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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픽포드의 주요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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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43d77><colcolor=#ffffff> 메리 픽포드 Mary Pickford | |
본명 | 글래디스 마리 스미스 Gladys Marie Smith |
출생 | 1892년 4월 8일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
사망 | 1979년 5월 29일 (향년 87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 | |
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프로듀서 |
활동기간 | 1900년 – 1955년 |
신체 | 154cm |
배우자 | 오언 무어(1911년 결혼–1920년 이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1920년 결혼–1936년 이혼) 찰스 "버디" 라저스(1937년 결혼–1979년 사별) |
자녀 | 아들 라널드 "라니" 찰스 라저스(1937년생)[A] 딸 락샌 라저스(1944년생)[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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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Queen of the Movies"
"America's Sweetheart"
캐나다 태생의 배우.릴리안 기시,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무성 영화 시절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유명 배우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공동 설립자 4인 중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미국의 연인(America's Sweetheart)이라는 호칭을 받은 최초의 영화 배우이며 특유의 작은 신체와 곱슬머리로 대변되는 소녀 역할을 주로 맡아서 'Little Mary'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첫 번째 유성영화인 <코퀘트(Coquette)>를 통해 제2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 활동
1892년 토론토에서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글래디스 머리 스미스. 아버지 존 찰스 스미스는 영국 감리교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샬롯 헤네시는 아일랜드 카톨릭 혈통으로 한동안 재봉사로 일했다. 샬럿 스미스(Charlotte Smith, 1893년생)와 존 찰스 스미스(John Charles Smith, 1896년생)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1900년 7살의 나이에 아역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삼남매는 어머니와 함께 철도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돌며 3류 극단에서 공연했다. 1907년 글래디스 머리 스미스는 브로드웨이에서 비중 있는 역할의 연기를 맡게 되었다. 이 일이 실패한다면 연기를 그만두려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브로드웨이 공연과 연극 순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예명을 메리 픽포드로 바꾸고 1909년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감독이 있는 바이어그래프사와 계약을 체결하며 그 해에만 51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다. 역할은 유부녀나 비서, 노예, 청소부, 아메리카 원주민, 매춘부 등의 보잘 것 없는 단역으로 크레딧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관객들은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서 이목을 끄는 픽포드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극장에서도 영화 광고를 '금발 곱슬머리 소녀', '바이어그래프 걸'이 나오는 작품이라고 소개하며 픽포드의 인기를 이용했다.
1913년부터 픽포드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설립자 애돌프 주커[3]와 함께 일하며 본격적으로 주연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를 오랫동안 경험한 주커는 그 동안 영화 현장에서 비중이 낮았던 배우가 중심이 되는 '스타 시스템'이 영화 산업의 핵심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주커는 같은 감독과 스탭이 제작하더라도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흥행이 극과 극을 달린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시기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던 감독주의를 벗어나 브로드웨이의 스타 배우들을 대거 계약하여 스타 중심으로 영화를 찍어내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매리 픽포드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이 계속해서 흥행에 성공하자 픽포드는 영화 산업의 주체가 배우 자신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기존에 비해 높은 출연료를 요구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는 순조롭게 성공하여 1916년 6월 24일에 주커와 새 계약을 맺으면서 매리 픽포드는 100만 달러(현대 기준 217억 원 상당) 계약을 맺은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매리 픽포드는 주커로부터 자신이 출연한 영화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권한을 보장받았고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기 시작한다.
1918년, 재계약 시점이 되자 메리 픽포드는 주커와의 재계약을 거절했다. 그리고 소수의 메이저 스튜디오가 영화 제작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배우와 감독은 스튜디오에 얽매여 있던 당시에 그녀는 배우와 감독들에게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1919년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했다.
매리 픽포드의 무성영화 대표작으로는 <Tess of the Storm Country>(1914, 1922[4]), <Rebecca of Sunnybrook Farm>(1917), <Poor Little Rich Girl>(1917), <Polyanna>(1920) 등이 있다. 동생들도 예명을 지어 라티 픽포드[5], 잭 픽포드[6]로 활동했는데 잭 픽포드가 메리 픽포드의 출연작인 <Through the Back Door>(1921) <소공자>(1921)을 감독하기도 했다.
1926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돈 주앙(Don Juan)>을 내놓으면서 영화에 소리를 첨가하는 시대가 개막했을 때, 매리 픽포드는 소리가 "밀로의 비너스[7]에 립스틱을 바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체에 대한 경박한 장식"에 불과하다고 여겨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1928년 다시 워너에서 내놓은 <뉴욕의 불빛(The Lights of New York)>을 시작으로 토키가 영화계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1930년쯤 되자 무성영화는 완전히 죽은 매체가 되어있었다.
유성영화가 영화의 미래임을 깨달은 매리 픽포드는 무성영화 스타 중 최초로 유성영화에 도전했다. 당시 음향기술의 한계로 거슬리는 소리가 담겼고 배우들은 녹음기가 허용하는 일정 공간 이상을 벗어나지 못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매리 픽포드는 예전에 무대에서 배운 연기술을 적용하며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려고 애썼고 <코퀘트>(1929)로 좋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남자를 유혹하는 픽포드의 캐릭터가 기존에 매리 픽포드가 곧잘 맡던 순수한 배역들과 이미지가 충돌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관객들은 매리 픽포드의 기존 배역들이 고루하다고 생각하며 픽포드보다 더 섹시하고 젊은 배우를 요구했다.
한계를 느낀 매리 픽포드는 1933년 영화 배우로서 은퇴를 선언했으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영화 제작에는 꾸준히 참여했다.
3. 사생활
- 첫 번째 남편은 1911년에 결혼했던 배우 오언 무어[8]다. 무어는 수시로 가정폭력을 저질렀다. 픽포드가 1916년에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불륜 관계가 되면서 1920년 이혼했다.
- 두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는 1919년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1920년 픽포드와 재혼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사이가 멀어져 있었다. 페어뱅크스는 실비어 애슐리[9]와 내연 관계가 되었다.
"America's Boyfriend(미국인들의 남자친구)"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버디" 라저스[10]는 캔자스주 올레이더[11] 출신으로 <날개>(1927)가 대박을 친 덕분에 1927년 픽포드와 <My Best Girl>을 찍을 수 있었다. 12살 연하의 라저스는 이때 픽포드에게 첫눈에 반했다.
매리 픽포드는 버디 라저스와 관계를 갖는 한편 한 유력 기업가와의 스캔들도 동시에 난다. 경력이 안 풀리는 가운데 가정까지 엉망이 되다보니 그녀는 술에 기대면서 알코올 의존증이 되고 말았다.
버디 라저스 |
1936년 픽포드는 페어뱅크스와 이혼했다.
- 세 번째 남편이 되는 내연남 버디 라저스는 매리 픽포드가 페어뱅크스와 이혼하자마자 청혼을 해대기 시작했다. 페어뱅크스가 이혼한 바로 그해에 내연녀였던 실비어 애슐리와 결혼하자 같은 해인 1936년 픽포드도 라저스와 결혼을 감행한다. 사람들은 둘의 나이차를 두고 뒷담화를 해댔는데, 픽포드가 페어뱅크스에게 복수를 하려고 보여주기식으로 삼혼을 한 거라고 생각해 더 입방아를 찧어댔다.
버디 라저스는 평생 매리 픽포드에게만 충실했던 애처가로, 술에 취한 픽포드가 자신을 실수로 전남편 이름인 "더글러스"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았다.
3.1. 입양자녀 관련 논란
결혼 6년 뒤인 1943년 51세가 됐을 때 픽포드는 6살짜리 고아 라널드 "라니" 라저스[12]를 입양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여자 아기 락샌[13]을 데려온다.두 부부는 진정한 부모로서의 정을 자녀들에게 주지 않고 둘을 사진을 찍을 때나 소품으로 써먹었는데, 곧 라니 라저스의 짧은 신장과 락샌 라저스의 뒤틀린 치열을 거슬려하게 돼 소품으로 써먹는 것도 중단하고 아예 기숙학교로 보내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이들은 부부 간의 금슬은 좋았으나 양육자로서는 구제불능이었다.
자녀들은 격렬히 반항한 끝에 둘 다 10대 후반에 이른 결혼을 감행했고, 아들 라니 라저스는 나중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픽포드는 병원에 와서는 왜 자신을 힘들게 이런 데까지 찾아오게 만드냐고 불평했다.
1970년대에 라니 라저스와 락샌 라저스는 막노동 등을 하며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픽포드는 4-50년대엔 영화 제작과 자선행사에 참여하고 라디오 일을 하기도 했지만 곧 은둔에 들어갔다. 주로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자신의 대저택 픽페어[14]에 머물며 소수하고만 교류했다. 그 친구들은 픽포드에게 입양자녀들에 대해 질문하는 게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부부지간엔 사이가 좋고 입양 자녀들에겐 냉담했던 또 다른 예시로는 제임스 캐그니가 있다.
4. 사망
1976년 영화계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을 때, 시상식까지 갈 기력이 없는 매리 픽포드를 위해 픽포드의 자택에서 시상했는데, 이때 노화한 모습을 갑자기 오랜만에 접하게 된 많은 미국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1979년 5월 29일 캘리포니아주 산타 모니카에서 뇌출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글렌데일에 있는 포리스트 론 묘지 내 기억의 정원에 묻혔다.
매리 픽포드는 유언장에 두 자녀 앞으로 각각 겨우 50,000달러만을 남겼는데 그조차도 원래는 15,000씩만을 주려다 마음을 바꾼 것이었고, 50,000달러가 전부 집행되지도 않았다.
5. 여담
- 본인과 마찬가지로 무성영화 시절의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배우 릴리안 기시와 절친한 사이였다.
- 캐나다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료 배우들과 함께 채권 기금 모금 연설에 참여해 약 4천만 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팔았고, 채권 기금으로 5천 달러를 기부하며 공식적으로 미국 국기에 키스하는 등 미국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매리 픽포드는 미 해군의 공식적 여동생으로 불렸고, 육군은 그녀의 이름을 따 두 개의 대포를 명명하는가 하면, 아예 매리 픽포드를 명예 대령으로 임명했다.
- 그러나 매리 픽포드는 캐나다인임을 늘 자랑스러워하며 미국인과의 결혼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 이후에도 항상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다녔고, 거처도 고향 온타리오에 마련했다. 말년에는 "캐나다인으로 죽고 싶다"며 캐나다 국적을 회복했다.
- 1918년 스페인 독감의 생존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