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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4년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 |
혁명가 & 저항가들 |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 |
대통령들 |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 |
첫 여성들 |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 |
범법자들 |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 |
예술가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 |
종교인들 |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 |
팝 아이콘들 |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 |
제국 건설자들 |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 |
운동선수들 |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 |
출처 | }}}}}}}}} |
<colbgcolor=#000><colcolor=#fff> J. P. 모건 J. P. Morgan | |
본명 | 존 피어폰트 모건 John Pierpont Morgan |
출생 | 1837년 4월 17일 |
미국 코네티컷 하트퍼드 | |
사망 | 1913년 3월 31일 (향년 75세)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로마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기업인, 금융인 |
모교 | 괴팅겐 대학교 |
종교 | 성공회 |
배우자 | 어멜리아 스터지스(1861년 결혼–1862년 사별) 프랜시스 루이스 트레이시(1865년 결혼) |
자녀 | 장녀 루이자 피어폰트 모건(1866–1946) 장남 J. P. 모건 주니어(1867–1943) 차녀 줄리엣 피어폰트 모건(1870–1952) 차녀 앤 트레이시 모건(1873–1952)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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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 투자가, 은행가.일명 금융왕으로 명성을 떨친 금융인으로, 글로벌 금융 기업 JP모건 체이스의 전신인 'JP모건 코퍼레이션'을 창업한 인물이다. 금융업을 주력 사업으로 운영했지만 철도 회사[1]와 철강 회사[2]를 소유하기도 했다. 또 제너럴 일렉트릭과 AT&T의 창업에도 기여한 기업인으로 평가된다. 19세기 미국 금융가를 주름잡았으며 이 시기 국가를 능가할 만한 자금력을 소유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생애
J. P. 모건은 1837년 4월 17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조지프는 보험회사를 운영하였는데 1835년 뉴욕 월 스트리트에 대형화재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다른 보험회사들은 보험금 지금을 꺼렸는데, 조지프가 운영하는 애트나 보험만은 화재 피해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해주었다. 이로인해 그의 보험회사는 월 스트리트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J. P. 모건의 할아버지는 그가 10살일 때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인 주니우스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덕분에 J. P.모건은 보스턴 잉글리시 하이스쿨[3]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스위스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우고, 그 이후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미술사 학위를 취득했다.졸업 후 J. P.모건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피바디-모건사(Peabody, Morgan & Co)에 입사하게 되었다. 20살에 런던 지점에서 인턴으로 일한 그는 24살 때 피바디-모건사의 협력 파트너인 던컨-셔먼사(Duncan, Sherman & Company)에서 근무했다. 이쯤에 그는 미국 남부에 머물면서 면화 무역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거기서 몇달을 보냈다. 그 사이 사업구상을 한 그는 런던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 사업에 대해 논의를 했고 그러면서도 훗날 그의 첫번째 아내가 되는 아멜리아 스터지스에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업 구상을 하던 도중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에도 관여하여 떼돈을 벌었다. 북군은 사실상 전쟁채권이나 다름없는 그린백 지폐를 찍어냈는데, 당시 금본위제 시절이라서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지폐와 금 사이에 가격 격차가 커지기 시작했다. J. P. 모건은 그 시세 차익을 노리고 금을 대량으로 사재기한 뒤 해외로 빼돌렸다가 금값이 오를 때 파는 방식으로 떼 돈을 벌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홀 소총 사건이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J. P. 모건이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고, 미국 정부에게서 5000정의 소총을 한 정당 $3.5에 산 다음, 다시 미국 군부에 한 정당 $22에 되판 사건이다. 사실 복잡한 내막이 있는 사건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정부가 소총을 한 정당 $3.5에 팔았다가 다시 한 정당 $22에 산 사건이므로 굉장한 논란이 되었다. 이 비리에 관여한 J. P. 모건은 별다른 처벌없이 풀려났고 이 사건은 그의 발자취에 꼬리처럼 따라붙은 멍에가 되었다. 한편 피바디-모건사(Peabody, Morgan & Co)의 동업자인 조지 피바디가 동업계약을 끝내고 은퇴를 했다. 그는 은퇴할 때 회사명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져서 J.S.모건社(J. S. Morgan & Co.)로 이름을 바꾸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진정한 수혜자는 미국의 J. P. 모건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런던 금융가들은 프랑스의 경제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프랑스 국채를 15-20% 수준으로 마구 팔아버렸던 것을 미국의 J. P. 모건이 모두 사들였다. 프랑스가 국채에 대해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시의 프랑스 경제상황에서는 그게 맞았지만 J. P. 모건은 프랑스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유럽을 먹여 살리고 있는 프랑스의 거대한 '식량생산력'을 알고 있었고 모라토리움은 커녕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배상금 50억 프랑 정도는 1년도 안 돼서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했지만 프랑스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고 배상금을 다 갚았다.[4]
특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는 지금과 같은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유럽의 식량 수요는 온전히 유럽 안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J. P. 모건은 이를 떠받칠 수 있는 나라가 프랑스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영국을 포함한 EU에서 소비되는 식품의 40%를 프랑스가 생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치즈나 와인 같은 고가 가공품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같은 저가 육류마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나라에까지 수출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호주 등 낙농업이 발달한 국가조차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나라는 모두 프랑스로부터 식품을 수입하고 있다. 프랑스의 식품 산업이 품질, 생산력 등에서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된 J.P 모건의 유럽 체류 당시 일화가 있다. 그가 영국, 그리스 왕국, 러시아 제국에 이어 심지어 아프리카 모로코[5]에 있을 때도 호텔 웨이터가 계속 "식재료는 프랑스산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유럽에서 프랑스 말고는 농사를 짓는 나라가 없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웨이터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조금 하긴 하지요."라고 답해주자 그는 프랑스의 식량생산력에 감탄했다고 한다.[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덕분에 J. P. 모건은 조지 피바디의 명성 아래에 있던 평범한 은행가에서 미국은 물론이고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의 유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적 금융가로 성장하게 된다. 어느 정도냐면 미국 국회 청문회에서 "하느님이 발행한 채권도 내가 신용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다"고 일갈할 정도였다. 그 말대로 1907년 은행 패닉에서 그가 미국의 금융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강제적으로 채무조정을 한 결과 금융위기는 수습됐고, 연방준비제도가 만들어지게 된다.
1880년 미국에서 철도 산업은 급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쟁이 너무 심해져서 철도회사들은 부채에 허덕이게 되었다. 특히 뉴욕센트럴철도와 웨스트쇼어철도의 경쟁이 치열했는데 결국 악화된 수익성으로 인해 웨스트쇼어철도는 파산하였고, 뉴욕센트럴철도는 파산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J.P.모건이 두 회사 대표를 자신의 호화요트에 초대해, 두 회사가 합의하지 않으면 요트에서 내려주지 않겠다고 반협박했다. J.P.모건의 강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하게 되었고 더 이상의 요금 인하 경쟁은 없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회사의 수익성은 악화되어 갔다. 왜냐하면 대형화주들을 묶어두기 위해 철도회사들은 값싼 가격으로 화물을 운송하였기 때문이다. 화물운송에서 발생한 손해를 메꾸기 위해 그 손실을 중소기업과 철도 이용객들에게 전가했다. 이러한 불합리한 요금체계가 문제가 되자 결국 연방의회가 개입했다. 그러자 정부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한 J.P.모건이 개입했다. 그는 철도회사 관계자들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 요금인하 경쟁을 하지 않도록 요구했고 1889년 연방철도협회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3년 불황기에 철도회사들은 대거 파산했고 3분의 1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러자 J.P.모건은 파산한 철도회사에 대한 회생작업을 진행하였다. 파산한 회사를 인수해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는 철도회사들을 인수한 다음 그의 휘하 하에 두었다. 결국 드럭셀-모건사는 미국 철도회사의 3분의 2이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1890년 J.P.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이 마차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하고 이어서 그의 동업자인 앤서니 드럭셀이 사망하자 J.P.모건은 회사의 경영권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다.
1895년 유럽으로의 금 유출 때문에 미국이 채무불이행의 위기에 놓였을 때도 모건이 자금을 빌려준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에 대규모의 흉작과 내부 정쟁 그리고 쿠데타로 국가부도 사태가 발생하였고, 아르헨티나에 투자한 베어링 브라더스[7]가 파산위기에 몰렸다, 베어링 브라더스는 영란은행에 손을 벌렸고, 영란은행을 위시한 영국의 은행들은 이 부실을 메우기 위해 미국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국의 금이 다량으로 영국으로 흘러들어 가자 미국은 파산위기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J.P.모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만났다. 그는 로스차일드와 함께 사모 방식으로 채권을 발행해서 금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그는 남북전쟁 때 만들어진 전시국채법을 끄집어내 채권을 발행했고, 이를 통해 J.P.모건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30년 만기 채권 발행의 대가로 350만 온스의 금을 미국 재무부에 팔수 있게 되었다. 그는 대통령을 겁박해 대규모 국채발행을 허가받아 수백만 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이로인해 폭리를 취했다는 비판도 따랐지만 뉴욕 타임스는 "모건 같은 파수꾼이 없었다면 그 어떤 투자자도 미국 국채를 사기 위해 줄을 서지 않았을 것"라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JP 모건의 사업들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소위 '모건화'(Morganization)로 유럽자본을 끌여들어서 적당한 기업을 인수하고 구조조정 등을 통해 비용을 낮춰 수익을 낸 다음, 그 기업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적대적 흡수합병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려 독과점 기업을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굉장히 성공적이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기업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미국최대의 철강회사인 US Steel이다. JP 모건과 앤드류 카네기가 최초로 시도한 것들 중 하나가 수직계열화이다. 당시 J.P.모건은 미국 2위 철강회사 페더럴 스틸에 투자했는데, 어느 날 카네기의 심복 슈와브가 그에게 철강 트러스트를 제안했다. 이에 동의한 J.P.모건은 4억 8천만 다럴에 카네기 철강을 인수했고 그 후 다른 철강회사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자신이 만들 철강 트러스트에 가입하라는 것이다. 각종 강압적인 수단을 써서 회사의 경영권을 손에 넣은 J.P.모건은 3개월 만에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 US스틸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금융, 철도에 이어 철강까지 J.P.모건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J.P.모건은 영국의 해운회사들을 끌어들여서 해운 트러스트를 만들었다. 그는 당시 최대의 여객회사인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을 인수해 여객 분야에도 진출하였다.[8] J.P.모건은 독과점이 경제와 소비자에게 이롭다고 진심으로 믿었지만, 대중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901년 윌리엄 매킨리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미국 경제를 좀먹는 벌레나 다름없는 트러스트들을 손보기로 결정했다. 반독점법의 철퇴를 맞을 위기에 쳐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1907년 은행 패닉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 3위의 신탁회사인 니커보커 신탁회사가 파산위기에 몰린 것이다. 투자자들은 신탁회사에 몰려고 예금 인출을 요구했다. 니커보커 신탁이 파산하고 아메리카 신탁이 파산 위기에 몰리자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조지 코텔유는 J.P.모건을 비롯한 월 스트리트의 금융가를 불러 사태 해결을 위한 협조를 부탁했다. 하지만 다른 은행가들은 아메리카 신탁 구제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지만, J.P.모건은 달랐다. 그는 아메리카 신탁의 파산을 막자고 호소하면서 퍼스트 내셔널 은행과 내셔널시티은행과 함께 300만 달러를 조성해서, 아메리카 신탁의 파산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뱅크런은 없어지지 않았다. 뉴욕증권거래소가 파산위기에 몰린 것이다. J.P.모건과 월 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은 콜금리10%를 조건으로 2500달러를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뉴욕시의 재정이 바닥난 것이다. J.P.모건은 3,000만 달러를 투입해서 뉴욕시의 파산을 막았다. 그 이후 테네시 석탄·철강·철도 회사가 파산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 회사는 무어 앤 슐레이라는 대형 증권회사에 돈을 빌렸는데 테네시 석탄·철강·철도 회사가 파산위기에 몰리자 무어 앤 슐레이도 파산위기에 빠졌다. 이에 J.P.모건은 월 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을 소집해 2,500만 달러의 구제자금을 만들었다. 결국 J.P.모건의 활약으로 금융시장 패닉을 수습하였고 미국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몰락은 이 때 시작되었다.
그가 인수한 회사 화이트 스타 라인의 여객선 타이타닉이 침몰하면서 부터였다. 타이타닉이 침몰하면서 화이트 스타 라인의 실질적 소유주인 J.P.모건이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J.P.모건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자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챙기는 것을 등한시 했다는 거다.[9] 결국 트러스트를 해체해야 한다는 대중의 요구에 정치권이 응하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대통령은 푸조 위원회를 설립해 금융산업 독점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푸조위원회는 소수의 금융가들이 미국의 산업에 통제권을 쥐고 있고 그 정점에는 J.P.모건이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결국 청문회에 불려나온 J.P.모건은 의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이로인해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다. 결국 그는 휴양 차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여담
-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로 남은 금융인답게 투자 관련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니콜라 테슬라의 연구 개발 작업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면서 그의 일생일대 목표 중 하나였던 무선 송전탑 공사를 무산시킨 일도 그 중 하나.
- 독점 시장의 핵심인 '트러스트'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었으며, 존 D. 록펠러가 그랬듯이 살아생전에 수많은 적을 두었다. 본인이 스스로 모든 판을 짜고 주도적으로 끌고 가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워 하는 '통제만능주의'의 면모를 보이며 자기 회사의 먹잇감이 된 상대를 매우 혹독하게 물어뜯었기 때문. 이처럼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궁극적으로 독점 기업주의 자리에 오른 뒤 반독점법의 주요 표적 중 하나가 되자, 일가친척 등 소수의 주변인을 제외한 다수의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 정작 월 스트리트는 1907년 금융 위기 당시 J. P. 모건 본인의 자금 지원이 없었다면 말 그대로 폭삭 망해 주저앉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월가의 금융자본가들이 웃는 낯으로 상대방 등에 칼 꽂는 데 도가 튼 양반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월가의 비판론자들이 모건 본인을 끈질기게 공격해댄 것이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 반독점법에 근거한 독점 기업 해체 공세를 하도 맞다 보니 자연히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 급진파[10] 정치인들과는 앙숙이었다. 당시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파가 휘그당을 집단 탈당해 북부를 기반으로 창당한 이래 남부 노예주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온 민주당에 비해 진보적인 정당이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중에서도 독점 시장 구조를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급진주의자였다.
- 오늘날 미국 금융가의 또 다른 글로벌 거대 투자은행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모건 스탠리는 막내 손자[11]인 헨리 스터지스 모건이 해럴드 스탠리와 손잡고 공동 창업한 회사다. 회사명에 '모건'이 들어가 있는 것도 이 때문. 이를 감안하면 미국의 4대 은행 기업 중 절반인 두 곳이 사실상 모건 가문의 직·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금융업계를 유대인들이 꽉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미국 금융가를 이끄는 기업인과 투자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WASP(백인·앵글로색슨계·개신교인)이 대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4대 시중은행'으로 평가되는 금융 기업 네 곳 중 이탈리아계 아마데오 지아니니가 창업한 뱅크 오브 아메리카[12] 외 세 곳은 모두 앵글로색슨계 백인이 창업했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리먼 브라더스가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 뉴욕과 런던이 글로벌 금융 시장의 중심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병이 있어 코 비대증을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적들로부터 "그 코쟁이 새끼"라는 말로 힐난당하곤 했다고.
- 라파엘로 산치오의 그림 '콜론나 제단화'를 1901년 당시 2백만 프랑을 주고 구입, 미국으로 가져왔다. 이는 당시 명화 시장 거래가의 최고액이었으며, 해당 그림은 현재 미국에 있는 유일한 라파엘로의 제단화 작품으로 본인 사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푸조 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새뮤얼 운터마이어 변호사의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한 답변으로 당시 "부패한 족속들"이라는 맹비난을 받던 월 스트리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고 평가된다.운터마이어 : "사람들에게 대출을 주는 근거가 무엇인가?”J. P. 모건 :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인격이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돈으로 인격을 살수 없다. 내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의 채권을 가지고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1] 회사명 '노던 시큐리티스'로, 이후 독점 기업으로 지목되어 반독점법의 철퇴를 맞으면서 존 D. 록펠러의 정유 기업 '스탠더드 오일'과 함께 해체되었다.[2]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창업한 철강 기업 '카네기 스틸'을 포함해 수십 곳의 크고 작은 철강 기업들을 매입한 뒤 하나로 합병, 'US스틸'을 창업하였다. 합병 당시 세계 1위 시가총액을 기록할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 되어, 당시 월가에서는 '그 회사'라고만 지칭해도 알아들었다고 한다.[3] 미국 최초의 공립학교 중 하나로 미국에서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이다.[4] 심지어 당사자(승자)인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조차도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였다.[5] 아프리카에 있긴 하지만 러시아나 그리스보다도 프랑스 본토에 가깝긴 하다.[6] 스페인은 넓은 국토(50.5만 ㎢)에 비해 인구가 의외로 적은데, 이는 영토 중심부의 상당한 면적이 산지 및 고원 지형이라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많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해안지대에 흩어져 산다. 이탈리아도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 지형이 상당히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농산물을 수출할 여력이 적다.[7] 1995년 닉 리슨의 사기행각으로 파산하게 되는 은행이다.[8] 당시 J.P.모건이 만든 해운 트러스트 IMM의 상선은 프랑스 전체의 상선보다 많았다.[9] 결국 J.P.모건이 세운 해운 트러스트 IMM은 파산위기에 빠져, 루스벨트 라인에 매각되었다.[10] 현재와 달리 링컨 이래로 FDR, 아이젠하워까지 근 100여 년간 민주당이 남부 보수, 공화당이 북부 진보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1900년대를 전후해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도농'에서 '빈부'로 변화하고, 이에 따라 공화당의 친기업 자유주의 성향이 보수로 재정의되면서 남부의 친농민-친노동자 성향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필두로 진보로 재정의되기 시작한다. 윌슨 역시 이 과도기 시기 버번 민주당 소속의 딕시 성향이었지만, 제닝스 브라이언과 경쟁하고 서로 토론하다가 그에게 물들어 진보 성향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 뒤에도 흑백분리 화장실을 만드는 등, 딕시 물이 덜 빠진 짓도 많이 했다.[11] J. P. 모건 본인의 아들인 J. P. 모건 주니어의 넷째 아들.[12] 원래는 뱅크 오브 이탈리아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했는데, 1은행 1점포 원칙이 없어지게 되면서 BOI를 확장하며 LA에 있던 뱅크 오브 아메리카란 동네 은행을 인수한 후 전체 은행망 이름을 그걸로 갈아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