에서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고 뇌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네 번째 남편 게리 메럴과의 결혼생활 중에 입양한 딸 마고 메럴은 3살 때 정신박약아로 판정되었다. 이후 특수학교와 시설을 거쳤다.
- 게리 메럴과 이혼할 때 유명 사립탐정 프레드 오태쉬[22]를 고용해 메럴의 뒤를 밟게 해 불륜 증거를 잡았다.
4. 여담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존 가필드와 함께 술이 금지된[23] 군인 전용 무료 오락 공간인 할리우드 캔틴[24]을 열고 전두지휘했다. 무수한 할리우드 스타들[25]이 이 공간에 들려 공연을 하고 연합군들과 함께 춤을 추고 음식 봉사를 했다.#
-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흑백 분리 정책에 저항하던 인종차별 반대론자였다.
-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헨리 폰다 등과 함께 당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민주당원이었다. 현대 할리우드는 민주당원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정치 지형이 현대 미국과 다른 30~40년대에는 오히려 공화당원이 더 많았다. 특히 할리우드는 '자유'를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전쟁 이후 냉전 분위기가 대두된 40~50년대까지만 해도 반공 보수파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50년대에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있었다. 그 이후인 60년대부터는 진보적 가치가 대두되며 리버럴 세력이 압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 동물 구호 단체 테일웨거스 소사이어티의 회장이었다.
- 1930-40년대에 아카데미상을 2번이나 받았지만, 상운이 없는 배우로 분류된다. 전술했듯 1950년 <이브의 모든 것>과 1962년 <제인의 말로>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둘 다 상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나이 든 배우를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말년에 대선배 릴리언 기쉬와 함께 1987년작 <8월의 고래>를 찍으면서 툭하면 기쉬보다 돈 많이 달라고 하거나 기쉬에게 귀 먹었냐고 비아냥거려서 기쉬가 무척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쉬는 병마를 앓고 있던 데이비스를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데이비스는 사망하기 2년 전으로 한창 암투병할 시기였다.
- 스크루볼 로맨틱 코미디 <The Bride Came C.O.D.>(1941)에서 제임스 캐그니와 짝을 이뤘다. 개봉 당시 묻혀버린 마이클 커티즈 연출의 <Jimmy the Gent>(1934) 이후로 두 사람이 또 뭉쳤던 이유는 다시 함께 일하고 싶어서였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캐그니는 말년 인터뷰에서 실은 데이비스가 자신을 마피아와 연루된 사람이라고 믿으며 함께 홍보사진을 찍는 것조차 거부하는 등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하며 인간적으론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직업적으로는 해야할 몫을 해내는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 캐서린 헵번과도 묘한 경쟁 구도였다.[27] 그 대표적인 예로 햅번은 메릴 스트립을 계산적이고 기계적인 연기를 한다고 깠으나, 데이비스는 스트립의 데뷔 초,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라며 스트립에게 친필 편지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이때 인연으로 데이비스 사후 다큐에 스트립이 출연하기도 하였다.
-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커버에 등장하는 유명인 중 하나다.
- 비교적 노안인 편이었다. 동시기에 동갑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노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특히 <이브의 모든 것>에 나오는 앤 백스터가 무지무지한 동안이기에, 더욱 노안인게 부각된다.[28]
5. 주요 출연 작품
<rowcolor=#fee8e1> 연도 | 작품 | 배역 | 비고 |
1932 | The Man Who Played God | 그레이스 블레어 | 대럴 F. 재넉 제작 |
So Big | 댈러스 오매러 양 | 조지 브렌트 출연 | |
The Rich Are Always with Us | 상속녀 말브로 | 조지 브렌트 출연 | |
The Dark Horse | 케이 러슬 | ||
Three on a Match | 속기사 루스 웨스캇 | 머빈 러로이 연출 험프리 보가트 출연 | |
20,000 Years in Sing Sing | 페이 윌슨 | 마이클 커티즈 연출 스펜서 트레이시 출연 | |
1933 | The Working Man | 제니 하틀런드/제인 그레이 | 미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
Ex-Lady | 헬런 바우어 | 1933년 바버라 스탠윅 주연작 개작 | |
Bureau of Missing Persons | 노머 라버츠 | 루이스 스톤 출연 | |
1934 | The Big Shakedown | 노머 넬슨 | |
Fashions of 1934 | 린 메이슨 | 윌리엄 파월 출연 | |
Jimmy the Gent | 조운 마튼 | 제임스 캐그니 출연 | |
인간의 굴레에서 (Of Human Bondage) | 밀드러드 라저스 | 레슬리 하워드 출연 | |
Housewife | 퍼트리셔 버클리 | 조지 브렌트 출연 | |
1935 | 데인저러스 (Dangerous) | 배우 조이스 히스 | 제 8회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프랜쵸우 토운 출연 |
Bordertown | 머리 로어크 | 폴 뮤니 출연 | |
Special Agent | 줄리 가드너 | 조지 브렌트 출연 | |
The Girl from 10th Avenue | 미리엄 브레이디 | ||
Front Page Woman | 기자 엘런 가필드 | 조지 브렌트 출연 | |
1936 | 화석의 숲 (The Petrified Forest) | 게이브리엘 메이플 | 레슬리 하워드, 험프리 보가트 출연 |
The Golden Arrow | 데이지 애플비 | 조지 브렌트 출연 | |
1937 | Kid Galahad | 루이즈 "플러프" 필립스 | 제 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볼피컵 |
Marked Woman | 술집 여성 메리 드와이트 스트로버 | 볼피컵[29] | |
It's Love I'm After | 조이스 아든 |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레슬리 하워드 출연 | |
That Certain Woman | 메리 다널 (헤인즈) | 헨리 폰다, 도널드 크리스프 출연 | |
1938 | 제저벨 (Jezebel) | 줄리 마스던 | 제 11회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헨리 폰다, 조지 브렌트 출연 |
The Sisters | 루이즈 엘리엇 | 에롤 플린 출연 | |
1939 | 사랑의 승리 (Dark Victory) | 상속녀 주디스 "주디" 트러헌 | 험프리 보가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브렌트 출연 |
후아레스 (Juarez) | 벨기에의 샤를로트 | 폴 뮤니 출연 | |
The Old Maid | 샬럿 러블 | 이디스 워튼 원작, 조지 브렌트 출연 | |
엘리자베스의 스캔들 (The Private Lives of Elizabeth and Essex) | 엘리자베스 1세 | 에롤 플린, 더 해빌런드 출연 | |
1940 | 속세와 천국 (All This, and Heaven Too) | 앙리에트 들루지-데포르트 | 샤를 부아예 출연 |
편지 (The Letter) | 레슬리 크러즈비 | 윌리엄 와일러 연출 W. 서머싯 몸 원작 | |
1941 | 작은 여우들 (The Little Foxes) | 리지너 기든즈 | 윌리엄 와일러 연출 릴리언 헬먼 원작 |
대단한 거짓말 (The Great Lie) | 매기 패터슨 밴 앨런 | 메리 애스터, 조지 브렌트 출연 | |
The Bride Came C.O.D. | 조운 윈필드 | 제임스 캐그니 출연 | |
1942 | 가라 항해자여 (Now, Voyager) | 샬럿 베일 | 폴 헨리드, 클로드 레인스 출연 |
In This Our Life | 스탠리 팀버레이크 킹스밀 | 존 휴스턴, 라울 월시[30] 연출. 더 해빌런드, 조지 브렌트 출연 | |
만찬에 온 사나이 (The Man Who Came to Dinner) | 매기 커틀러 | 모스 하트, 조지 S. 카우프먼 원작 | |
1943 | 라인의 감시 (Watch on the Rhine) | 새러 믈러 | 대실 해밋 대본 릴리언 헬먼 원작 |
Old Acquaintance | 작가 캐서린 "킷" 말로우 | 빈선트 셔먼 연출 기그 영, 앤 리베어 출연 | |
Thank Your Lucky Stars | 본인 | ||
1944 | 미스터 스케핑튼 (Mr. Skeffington) | 프랜시스 비어트리스 "패니" 트렐리스 스케핑튼 | 클로드 레인스 출연 |
할리우드 캔틴 (Hollywood Canteen) | 본인 | ||
1945 | 푸른 옥수수 (The Corn Is Green) | 릴리 크리스터벌 마패트 양 | |
1946 | 도둑맞은 인생 (A Stolen Life) | 케이트 보스워스/퍼트리셔 보스워스 | 글렌 포드 출연 |
디셉션 (Deception) | 크리스틴 래드클리프 | ||
1948 | June Bride | 린더 길먼 | 로버트 몽고메리, 데비 레널즈 출연 |
1949 | Beyond the Forest | 로저 몰린 | 킹 비더 연출 조셉 코튼 출연 |
1950 | 이브의 모든 것 (All About Eve) | 마고 채닝 | 제 4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외 1 건 |
1951 | Payment on Demand | 조이스 램지 | |
1952 |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전화 (Phone Call from a Stranger) | 머리 호우크 | 셸리 윈터스 출연 |
1953 | 스타 (The Star) | 마거릿 엘리엇 | 스털링 헤이든, 내털리 우드 출연 |
1955 | 여왕과 로올리경 (The Virgin Queen) | 엘리자베스 1세 | 두 번째 엘리자베스 1세 연기 |
1956 | The Catered Affair | 애그니스 헐리 | 어니스트 보그나인, 데비 레널즈 출연 |
1959 | The Scapegoat | 드 게 백작 부인 | 알렉 기네스 출연 |
1961 | 포켓에 가득찬 행복 (Pocketful of Miracles) | 애플 애니 | 프랭크 캐프러 연출 글렌 포드 출연 |
1962 | 제인의 말로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 베이비 제인 허드슨 | 조운 크로퍼드 출연 |
1963 | La noia | 디노의 엄마 | 이탈리아 영화 |
1964 | 데드 링거 (Dead Ringer) | 마거릿 들로커/이디스 필립스 | 칼 몰든, 피터 로퍼드 출연 |
허쉬 허쉬 스윗 샬롯 (Hush...Hush, Sweet Charlotte) | 샬럿 할리스 | 더 해빌런드, 조셉 코튼 출연 | |
Where Love Has Gone | 제럴드 헤이든 부인 | 수전 헤이워드 출연 | |
1965 | The Nanny | 유모 | |
1968 | The Anniversary | 태거트 부인 | |
1971 | 노인 강도 (Bunny O'Hare) | 버니 오헤어 | 어니스트 보그나인 출연 |
1972 | 핵잠수함 스타피쉬 (Madame Sin) | 신 부인 | 로버트 웨그너 출연 |
1973 | Scream, Pretty Peggy | 엘리엇 부인 | TV 영화 |
1976 | 마리안의 욕망 (Burnt Offerings) | 일리저버스 숙모 | 캐런 블랙, 올리버 리드 출연 |
1978 | 나일 살인 사건 (Death on the Nile) | 머리 밴 스카일러 | 피터 유스티노프, 데이비드 니븐 출연 |
마녀의 산 2 (Return from Witch Mountain) | 리서 웨지 | 크리스토퍼 리 출연 | |
The Dark Secret of Harvest Home | 더 위도우 포춘 | TV 미니시리즈 | |
1980 | 숲속의 눈동자 (The Watcher in the Woods) | 에일우드 부인 | 캐럴 베이커 출연 |
1985 | 겨울 살인사건 (Murder with Mirrors) | 캐리 루이즈 세러콜드 | TV 영화 헬런 헤이즈가 제인 마플 역 |
1986 | As Summers Die | 해나 러프튼 | TV 영화 제이미 리 커티스 출연 |
1987 | 8월의 고래 (The Whales of August) | 리비 스트롱 | 릴리언 기쉬, 앤 소던 출연 |
1989 | 사악한 입맞춤 (Wicked Stepmother) | 머랜더 피어포인트 |
6. 어록
조안 크로포드와의 불화에서 볼 수 있듯 굉장히 터프한 성격이라 성격에 걸맞은 직설적인 어록을 많이 남겼다.늙음은 계집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 이것이 나의 신조다.
섹스는 인간에 대한 신의 가장 큰 농담이다.
50살이 되었을 때, '여기에 우리가 반세기 동안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60살이 되는 건 조금 무서웠다.
70살이 될 때 내가 무얼 하고 있었냐고? 나는 검은 얼굴로 검은 가발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화환을 문 앞에 걸었다.
60살이 되는 건 조금 무서웠다.
70살이 될 때 내가 무얼 하고 있었냐고? 나는 검은 얼굴로 검은 가발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화환을 문 앞에 걸었다.
성공은 새로운 목표를 낳을 뿐이다.
[1] 결혼 후 성을 하이먼으로 바꾸어 B.D. 하이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Margot "Margo" Mosher Merrill.[A] 입양.[A] [5] 이후 그리어 가슨이 타이 기록(1942–46년)을 냈다.[6] 달리 말하면 엄청난 디바여서 커리어 중반 이후로는 제작사, 제작자, 감독, 동료배우 할것 없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직언을 퍼부어서 많이들 껄끄러워 했다.[7] 영화평론가 라버트 오즈본.[8] 현대 평론가들은 배우의 외모 기준이 까다롭지 않은 오늘날의 할리우드에 와선 데이비스의 얼굴이 그저 멋지게 보이게 됐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의 관객들은 데이비스가 당시 왜 그렇게까지 외모를 비하 당했는지, 이를 오로지 연기로 극복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체감하기 힘들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했다.[9] 베티 본인은 이 곡을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자기를 다시 각인시킨 곡이라고 자필로 작곡자와 칸스에게 편지를 보냈을 정도. 손자도 자길 존경하게 만든 곡이라고 한다. 이후 그래미상 수상 당시 장미 화환을 보냈다고 한다.[10] 하워드 B. 고틀립(Howard B Gotlieb).[11] 워너 사에서 제안한 세 명 중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역을 따낸건 멜라니 역의 더 해빌런드가 유일하다.[12] 정확히는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베이비 제인 역이 크로퍼드의 역을 질투하며 일방적으로 증오한다.[13] 2024년기준으로 250만달러 가량의 액수다.일반인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한때 할리우드 톱 여배우의 유산으로는 그닥...[14] 일이 벌어졌을 당시에 무어는 9살이었으나 업계에 들어온 후 이 일화를 전해듣고 자서전에 적어두었다.[15] 워너 사는 두 사람을 위해 여성재소자들을 소재로 한 <Caged>(1950)를 기획했는데, 데이비스가 "레즈비언 영화 같은 건 안 찍는다"며 거부해 다른 배우들로 교체되었다는 얘기가 있다.[16] Katherine Albert. Dale Eunson.[17] Joan Evans.[18] Alfred Steele. 1900 - 1959.[19] 데이비스는 영화의 제작에도 관여했기에 영향력이 컸다.[20] 처음엔 꾀병이었으나 나중에는 피로가 몰려와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고 한다.[21] 다만 이 일화를 주장한 찰스 하이앰 저술 서적의 신빙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22] Fred Otash. 많은 유명 누아르 소설과 영화 주인공들이 오태쉬에 기초하고 있다.[23] 그 대신 다양하게 제공된 논알콜 음료들 중에선 우유가 가장 잘 나갔다고 한다.[24] Hollywood Canteen.[25] 베티의 뜻에 동참한 할리우드 스타들 명단 보면 전부 기라성급이다. 당시 데이비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부분.[26]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와 70년대 미국 공포 영화를 이끌었던 배우였다. 로버트 올트먼 영화에도 출연했다.[27] 당장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2위로 1위인 캐서린 헵번과 엎치락뒤치락한다.[28]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데이비스는 <이브의 모든 것>을 찍을 때 42세였다. 반면 이브 역을 맡은 백스터는 당시 27세였다. 백스터가 상당히 동안인 건 맞지만, 데이비스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브의 모든 것> 속 모습은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다.[29] <Kid Galahad>와 함께 오름.[30] 휴스턴 부재 중 연출을 맡았으나 크레딧 미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