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efd88f> 제임스 카그니 James Cagney | |
본명 |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 James Francis Cagney Jr.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899년 7월 17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 | |
사망 | 1986년 3월 30일 (향년 86세) |
미국 뉴욕주 스탠퍼드 | |
묘지 | 미국 뉴욕주 뉴욕시 천국의 문 공동묘지 |
직업 | 배우, 무용수 |
활동 기간 | 1921년 - 1984년 |
영화 데뷔 | 1930년, 'Sinners' Holiday' |
경력 | 미국배우조합 6대 협회장(1942년 - 1944년) |
신장 | 165cm |
배우자 | 프랜시스 버넌(1922년 - 1986년 캐그니 본인의 사망) |
자녀 | 슬하 1남 1녀(모두 입양) |
종교 | 가톨릭 |
지지정당 |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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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배우.2. 생애 및 활동
고전 할리우드 시절 악한 연기로 유명했던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다.1899년 7월 17일 뉴욕시 맨해튼 빈민가 다세대 주택에 살던 제임스 캐그니 시니어와 캐럴린 넬슨 캐그니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집을 운영하는 바텐더이자 아마추어 권투선수였다.
형제 중 두 명[1]이 의사가 되었다. 동생 윌리엄 "빌" 캐그니[2]는 훗날 제임스 캐그니의 사업 동료가 되어 출연작들의 계약 및 제작에 관여했다. 여동생 진 캐그니[3]는 배우로 활동했다.
14살 때부터 신문 "뉴욕 선"의 사환, 뉴욕 공공도서관 장서관리인 등 다양한 일을 학업과 병행했다.
1919년 워너메이커 백화점 점원으로 있을 때 심심해서 춤을 추다가 동료에게서 보드빌 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오디션을 통과한 캐그니는 "Every Sailor"에서 여장 코러스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싫어했지만, 캐그니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술회했다. 브로드웨이 롱에이커 극장(Longacre Theatre)의 쇼 "Pitter Patter"에서 코러스 보이가 되면서 탭댄서로 일했다. 캐그니는 자신의 연예인 정체성은 무용수가 먼저였으며, <성조기의 행진>(1942)에서 보여준 춤솜씨들은 전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뮤지컬 영화에서 워낙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춤을 활용한 출연작이 거의 없다.
케리 그랜트는 아직 이름이 아치볼드 리치일 적에 "파커랑 랜드랑 리치"(Parker, Rand, and Leach)란 이름의 삼인조 보드빌 공연팀에 있었는데, 그랜트가 나가면서 캐그니가 1921년 오디션을 통해 이 팀에 새로 뽑히게 된다. 캐그니가 들어온 뒤로는 이 팀의 이름은 "파커랑 랜드랑 캐그니"(Parker, Rand, and Cagney)가 되었다.
1930년 머리 바우머(Marie Baumer)가 쓴 연극 "Penny Arcade" 개작의 주연을 맡았다. 이 연극을 본 앨 잔슨(Al Johnson)은 영화화 판권을 산 뒤 워너 브라더스에 팔았다. 그래서 나오게 된 영화가 데뷔작인 <Sinner's Holiday>였다. 캐그니는 이미 이때부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대사는 연기를 거부하는 등 고집 센 면모를 보였다. 겨우 3주 단기 계약으로 시작된 워너와의 관계는 7년 짜리 장기 계약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어딘가 동정을 자아내는 악한은 이후 캐그니의 경력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다섯 번째로 찍은 영화 윌리엄 A. 웰먼의 <공공의 적>(1931)을 통해 스타 지위에 등극했다. 한때는 가제가 "Beer and Blood(맥주와 피)"였던 이 영화에서 캐그니는 정서 불안의 악한을 연기했다. 캐그니가 메이 클라크의 얼굴에 대고 자몽을 뭉개는 장면으로부터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묘사가 암묵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다.[4] 에드워드 G. 로빈슨과 출연한 <스마트 머니>(1931)에선 아예 여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친다.
악한 연기에 대한 높은 대중선호도로 워너는 계속 캐그니를 "깡패 영화"에 출연시켰다.
1930년 워너와 계약한 첫 해엔 주급이 500 달러였고, 일 년에 다섯 편을 찍는다는 조건이었다. 1931년에 <Blonde Crazy> 직후 주급이 1,000 달러로 올라갔다. 1932년 <Winner Take All>을 찍고 나자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에드워드 G. 로빈슨 수준이 돼 주급 3,000달러를 받게 됐다.
1935년 워너가 일 년에 탑 빌링 네 편씩만 찍기로 해놓고 <Ceiling Zero>를 개봉하면서 팻 오브라이언의 이름을 제일 위에 올리자 캐그니는 워너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해 승소했다. 캐그니는 훗날 자신이 워너에 반항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베티 데이비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미리엄 합킨스가 워너와 싸울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38년 잭 워너는 캐그니와 한 편당 150,000 달러 계약을 맺고 흥행 수익에 따른 추가 보상까지 약속했다.
미국배우조합에서 한참 업계에서 마피아를 몰아내려고 애쓰던 1942년 협회장이 됐는데, 마피아로부터 살해 협박이 시작됐다. <성조기의 행진>을 찍으려고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머리에 아크등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캐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마피아 조직에서 범죄일에 가담하고 있던[5] 동료 배우 조지 래프트가 캐그니는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해 협박이 끝났다고 한다.
1961년 은퇴했던 캐그니는 뇌졸중을 겪은 뒤 1981년 치료비에 보태기 위해 밀로쉬 포맨의 <래그타임>으로 복귀하면서 말년에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4년 이후 완전히 은퇴했고 1986년, 뉴욕의 농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항년 86세. 추도사는 절친 로널드 레이건이 맡았다.
3. 주요 작품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배역 |
1930 | 천국의 새 | 해리 델러노 |
The Doorway to Hell | 스티브 마일어웨이 | |
1931 | Other Men's Women | 에드 |
공공의 적 | 탐 파워스 | |
스마트 머니 | 잭 | |
Blonde Crazy | 버트 해리스 | |
1932 | Taxi! | 맷 놀런 |
Crowd Roars | 조 그리어 | |
Winner Take All | 지미 케인 | |
1933 | Hard to Handle | 마이런 C. "레프티" 메럴 |
풋라이트 퍼레이드 | 체스터 켄트 | |
Lady Killer | 댄 퀴글리 | |
1934 | Jimmy the Gent | 지미 코리건 |
He Was Her Man | 플리커 헤이즈 | |
히어 컴스 더 네이비 | 체스터 "체스티" 오카너 | |
1935 | Devil Dogs of the Air | 타머스 제퍼슨 "타미" 오툴 |
The Irish in Us | 대니 오해러 | |
한여름 밤의 꿈 | 닉 보톰 | |
Frisco Kid | 뱃 모건 | |
G Men | 제임스 "브릭" 데이비스 | |
1936 | Ceiling Zero | 디지 데이비스 |
1937 | Something to Sing Abou | "테리" 루니 |
1938 | Boy Meets Girl | 라버트 로 |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 | 윌리엄 "라키" 설러번 | |
1939 | The Oklahoma Kid | 짐 "디 오클러호머 키드" 킨케이드 |
Each Dawn I Die | 신문기자 프랭크 로스 | |
포효하는 20년대 | 에디 바틀렛 | |
1940 | The Fighting 69th | 제리 플렁컷 이등병 |
Torrid Zone | 닉 버틀러 | |
City for Conquest | 대니 케니 | |
1941 | 더 스트로베리 블론드 | 비프 그라임스 |
The Bride Came C.O.D. | 스티브 칼린스 | |
1942 | 성조기의 행진 | 조지 M. 코핸 |
Captains of the Clouds | 브라이언 맥클레인 | |
1943 | Johnny Come Lately | 탐 리처즈 |
1945 | 백주의 피 | 기자 닉 컨든 |
1946 | 13 루 매들렌 | 라버트 에멧 "밥" 샤키 |
1948 | The Time of Your Life | 조지프 "조" T. |
1949 | 화이트 히트 | 아서 "코디" 재럿 |
1951 | 컴 필 더 컵 | 루 마쉬 |
Starlift | 본인 | |
1952 | What Price Glory | 플래그 대위 |
1953 | A Lion Is in the Streets | 행크 마튼 |
1955 | 사랑하거나 떠나거나 | 마튼 스나이더 |
미스터 로버츠 | "선장" 모튼 소령 | |
1956 | Tribute to a Bad Man | 제러미 로덕 |
1957 |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 란 체이니 |
1959 | Shake Hands with the Devil | 숀 레너핸 |
1961 | 원, 투, 쓰리 | C.R. "맥" 맥너매러 |
1981 | 래그타임 | 경찰국장 라인랜더 왈도 |
1984 | Terrible Joe Moran | 조 머랜 |
4. 정치관
- 한때 민주당을 지지했으며, 프랭클린 D. 로저벨트 대통령의 재선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리 S. 트루먼을 거치며 실망해 1948년엔 공화당 후보 토머스 E. 듀이에게 투표했으며, 1960년대 반문화를 경험하며 더 보수적으로 변해 1980여년까지 공화당에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절친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뒤엔 레이건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 캐그니는 자신이 개인/시민으로서의 자유 외에는 그 무엇도 좇지 않는다고 늘 강조했지만 1930년대에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샀고 정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여럿이다.
- 1918년 노동운동가 타머스 무니(Thomas Mooney)가 명백히 조작된 증언과 증거에 근거해 억울하게 무기징역형을 받자 상류층과 할리우드에서 1939년 무니가 사면될 때까지 장기 구명 운동을 펼쳤는데, 캐그니 역시 변호 비용을 지원했었다.
- 할리우드 전체가 좌익 성향을 의심 받던 시절인 1933년 영화배우조합에 들어갔다.
- 고전 할리우드 시절 제작사 수장들은 소속 탑스타들의 하루치 급료를 "세금" 형태로 제해 제작사 자금을 정치인들에게로 은밀히 이동 시키고 있었다. 특히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선 총 50만 달러가 공화당 후보 프랭크 메리엄[6]에게 흘러들어갔다. 캐그니는 이 "메리엄 세금(Merriam tax)"에 반대하는 반란에 참여해 진 할로우와 함께 이 세금을 내는 걸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캐그니는 워너 브라더스에 이 세금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경쟁 후보 업튼 싱클레어의 캠프에 일주일치 급료를 기부하겠다고 선포했다. 여담이지만 이 선거에선 결국 메리엄이 이겼다.
- 1935년 캘리포니아 샌 와킨 밸리(San Joaquin Valley) 목화 채취 노동자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기부를 한 적이 있는데, 이를 주관한 단체가 좌파였다.
- 1931년 앨라배마주에선 9명의 흑인 청소년들이 2명의 백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스카츠보로 소년 사건(Scottsboro Boys)이 있었다. 나중에 소녀들이 흑인 소년들과 시비가 붙었던 백인 소년들의 위압 때문에 위증했음을 인정했는데도 결국 3명이 수감됐다. 흑인들은 참정권이 없어 배심원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풀려난 흑인 소년들이 린치 위기에 몰리자 1936년 캐그니는 이들의 후원에 참여했는데, 이 후원의 중심에 있던 게 미국 공산당이었다. 미국 공산당은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벽에 대표 후원자들 중의 하나로 캐그니의 이름을 걸어놓기도 했다.
5. 가족
1920년에 "Pitter Patter"의 코러스 보이가 되면서 같은 극장에서 "버넌과 나이(Vernon and Nye)"라는 그룹의 댄서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1922년 결혼했고 평생 부인에게 충실했던 걸로 유명한데 무려 64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 아내의 중간 이름인 윌러드(Willard)에서 따온 윌리(Willie)와 빌(Bill)이 애칭이었는데, 동생도 마침 빌로 불렸기 때문에 아내를 빌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My Bill(나의 빌)"이라고 했다.5.1. 입양 자녀 논란
아버지로서는 실격이어서 1940년에 입양한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3세(James Francis Cagney III), 역시 입양한 딸 캐슬린 "케이시" 캐그니(Cathleen "Casey" Cagney) 둘 모두와 절연했고, 말년엔 자식들과 전혀 왕래가 없었다. 부부 사이엔 사랑이 넘쳤으나 입양한 자식들은 아껴주지 않았다는 점은 메리 픽포드 부부와 같다. 픽포드의 경우처럼 소문도 날만큼 나있었다.입양 아들은 1984년 제임스 캐그니보다 먼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42세.
제임스 캐그니는 출생 당시 풀네임이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James Francis Cagney Jr.)였는데 아버지 제임스 캐그니 시니어 사망 후엔 본인이 제임스 캐그니 시니어가 되었고, 입양한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3세가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가 되어 입양 아들이 사망했을 시점엔 손자가 제임스 캐그니 3세(James Cagney 3d)로 불리게 되었다. 입양 아들은 손녀 신디 캐그니(Cindy Cagney)도 남겼다.
이때 제임스 캐그니의 조수는 입양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임스 캐그니가 "매우 속상해했다"고 언론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제임스 캐그니는 사망 직전에 가졌던 인터뷰에서 기자가 가족 제도가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 의견을 묻자 이를 비판하고 자신이 형제들을 얼마나 잘 돌봤는지를 강조하기까지 했다.[7]
그러나 제임스 캐그니는 2년 뒤인 1986년 사망하면서 당시 생존해있던 입양 딸 케이시 캐그니는 물론 손주들 전체를 유산 상속에서 제외했다. 그나마 메리 픽포드는 자녀들에게 명목상의 소액 유산을 분배하기라도 했는데 제임스 캐그니는 그마저도 없었다. 입양 아들 사망 시에 조수가 했던 말은 그저 흉흉했던 여론을 잠재우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딸은 캐그니를 용서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 1984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 배우로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20명도 안된다.[8]
- 젊은 시절 경작에 관심을 보였고 말과 보트 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탑승해봤다고 할 정도로 말을 애용한듯. 뉴욕주 북부에 농장을 소유해 한때 가축 두수가 175에 달했다.
- 많은 고전 할리우드 동료들처럼 말년에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배우로서의 명성이 있어 그림 한 점당 65,000 달러까지 제안 받았는데, 젊은 화가들의 기회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해 팔지 않았다고 한다.
- 시쓰기도 취미였다.
- 에드워드 G. 로빈슨이 다른 배우들에게 잘난체를 하고 독재적으로 지시하곤 했다고 말했다. 하루는 화가 난 조지 래프트가 때려서 로빈슨이 나가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 험프리 보가트는 배우로서 존재감이 있었으며 요구 받는 모든 걸 해냈지만 인간적으론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보가트는 사람들을 멀리했는데, 자신이 그들을 먼저 싫어해 거리를 둔다는 인상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 과거 할리우드 황금기의 제작사 중심 체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제작사 윗선들 역시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생전부터 전기 영화 시도가 있었다. 본인도 <성조기의 행진>(1942)에서 업계 실존인물을 연기해 아카데미상을 탄 전적이 있는만큼 자신의 삶을 영화화하려는 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연기하고 싶어했는데, 캐그니는 그의 억양을 문제 삼으며 만류했다. 트리트 윌리엄스[9]도 의사를 밝혔다. 존 트래볼터에게도 제안이 갔었는데 트래볼터는 내가 그걸 어떻게 해낼 수 있겠냐며 마이클 J. 폭스를 추천했고, 폭스가 최종 낙점 되었으나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 폭스는 캐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James Cagney: Top of the World>(1992)에서 해설을 맡기도 했다.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오슨 웰스와도 닮았다.
[1] 해리(Harry)와 에디(Eddie).[2] William "Bill" Cagney.[3] Jeanne Carolyn Cagney. 1919 - 1984.[4]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애인을 불합리하게 괴롭히는 장면이기 때문에 악랄한 폭력성이 더 부각되었다. 이 영화에 나왔던 조운 블란델이 <스파이 인 더 그린 햇(The Spy in the Green Hat)>(1967)에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5] 범죄 현장에서 도망칠 때 차량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소위 운전수("driver") 역할을 하고 있었다.[6] Frank Merriam. 1865 - 1955.[7] 물론 해당 기자는 캐그니를 돌려까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8] 그마저도 자선 활동을 포함하여 수상한 사람들이 많다.[9] Treat Williams. TV 드라마 "Everwood"(2002-5)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