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을 확인하세요.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 #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
}}}}}}}}}}}} |
<colcolor=#0d1635>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에런 버 | 조지 클린턴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엘브리지 게리 | 대니얼 D. 톰킨스 | 존 C. 칼훈 | 마틴 밴 뷰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리처드 멘터 존슨 | 존 타일러 | 조지 M. 댈러스 | 밀러드 필모어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윌리엄 R. 킹 | 존 C. 브레킨리지 | 해니벌 햄린 | 앤드루 존슨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스카일러 콜팩스 | 헨리 윌슨 | 윌리엄 A. 휠러 | 체스터 A. 아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토머스 A. 헨드릭스 | 리바이 P. 모턴 | 애들레이 E. 스티븐슨 | 개릿 A. 호바트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찰스 W. 페어뱅크스 | 제임스 S. 셔먼 | 토머스 R. 마셜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캘빈 쿨리지 | 찰스 G. 도스 | 찰스 커티스 | 존 낸스 가너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헨리 A. 월리스 | 해리 S. 트루먼 | 앨번 W. 바클리 | 리처드 닉슨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린든 B. 존슨 | 휴버트 험프리 | 스피로 애그뉴 | 제럴드 포드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넬슨 록펠러 | 월터 먼데일 | 조지 H. W. 부시 | 댄 퀘일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앨 고어 | 딕 체니 | 조 바이든 | 마이크 펜스 | |
제49대 | 제50대 | |||
카멀라 해리스 | J. D. 밴스 | |||
}}}}}}}}}}}}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 |||
| |||
본명 |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Theodore Roosevelt Jr. | ||
출생 | 1858년 10월 27일 | ||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 |||
사망 | 1919년 1월 6일 (향년 60세) | ||
뉴욕주 오이스터베이 | |||
묘소 | 영스 메모리얼 묘지 | ||
재임기간 | 제25대 부통령 | ||
1901년 3월 4일 ~ 1901년 9월 14일 | |||
제26대 대통령 | |||
1901년 9월 14일 ~ 1909년 3월 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니어(1831 ~ 1878) 어머니 마샤 스튜어트 불럭 루스벨트(1835 ~ 1884) | |
형제자매 | 누나 안나 루스벨트 (1855 ~ 1931) 남동생 엘리엇 루스벨트 (1860 ~ 1894)[1] 여동생 코리네 루스벨트 (1861 ~ 1933) | ||
배우자 | 앨리스 해서웨이 리 루스벨트 (1861 ~ 1884, 사별) 에디스 커밋 케로 루스벨트 (1861 ~ 1948, 재혼) | ||
자녀 | 앨리스 루스벨트(1884 ~ 1980)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1887 ~ 1944) 커밋 루스벨트(1889 ~ 1943) 에설 루스벨트(1891 ~ 1977) 아치볼드 루스벨트(1894 ~ 1979) 퀜틴 루스벨트 (1897 ~ 1918)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B.A.)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대학원 (사후 J.D.)[2] | ||
병역 | 미합중국 육군 대령 예편[3] | ||
종교 | 개신교 (미국 개혁교회)[4] | ||
신체 | 키 178cm / 체중 95kg / O형 | ||
최종 당적 | [5] | ||
문장 |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제26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 |
|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즐겨 사용한 말.[9][10]
미국의 제26대 대통령.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즐겨 사용한 말.[9][10]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자,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며, 전임자 승계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된 대통령이기도 하다.[11]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평화상, 1906년) 수상자이기도 하다.[12]
20세기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은 대통령이자, 독특한 성품으로 여러 흥미로운 일화들을 남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는 먼 친척 관계이다.
Theodore라는 인명에 대해서 테오도어, 테오도르, 디어도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 상 치 마찰음과 모음화 R을 반영한 /ˈθiːədɔːr/(시어도어)로 표기한다. Roosevelt라는 성씨는 네덜란드어에서 온 것으로 roos(로스, '장미')와 veld(벨트, '들판')가 합쳐진 조어이다.[13]
2. 약력
- 1882. 뉴욕주 하원의원
- 1883.1. 뉴욕주 하원의장
- 1895.5. 뉴욕주 경찰청장
- 1895. 뉴욕주 인사위원회 위원
- 1897.4. 해군차관
- 1899.1. 제33대 뉴욕 주지사
- 1901.3. 제25대 미국 부통령
- 1901.9. 제26대 미국 대통령
- 1912. 제28대 미국 대통령 선거 진보당 대선 후보 (낙선)
3. 일생
그의 다양한 경력을 보여주는 그림. 왼쪽 위부터 '카우보이, 역사가, 경찰청장, 해군장관, 러프라이더(군인), 뉴욕주지사, 부통령, 대통령, 중재자(?), 그리고 역대급 위대한 헌터(사냥꾼)'.
3.1. 부통령이 되기 전까지
맨해튼의 상류 가정에서 태어나서 대단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에는 심한 천식으로 고생했고 시력도 지독한 근시였으며[14] 뚱보 소리 듣기도 한 성인이 된 후의 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어릴 땐 말라깽이였다고 한다. 때문인지 요양을 갔다가 요양간 동네의 힘센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고. 그러다 12세가 되자 아버지가 "너는 정신력은 강한데 몸이 약하다. 근데 몸이 약하면 정신도 제 능력을 다 발휘 못하니까 앞으로 체력 단련에 힘써라."하고 말한 이후로 매일매일 몸을 단련하여 건강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루스벨트가 가장 좋아한 스포츠는 사냥이었다. 은퇴 후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는 사자, 코뿔소 등을 원없이 잡고 다녔었다. 잡은 동물들을 앞에 놓고 당당하게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어쨌든 허약한 몸을 극복하고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가서 최상위권에 드는 성적[15]으로 학부를 졸업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1년 뒤 중퇴하고 공화당에 입당해서 1882년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뉴욕 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1884년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2월 14일에 같은 집에서 한꺼번에 각기 다른 병으로 잃는 불행을 겪었다. 이에 충격을 받고 아내가 낳은 딸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노스다코타로[16] 가서 3년 남짓 카우보이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이때의 경력으로 후에 정적들에게 종종 "빌어먹을 카우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재혼한 후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잡지 기사를 쓰고, 책을 저술하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그가 저술하고 출판한 책은 무려 38권에 이른다. 이후 1888년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에 의해서 미국시민봉사위원회에 임명되었고 7년 뒤인 1895년 뉴욕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뉴욕에 돌아왔다.
1897년 윌리엄 매킨리 정부의 해군 차관보가 되었다. 그가 차관보가 된지 얼마 안 된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이 터지게 된다.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는 마침내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차관보를 그만두고 스스로 의용군 '러프 라이더(Rough Riders - 거친 기수들)'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전, 공적을 세우고 전쟁영웅이 되었다.[17] 비록 그는 정규 군인이 아니었지만 전쟁 말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특별히 미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다.
러프 라이더 기병대장 시절의 루스벨트. 그러나 이 그림은 당시 모습을 제대로 담아낸 것은 아니다. 명칭과 달리 루스벨트의 러프 라이더스는 거의 보병으로 싸워야 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볼 때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그의 공적은 과장된 면이 많았다. 그가 빛을 발휘한 산후안 고지 전투 때는 러프 라이더보다 흑인 보병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피해를 제일 많이 보았다. 오히려 미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됐던 스페인군들이 가망도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흑인 부대에서 용맹히 전사한 이들은 루스벨트가 있었던 곳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싸웠지만 정작 훈장은 못 받은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그의 군대는 공식적인 정규군이 아니었는데, 정규 미군의 작전 명령을 무시하면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가 직접 전쟁에 나섰기 때문에 미디어에 의해 과대포장되어 이득을 본 셈이라는 것. 여담으로 이와 유사한 문제는 케네디 대통령한테도 일부 제기된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미서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해 말 치러진 뉴욕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었다.
3.1.1. 루스벨트 추론(Roosevelt Corollary)[18]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적 경쟁이 극대화된 시기였다. 증기선과 전신으로 대표되는 통신상의 혁명은 제국주의로 하여금 그 활동 무대를 지구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무연화약, 기관총, 강철 대포가 출현함으로써 산업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격차를 극도로 벌렸다. 여기서 대표적인 무기체계가 바로 전함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이 시대를 가리켜 전함 외교의 시대라고 했는데, 19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시대를 비교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전략) 1798년 나폴레옹 군대의 이집트 침략 당시 양국 군대는 장비상으로는 막상막하였다. 따라서 승패는 무기가 아니라, 침략성과 잔혹함, 특히 조직력에 의해 결판났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군사적 측면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균형은 깨졌다. 고성능 폭발물과 증기운송과 같은 수단들이 열강의 식민지 침탈을 손쉽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1880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반세기가 전함외교의 황금시대로 불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략)"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김택동 옮김, 한길사, 1998, pp. 91-92.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김택동 옮김, 한길사, 1998, pp. 91-92.
전함의 출현은 미국의 외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는데, 종전까지 미국의 방어벽 역할을 하던 바다는 더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대서양은 미국으로 유럽의 전쟁을 운송하는 고속 침투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신흥 산업국가인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동아시아의 전통적 강국인 청나라를 청일전쟁(1894~1895)으로 거꾸러뜨려, 태평양마저도 미국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1880~90년대까지 이어진 1차 베네수엘라 위기가 루스벨트의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광이 발견됐고, 이를 영국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미 해군이지만 당시 미 해군은 세계 해군 순위권은커녕 다 저물어 버린 스페인 해군 정도나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약체 해군이었고, 18세기부터 세계 1위 해군력을 놓친 적이 없는 영국 해군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약체화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메리카의 스페인령 식민지를 다른 외국에 매도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는 미국에게 있어 큰 문제였다. 스페인이라면 상대가 가능했지만, 새로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식민지를 양도받을 나라는 미국이 상대하기 상당히 버거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새로 카리브해에 진입할 유럽 강대국이 독일일 것으로 보았다. 루스벨트는 해군력이 아닌 외교 정책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담보해야만 했다. 참고로 기존 미국의 대외 정책을 대표하던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다음의 세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1. 아메리카 대륙은 어떠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미래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 먼로 독트린은 유럽 열강과의 외교전을 뒷받침해줄 무기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내의 신규 식민지의 확보는 1. 항목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매각함으로써 독일 해군이 미국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은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다른 나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은(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유럽 열강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해당하고,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도 유럽 국가간의 내부문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에 루스벨트는 1896년 '루스벨트 추론'이라고 알려진 저작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존의 먼로 독트린이 아메리카 대륙의 비식민화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원칙을 고수하자면, 식민지의 양도를 통해 새로운 거대 식민지의 출현을 방기할 수 있는 2, 3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고, 2, 3 원칙을 고수하자면 유럽 국가간의 식민지 거래를 통해 1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의 진정한 목표는 1원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먼로 독트린은 "어떤 非아메리카 세력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의 누구를 희생의 대가로 삼아 영토 팽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라는 것이다.[19] 따라서 2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2원칙의 포기는 논리적 귀결로써 3원칙의 포기 또한 요구했다. 식민지의 문제와 따로 떨어진 식민모국의 문제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그것을 미국의 방위 정책으로 만들 수 있는 4원칙을 추가했다. 4원칙의 내용은 바로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포기하거나 양도할 경우 그것을 접수하는 나라는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20]
이는 먼로 독트린의 제국주의 이론으로의 변화를 뜻했다. 먼로 독트린은 애초에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이끌려 전쟁으로 딸려들어가는 사태를 방어하기 위한 고립주의 정책의 표명이었지만, 2, 3 원칙이 폐기된 이상은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자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유럽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획득을 시도하는 유럽 국가의 행동을 적대행위로 간주함으로써였다. 그리고 이런 천명들은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분쟁의 성격을 판단할 권리를 미국에만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02년 독일은 채무변제를 빌미로 함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를 위협했는데(2차 베네수엘라 위기), 빌헬름 2세는 채무변제를 빌미로 영토를 차지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지만, 루스벨트는 빌헬름 2세의 항변을 무시하고 전 함대를 집결해 일전을 불사한 각오를 보였다.
새로운 먼로 독트린 추론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을 위협하는) 전쟁의 괴물을 좇아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던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쟁의 괴물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는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어디로도 출동해야 된다는 일방주의로 변화했다. 전함과 전신을 통해 적이 언제든 미국을 침략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은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적을 찾아서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21]
이상 루스벨트 추론 문단의 내용은 최정수, <T.루즈벨트의 '世界政策'>, 2001,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주로 참조해 작성했다.
3.2. 대통령직 승계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두번째 러닝메이트로[22] 선택되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며 1901년 3월 부통령에 취임했다.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불과 6개월만 인 1901년 9월 암살되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때 나이가 42세로 미국 대통령 중 최연소 나이에 취임한 대통령이다. 선출된 최연소 대통령 타이틀은 43세에 취임한 존 F. 케네디가 갖고 있다.
1902년 의회 도서관 앞에서 연설하는 루스벨트. 그는 연설할 때 팔을 강하게 휘두르며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3.2.1. 대기업 규제-셔먼 반독점법
루스벨트는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당시 우드로 윌슨 등이 참여했던 혁신주의 사회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23] 그래서 그가 부통령직에 지명된 것도 사실은 이런 그를 실권없는 자리로 쫓아내기 위한 당내 보수파들의 정략이었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 허나 공화당의 원로인 마크 해나는 "그 카우보이 놈이 호시탐탐 노리는 게 대통령 자리라는 걸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느냐"며 반대하였고 결국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해나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고 "봐라! 저 무지막지한 카우보이가 대통령이라니!"라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하여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셔먼 반독점법을 밀어붙였는데[24][25], 위 만화에서 보이듯이 그 시절의 미국은 강도 귀족이라고 불리던 재벌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따라서 거대화된 대기업들이 인수합병 등으로 더 날뛰지 못하게 통제했는데, 이 때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나 존 피어폰트 모건의 노던 시큐리티스 등 대기업들까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당시 기업들의 독점 합병을 '트러스트(Trust)'라고 불렀는데 이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대기업에 타격을 입힌 사실 때문에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라는 별명도 얻었다. 건국 이래 미국의 경제정책은 일관되게 시장 불간섭주의 입장을 고수했는데, 그의 이러한 정책은 자유방임시장에 정부가 통제, 감독을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다만 이렇게 반독점 정책을 펼친 것으로 그가 일방적인 반기업, 친노동 정책을 펼쳤다고 정의해서는 안된다. 그는 기업에게 강하게 나갔던 것 만큼 노조의 노동쟁의에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정부 차원에서 군대와 경찰 등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이전의 미국에도 자주 있었지만 그 이유는 파업 과정에서 자본가의 사유재산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 차원에서 파업에 개입할 법적인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허나 루스벨트는 공익과 사회안정을 명분으로 노동 쟁의에 개입하였으며, 이러한 방식의 대응은 루스벨트가 최초이다. 물론 '곤봉 정치'의 신봉자였던 만큼 그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입법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26]
이처럼 그의 일관되지 않은 국내외 정책은 특정한 이념적 신념보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미국, 구체적으로 강력한 군대와 경찰력을 가진 미국을 신봉했던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3.2.2. 대외정책: 팽창주의로의 전환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
19세기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은 유럽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주창했다. 한편으로 미국은 유럽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태평양 쪽에 관심을 가지고 하와이 점령, 쿠로후네 사건이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의 정책을 펼치긴 했으나 소극적이었다.
그러다 이러한 먼로 독트린 하의 미국 대외정책을 전환하여 20세기 공식적으로 팽창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것이 루스벨트였다. 물론 실질적으론 이미 전전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시절에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어, 전임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시절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1898년)을 미국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1년 대통령을 승계받은 루스벨트는 전임자들보다 노골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미국의 제국주의 노선을 공식화했다. 루스벨트는 당시 일부 서구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인종 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는 미국인이야말로 가장 진보한 인종이며, 그러한 미국에 의해 세계가 지배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로 독트린을 수정하여 서반구에서는 미국이 국제경찰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장하게 되는 '세계경찰'론을 처음 꺼낸 사람이 바로 루스벨트였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세계경찰론은 현재 미국이 주장하는 그런 역할이 아니라 당시 열강들의 제국주의 정책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다만 이전까지 먼로주의와 상호 불간섭주의를 주장해왔던 미국이 갑자기 제국주의로 돌아서기에는 명분이 없기에 그 명분 차원에서 서반구에서 미국이 경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둘러 표현한 것. 그리하여 그는 미합중국 해군 강화에 열을 올려 대백색함대를 창설하여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세계 각국으로 원정을 떠났고 열강으로서 미합중국의 해군력을 과시했다. 덕분에 그가 퇴임하던 시점에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
세계경찰론을 자처한 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은 카리브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유럽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미국 패권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그는 산토도밍고,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에 진출했고,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등 남미국가들에 개입했다. 한편, 남미 국가들의 부채를 갚아주는 유화 정책을 펼치며 그 나라들이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곤봉 외교'의 대표적인 일면으로 꼽힌다.
또 그는 경제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파나마 운하의 이권을 획득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의 획득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생각했으며, 자서전에서 내각의 상의없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업적임을 강조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파나마 지역이 속해 있던 콜롬비아와 협상을 벌였으나 콜롬비아 정부가 루스벨트의 제시액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자 루스벨트는 파나마 주민들을 설득하여 파나마의 독립을 배후에서 조장했다. 그 결과 1903년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독립에 성공했고, 미국은 신생국 파나마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 외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획득한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역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미국식 제국주의 건설을 위해 애썼다. 루스벨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드넓은 태평양에 있었다. 미국-스페인 전쟁 직후 획득하게 된 필리핀의 처리를 두고 미국 내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루스벨트는 필리핀을 미국이 영구 지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선 이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또한 러일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와 일본 간에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했다. 그가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한 것은 궁극적으로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담을 주선한 공로로 그는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묵인했다.[28]
3.2.3. 2기와 3선 불출마 선언 번복
대외적으로 미국의 팽창주의를 주도하고, 국내에서는 반독점법을 추진하면서 서민들 인기도 괜찮은 편이라 연임에 성공했다. 승계받은 대통령이 재선한 최초의 사례.허나 그의 두 번째 임기 동안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1907년에는 불황을 맞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때가 기회다 싶어 그의 지나친 기업 규제가 불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반대파들의 비난이 튀어나왔고[29], 불황의 여파로 의회가 돌아서면서 정치력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던 와중 그에겐 선택의 순간이 오는데.. 바로 3선 출마 여부였다. 원래 미국은 헌법에 연임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진 않았지만,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2선만 하고 물러난 이래 다른 후임 대통령들도 이를 본받아 최대 2선만 하고 물러나는게 암묵적인 룰이었다.[30] 그러나 유독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절 3선 출마 여부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의 첫 임기가 선거를 통한 것이 아닌 승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루스벨트가 자신의 두 번째 선거임을 주장하면서 3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31] 그래서 이런 구설수가 지속되는데에 부담을 느꼈던 그는 결국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3선은 없다라는 돌출 발언을 한다.
그러나 그는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3선 불출마 선언을 깨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1908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1912년 대선 출마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을 깨고 나와서 신당을 창당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는데,[32] 당장 자신과 지지자들은 좋을지 몰라도 당 입장에선 최악의 방법을 고른 셈이다.
사실 1908년 대선 당시만 해도 그는 후계자로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밀었고, 태프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심지어 이때만 해도 사이가 좋아서 시어도어는 윌리엄 태프트에게 "나는 늘 당신이 워싱턴과 링컨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편지를 보내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자신의 정책적 철학과 측근들을 그대로 계승하리라 생각했지만, 태프트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자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전직 대통령의 비판이 이어지자 현직 대통령 태프트는 결국 루스벨트 재임 기간 중의 추문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측근을 해고하기도 했다. 결국 태프트에게 앙심을 품게 된 루스벨트는 3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깨고 19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태프트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게 되고 이에 루스벨트는 진보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여 공화당을 분열시켜버렸다. 그야말로 계파 갈등 시궁창 배틀이었다.
덕분에 분열된 공화당은 표가 나뉘어 버렸고, 1912년 대선은 어부지리격으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41.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득표율은 27.4%(412만표)로, 이는 공화당의 태프트(23.2%)를 능가하며 미국 대선에서 제3당 후보가 얻은 최다 득표이기도 하다. 물론 루스벨트의 모호한 성향을 봤을 때 당시 민주당 성향 표도 일부는 흡입되었다고 보는게 맞겠지만.[33]
3.3. 암살 미수 사건
3.4. 퇴임 후
| |
1918년, 자신의 집에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34]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데스마스크 |
1912년 3선 대통령에 실패한 전후로는 주로 해외를 돌아다니며 탐험과 사냥을 즐겼는데, 다우트 강 탐사 당시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 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막내아들 퀜틴이 종전을 불과 4개월여 앞두고 1918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의 공중전에서 20세의 나이로 전사하자 충격을 받았는지 이 무렵부터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선에 미련이 남았는지, 1917년 공화당에 복당한 이후 1920년 선거에 다시 재출마를 생각하고 러닝 메이트로 워런 G. 하딩까지 정해놨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선거가 시작되기 전인 1919년 1월 6일, 뉴욕 오이스터베이 자택에서 자던 중에 사망했다. 부검 결과 새벽 4:00 ~ 4:15 사이로 추정되는 시각에 정맥에서 분리된 응고된 혈액이 폐로 유입되면서 관상동맥폐색으로 인해 수면중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 것이다. 새벽에 수면 중에 갑자기 혈관이 막혔던지라 손쓸 새도 없었고 설령 평일 낮에 병원 앞에서 발견해서 지체없이 치료했다고 해도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치료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35] 전날인 1월 5일 밤, 하인인 제임스에게 불 좀 꺼달라고 요구한 다음 잠들었다가 사망해서 그것이 유언이 되었다. 죽은 루스벨트의 베개 밑엔 책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향년 60세였는데, 암살이나 사고를 제외한 병사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4번째로 수명이 짧았다.[36][37] 비록 치명상은 피했어도 1912년 암살 미수로 부상을 입기도 했고 1918년 쿠엔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잠시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자세히 보면 건강이 안 좋긴 했으나 대외적으로는 1920년 대선을 준비하는 등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기에 그의 죽음은 진영을 불문하고 충격이었다. 거기다 후임 태프트는 그보다 1살 많았고, 후후임인 당시 현직이었던 윌슨은 그보다 2살 더 많았으니 그들보다 더 먼저 안타까운 나이에 죽은 것이다. 루스벨트의 아들 커밋은 외지에 나가 있던 형제들에게 전하는 부고에 "The old lion is dead(늙은 사자가 죽다)"라고 썼으며, 그의 죽음 당시 민주당 출신 부통령이었던 토머스 R. 마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Death had to take Roosevelt sleeping, for if he had been awake, there would have been a fight."
- 죽음은 루스벨트가 잠든 사이 그를 데려갔습니다. 만약 그가 깨어 있었다면 그와 한바탕 싸워야 했을 겁니다.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종종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아예 이 말로 만든 밈도 있다.- 죽음은 루스벨트가 잠든 사이 그를 데려갔습니다. 만약 그가 깨어 있었다면 그와 한바탕 싸워야 했을 겁니다.
루스벨트가 1920년 대선을 준비하면서 러닝메이트로 점찍어두었던 하딩은 루스벨트가 생전 하딩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했다는 점 때문에 1920년 대선 경선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꺾고 최종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결국 1920년 대선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으나 1923년 대통령 임기 중에 급사했으며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매우 안 좋았다. 때문에 호사가들은 루스벨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반응도 있다.[38]
4. 가족
|
(왼쪽부터) TR에 기대 있는 퀜틴, TR 본인, 안경을 쓴 시어도어 3세, 앉아있는 아치볼드, 흰 드레스를 입은 앨리스, 커밋, 앉아있는 후처 에디스, 에설 |
사별한 전처 앨리스 리 루스벨트(1861년 7월 29일 ~ 1884년 2월 14일) 사이에서 딸 앨리스를 두었다. 이후 후처 에디스(1861년 8월 6일 ~ 1948년 9월 30일)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 앨리스 루스벨트: 1884년 2월 12일 ~ 1980년 2월 20일 (향년 96세)
아버지를 닮았는지 성격이 꽤 괴팍하고 독설가로 유명했는데, 가장 유명한 독설이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을 평가한 말이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다만 멍청이었을 뿐이지." 그리고 친척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가족을 두고도 "3분의 2는 물러터진 옥수수죽(프랭클린을 말한다)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엘리너"라고 말할 정도로 평소 말이 꽤 거칠었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자국에서의 업적과 인기와는 별개로 자식농사를 제대로 시킨 것인지 실로 의심스러울 정도로 앨리스의 평소 행적은 꽤 개차반에 가까웠는데, 1905년에 대한제국에 고종의 초청을 받은 외교 사절 신분으로 공식 방문해선 유교국가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극히 무례한 행동을 일삼아서 구설수에 올랐다. 대표적인 예시로
명성황후의 능에서 승마바지 차림으로 말채찍을 들고 조형물인 석마(石馬)를 탔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제국 황실 의전담당차 있던 독일인 에마 크뢰벨(Emma Kroebel)이 본국에서 <나는 어떻게 조선의 황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을 펴내면서 알려지게 된다.
1909년 11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서 앨리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기사가 실리자마자 다음날, 앨리스의 남편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공화당 의원이 내용이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코넬 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던 한국인 사서가 관련 사진을 발견함으로서 앨리스가 외교사 무례의 신기원을 이룩하고 간 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39]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앨리스와 외교 사절단은 이미 일본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대한제국에는 고종이 초대해서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차릴 겸 들른 길이었다.[40] 고종과 각부 대신들은 저런 앨리스를 인천에서부터 맞이해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출국할 때까지 극진히 대접했다. 앨리스는 고종이 서글프고 애처로웠다는 말을 남겼다. 고종의 융숭한 대접과 앨리스의 행적 자료
“(고종 알현 당시) 그녀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고 승마용 채찍을 한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었다. (명성황후릉인 홍릉에 방문해서는) 동물 석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말 석상을 보고서는 말에서 내려 재빨리 석마(石馬) 위에 올라탔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그토록 무례한 짓을 저지른 것은 한국 외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
그녀는 대한제국을 방문하기 전 청나라를 방문하여 서태후도 만났는데 서태후를 가리켜 “중간 정도의 신장에 치파오 걸친 모습이 수려하고 장엄했다. 대국 통치자의 풍모가 넘치는 걸출한 여성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앨리스는 서태후와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
저런 모습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워낙 왈가닥이라서 백악관에 손님이 찾아오면 "미합중국 대통령은 맨날 자식을 때려요!"라고 소리지르는 장난을 즐겼으며, 뱀을 목에 걸고 나타나는 바람에 백악관 방문객들을 깜짝 놀래키곤 했다. 그런데 앨리스가 아니라도 루스벨트의 자식들은 백악관에 있을 때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형제들이 아버지의 단점들만 물려받은 건지 아니면 루스벨트 부부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건지 하나같이 말썽꾸러기들이라 숱한 장난으로 백악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영부인과 백악관 직원들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미국의 대통령 뿐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백악관에서 함께 수행해야 했다. 루스벨트 본인도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제 딸 앨리스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꽤 악동이었던 그조차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말년에 누군가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자, "실리보다는 허세만 가득찬 양반이었죠."라고 아버지를 디스했다. 15살 연상으로 훗날 미국 하원의장을 역임한 니컬러스 롱워스와 결혼해서 폴리나 롱워스(1925~1957)라는 딸을 낳았는데, 앨리스가 너무 장수해서 폴리나와 폴리나의 남편(앨리스의 사위)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보게 된다. 사실 폴리나는 정식 남편인 니컬러스 롱워스 소생이 아니라 앨리스가 미국의 정치인 윌리엄 보라랑 바람펴서 낳은 딸로 대외적으로는 부부 사이의 딸로 알려졌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장수했기 때문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2차 대전기에는 자신의 먼 친척의 입장과는 상반되게도 미국의 전쟁 개입을 반대하는 고립주의 성향의 단체인 미국우선주의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로도 왕성히 활동했다. 좋게 말하면 세력균형에 의한 외교를 중요시하던 자신의 아버지의 입장을 따랐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이미 세력균형에서 집단안보로 넘어가는 역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대착오적 입장을 마지막까지 견지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 장남 시어도어 3세[41]: 1887년 9월 13일 ~ 1944년 7월 12일 (향년 56세)
아버지 못지 않은 풍운아였다. 1,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이자 하딩-쿨리지 정권에서 해군성 차관, 필리핀 총독,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한 공화당의 거물급 정치가였는데, 2차 세계대전에 1사단의 26연대를 지휘하는 대령으로 참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전투를 거치며 준장까지 진급했다.
당시 상관이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조지 S. 패튼 장군이었는데, 브래들리와 패튼 두 사람 모두 부하 장병들에게 너무 자유분방하고 친근하게 대해서 결과적으로 군 기강을 흐트러지게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의 리더쉽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1시단은 최정예 부대였지만,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너무 약탈하는 바람에 민원이 심해서 미군 최고 지휘부를 빡치게 하였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자신의 상관이자 죽이 잘 맞았던 친구인 1사단장 테리 앨런과 함께 나란히 1사단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던 시어도어 3세는 자청해서 제1파로 상륙했는데, 제1파의 최고령, 최선임 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유타해변 인근에 수백명의 병력들과 잘못 상륙했다. 현장에서 장교, 참모진들이 최선임자인 그에게 "장군님, 이제 뭘 어떡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았다.
장교들은 병력들을 집결해서 유타나 오마하에 있는 병력들을 지원하자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원했겠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오히려 자신들이 잘못 상륙한 곳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좋은 곳임을 눈치채고 피는 못속인다고 루스벨트 집안답게 "뭘 어떡하냐고? 여기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거다!" 라고 외치곤 권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유타 해변에 상륙한 병력들을 집결시켜 자신들이 발견한 독일군의 허점으로 돌격,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상륙 33일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 결국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훈받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먼 친척뻘 되는 FDR을 싫어한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슬하에는 그레이스, 시어도어 4세, 코닐리어스, 퀜틴 주니어가 있다.
1시단은 최정예 부대였지만, 이탈리아 민간인들을 너무 약탈하는 바람에 민원이 심해서 미군 최고 지휘부를 빡치게 하였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자신의 상관이자 죽이 잘 맞았던 친구인 1사단장 테리 앨런과 함께 나란히 1사단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는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던 시어도어 3세는 자청해서 제1파로 상륙했는데, 제1파의 최고령, 최선임 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었지만 유타해변 인근에 수백명의 병력들과 잘못 상륙했다. 현장에서 장교, 참모진들이 최선임자인 그에게 "장군님, 이제 뭘 어떡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았다.
장교들은 병력들을 집결해서 유타나 오마하에 있는 병력들을 지원하자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원했겠지만 주변을 둘러보고는 오히려 자신들이 잘못 상륙한 곳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좋은 곳임을 눈치채고 피는 못속인다고 루스벨트 집안답게 "뭘 어떡하냐고? 여기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거다!" 라고 외치곤 권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유타 해변에 상륙한 병력들을 집결시켜 자신들이 발견한 독일군의 허점으로 돌격,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상륙 33일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 결국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훈받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먼 친척뻘 되는 FDR을 싫어한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슬하에는 그레이스, 시어도어 4세, 코닐리어스, 퀜틴 주니어가 있다.
* 차남 커밋: 1889년 10월 10일 ~ 1943년 6월 4일 (향년 53세)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지만 2차 대전 중에 전쟁에 대한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다가 알래스카에 파견 나가있던 중 그곳에서 자살했다. 슬하에 커밋 주니어[42], 조셉, 벨, 더크가 있다.
* 차녀 에설: 1891년 8월 13일 ~ 1977년 12월 10일 (향년 86세)
어그로를 끄는 이복 언니, 세계대전에 참전한 오빠들과 남동생들에 비해 평범한 생을 살다 갔다. 리처드 더비와 결혼해서 리처드 주니어, 이디스, 세라, 주디스를 낳았다.
* 삼남 아치볼드: 1894년 4월 10일 ~ 1979년 10월 13일 (향년 85세)
두 형처럼 1, 2차 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두 형처럼 1, 2차 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두 차례의 참전때마다 무릎에 부상을 입어서 나중에 두 번의 다른 전쟁에서 같은 부상으로 두 번이나 100% 장애로 분류된 미국의 유일한 참전용사라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루스벨트의 아들들 중 2차대전 이후로도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다. 아치볼드 주니어, 시어도라, 낸시, 에디, 재커리를 두었다.
* 사남 퀜틴: 1897년 11월 19일 ~ 1918년 7월 14일 (향년 20세)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그는 5, 6명 정도의 친구들을 데리고 백악관에서 말썽을 부렸고 심지어는 찢어 뭉친 종잇조각을 백악관에 걸린 대통령 초상화에 붙여 놓았다가 루스벨트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육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던 중인 1918년 7월 14일 독일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다가 머리에 기관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비행기와 함께 독일군 후방에 떨어졌는데, 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독일군 지휘부는 그가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천여명의 독일군 병력을 동원해서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뤄줬다고 한다.
4.1.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의 관계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재임 1933-1945)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43] 물론 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본관만 같은 남남이나[44], 테디의 조카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프랭클린과 결혼하여 프랭클린은 테디의 조카사위도 된다.[45] 그러다보니 사적으론 둘이 교류가 제법 활발했다고 한다.우선 둘이 막 결혼한 시절 테디가 프랭클린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 준 편지도 남아 있으며, 1905년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인 엘리너를 테디가 직접 프랭클린에게 인계해 주며 장인어른 역할을 했다. 테디 본인도 프랭클린을 두고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총알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46]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히 프랭클린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지만 둘의 정치 노선은 다소 달랐던 편. 일단 테디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이었고 프랭클린은 테디의 정적이었던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 물론 혁신주의라는 큰 틀에서는 공통점도 있었기에, 젊은 프랭클린은 테디가 본 책, 쓴 책은 모두 읽어봤다고 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로도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둘은 후술되어있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한반도 문제 관련해서 상반된 행보로도 알려져있는데, 다만 이건 딱히 시어도어는 친일이고 프랭클린(더 나아가 후임 해리 트루먼까지)은 반일이라 그랬다는 식의 1차원적인 해석보단, 당시 미국과 일본의 목적이 어긋난 데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어도어 재임기 시절 서양 열강들은 중국에서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시베리아로 진출하길 바라고 있었다. 허나 일본은 자신의 목표를 시베리아가 아닌 중국으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었기에[47], 이것은 조선 침략기의 미국인(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일본관과 중국 침략기의 미국인(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의 일본관이 정반대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국간 관계가 훼손되자,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이란 무리수를 두게 되고 태평양 전쟁으로 패전하게 된다.
한반도만을 중심에 두지 않고 전반적인 외교정책을 바라보면 공통점도 있는데, 두 대통령 모두 대외 개입 및 영향력 투사를 강력히 지지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테디 때나 FDR 때나 미국은 고립주의 성향이 다소 강했지만, 테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퇴임 이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하였으며 위에서도 언급된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와 같은 말을 남겼다. FDR은 말할 것도 없이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의사를 밝혔고 2차대전 동안 미국 또는 미국을 넘어 연합군 진영을 이끌었고 전후 세계 질서 재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다. 위 테디의 꿈인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이룬 것은 덤.
또한 테디와 FDR은 미국 역사에서 얼마 없는[48] 3선 출마를 한 대통령들이다.[49] 차이점이 있다면 테디는 낙선한 반면 FDR은 미국 유일의 3선 당선을 넘어 4선까지 했다 임기 중 사망하여, 이후 미국 의회가 대통령 3선 이상 금지를 수정헌법에 반영하는데 이바지(?)했다는 점.
5. 평가
둥글둥글한 외모와 테디라는 별명, 그리고 학자, 농장주, 카우보이, 군인, 경찰, 탐험가, 사냥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과 전임자의 암살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이 됐음에도 대통령 시절 국내에 남긴 여러 진보적 정책, 흥미로운 일화들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혈질에 가까운 인물로 싸우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당시 서구권에서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은 심지어 버나드 쇼처럼 일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꽤 수용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시아권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거론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 또한 당시에는 특별히 우파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마냥 보수주의라고 평하긴 좀 무리가 있긴 하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같은 현대 미국의 상당한 정치권 진보주의자[50]들도 시어도어를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51] 실제로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당시 정치판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정치성향은 중도좌파 내지 좌파로 평가받기도 했다. 대외정책이야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이미 시대 트렌드가 제국주의여서 링컨급 신념을 지닌 대통령이 아닌 이상 다수는 시어도어랑 비슷한 길을 걸었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상당하다. 물론 그래봤자 위선적인 전쟁광 제국주의자일 뿐이라고 디스하는 학자도 있긴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적과 능력만 놓고 보면 가장 평가가 높은 공화당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52] 미국의 국력 신장을 이끈 대통령으로 뽑히며, 덕분에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나 인기 랭킹에서도 보통은 10위권 안에 든다. 심지어 2010년 시에나대학교에서 시행한[53] 대통령 업적 평가에선 2위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참고로 이 조사에서 1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3위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두 루스벨트가 그 유명한 링컨을 누른 셈. 참고로 이 조사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15위를 차지했다. 러시모어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54]
영국의 역사가 휴 브로건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악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정열적인 사람,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최고의 독서가"라고 평가했으며,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아버지는 장례식에 가면 시체가 되고, 결혼식에 가면 신부가 되고, 세례식에 가면 아기가 되고 싶어하셨지요."[55]라고 회상했다. 뭔 소린가 하니 주인공 기질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후술하겠지만 장례식장에서 관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자살 소동까지 벌였으니 과장도 아니다.
아나키스트인 놈 촘스키는 그를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라고 혹평했으며 미국 진보주의 계열 사학자인 하워드 진 역시 "진보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라고 혹평했다. 전임인 윌리엄 매킨리와 묶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로 혹평받기도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한 먼로 독트린에 수정조항을 달아 라틴아메리카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 중에 콜롬비아와 마찰이 생기자 파나마의 반란과 분리독립을 배후조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만 루스벨트가 진짜 보수주의자라고 보긴 어렵고 자유제국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네오콘 계열에게는 전략적 측면, 경제적 측면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데, 전략적 측면에서는 루스벨트 추론과 대백색함대 세계순방 등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수립한 위인으로 평가하는 반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위에 나온 독점금지법 때문에 자유시장경제를 억압하고 후퇴시킨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들고 다녀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는 시어도어의 말은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을 잘 보여준다. 사실 국내 정책에서도 반대파들 상대로 종종 써먹었다.
5.1. 뉴 내셔널리즘의 거물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결정적으로 고평가받는 점은 극단적 자본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개입경제로 미국의 현대적 복지체제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테디는 자유방임주의, 불간섭주의 기조 하에 있었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국가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권한 행사를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내정에선 독과점 철폐, 산업의 국가 통제, 노동자 보호, 과격 노동 운동 강경 대응 등 국가가 기업과 노조 양면으로 산업 전반에 적극 개입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먼로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의 전통적 외교 노선인 불간섭주의를 폐기하고 개입주의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추구했다. 그 결과 재임기간 중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여 미국을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시켰다. 물론 이후 그의 후임으로 우드로 윌슨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나 공화당 출신의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 연이어 대통령이 되면서 루스벨트의 팽창주의, 개입주의가 그대로 계승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본인의 집권기 이전 한동안 존재감과 역할이 그리 돋보이지 않던 미국 대통령의 역할과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자연보호에 앞장선 것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미국의 많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었고, 2억 에이커 이상의 지역에서 산림개발을 금지했다. 루스벨트가 이렇게 적극적인 자연보호 정책을 펼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자연 파괴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적 사고에서 자연을 보호하여 미국인들의 야생성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국립공원들을 지정하여 개발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있다.[56]
그는 기존의 자본주의를 비관적으로 보았고 사회복지와 노동자, 여성의 권익문제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루스벨트의 정책을 뉴 내셔널리즘이라고 한다.
5.2. 인종차별 관련
한국에서는 제국주의로 인한 한일합병 문제 때문에 유별나게 인종차별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되레 인종문제에서 유화적인 편에 속했다. 패권주의적 정책을 시행했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근대주의자로써 전근대적인 남부백인들의 (KKK로 대표되는) 흑인 핍박에 대해서는 미개한 전근대적 짓거리로 보고 경멸했으며, KKK를 탄압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현대 미국에서조차도 KKK를 옹호했던 우드로 윌슨 수준의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오히려 루스벨트는 당대 기준에서는 반인종주의적이라고 보일 만한 행보도 보였다. 예를 들어 당대 가장 영향력 있던 흑인 지도자 부커 T. 워싱턴을 백악관에 초청하였는데, 이는 당시 흑인에 대한 인식을 고려하면 파격적 행보였고, 부커 워싱턴은 최초로 백악관에 방문한 흑인으로 기록되었다. 남북 전쟁 직전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피어스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도[57] 노예제를 혐오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5.3. 친일, 혐한 성향
자국 미국에서는 매번 존경하는 대통령 탑텐 안에 항상 들 정도로 평판이 좋은 인물인 것과는 별개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게 볼 수는 없는 인물인데, 재임 중인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서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도왔기 때문이다.[58] 그해 을사조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의 거중조정[59]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 최대금광인 운산금광의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까지 차지하고 있었다.일단 미국 사학계에서는 루스벨트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일병합에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통념과는 달리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태생부터가 꽤 친일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단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방관한 정도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임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 문화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한국에 대해서도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미개하여 스스로를 통치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당시 서구인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던 인종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당시 문명의 상위에 있던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 믿었으며, 미국인에 의해 세계가 주도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대외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60]
이러한 신념을 가졌던 그는 아시아에서 빠른 속도로 문명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대해서도 무척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음에도 일본인만큼은 황인종이 아닌 문명화된 백인의 일원으로 보았다. 그는 “튀르키예인들보다 일본인들이 인종적으로 우리(백인종)에게 더 가깝다. 튀르키예인들은 우리의 국제사회(소위 ‘문명권’)에서 구제 불능 회원인 반면 일본인들은 바람직한 신입 회원이라 생각한다”[61]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1899년 영문으로 발간된 니토베 이나조의 부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사무라이 정신에 심취하여 이 책을 30권이나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줬을 정도였고 에도 시대의 대표적 명군 우에스기 요잔[62]을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일본과 달리 서구화에 실패하고 근대화도 늦었던 중국에 대해서도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인종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당치도 않은 말이냐?”고 말할 정도로 중국을 부정적으로 여겼으며, 포츠머스 회담엔 조선과 함께 청나라 또한 회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다.
루스벨트는 1900년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1905년 언론인 조지 케넌이 보낸 편지 겸 기고문 <나태한 나라, 한국>을 읽고 “한국에 관하여 쓴 당신의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며 극찬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견해가 보다 구체화되어있다. "한국인은 본래 일본인 또는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사물을 파악할 능력이 없으며 사물에 제대로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패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훌륭한 사회를 만들고 지켜나갈 수 없다. 조선인이 갖고 있는 인종적 결함과 낡고 뒤떨어진 정치·사회제도 탓에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후진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또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선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조선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쳐진 인종이다. 조선인은 자치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 일본은 입헌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활기에 넘치는 문명 국민이다." 출처.[63] 편지 일부 내용
이후 미국은 1908년 신사협정, 미일중재조약, 다카히라-루트 협정 등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확인하는 협정을 수차례나 타결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일본인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대통령이다. 반면 한국인에게는 이 점 때문에 자국인들인 미국인들한테나 위인이지 한국인들한테는 악인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링컨, 워싱턴 다음으로 중요하고 친숙한 대통령 중 한 명이지만, 비미국인 중 미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잘 모른다. 원래 위인전의 특징이 인물의 부정적인 면은 철저히 감추려는 성향이 있기도 하고... 아래의 7번 문단에 나오는 미국산 매체에서도 친일 성향 및 동아시아 관련은 잘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6번 문단에 나오는 사냥이나 존 슈랭크가 저지른 암살 미수 등 다양한 일화들이 더 유명하다. 희화화를 한다면 총들고 동물 사냥하는 사냥덕후로 묘사되는 편이다.
일뽕 성향의 미국 유튜버 토니 마라노가 말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한국. 미국 내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동아시아의 관계는 어쩌면 이러한 극렬 와패니즈들만 관심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네이버 캐스트: 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했는가?
5.3.1. 친일의 이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일 성향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사실 이는 문화적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 컸기에, 그 역시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일본을 도우면서도 때론 경계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본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을 경계하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마냥 친일이라고 평가하진 않는다. 앨프리드 머핸에게 보낸 1897년 서한에서도 일본의 위협을 거론하며 하와이의 병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한 적도 있었다.[64]또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동시에 필리핀을 향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경계하여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에도 지나친 손해가 가지 않게 노력하였다.[65] 이로써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길 바랐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강성해지는 조짐이 보이자 일본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루스벨트는 하와이 일본인의 본토 이주를 엄금하고 일본 해군의 태평양 상륙을 우려하여 미국 해군의 증강을 촉구했다. 유진 헤일 상원 의원에게 보내는 1906년 10월 27일자 서신에서는 태평양의 반일 캠페인을 우려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있을 시 미래가 염려된다 할 정도로 고민이 있어 대통령 재임 당시 끊임없이 미합중국 해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1907년 12월에 시작한 미해군의 전세계 원정인 대백색함대 원정에서 일본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의 정식 초청을 받아 함대가 일본을 방문하여 새로운 시대의 미국이 주도할 해군력을 제대로 과시했다. 이 때의 일본은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의 압승으로 인하여 해군력의 자부심이 강했는데 요코하마 입항 당시 미합중국 해군 대백색함대 위용의 충격을 받아(쿠로후네 사건과 비교하여 일본에서는 백선 내항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며 함대 증강에 노력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진다.
1907년에는 일본과의 신사협정을 맺어 비숙련 노동자의 이민을 금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법무장관 녹스에게 보낸 1909년 2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이민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인 노동자는 배제되어야 하는데, 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똑똑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루스벨트의 이민 제한 정책은 후에 1924년 이민법에서 일본계를 포함한 아시아계의 전면 이민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확대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66]
한편으로는 언론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반일 캠페인을 전개해 일본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이 일본인 학생들을 중국인들이 다니는 아시아인 학교로 전학시키려 했는데, 이를 일본인을 중국인과 동급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직접 개입해 무산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 개입은 본인의 일본 애호 성향이 원인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는 친일 성향이 있었고 일본 문화에 호감을 가진 건 분명하지만 기본적으론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직업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와패니즈들마냥 일본에 맹목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갖진 않은 것이다.
애시당초 친일이니 와패니즈니 하는 현대의 관점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그대로 대입하는게 웃긴 것이다. 당대의 인종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을 열렬히 신봉했다는게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루스벨트가 일본 문화를 좋아한 것과 별개로 일본에 대한 정치적 경계가 공과 사를 구분하는 정치인이라서 그랬다는 것도 사실 맞지 않는 말이다. 단지 루스벨트는 백인, 그 중에서도 앵글로 색슨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고 믿는 인종차별주의자고 일본인도 한국인/중국인 등 몇몇 국가들보단 뛰어나지만 본인같은 백인이나 앵글로 색슨 미국인보다는 열등한 민족이고 세계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을 뿐 인 것이다.
그냥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는 애호하지만 어느 분야든 주류인 서구를 넘으려고 하면 견제하고 한 대 쥐어박는 정도의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스러운 사고방식에 불과하고 그러니까 정치적 견제도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20세기초의 일본의 지식인들의 글들을 보다보면 그 전까지는 서구의 문물이나 사고방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넘을 수 없는 차별의 벽을 계속해서 마주하고는 점차적으로 흑화(?)하는 변화의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결국 일본인들은 발전해도 인종에 대한 차별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점점 이런 사고는 반대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함을 외치는 아시아주의나 대동아 공영권같은 방식으로 분출되지만 또 그 안에서도 일본인들의 이중심리(서양의 차별 때문에 동양인이 뭉쳐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 와중에도 일본인과 비 일본인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심리)들도 많이 보이는 등 당대 일본 지식인들의 글들에는 그러한 분열적인 심사를 보이는 내용들이 많이 보인다.
6. 기타
- 시어도어의 애칭이 '테디(Teddy)'라서 테디 루스벨트라고도 알려져 있고 미국에서도 테디 루스벨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디'라는 애칭은 'Teddy', 'Teddie'라는 표기가 있는데 가족들이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 Teddie라는 표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루스벨트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줄여서 Thee라고 쓴 적이 있다. 당시 국민들이 부른 애칭은 Teddy이고 오늘날에도 Teddy Roosevelt라고 쓰는데 Teddie와는 달리 Teddy란 표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풀네임 머릿글자를 따서 TR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언론에서 대통령을 이니셜로만 부른 최초의 사례이다. 한국 언론에서 정치인을 YS, DJ, JP, MB 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그 원조격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친족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들네임인 델러노까지 포함해서 FDR로 부르기도 한다.
-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시기가 루스벨트 재임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비행기를 탄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최초로 자동차를 탄 대통령이기도 하다. 해군 잠수함에 최초로 탑승하여 직접 잠수함을 조타하기도 했다. 다만 죽은 날짜가 하필이면 2살 연상인 토머스 우드로 윌슨 재임기에 죽었다.
사냥복 차림의 루스벨트 "당신 나라에는 특이한 것이 두 개 있는데,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와 당신네 나라 대통령이오." - 루스벨트 재임기에 미국을 방문한 한 영국 외교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어딘가 특이한 면이 있어서 아래의 일화에서 보듯 기행도 많이 일삼았다. 오죽하면 영국 외교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 프랑스 대사인 주세랑이라는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산책하다가 너무 깊어서 걸어서 건너가기 힘든 개울을 만나자 대통령은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주세랑 대사에게 옷을 벗을 것을 권했다. 결국 그 프랑스 외교관도 웃통을 벗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헤엄쳐서 개울을 건넜다. 또한 그와 함께 산책한 영국 대사는 그 날 일기에 죽는 줄 알았다. 산책이라더니 어떻게 2시간 반 동안 등산하냐.며 이런 식의 일기를 남겼을 정도였고, 그 영국 대사가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자 앞서가다 말고 내려와서 영국 대사를 잡아끌고 끝까지 올라갔다. 또한 한 친구와 산책하다가 산 속에서 폭발음이 들렸는데, 이것은 채석장에서 굴을 터뜨린 소리였다. 당연히 바위조각들이 튀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되려 친구에게 '바위조각 많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 보자'고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게 뭐 산책인지 유격 훈련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었다.
-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 복싱선수 존 설리번을 백악관에 불러 복싱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연습 중 부상당한 적도 많지만 눈이 찢어져도 끝까지 연습을 했다. 정통으로 한쪽 눈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는데 결국은 그 눈의 시력을 잃었다(즉, 애꾸눈).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장애물 경주를 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기였던 일본 외교관 가네코 겐타로[67]는 루스벨트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일본 유도 선수들과 스모 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빙해 일주일에 세 번씩 대련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하였다. 백악관에 요코즈나를 초청한 적도 있다.
- 유도와 스모 뿐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에도 시대의 다이묘 우에스기 요잔을 존경했으며 오륜서와 추신구라, 무사도(니토베 이나조 저)를 애독했다. 특히 추신구라에 대해서는 최고의 이야기라는 극찬을 했다. 루스벨트 시절 미일관계는 단순히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차원을 넘어 루스벨트 개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BANZAI"라고 글을 메모하기도 했다.[68]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훈시를 영어로 번역한 후 미군에 배포했다. 일본 외교관들에게서 일본 요리를 대접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일반적인 서양인들은 날생선을 사용하는 일본 요리(특히 회)에 기겁을 했지만 루스벨트 본인은 맛있다고 칭찬하며 잘 먹었다고 한다.
- 1912년 대선에 출마하여 밀워키에서 연설을 준비 중에 괴한[69]에게 피격당해서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지고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로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한 후에 병원으로 갔다. 그나마 연설도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해냈으며 연설 후 의사에게도 '들것에 누워 가기 싫다.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끝내 병원까지 걸어갔다. 총탄이 루스벨트의 상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안경 케이스와 연설문을 뚫고 가슴 근육에 박혔는데, 워낙 운동과 탐험으로 다져진 강건한 체구였던 덕택에 폐를 뚫고 들어오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이 행동에 대해서 그의 반대자인 우드로 윌슨 등도 '나는 루스벨트의 정치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 기개는 존경한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또한 루스벨트가 총상을 치료하는 중에는 같이 대선에 출마한 윌슨과 태프트 모두 선거운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에게 1개 기병 사단을 지휘해서 참전하겠다고 요구했다. 물론 윌슨은 거절했다.
무스를 타고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70][71]
모험심이 강해 탐험과 사냥이 취미다 보니, 자연환경보호정책을 편 것 치고는 상당히 사냥한 동물들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자연보호활동과 사냥을 하는 것의 괴리가 문제되지 않았던 모양으로(사실 지금도 들개 등 유해조수가 나타나면 동물보호협회 소속(...) 엽사가 총 들고 온다)이를 가지고 루스벨트를 비판하는 이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사실 자연보호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자체가 프로 사냥꾼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는 그들 사냥꾼이야말로 동물 숫자의 감소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초원에 우글거리던 코끼리떼가 지금은 손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 경각심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찌보면 코끼리가 다시 많아져야 내가 사냥을 즐길 수 있다(좋게 말하면 인류가 자연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냥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로는 테디 베어 이야기가 있는데 관련 일화는 해당 항목 참고.
- 탐험에 대해서는 1909년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는 과학탐험대를 인솔하여 바로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다. 1913년에는 브라질에 위치한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는 미탐사 지역인 다우트 강 탐험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탐험을 마치고 루스벨트는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 위의 아들이 한 말처럼 진짜로 장례식장에서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려서 실패했지만 그는 관에 들어가 보고 싶다며 징징댔다고 한다.
- 골치를 앓고 있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부의 고위관리와 회의하던 도중에 조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아저씨, 4시가 넘었어요!"라고 말하자 관리에게 "저 아이들하고 4시에 사냥을 가기로 했는데, 미안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논합시다. 원래 애들에게 있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견디기 힘든 일 아니오?"라며 회의도 대충 끝내고 냅다 사냥을 나가버렸다.
- 아이들을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에도 자식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어울려 놀곤 했다. 함께 사냥을 가거나 승마를 하기도 했으며 베개싸움까지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 만찬장의 쥐잡기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영부인 이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가 7명인데(원래 루스벨트 부부의 아이는 6명인데, 남편까지 합쳐서 한 말) 시어도어가 제일 어려요."
- 스테이크를 좋아해서 즐겨먹었으며 음식을 한가지가 아닌 항상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미식가였다.
- 뉴욕 경찰청장 때와 주지사 시절에는 검은 망토로 변장하거나 경찰관으로 변장하고 공무원들이 있는 곳을 돌며 졸거나 근무를 똑바로 안 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즉석에서 질책했다고 한다. 일종의 암행어사를 직접 했던 셈이다.
- 그림도 취미 중 하나였다. 자식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직접 편지를 썼는데 어린이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그림을 그려서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에 그린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백악관 정원의 풍경이다.
- 맥스웰하우스 커피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마지막 한 방울까지(good to the last drop)"[72]가 오랫동안 이 양반 작품으로 알려져 왔었다. 1907년 그가 맥스웰하우스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저 말을 하며 격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적으로 퍼뜨린 루머이며 후에 제너럴 푸즈의 전 회장 클리퍼드 스필러가 테디 루스벨트의 말에서 따온 게 아니라고 확인해 줬다. 1920년대 코카콜라도 같은 문구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찌됐건 루스벨트가 엄청난 커피광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 미국의 상징동물을 흰머리수리에서 회색곰으로 바꾸려고 했다.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흰머리수리가 강한 미국의 상징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73]
텍사스라는 애마가 있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도 꽤 된다.
- 사진기억력을 가져 매일 아침 커피타임에 책 한 권씩을 읽었다고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책을 빌려줬는데 책의 분량이 좀 많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 초대되어 다시 찾아가보니 대통령은 이미 그 책을 독파하여 '그 책 읽어보니까 어떤 부분은 어떻고...'라며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친구에게 열심히 설명했을 정도. 속독 능력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독으로도 유명했다. 덧붙여 친척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속독 능력자였다고 한다.
- 루스벨트에게는 38구경 권총이 있었는데, 인생을 함께 한 총이었다. 이 총은 박물관에서 두번이나 도난당했다. 첫번째 도난은 박물관 뒤 숲에서 찾았고 두번째 도난은 어처구니없게 잃어버린 후[74] 20년만에 되찾게 되었다.
- 간혹 웹상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어록으로 "보수주의자를 화나게 만들고 싶으면, 그에게 거짓말을 하라. 리버럴(좌파)을 화나게 만들고 싶으면,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To anger a conservative, lie to him. To anger a liberal, tell him the truth.)라는 표현이 떠다니기도 했지만, 실제로 루스벨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옥스포드 영어사전 편집자 베리 포픽(B.Popik)이 현존하는 모든 어록들을 검토해 봤지만, 그런 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루스벨트의 당적이 공화당이기 때문에 생긴 루머로 보이는데, 애초에 대기업을 규제하고 법치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고, 일본에 유화적인 정치적 포지션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4번함 CVN-71에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별명은 '큰 몽둥이(Big Stick)'.
- 처음으로 시크릿 서비스가 미국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맡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전임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당하자 더 이상 대통령의 경호 임무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의회가 재무부 산하 기관인 미국 비밀경호국에 경호 임무를 맡긴 것이다.
- 아래 명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목표(별)을 향해 바래보고 꿈을 위한 내실을 다져라(땅을 꿋꿋이 디뎌라)라는 의미.Keep your eyes on the stars, and your feet on the ground.네 두 눈은 별을 향하고, 네 두 발은 땅을 꿋꿋이.
- 미국 미식축구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초창기 미식축구는 아이비 리그에서 활성화되어 점점 야구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인기종목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미식축구 특유의 과격성과 폭력성, 특히 선수보호란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선수들의 크고작은 부상에, 영구적 장애, 심하면 사망도 나올정도라 미식축구 폐지론까지 나올정도로 여론이 나빠졌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거 사내들이 스포츠 좀 하면 다칠수도 있는거 아니오?" 라면서 오히려 젊은이들의 진취성을 높이자고 미식축구를 적극 활성화 시켰는데, 하필 얼마후 하버드 대학교 선수였던 아들이 경기도중에 코뼈가 박살나자 경기를 일으켜 그날 즉시 NCAA 임원, 각 대학교 코칭스태프, 총장을 집합시켜 회의를 해서 강제로 보호장구를 의무화 시킨다.
- 재임 중 최초로 해외를 공무 목적으로 갔던 대통령이었다. 당시 파나마 운하 점검차로 왔던 것이다.
- 언론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친분이 있어서 그의 진보당 창당을 도왔다.
- 하마를 사육해서 고기를 얻자는일명 미국 하마법안(American Hippo bill)의 주요 지지자였다. 하원 결의안 23261호라고 불리는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당시 미국은 외국에서 들여온 부레옥잠에 고통받고, 고기공급이 부족했는데 하마가 부레옥잠을 먹고, 하마는 인간이 잡아먹으면 두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 덤으로 하마고기를 소와 돼지를 섞은 맛이라고 평했다. 꽤 인기를 끈 이론이었지만, 주요 지지자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죽으면서 무산되었다.#
7. 대중매체에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에 로빈 윌리엄스가 이 역으로 등장했다. 항목 참조.위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가 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 입구의 동상 주인공이 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그러나 동상 좌우로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이 마치 떠받드는 듯한 구도를 취하는 모습 때문에 인종차별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받아왔다. 결국 조지 플로이드 흑인 시위가 진행 중인 2020년 6월 철거가 결정되었다. 시어도어 뿐만 아니라 처칠, 콜럼버스 등의 유명인들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2017년 마틴 스콜세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손잡고 영화 루스벨트를 제작할 것이라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해당작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두(The Rise of Theodore Roosevelt)'라는 전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 전기는 버락 오바마가 애독하는 책 중 하나라고. 루스벨트의 삶을 다룬 3부작 전기 중 1부에 해당된다. 루스벨트의 탄생부터 전임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는 곳까지 1부, 2부인 시어도어 렉스는 대통령 퇴임까지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논픽션의 작가는 80년대 레이건 친화적인 전기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997년 작품인 '러프 라이더즈'에도 주인공격. 루스벨트가 러프라이더로 참전한 미국-스페인 전쟁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스벨트 역으로 플래툰의 번즈 하사로 유명한 톰 베린저가 출연. 철저히 미국 중심적으로 전쟁을 해석하고 있지만, 시대적 고증과 전투묘사는 괜찮은 편이니 19세기 말엽의 무기나 전쟁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한 영화.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에서는 러시모어 산에 있는 그의 머리 위에 ICBM 발사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름하여 '루스벨트 지구 멸망'이라는 병기로 개조되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75]에서는 1편에선 농장주를 하다가 의용병을 이끌고 캐나다의 영국군을 무찌르는 영웅으로 나오고 이후 민주당 대통령이 돼서 북부를 부흥시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나온다. 최전선에 시찰가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다만 여기서는 퇴임 후 골프를 치다가 사망하는 걸로 처리된다.
영국에서 나온 대체역사 소설 시리즈에서는 루스벨트가 1912년에 진짜로 암살된 후 혼란의 와중에서 트로츠키주의에 감화된 사회주의자들이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통령 일가를 참살하고 유럽 자유주의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냉전구도를 이끄는 이야기도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PLUTO에 등장하는 캐릭터 Dr. 루스벨트도 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특히 테디 베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사살급.
문명 6에서 미국 지도자로 전작인 문명 5의 워싱턴을 제치고 확정되었다. 본작에서 지도자들 이미지는 실사풍과 캐리커처풍 이미지를 적절히 조합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자세한 것은 문명 6/등장 문명/미국 참고. 두툰의 문명 만화에서의 주 포지션은 막강한 피지컬을 앞세워 주변국들을 때려잡는 깡패 포지션.
엠파이어 어스 2의 미국 캠페인 초반이 미국-스페인 전쟁을 다루므로 루스벨트도 캠페인에서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타잔에서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하필이면 몸값을 차지하려는 악당들에게 납치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타잔이 지켜주자 다행히 무사히 돌아간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회 초반에 잠시 등장한다. 테디 루즈벨트는 유진 초이 대위(이병헌 분)와 카일 무어 소령(데이비드 맥기니스 분)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전투에서의 성과를 치하하고 세계 전반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을 한반도로 파견한다. 동양권에서 방영한 드라마 치고, 해당 배우의 외모나 발성 등이 실제 테디와 상당히 일치하는 편이다. 이때 테디가 했던 발언은 당시 시대상과 실제 테디 루즈벨트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터라 매우 인상적인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케일럽 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에일리어니스트>에서 등장. 그의 경찰국장 시절 행적을 다룬다. 주인공인 크라이즐러와 무어와는 하버드 대학교 시절의 친구로, 정신의학적, 법의학적 시선으로 연쇄살인범을 쫓는 주인공들을 도와준다. 사건을 대충 덮기를 바라는 사교계 거물이나, 새로운 수사방법을 백안시하는 경찰 내부 분위기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투덜거리거나 차갑게 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졌다.[77] 배우는 허트 로커에서 엘드리지 역을 맡은 브라이언 게러티.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 ERB 뉴스의 진행자로 등장하며 "What's up bitches?(잘 지내냐, 새끼들아?)"하는 인사가 특징적이다. 나중에 시즌 5에서 윈스턴 처칠과의 대결로 등장하기도 하며 ERB 뉴스의 해당 인사를 셀프 패러디했다.
숀 코너리의 주연의 1975년작 영화 바람과 라이온에서 루즈벨트 역시 주연급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루즈벨트 역을 맡은 브라이언 키스의 연기는 극찬을 받았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반드시 그 영화를 볼 것을 추천한다. 근래에도 EBS 등에서 종종 방영이 되고 있다.
8. 어록
The great fundamental issue now before our people can be stated briefly. It is, are the American people fit to govern themselves, to rule themselves, to control themselves? I believe they are. My opponents do not. I believe in the right of the people to rule. I believe that the majority of the plain people of the United States will, day in and day out, make fewer mistakes in governing themselves than any smaller class or body of men, no matter what their training, will make in trying to govern them. I believe, again, that the American people are, as a whole, capable of self-control, and of learning by their mistakes. Our opponents pay lip-loyalty to this doctrine; but they show their real beliefs by the way in which they champion every device to make the nominal rule of the people a sham. 지금 우리 국민들 앞에 놓인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간단하게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미국 국민들은 그들 스스로를 통치하고, 그들 스스로를 다스리고, 그들 스스로를 통제하기에 알맞습니까? 입니다. 저는 그들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제 상대들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민의 통치권을 믿습니다. 저는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 대다수가 날마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어떤 소규모 계층이나 집단보다 자신들이 받은 훈련에 관계없이 그들을 통치하려고 노력할 때 저지르는 실수가 더 적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미국인들이 모두 자제력이 있고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이상을 입술로만 지지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명목상의 국민 통치를 가짜로 만드는 모든 수단을 옹호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진짜 신념을 드러냅니다. I have scant patience with this talk of the tyranny of the majority. Wherever there is tyranny of the majority, I shall protest against it with all my heart and soul. But we are today suffering from the tyranny of minorities. It is a small minority that is grabbing our coal-deposits, our water-powers, and our harbor fronts. A small minority is battening on the sale of adulterated foods and drugs. It is a small minority that lies behind monopolies and trusts. It is a small minority that stands behind the present law of master and servant, the sweat-shops, and the whole calendar of social and industrial injustice. It is a small minority that is to-day using our convention system to defeat the will of a majority of the people in the choice of delegates to the Chicago Convention. 나는 다수의 횡포에 대한 이런 이야기에 인내심을 거의 갖지 못합니다. 다수자의 폭정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것에 항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소수자의 폭정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석탄 매장지, 수력 발전 시설, 항구를 움켜쥐는 것은 소수입니다. 소수는 오염된 음식들과 약물들 판매에 매달려 있습니다. 독점들과 트러스트들 뒤에 숨은 것은 소수입니다. 주인과 하인의 현행법, 착취 공장, 그리고 사회 및 산업적 불의의 전체 일정 뒤에 서 있는 것도 소수입니다. 오늘날 시카고 컨벤션의 대의원을 선택하는 데 있어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의 컨벤션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도 소수입니다. The only tyrannies from which men, women, and children are suffering in real life are the tyrannies of minorities. If the majority of the American people were in fact tyrannous over the minority, if democracy had no greater self-control than empire, then indeed no written words which our forefathers put into the Constitution could stay that tyranny. 남성들, 여성들, 어린이들이 현실에서 고통받는 유일한 폭정은 소수자들의 폭정들입니다. 만약 대다수의 미국인이 실제로 소수자에 대해 폭정을 행사했다면, 만약 민주주의가 제국보다 더 큰 자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실제로 우리 조상들이 헌법에 넣은 어떤 서면 단어도 그 폭정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No sane man who has been familiar with the government of this country for the last twenty years will complain that we have had too much of the rule of the majority. The trouble has been a far different one that, at many times and in many localities, there have held public office in the States and in the nation men who have, in fact, served not the whole people, but some special class or special interest. I am not thinking only of those special interests which by grosser methods, by bribery and crime, have stolen from the people.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 정부를 잘 아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수결의 지배가 너무 심하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는 전혀 달라왔습니다. 여러 차례, 여러 지역에서 실제로 전체 국민을 위해 봉사한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이나 이익 집단을 위해 봉사한 사람들이 미국과 국가에 공직을 맡아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뇌물과 범죄와 같은 더욱 추악한 방법으로 국민에게서 돈을 훔친 특수이익집단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I am thinking as much of their respectable allies and figureheads, who have ruled and legislated and decided as if in some way the vested rights of privilege had a first mortgage on the whole United States, while the rights of all the people were merely an unsecured debt. Am I overstating the case? Have our political leaders always, or generally, recognized their duty to the people as anything more than a duty to disperse the mob, see that the ashes are taken away, and distribute patronage? Have our leaders always, or generally, worked for the benefit of human beings, to increase the prosperity of all the people, to give each some opportunity of living decently and bringing up his children well? The questions need no answer. 저는 그들의 존경받는 동맹자들과 우두머리들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그들은 특권층의 기득권이 미국 전체에 대한 1차 저당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통치하고, 입법하고, 결정을 내렸고, 모든 국민의 권리들은 단지 담보 없는 부채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과장하고 있나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항상, 또는 일반적으로 국민에 대한 의무를 폭도를 분산시키고, 재를 치우고, 후원금을 분배하는 것 이상의 것으로 인식했습니까? 우리의 지도자들은 항상, 또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의 번영을 증진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품위 있게 생활하고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일했습니까? 그 질문들은 답이 필요 없지요. Now there has sprung up a feeling deep in the hearts of the people-not of the bosses and professional politicians, not of the beneficiaries of special privilege-a pervading belief of thinking men that when the majority of the people do in fact, as well as theory, rule, then the servants of the people will come more quickly to answer and obey, not the commands of the special interests, but those of the whole people. To reach toward that end the Progressives of the Republican party in certain States have formulated certain proposals for change in the form of the State government - certain new "checks and balances" which may check and balance the special interests and their allies. That is their purpose. Now turn for a moment to their proposed methods. 이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 상사나 직업 정치인, 특권의 수혜자의 마음이 아니라 - 대다수 국민이 이론에 따라가 아니라 실제로 통치할 때 국민의 하인들은 특수 이익 집단의 명령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명령에 더 빨리 응답하고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사상가들의 퍼져 있는 믿음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정 주의 공화당 진보주의자들은 주 정부 형태의 변화에 대한 특정 제안 - 특수 이익과 그들의 동맹을 견제하고 균형을 이룰 수 있는 특정 새로운 "견제와 균형"을 공식화했습니다. 저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이제 그들의 제안한 방법을 잠시 돌아봅니다. First, there are the "initiative and referendum," which are so framed that if the legislatures obey the command of some special interest, and obstinately refuse the will of the majority, the majority may step in and legislate directly. No man would say that it was best to conduct all legislation by direct vote of the people-it would mean the loss of deliberation, of patient consideration but, on the other hand, no one whose mental arteries have not long since hardened can doubt that the proposed changes are needed when the legislatures refuse to carry out the will of the people. The proposal is a method to reach an undeniable evil. Then there is the recall of public officers the principle that an officer chosen by the people who is unfaithful may be recalled by vote of the majority before he finishes his term. I will speak of the recall of judges in a moment - leave that aside - but as to the other officers, I have heard no argument advanced against the proposition, save that it will make the public officer timid and always currying favor with the mob. That argument means that you can fool all the people all the time, and is an avowal of disbelief in democracy. If it be true-and I believe it is not it is less important than to stop those public officers from currying favor with the interests. Certain States may need the recall, others may not; where the term of elective office is short it may be quite needless; but there are occasions when it meets a real evil, and provides a needed check and balance against the special interests. 첫째, "이니셔티브와 국민 투표"가 있는데, 이는 입법부가 어떤 특수 이익의 명령에 따르고 다수의 의지를 완강히 거부할 경우 다수가 개입하여 직접 입법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모든 입법을 국민의 직접 투표로 진행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심의와 인내심 있는 고려를 잃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면에 정신 동맥이 오래 전에 굳어진 사람은 입법부가 국민의 의지를 수행하기를 거부할 때 제안된 변경 사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 제안은 부인할 수 없는 악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다음 공무원 소환이 있는데, 이는 국민이 선출한 불성실한 공무원이 임기를 마치기 전에 다수의 투표로 소환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저는 잠시 후에 판사 소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옆으로 제쳐두고. 하지만 다른 임원들에 대해서는, 저는 그 제안에 반대하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공무원을 소심하게 만들고 항상 폭도에게 아첨하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뿐입니다. 그 주장은 당신이 항상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 공무원들이 이해 관계자에게 아첨하는 것을 막는 것보다 덜 중요합니다. 어떤 주에서는 소환이 필요할 수 있고, 다른 주에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거직의 임기가 짧은 경우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악에 부딪히고 특수 이해 관계자에 대한 필요한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Then there is the direct primary-the real one, not the New York one-and that, too, the Progressives offer as a check on the special interests. Most clearly of all does it seem to me that this change is wholly good-for every State. The system of party government is not written in our constitutions, but it is none the less a vital and essential part of our form of government. In that system the party leaders should serve and carry out the will of their own party. There is no need to show how far that theory is from the facts, or to rehearse the vulgar thieving partnerships of the corporations and the bosses, or to show how many times the real government lies in the hands of the boss, protected from the commands and the revenge of the voters by his puppets in office and the power of patronage. We need not be told how he is thus entrenched nor how hard he is to overthrow. The facts stand out in the history of nearly every State in the Union. They are blots on our political system. The direct primary will give the voters a method ever ready to use, by which the party leader shall be made to obey their command. The direct primary, if accompanied by a stringent corrupt-practices act, will help break up the corrupt partnership of corporations and politicians. 그리고 직접 예비선거가 있습니다. 뉴욕이 아닌 실제 예비선거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진보당이 특수 이익에 대한 견제로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변화가 모든 주에 전적으로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정당 정부 체제는 우리 헌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 정부 형태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그 체제에서 정당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당의 의지를 섬기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 이론이 사실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보여줄 필요도 없고, 기업과 사장들의 저속한 도둑질 파트너십을 반복할 필요도 없고, 실제 정부가 얼마나 자주 사장의 손에 놓여 있는지 보여줄 필요도 없습니다. 사장의 꼭두각시와 후원의 힘으로 유권자들의 명령과 복수로부터 보호받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굳건히 자리 잡았는지, 그를 전복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은 연방의 거의 모든 주의 역사에서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우리 정치 체제의 얼룩입니다. 직접 예비선거는 유권자들에게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할 것이며, 이를 통해 당 대표는 유권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직접 예비선거는 엄격한 부패 행위 방지법이 수반된다면 기업과 정치인의 부패한 파트너십을 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My opponents charge that two things in my program are wrong because they intrude into the sanctuary of the judiciary. The first is the recall of judges; and the second, the review by the people of, judicial decisions on certain constitutional questions. I have said again and again that I do not advocate the recall of judges in all States and in all communities. In my own State I do not advocate it or believe it to be needed, for in this State our trouble lies not with corruption on the bench, but with the effort by the honest but wrong-headed judges to thwart the people in their struggle for social justice and fair dealing. The integrity of our judges from Marshall to White and Holmes-and to Cullen and many others in our own State -- is a fine page of American history. But I say it soberly: Democracy has a right to approach the sanctuary of the courts when a special interest has corruptly found sanctuary there; and this is exactly what has happened in some of the States where the recall of the judges is a living issue. I would far more willingly trust the whole people to judge such a case than some special tribunal-perhaps appointed by the same power that chose the judge-if that tribunal is not itself really responsible to the people and is hampered and clogged by the technicalities of impeachment proceedings. 제 반대자들은 제 프로그램의 두 가지가 사법부의 성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는 판사 소환이고, 두 번째는 특정 헌법적 문제에 대한 사법 판결을 국민이 검토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주와 모든 커뮤니티에서 판사 소환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거듭해서 말했습니다. 제 주에서도 저는 그것을 옹호하지 않으며 필요하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이 주에서 우리의 문제는 재판부의 부패가 아니라 정직하지만 잘못된 생각을 가진 판사들이 사회 정의와 공정한 거래를 위한 국민의 투쟁을 좌절시키려는 노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셜에서 화이트와 홈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주에 있는 컬렌과 다른 많은 판사들의 성실성은 미국 역사의 훌륭한 한 페이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냉정하게 말씀드립니다. 민주주의는 특정 이익 집단이 부패하게 피난처를 찾았을 때 법원이라는 피난처에 접근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판사 소환이 중요한 문제인 일부 주에서 정확히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판사를 선택한 동일한 권력에 의해 임명된 특별 재판소보다 전체 국민이 그러한 사건을 판결하도록 훨씬 더 기꺼이 신뢰할 것입니다. 그 재판소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책임이 없고 탄핵 절차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방해받고 막혔을 경우 말입니다. I have stated that the courts of the several States - not always but often - have construed the "due process" clause of the State constitutions as if it prohibited the whole people of the State from adopting methods of regulating the use of property so that human life, particularly the lives of the working men, shall be safer, freer, and happier. No one can successfully impeach this statement. I have insisted that the true construction of "due process" is that pronounced by Justice Holmes in delivering the unanimous opinion of 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when he said: "The police power extends to all the great public need. It may be put forth in aid of what is sanctioned by usage, or held by the prevailing morality or strong and preponderant opinion to be greatly and immediately necessary to the public welfare." 저는 여러 주의 법원이 -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 주 헌법의 "적법 절차" 조항을 마치 주 전체 주민이 재산 사용을 규제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인간의 삶, 특히 근로자의 삶이 더 안전하고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해석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이 진술을 성공적으로 반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적법 절차"의 진정한 해석은 홈즈 판사가 미국 대법원의 만장일치 의견을 전달하면서 "경찰권은 모든 대중의 큰 필요까지 확장됩니다. 그것은 관습에 의해 승인되거나 지배적인 도덕성이나 강력하고 우세한 의견에 의해 대중 복지에 매우 즉각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돕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린 해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I insist that the decision of the New York court of appeals in the Ives case, which set aside the will of the majority of the people as to the compensation of injured workmen in dangerous trades, was intolerable and based on a wrong political philosophy. I urge that in such cases where the courts construe the due process clause as if property rights, to the exclusion of human rights, had a first mortgage on the Constitution, the people may, after sober deliberation, vote, and finally determine whether the law which the court set aside shall be valid or not. By this method can be clearly and finally ascertained the preponderant opinion of the people which Justice Holmes makes the test of due process in the case of laws enacted in the exercise of the police power. The ordinary methods now in vogue of amending the Constitution have in actual practice proved wholly inadequate to secure justice in such cases with reasonable speed, and cause intolerable delay and injustice, and those who stand against the changes I propose are champions of wrong and injustice, and of tyranny by the wealthy and the strong over the weak and the helpless. 저는 아이브스 사건에서 뉴욕 항소법원이 위험한 무역에서 부상당한 노동자에 대한 보상에 관해 대다수 국민의 의지를 무시한 결정은 용납할 수 없으며 잘못된 정치 철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법원이 재산권이 인권을 제외하고 헌법에 따라 1차 저당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적정 절차 조항을 해석하는 그러한 경우 국민은 냉정한 심의 끝에 투표하고 최종적으로 법원이 무시한 법이 유효한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방법을 통해 홈즈 판사가 경찰권 행사로 제정된 법률의 경우 적정 절차에 대한 시험을 하는 국민의 우세한 의견을 명확하고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헌법 개정의 통상적인 방법은 실제 실행에 있어서 이런 사건에서 적절한 속도로 정의를 확보하기에 전혀 부적절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참을 수 없는 지연과 불의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안하는 개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잘못과 불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부유하고 강자가 약하고 무력한 사람을 횡포하게 다루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So that no man may misunderstand me, let me recapitulate: 아무도 나를 오해하지 못하도록, 다시 요약하자면: (1) I am not proposing anything in connection with 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or with the Federal Constitution. (1) 나는 미국 대법원이나 연방 헌법과 관련하여 어떤 것도 제안하지 않습니다. (2) I am not proposing anything having any connection with ordinary suits, civil or criminal, as between individuals. (2) 나는 개인 간의 일반적인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과 관련된 어떤 것도 제안하지 않습니다. (3) I am not speaking of the recall of judges. (3) 나는 판사 소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4) I am proposing merely that in a certain class of cases involving police power, when a State court has set aside as unconstitutional a law passed hy the legislature for the general welfare, the question of the validity of the law-which should depend, as Justice Holmes so well phrases it, upon the prevailing morality or preponderant opinion-be submitted for final determination to a vote of the people, taken after due time for consideration. (4) 나는 단지 단지 경찰권과 관련된 특정 사례에서 주 법원이 일반의 복지를 위해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을 위헌으로 판결했을 때, 법률의 유효성 문제는(홈즈 판사가 잘 표현했듯이, 지배적인 도덕성이나 우세한 의견에 달려 있음) 고려 기간을 거친 후 최종 결정을 위해 국민 투표에 회부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And I contend that the people, in the nature of things, must be better judges of what is the preponderant opinion than the courts, and that the courts should not be allowed to reverse the political philosophy of the people. My point is well illustrated by a recent decision of the Supreme Court, holding that the court would not take jurisdiction of a case involving the constitutionality of the initiative and referendum laws of Oregon. The ground of the decision was that such a question was not judicial in its nature, but should be left for determination to the other co-ordinate departments of the government. Is it not equally plain that the question whether a given social policy is for the public good is not of a judicial nature, but should be settled by the legislature, or in the final instance by the people themselves? 그리고 저는 사물의 본질상 법원보다 국민이 우세한 의견을 더 잘 판단해야 하며, 법원이 국민의 정치적 철학을 뒤집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제 요점은 최근 대법원의 판결에서 잘 설명되는데, 대법원은 오리건주의 이니셔티브 및 국민투표법의 합헌성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결했습니다. 판결의 근거는 그러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사법적이지 않으며, 정부의 다른 조정 부서에서 결정하도록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어진 사회 정책이 공익을 위한 것인지 여부에 대한 문제는 사법적 성격이 아니라 입법부에서, 아니면 최종적으로 국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명백하지 않습니까?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Mr. Taft, devoted most of a recent speech to criticism of this proposition. He says that it "is utterly without merit or utility, and, instead of being in the interest of all the people, and of the stability of popular government, is sowing the seeds of confusion and tyranny." (By this he, of course, means the tyranny of the majority, that is, the tyranny of the American people as a whole.) He also says that my proposal (which, as he rightly sees, is merely a proposal to give the people a real, instead of only a nominal, chance to construe and amend a State constitution with reasonable rapidity) would make such amendment and interpretation "depend on the feverish, uncertain, and unstable determination of successive votes on different laws by temporary and changing majorities"; and that "it lays the axe at the root of the tree of well-ordered freedom, and subjects the guaranties of life, liberty, and property without remedy to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of an electorate." 미국 대통령, 태프트 씨는, 최근 연설의 대부분을 이 제안에 대한 비판에 할애했다. 그는 그것이 "전혀 공로나 유용성이 없으며, 모든 국민의 이익과 대중 정부의 안정성에 부합하지 않고 혼란과 폭정의 씨앗을 뿌린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폭정은 다수의 폭정, 다시 말해 미국 국민 전체의 폭정을 뜻합니다.) 그는 또한 내 제안(그가 올바르게 파악했듯이, 이는 국민에게 명목상의 기회가 아닌 실질적인 기회를 주어 주 헌법을 합리적으로 신속하게 해석하고 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안일 뿐)이 그러한 개정과 해석을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다수에 의한 다양한 법률에 대한 연이은 투표의 열광적이고 불확실하며 불안정한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하며, "잘 질서 있는 자유라는 나무의 뿌리에 도끼를 얹고,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보장을 일시적인 유권자 다수의 변덕스러운 충동에 구제 불능으로 종속시킨다"고 말합니다. This criticism is really less a criticism of my proposal than a criticism of all popular government. It is wholly unfounded, unless it is founded on the belief that the people are fundamentally untrustworthy. If the Supreme Court's definition of due process in relation to the police power is sound, then an act of the legislature to promote the collective interests of the community must be valid, if it embodies a policy held by the prevailing morality or a preponderant opinion to be necessary to the public welfare. 이 비판은 실제로 제 제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모든 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입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한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경찰권과 관련하여 대법원이 내린 적정 절차에 대한 정의가 타당하다면, 공동체의 집단적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입법부의 행위는 유효해야 하며, 대중의 복지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우세한 도덕성이나 우세한 의견이 정책을 구현한 것이어야 합니다. This is the question that I propose to submit to the people. How can the prevailing morality or a preponderant opinion be better and more exactly ascertained than by a vote of the people? The people must know better than the court what their own morality and their own opinion is. I ask that you, here, you and the others like you, you the people, be given the chance to state your own views of justice and public morality, and not sit meekly by and have your views announced for you by well-meaning adherents of outworn philosophies, who exalt the pedantry of formulas above the vital needs of human life. 이것이 제가 국민에게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우세한 도덕성이나 우세한 의견을 국민 투표보다 더 잘,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국민은 법원보다 자신의 도덕성과 의견이 무엇인지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여기 계신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과 같은 다른 사람들, 여러분 국민에게 정의와 공공 도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힐 기회를 주시고, 인간 삶의 필수적인 필요보다 공식의 학구적 태도를 더 중시하는 선의의 지지자들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견해를 발표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The object I have in view could probably be accomplished by an amendment of the State constitutions taking away from the courts the power to review the legislature's determination of a policy of social justice, by defining due process of law in accordance with the views expressed by Justice Holmes of the Supreme Court. But my proposal seems to me more democratic and, I may add, less radical. For under the method I suggest the people may sustain the court as against the legislature, whereas, if due process were defined in the Constitution, the decision of the legislature would be final.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은 아마도 주 헌법을 개정하여 법원에서 사회 정의 정책에 대한 입법부의 결정을 검토할 권한을 박탈하고 대법원의 홈즈 판사가 표현한 견해에 따라 적법 절차를 정의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제안은 나에게 더 민주적이고, 나는 덜 급진적이라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에서는 국민이 입법부에 반대하여 법원을 지지할 수 있지만, 적법 절차가 헌법에 정의되어 있다면 입법부의 결정이 최종 결정이 될 것입니다. Mr. Taft's position is the position that has been held from the beginning of our government, although not always so openly held, by a large number of reputable and honorable men who, down at bottom, distrust popular government, and, when they must accept it, accept it with reluctance, and hedge it around with every species of restriction and check and balance, so as to make the power of the people as limited and as ineffective as possible. 태프트 씨의 입장은 우리 정부의 시작부터 유지해 온 입장입니다. 비록 항상 공개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밑바닥에는 대중 정부를 불신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는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모든 종류의 제한과 견제와 균형으로 그것을 보호함으로써 국민의 권력을 가능한 한 제한하고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명성 있고 명예로운 많은 사람들이 유지해 온 입장입니다. Mr. Taft fairly defines the issue when he says that our government is and should be a government of all the people by a representative part of the people. This is an excellent and moderate description of all oligarchy. It defines our government as a government of all the people by a few of the people. 태프트 씨는 우리 정부가 국민의 대표적 일부가 이끄는 모든 국민의 정부이며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공정하게 정의합니다. 이것은 모든 과두정치에 대한 훌륭하고 온건한 설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정부를 소수의 국민이 이끄는 모든 국민의 정부로 정의합니다. Mr. Taft, in his able speech, has made what is probably the best possible presentation of the case for those who feel in this manner. Essentially this view differs only in its expression from the view nakedly set forth by one of his supporters, Congressman Campbell. Congressman Campbell, in a public speech in New Hampshire, in opposing the proposition to give the people real and effective control over all their servants, including the judges, stated that this was equivalent to allowing an appeal from the umpire to the bleachers. Doubtless Congressman Campbell was not himself aware of the cynical truthfulness with which he was putting the real attitude of those for whom he spoke. But it unquestionably is their real attitude. Mr. Campbell's conception of the part the American people should play in self-government is that they should sit on the bleachers and pay the price of admission, but should have nothing to say as to the contest which is waged in the arena by the professional politicians. Apparently Mr. Campbell ignores the fact that the American people are not mere onlookers at a game, that they have a vital stake in the contest, and that democracy means nothing unless they are able and willing to show that they are their own masters. 태프트 씨는 그의 유능한 연설에서 이런 식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견해는 그의 지지자 중 한 명인 캠벨 의원이 노골적으로 밝힌 견해와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캠벨 의원은 뉴햄프셔에서 한 공개 연설에서 판사를 포함한 모든 하인에 대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통제권을 국민에게 부여한다는 제안에 반대하면서, 이것이 심판이 관람석에 항소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캠벨 의원은 자신이 대변하는 사람들의 실제 태도에 대해 냉소적인 진실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실제 태도입니다. 캠벨 씨는 미국 국민이 자치 정부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개념은 관람석에 앉아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전문 정치인들이 경기장에서 벌이는 경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캠벨 씨는 미국 국민이 단순히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그들이 경쟁에 중요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의 주인임을 보여줄 능력과 의지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듯합니다. I am not speaking jokingly, nor do I mean to be unkind; for I repeat that many honorable and well-meaning men of high character take this view, and have taken it from the time of the formation of the nation. Essentially this view is that the Constitution is a straight-jacket to be used for the control of an unruly patient-the people. Now, I hold that this view is not only false but mischievous, that our constitutions are instruments designed to secure justice by securing the deliberate but effective expression of the popular will, that the checks and balances are valuable as far, and only so far, as they accomplish that deliberation, and that it is a warped and unworthy and improper construction of our form of government to see in it only a means of thwarting the popular will and of preventing justice. 저는 농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불친절할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많은 명예롭고 선의의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가 건국된 이래로 그렇게 해 왔다는 것을 반복합니다. 본질적으로 이 견해는 헌법이 어수룩한 환자인 국민을 통제하는 데 사용되는 구속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 견해가 거짓일 뿐만 아니라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헌법은 대중의 의지를 의도적이지만 효과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정의를 확보하도록 설계된 도구이며, 견제와 균형은 그러한 심의를 달성하는 한,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만 가치가 있으며, 대중의 의지를 좌절시키고 정의를 방해하는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우리 정부 형태의 왜곡되고 가치 없고 부적절한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Mr. Taft says that "every class" should have a "voice" in the government. That seems to me a very serious misconception of the American political situation. The real trouble with us is that some classes have had too much voice. One of the most important of all the lessons to be taught and to be learned is that a man should vote, not as a representative of a class, but merely as a good citizen, whose prime interests are the same as those of all other good citizens. The belief in different classes, each having a voice in the government, has given rise to much of our present difficulty; for whosoever believes in these separate classes, each with a voice, inevitably, even although unconsciously, tends to work, not for the good of the whole people, but for the protection of some special class-usually that to which he himself belongs. The same principle applies when Mr. Taft says that the judiciary ought not to be "representative" of the people in the sense that the legislature and the Executive are. 태프트 씨는 "모든 계층"이 정부에서 "의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진짜 문제는 일부 계층이 너무 많은 발언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사람이 계층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단지 좋은 시민으로서 투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주요 관심사는 다른 모든 좋은 시민과 동일합니다. 정부에서 각자의 발언권이 있는 서로 다른 계층에 대한 믿음이 현재 우리의 많은 어려움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발언권이 있는 이러한 별도의 계층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불가피하게 전체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층, 보통 자신이 속한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태프트 씨가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가 하는 의미에서 국민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This is perfectly true of the judge when he is performing merely the ordinary functions of a judge in suits between man and man. It is not true of the judge engaged in interpreting, for instance, the due process clause-where the judge is ascertaining the preponderant opinion of the people (as Judge Holmes states it ). When he exercises that function he has no right to let his political philosophy reverse and thwart the will of the majority. In that function the judge must represent the people or he fails in the test the Supreme Court has laid down. Take the Workmen's Compensation Act here in New York. The legislators gave us a law in the interest of humanity and decency and fair dealing. In so doing they represented the people, and represented them well. Several judges declared that law constitutional in our State, and several courts in other States declared similar laws constitutional, and the Supreme Court of the nation declared a similar law affecting men in interstate business constitutional; but the highest court in the State of New York, the court of appeals, declared that we, the people of New York, could not have such a law. I hold that in this case the legislators and the judges alike occupied representative positions; the difference was merely that the former represented us well and the latter represented us ill.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송에서 판사의 일반적인 기능을 수행할 때 판사에게 완벽하게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적정 절차 조항을 해석하는 판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판사가 사람들의 우세한 의견을 확인하는 경우(홈스 판사가 말했듯이). 그가 그 기능을 행사할 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철학이 뒤집히고 다수의 의지를 좌절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그 기능에서 판사는 사람들을 대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대법원이 정한 시험에서 탈락합니다. 뉴욕의 근로자 보상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입법자들은 인류와 예의, 공정한 거래의 이익을 위한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사람들을 대표했고, 그들을 잘 대표했습니다. 여러 판사가 우리 주에서 그 법이 합헌이라고 선언했고, 다른 주의 여러 법원이 유사한 법을 합헌이라고 선언했으며, 국가의 대법원은 주간 사업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사한 법이 합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주의 최고 법원인 항소 법원은 우리 뉴욕 주민이 그런 법을 가질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입법자와 판사가 모두 대표적 지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합니다. 차이점은 단지 전자가 우리를 잘 대표했고 후자가 우리를 나쁘게 대표했다는 것입니다. Remember that the legislators promised that law, and were returned by the people partly in consequence of such promise. That judgment of the people should not have been set aside unless it were irrational. Yet in the Ives case the New York court of appeals praised the policy of the law and the end it sought to obtain; and then declared that the people lacked power to do justice! 입법자들이 그 법을 약속했고, 그 약속의 일부로 국민이 그들에게 반환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국민의 그 판단은 비이성적이지 않은 한 뒤집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이브스 사건에서 뉴욕 항소 법원은 법의 정책과 얻으려는 목적을 칭찬한 다음, 국민이 정의를 행할 힘이 없다고 선언했다! Mr. Taft again and again, in quotations I have given and elsewhere through his speech, expresses his disbelief in the people when they vote at the polls. In one sentence he says that the proposition gives "powerful effect to the momentary impulse of a majority of an electorate and prepares the way for the possible exercise of the grossest tyranny." Elsewhere he speaks of the "feverish uncertainty" and "unstable determination" of laws by "temporary and changing majorities"; and again he says that the system I propose "would result in suspension or application of constitutional guaranties according to popular whim," which would destroy "all possible consistency" in constitutional interpretation. I should much like to know the exact distinction that is to be made between what Mr. Taft calls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when applied to a question such as that I raise and any other question. Remember that under my proposal to review a rule of decision by popular vote, amending or construing, to that extent, the Constitution, would certainly take at least two years from the time of the election of the legislature which passed the act. Now, only four months elapse between the nomination and the election of a man as President, to fill for four years the most important office in the land. In one of Mr. Taft's speeches he speaks of "the voice of the people as coming next to the voice of God." 태프트 씨는 다시 그리고 다시, 제가 인용한 내용과 다른 곳에서 연설을 통해 사람들이 투표할 때 믿지 못한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한 문장에서 그는 이 제안이 "유권자 다수의 순간적인 충동에 강력한 효과를 주고 가장 극심한 폭정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다수"에 의한 법률의 "열광적인 불확실성"과 "불안정한 결정"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제가 제안하는 시스템은 "대중의 변덕에 따라 헌법적 보장을 정지하거나 적용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는 헌법 해석에서 "가능한 모든 일관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태프트 씨가 제가 제기한 것과 같은 문제에 적용될 때 "일시적 다수의 변덕스러운 충동"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른 모든 문제 사이에 정확히 어떤 구별이 필요한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제안한 대로, 국민 투표에 의한 결정 규칙을 검토하고, 헌법을 그 정도로 개정하거나 해석하려면, 그 법안을 통과시킨 의회의 선거일로부터 적어도 2년은 걸릴 것입니다. 지금은 지명과 대통령 선출 사이에 불과 4개월이 걸리며, 4년 동안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을 사람이 선출됩니다. 태프트 씨는 연설 중 하나에서 "국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 다음에 온다"고 말했습니다. Apparently, then, the decision of the people about the presidency, after four months' deliberation, is to be treated as "next to the voice of God"; but if, after two years of sober thought, they decide that women and children shall be protected in industry, or men protected from excessive hours of labor under unhygienic conditions, or wage-workers compensated when they lose life or limb in the service of others, then their decision forthwith becomes a "whim" and "feverish" and "unstable" and an exercise of "the grossest tyranny" and the "laying of the axe to the root of the tree of freedom." 따라서 4개월간의 심의 끝에 국민이 대통령직에 대한 결정을 내린 것은 "신의 음성에 따른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하지만 2년간의 냉정한 생각 끝에 산업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거나,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과도한 노동을 하는 남성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다 생명이나 신체를 잃은 임금 노동자를 보상해야 한다고 결정한다면, 그들의 결정은 즉시 "변덕"과 "열광적"과 "불안정"이 되고 "가장 극악한 폭정"을 행사하는 것과 "자유라는 나무의 뿌리에 도끼를 얹는 것"이 됩니다. It seems absurd to speak of a conclusion reached by the people after two years' deliberation, after thrashing the matter out before the legislature, after thrashing it out before the governor, after thrashing it out before the court and by the court, and then after full debate for four or six months, as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If Mr. Taft's language correctly describes such action by the people, then he himself and all other Presidents have been elected by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then the constitution of each State, and the Constitution of the nation, have been adopted, and all amendments thereto have been adopted, by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If he is right, it was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which founded, and another fitful impulse which perpetuated, this nation. 2년간의 심의 끝에, 입법부에서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 끝에, 주지사 앞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법정과 법정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그리고 4~6개월 동안의 충분한 토론 끝에 국민이 내린 결론을 "일시적 다수결의 변덕스러운 충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태프트 씨의 말이 국민의 그러한 행동을 올바르게 묘사했다면, 그 자신과 다른 모든 대통령은 "일시적 다수결의 변덕스러운 충동"에 의해 선출된 것입니다. 그러면 각 주의 헌법과 국가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그에 대한 모든 개정안이 "일시적 다수결의 변덕스러운 충동"에 의해 채택되었습니다. 그가 옳다면, 이 나라를 세운 것은 "일시적 다수결의 변덕스러운 충동"이었고, 또 다른 변덕스러운 충동이 이 나라를 영속시켰습니다. Mr. Taft's position is perfectly clear. It is that we have in this country a special class of persons wiser than the people, who are above the people, who cannot be reached by the people, but who govern them and ought to govern them; and who protect various classes of the people from the whole people. That is the old, old doctrine which has been acted upon for thousands of years abroad; and which here in America has been acted upon sometimes openly, sometimes secretly, for forty years by many men in public and in private life, and I am sorry to say by many judges; a doctrine which has in fact tended to create a bulwark for privilege, a bulwark unjustly protecting special interests against the rights of the people as a whole. This doctrine is to me a dreadful doctrine; for its effect is, and can only be, to make the courts the shield of privilege against popular rights. Naturally, every upholder and beneficiary of crooked privilege loudly applauds the doctrine. It is behind the shield of that doctrine that crooked clauses creep into laws, that men of wealth and power control legislation. The men of wealth who praise this doctrine, this theory, would do well to remember that to its adoption by the courts is due the distrust so many of our wage-workers now feel for the courts. I deny that that theory has worked so well that we should continue it. I most earnestly urge that the evils and abuses it has produced cry aloud for remedy; and the only remedy is in fact to restore the power to govern directly to the people, and to make the public servant directly responsible to the whole people -- and to no part of them, to no "class" of them. 태프트 씨의 입장은 완벽하게 명확합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 국민보다 더 현명한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국민 위에 있으며, 국민이 접근할 수 없지만 국민을 다스리고 다스려야 하며, 국민 전체로부터 다양한 계층의 국민을 보호합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해외에서 실행되어 온 오래되고 오래된 교리입니다. 그리고 여기 미국에서는 4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밀스럽게 공적, 사적 삶에서 실행해 왔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판사들이 실행해 왔습니다. 사실 특권을 위한 방벽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 교리입니다. 국민 전체의 권리에 반하는 특수 이익을 부당하게 보호하는 방벽입니다. 이 교리는 저에게 끔찍한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효과는 법원을 대중의 권리에 대한 특권의 방패로 만드는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모든 비뚤어진 특권의 옹호자와 수혜자는 이 교리를 큰 소리로 칭찬합니다. 그 교리의 방패 뒤에서 비뚤어진 조항들이 법률에 끼어들고,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입법을 통제합니다. 이 교리, 이 이론을 칭찬하는 부자들은 법원에서 이 교리를 채택한 것이 많은 임금 노동자들이 법원에 대해 느끼는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이 그렇게 잘 통했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낳은 악과 남용이 시정을 위해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고 가장 간절히 촉구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시정은 실제로 국민에게 직접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하고, 공무원이 국민 전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져야 하며, 국민의 어떤 부분도, 어떤 "계급"도 책임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Mr. Taft is very much afraid of the tyranny of majorities. For twenty-five years here in New York State, in our efforts to get social and industrial justice, we have suffered from the tyranny of a small minority. We have been denied, now by one court, now by another, as in the Bakeshop Case, where the courts set aside the law limiting the hours of labor in bakeries 태프트 씨는 다수의 폭정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뉴욕 주에서 25년 동안, 우리는 사회 및 산업 정의를 얻기 위한 노력에서 소수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한 법원에 의해, 때때로 다른 법원에 의해 거부당했습니다. 베이크숍 사건에서 법원은 베이커리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법률을 무효화했습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 보상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입 주택 시가 공장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사건과 다른 많은 사건에서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 잘못된 정치 철학을 가진 몇몇 훌륭한 판사에 의해 우리 국민의 삶, 자유, 행복 추구를 보호할 권리를 거부당했습니다. "일관성"에 대해 말하자면, 예를 들어 소득세 사건과 같은 법원 기록은 사람들이 "일관성"에 대해 표현하는 두려움이 유치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불일치로 가득 차 있습니다. Well-meaning, short-sighted persons have held up their hands in horror at my proposal to allow the people themselves to construe the constitution which they themselves made. Yet this is precisely what the Association of the Bar of the City of New York proposed to do in the concurrent resolution which was introduced at their request into our legislature on January 16 last, proposing to amend the State constitution by a section reading as follows: "Nothing contained in this Constitution shall be construed to limit the powers of the legislature to enact laws" such as the Workmen's Compensation Act. In other words, the New York Bar Association is proposing to appeal to the people to construe the constitution in such a way as will directly reverse the court. They are proposing to appeal from the highest court of the State to the people. That is just what I propose to do; the difference is only one of method, not of purpose; my method will give better results, and will give them more quickly. The Bar Association by its action admits that the court was wrong, and sets to work to change the rule which it laid down. As Lincoln announced of the Dred Scott decision in his debates with Douglas: "Somebody has to reverse that decision, since it is made, and we mean to reverse it, and we mean to do it peaceably." Was Lincoln wrong? Was the spirit of the nation that wiped out slavery "the fitful impulse of a temporary majority?" 선의의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국민이 스스로 만든 헌법을 스스로 해석하도록 허용하자는 제 제안에 공포에 질려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뉴욕시 변호사 협회가 지난 1월 16일에 우리 의회에 요청하여 제출한 동시 결의안에서 제안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헌법에 포함된 내용은 근로자 보상법과 같은 법률을 제정하는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뉴욕 변호사 협회는 국민에게 헌법을 법원을 직접 뒤집는 방식으로 해석해 달라고 호소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주 최고 법원에서 국민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바로 제가 제안하는 바입니다. 차이점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일 뿐입니다. 제 방법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더 빨리 가져올 것입니다. 변호사 협회는 법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행동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정한 규칙을 바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링컨이 더글러스와의 토론에서 드레드 스콧 판결에 대해 발표한 것처럼 "누군가가 그 판결을 뒤집어야 합니다. 이미 내려진 판결이고, 우리는 그것을 뒤집을 생각이며, 평화롭게 뒤집을 생각입니다." 링컨이 틀렸을까요? 노예 제도를 근절한 국가의 정신이 "일시적 다수파의 변덕스러운 충동"이었을까요? Remember, I am not discussing the recall of judges -- although I wish it distinctly understood that the recall is a mere piece of machinery to take the place of the unworkable impeachment which Mr. Taft in effect defends, and that if the days of Maynard ever came back again in the State of New York I should favor it. I have no wish to come to it; but our opponents, when they object to all efforts to secure real justice from the courts, are strengthening the hands of those who demand the recall. In a great many States there has been for many years a real recall of judges as regards appointments, promotions, reappointments, and reelections; and this recall was through the turn of a thumbscrew at the end of a long-distance rod in the hands of great interests. I believe that a just judge would feel far safer in the hands of the people than in the hands of those interests. 기억, 저는 판사 소환에 대해 논의하지 않습니다. 소환은 태프트 씨가 사실상 옹호하는 쓸모없는 탄핵을 대신하기 위한 단순한 기계 장치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메이너드 시절이 뉴욕주에 다시 돌아온다면 저는 그것을 지지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반대자들은 법원에서 진정한 정의를 확보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할 때 소환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에서 임명, 승진, 재임명 및 재선과 관련하여 수년 동안 판사를 실제로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환은 큰 이해 관계자의 손에 있는 장거리 막대기 끝에 있는 엄지 나사를 돌려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정의로운 판사가 그러한 이해 관계자의 손보다 국민의 손에서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라고 믿습니다. I stand on the Columbus speech. The principles there asserted are not new, but I believe that they are necessary to the maintenance of free democratic government. The part of my speech in which I advocated the right of the people to be the final arbiters of what is due process of law in the case of statutes enacted for the general welfare will ultimately, I am confident, be recognized as giving strength and support to the courts instead of being revolutionary and subversive. The courts to-day owe the country no greater or clearer duty than to keep their hands off such statutes when they have any reasonably permissible relation to the public good. In the past the courts have often failed to perform this duty, and their failure is the chief cause of whatever dissatisfaction there is with the working of our judicial system. One who seeks to prevent the irrevocable commission of such mistakes in the future may justly claim to be regarded as aiming to preserve and not to destroy the independence and power of the judiciary. 저는 콜럼버스 연설에 동의합니다. 거기서 주장한 원칙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저는 그것들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연설에서 일반 복지를 위해 제정된 법률의 경우 적법 절차에 대한 최종 중재자가 되는 국민의 권리를 옹호한 부분은 궁극적으로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법원에 힘과 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법원은 그러한 법률이 공익과 합리적으로 허용되는 관계가 있을 때 그러한 법률에 손을 대지 않는 것보다 더 크거나 더 명확한 의무를 국가에 지고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법원은 종종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실패는 우리 사법 제도의 작동에 대한 불만의 주요 원인입니다. 미래에 그러한 실수가 돌이킬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사람은 사법부의 독립성과 권력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My remedy is not the result of a library study of constitutional law, but of actual and long continued experience in the use of governmental power to redress social and industrial evils. Again and again earnest workers for social justice have said to me that the most serious obstacles that they have encountered during the many years that they have been trying to save American women and children from destruction in American industry have been the courts. That is the judgment of almost all the social workers I know, and of dozens of parish priests and clergymen, and of every executive and legislator who has been seriously attempting to use government as an agency for social and industrial betterment. What is the result of this system of judicial nullification? It was accurately stated by the court of appeals of New York in the employers' liability case, where it was calmly and judicially declared that the people under our Republican government are less free to correct the evils that oppress them than are the people of the monarchies of Europe. 제 해결책은 헌법에 대한 도서관 연구의 결과가 아닙니다만, 사회적, 산업적 악을 시정하기 위해 정부 권력을 사용한 실제적이고 오랜 경험의 결과입니다. 사회 정의를 위한 진지한 일꾼들은 미국 산업에서 미국 여성과 어린이를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해 노력한 수년 동안 그들이 마주친 가장 심각한 장애물은 법원이었다고 다시 그리고 다시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는 거의 모든 사회 복지사와 수십 명의 본당 사제와 성직자, 그리고 사회 및 산업적 개선을 위한 기관으로 정부를 사용하려고 진지하게 시도해 온 모든 행정부와 입법부의 판단입니다. 이러한 사법적 무효화 시스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고용주 책임 사건에서 뉴욕 항소 법원이 정확하게 언급했는데, 그 사건에서 우리 공화 정부 하의 사람들은 유럽 군주제 국가의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악을 시정할 자유가 적다고 차분하고 사법적으로 선언했습니다. To any man with vision, to any man with broad and real social sympathies, to any man who believes with all his heart in this great democratic Republic of ours, such a condition is intolerable. It is not government by the people, but mere sham government in which the will of the people is constantly defeated. It is out of this experience that my remedy has come; and let it be tried in this field. When, as the result of years of education and debate, a majority of the people have decided upon a remedy for an evil from which they suffer, and have chosen a legislature and executive pledged to embody that remedy in law, and the law has been finally passed and approved, I regard it as monstrous that a bench of judges shall then say to the people: "You must begin all over again. First amend your Constitution (which will take four years); second, secure the passage of a new law (which will take two years more); third, carry that new law over the weary course of litigation (which will take no human being knows how long); fourth, submit the whole matter over again to the very same judges who have rendered the decision to which you object. Then, if your patience holds out and you finally prevail, the will of the majority of the people may have its way." 비전이 있는 사람, 폭넓고 실제적인 사회적 공감이 있는 사람, 우리의 위대한 민주 공화국을 온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라 국민의 의지가 끊임없이 패배하는 단순한 가짜 정부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 해결책이 나왔고, 이 분야에서 시도해 보겠습니다. 수년간의 교육과 토론의 결과로 대다수의 국민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악에 대한 구제책을 결정하고, 그 구제책을 법으로 구체화하기로 약속한 입법부와 행정부를 선택했으며, 그 법이 마침내 통과되어 승인되었을 때, 나는 판사단이 국민에게 "여러분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헌법을 개정해야 합니다(4년이 걸립니다). 둘째, 새로운 법률을 통과시켜야 합니다(2년이 더 걸립니다). 셋째, 그 새로운 법률을 지루한 소송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넷째, 여러분이 반대하는 결정을 내린 바로 그 판사에게 모든 문제를 다시 제출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의 인내심을 견뎌내고 마침내 여러분이 승리한다면, 대다수 국민의 의지가 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Such a system is not popular government, but a mere mockery of popular government. It is a system framed to maintain and perpetuate social injustice, and it can be defended only by those who disbelieve in the people, who do not trust them, and, I am afraid I must add, who have no real and living sympathy with them as they struggle for better things. In lieu of it I propose a practice by which the will of a majority of the people, when they have determined upon a remedy, shall, if their will persists for a minimum period of two years, go straight forward until it becomes a ruling force of life. I expressly propose to provide that sufficient time be taken to make sure that the remedy expresses the will, the sober and well-thought-out judgment, and not the whim, of the people; but, when that has been ascertained, I am not willing that the will of the people shall be frustrated. If this be not a wise remedy, let those who criticize it propose a wise remedy, and not confine themselves to railing at government by a majority of the American people as government by the mob. To propose, as an alternative remedy, slight modifications of impeachment proceedings is to propose no remedy at all-it is to bid us to be content with chaff when we demand bread. 그러한 시스템은 대중 정부가 아니라 대중 정부를 조롱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의를 유지하고 영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며, 사람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진짜로 살아있는 동정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방어될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저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지가 해결책을 결정했을 때, 그들의 의지가 최소 2년 동안 지속된다면, 그것이 삶의 지배력이 될 때까지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관행을 제안합니다. 저는 해결책이 사람들의 의지, 냉정하고 잘 생각된 판단을 표현하고 변덕스러움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고 분명히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확인되면 사람들의 의지가 좌절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명한 해결책이 아니라면,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현명한 해결책을 제안해야지, 미국 국민 다수에 의한 정부를 폭도에 의한 정부라 비난하는 데만 국한해서는 안 됩니다. 탄핵소추절차를 약간 수정하는 대안적 구제수단을 제안하는 것은 전혀 구제수단을 제안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빵을 요구할 때 쭉정이로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The decisions of which we complain are, as a rule, based upon the constitutional provision that no person shall be deprived of life, liberty, or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The terms "life, liberty, and property" have been used in the constitutions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 since Magna Carta. Until within the last sixty years they were treated as having specific meanings; "property" meant tangible property; "liberty" meant freedom from personal restraint, or, in other words, from imprisonment in its largest definition. About 1870 our courts began to attach to these terms new meanings. Now "property" has come to mean every right of value which a person could enjoy, and "liberty" has been made to include the right to make contracts. As a result, when the State limits the hours for which women may labor, it is told by the courts that this law deprives them of their "liberty"; and when it restricts the manufacture of tobacco in a tenement, it is told that the law deprives the landlord of his "property." Now, I do not believe that any people, and especially our free American people, will long consent that the term "liberty" shall be defined for them by a bench of judges. Every people has defined that term for itself in the course of its historic development. Of course, it is plain enough to see that, in a large way, the political history of man may be grouped about these three terms, "life, liberty, and property." There is no act of government which cannot be brought within their definition, and if the courts are to cease to treat them as words having a limited, specific meaning, then our whole government is brought under the practically irresponsible supervision of judges. As against that kind of a government I insist that the people have the right, and can be trusted, to govern themselves. This our opponents deny; and the issue is sharply drawn between us. 우리가 불평하는 결정은 원칙적으로 어떠한 사람도 적법 절차 없이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헌법 조항에 근거합니다.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용어는 대헌장 이래 영어권 사람들의 헌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난 6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용어는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산"은 유형 재산을 의미했고 "자유"는 개인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즉 가장 큰 정의로는 투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습니다. 1870년경에 우리 법원은 이러한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재산"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가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자유"에는 계약을 체결할 권리가 포함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가 여성이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하면 법원은 이 법이 여성의 "자유"를 박탈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임대주택에서 담배 제조를 제한할 때, 그 법은 집주인의 "재산"을 박탈한다고 합니다. 이제 저는 어떤 국민, 특히 우리의 자유로운 미국인이 판사단이 "자유"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데 오랫동안 동의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국민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그 용어를 스스로 정의했습니다. 물론, 인간의 정치적 역사는 대체로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세 가지 용어로 그룹화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명백합니다. 그 정의에 포함될 수 없는 정부 행위는 없으며, 법원이 그것들을 제한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 취급하는 것을 중단한다면, 우리의 전체 정부는 판사의 실질적으로 무책임한 감독을 받게 됩니다. 그런 종류의 정부에 반대하여 저는 국민이 스스로를 통치할 권리가 있고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우리 사이에 날카롭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If my critics would only show the same sober judgment of which they declare the people at large to be incapable, they would realize that my proposal is one of moderation and common sense. I wish to quote the remarks of William Draper Lewis, dean of the Law School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만약 제 비평가들이 일반 대중이 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은 냉정한 판단을 보인다면, 그들은 제 제안이 온건함과 상식의 제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법학대학 학장인 윌리엄 드레이퍼 루이스의 발언을 인용하기 바랍니다. To a lawyer the most interesting suggestion Colonel Roosevelt has made is to allow the people, after consideration, to reenact legislation which a court decision has declared is contrary to some clause in the existing State constitution. Anyone who has been asked to draft specific amendments to State constitutions will hesitate to condemn, without serious consideration, the suggestion made by Colonel Roosevelt. To take a concrete instance: The New York court of appeals declared the Workmen's Compensation Act, passed by the New York legislature, unconstitutional, as depriving in its operation the employer of his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A number of amendments to the New York constitution, designed to validate a compensation act, have been drafted, and it is not unlikely that one of them will be adopted. Personally, one or more of these amendments having been shown to me, I cannot but feel that constitutional amendments, designed to meet particular cases, run the danger of being so worded as to produce far-reaching results not anticipated or desired by the people. Colonel Roosevelt's suggestion avoids this difficulty and danger. If a persistent majority of the people of New York State want a workmen's compensation act, they should have it. But, in order to obtain it, they should not be driven to pass an amendment to their State constitution which may have effects which they do not anticipate or desire. Let them pass on the act, as gassed by the legislature, after a full knowledge that their highest court has unanimously expressed its opinion that the act is contrary to the State constitution which the people at a prior election have declared to be their fundamental law. I may not always approve of what the persistent majority wants. I might sometimes think the measure unwise. But that doesn't alter the right of that majority to enforce its will in government. The Roosevelt idea, it seems to me, supplies an instrument by which that majority can enforce its will in the most conservative way. It makes explosions unnecessary. 변호사에게 루즈벨트 대령이 한 가장 흥미로운 제안은 법원 판결이 기존 주 헌법의 어떤 조항에 반한다고 선언한 법률을 국민이 심사숙고한 후 재제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주 헌법에 대한 구체적인 개정안을 초안하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루즈벨트 대령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비난하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뉴욕 항소 법원은 뉴욕 의회에서 통과시킨 근로자 보상법이 적법 절차 없이 고용주의 재산을 박탈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보상법을 유효화하기 위해 고안된 뉴욕 헌법에 대한 여러 개정안이 초안되었고, 그중 하나가 채택될 가능성은 낮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개정안 중 하나 이상을 보았기 때문에 특정 사례에 맞게 고안된 헌법 개정안은 국민이 예상하거나 원하지 않는 광범위한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루즈벨트 대령의 제안은 이러한 어려움과 위험을 피합니다. 뉴욕 주 주민의 지속적인 다수가 근로자 보상법을 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그들은 예상하거나 원하지 않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주 헌법에 대한 수정안을 통과시키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최고 법원이 그 행위가 이전 선거에서 주민들이 근본법으로 선언한 주 헌법에 반한다는 의견을 만장일치로 표명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후에, 의회가 가스를 주입한 것처럼 그 행위를 통과시키도록 하세요. 나는 지속적인 다수가 원하는 것을 항상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그 조치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다수가 정부에서 자신의 의지를 집행할 권리를 바꾸지 않습니다. 루즈벨트의 아이디어는 그 다수가 가장 보수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집행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폭발을 불필요하게 만듭니다. I would have been very proud to have been the author of that plan, although I want to emphasize the fact that it involves no new principle, only a new method. I don't mind saying, however, that I think it unfortunate that it should have been proposed by Colonel Roosevelt. He is a man of such marked characteristics, and his place in the political world is such, that he arouses intense enthusiasm on the one hand, and intense animosity on the other. Because of this, the great idea which he has propounded is bound to be beclouded, and its adoption to be delayed. It is a pity that anything so important should be confounded with any man's personality. 저는 그 계획의 작성자가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원칙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만 포함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령이 제안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매우 두드러진 특성을 지닌 사람이고, 정계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매우 높아서 한편으로는 강렬한 열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그가 제안한 위대한 아이디어는 흐려지고 채택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것이 어떤 사람의 성격과 혼동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As regards the dean's last paragraph, I can only say that I wish somebody else whose suggestions would arouse less antagonism had proposed it; but nobody else did propose it, and so I had to.[78] I am not leading this fight as a matter of aesthetic pleasure. I am leading because somebody must lead, or else the fight would not be made at all. I prefer to work with moderate, with rational conservatives, provided only that they do in good faith strive forward toward the light. But when they halt and turn their backs to the light, and sit with the scorners on the seats of reaction, then I must part company with them. We the people cannot turn back. Our aim must be steady, wise progress. 학장의 마지막 문단과 관련하여, 나는 다른 누군가가 제안을 해서 적대감을 덜 불러일으키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제안해야 했습니다. 나는 미적 쾌락을 위해 이 싸움을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다만 그들이 선의로 빛을 향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멈추고 빛에 등을 돌리고 반동의 자리에 비웃는 사람들과 함께 앉을 때, 나는 그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우리 국민은 뒤돌아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꾸준하고 현명한 진전이어야 합니다. It would be well if our people would study the history of a sister republic. All the woes of France for a century and a quarter have been due to the folly of her people in splitting into the two camps of unreasonable conservatism and unreasonable radicalism. 우리 국민이 자매 공화국의 역사를 공부하면 좋을 것입니다. 1세기 4분의 1 동안 프랑스의 모든 비애는 국민이 비이성적인 보수주의와 비이성적인 급진주의라는 두 진영으로 분열된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Had pre-Revolutionary France listened to men like Turgot, and backed them up, all would have gone well. But the beneficiaries of privilege, the Bourbon reactionaries, the short-sighted ultra-conservatives, turned down Turgot; and then found that instead of him they had obtained Robespierre. They gained twenty years' freedom from all restraint and reform, at the cost of the whirlwind of the red terror; and in their turn the unbridled extremists of the terror induced a blind reaction; and so, with convulsion and oscillation from one extreme to another, with alternations of violent radicalism and violent Bourbonism, the French people went through misery toward a shattered goal. May we profit by the experiences of our brother republicans across the water, and go forward steadily, avoiding all wild extremes; and may our ultra-conservatives remember that the rule of the Bourbons brought on the Revolution, and may our would-be revolutionaries remember that no Bourbon was ever such a dangerous enemy of the people and of freedom as the professed friend of both, Robespierre. There is no danger of a revolution in this country; but there is grave discontent and unrest, and in order to remove them there is need of all the wisdom and probity and deep-seated faith in and purpose to uplift humanity we have at our command. 혁명 이전의 프랑스가 튀르고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지지했다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권의 수혜자, 부르봉 반동주의자, 근시안적인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튀르고를 거부했고, 그 대신 로베스피에르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붉은 테러의 회오리 바람을 희생하여 20년 동안 모든 제약과 개혁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들 차례에 공포의 고삐 풀린 극단주의자들은 맹목적인 반동을 유도했습니다. 그래서 극단에서 극단으로의 격변과 진동, 폭력적인 급진주의와 폭력적인 부르봉주의의 번갈아가며 프랑스 국민은 산산이 조각난 목표를 향해 비참함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물 건너에 있는 우리 형제 공화주의자들의 경험에서 이익을 얻고, 모든 거친 극단을 피하면서 꾸준히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극우 보수파는 부르봉 왕가의 통치가 혁명을 가져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우리의 혁명가들은 부르봉 왕가가 두 왕가의 친구라고 공언한 로베스피에르만큼 국민과 자유의 위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나라에는 혁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불만과 불안이 있으며,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와 정직, 그리고 인류를 고양하려는 깊은 믿음과 목적이 필요합니다. Friends, our task as Americans is to strive for social and industrial justice, achieved through the genuine rule of the people. This is our end, our purpose. The methods for achieving the end are merely expedients, to be finally accepted or rejected according as actual experience shows that they work well or ill. But in our hearts we must have this lofty purpose, and we must strive for it in all earnestness and sincerity, or our work will come to nothing. In order to succeed we need leaders of inspired idealism, leaders to whom are granted great visions, who dream greatly and strive to make their dreams come true; who can kindle the people with the fire from their own burning souls. The leader for the time being, whoever he may be, is but an instrument, to be used until broken and then to be cast aside; and if he is worth his salt he will care no more when he is broken than a soldier cares when he is sent where his life is forfeit in order that the victory may be won. In the long fight for righteousness the watchword for all of us is spend and be spent. It is of little matter whether any one man fails or succeeds; but the cause shall not fail, for it is the cause of mankind. 친구들이여,[79] 미국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진정한 국민 통치를 통해 달성되는 사회적, 산업적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목적입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단지 방편일 뿐이며, 실제 경험상 잘 되는지 아닌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수용되거나 거부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속에 이 고상한 목적을 가져야 하며, 모든 진지함과 성실함으로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일은 무위로 돌아갈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영감을 받은 이상주의의 지도자, 위대한 비전을 부여받고, 크게 꿈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불타는 영혼에서 나온 불로 사람들을 불태울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지도자는 누구이든 간에, 부서질 때까지 사용되고 나서 버려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금만한 가치가 있다면, 군인이 승리를 위해 목숨을 잃는 곳으로 보내질 때와 마찬가지로 부서져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를 위한 긴 싸움에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모토는 쓰고 쓰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의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대의이기 때문입니다. We, here in America, hold in our hands the hope of the world, the fate of the coming years; and shame and disgrace will be ours if in our eyes the light of high resolve is dimmed, if we trail in the dust the golden hopes of men. If on this new continent we merely build another country of great but unjustly divided material prosperity, we shall have done nothing; and we shall do as little if we merely set the greed of envy against the greed of arrogance, and thereby destroy the material well-being of all of us. To turn this government either into government by a plutocracy or government by a mob would be to repeat on a larger scale the lamentable failures of the world that is dead. We stand against all tyranny, by the few or by the many. We stand for 'the rule of the many in the interest of all of us, for the rule of the many in a spirit of courage, of common sense, of high purpose, above all in a spirit of kindly justice toward every man and every woman. We not merely admit, but insist, that there must be self-control on the part of the people, that they must keenly perceive their own duties as well as the rights of others; but we also insist that the people can do nothing unless they not merely have, but exercise to the full, their own rights. 우리는, 여기 미국에서, 세계의 희망, 다가올 세월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높은 결의의 빛이 희미해지고, 사람들의 황금빛 희망이 먼지 속에서 뒤떨어진다면, 수치와 불명예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대륙에서 우리가 단지 위대하지만 부당하게 분배된 물질적 번영의 또 다른 나라를 건설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시기심의 탐욕을 오만의 탐욕에 대항시켜 우리 모두의 물질적 복지를 파괴한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정부를 플루토크라시 정부나 폭도 정부로 바꾸는 것은 죽은 세계의 비참한 실패를 더 큰 규모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수이든 다수이든 모든 폭정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한 다수의 지배, 용기, 상식, 높은 목적의 정신, 무엇보다도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에 대한 친절한 정의의 정신으로 다수의 지배'를 위해 서 있습니다. 우리는 국민들이 자제력을 가져야 하며, 다른 사람의 권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무도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들이 단순히 권리를 갖는 데 그치지 않고 최대한 행사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The worth of our great experiment depends upon its being in good faith an experiment - the first that has ever been tried - in true democracy on the scale of a continent, on a scale as vast as that of the mightiest empires of the Old World. Surely this is a noble ideal, an ideal for which it is worth while to strive, an ideal for which at need it is worth while to sacrifice much; for our ideal is the rule of all the people in a spirit of friendliest brotherhood toward each and every one of the people. 우리의 위대한 실험의 가치는 그것이 선의로 실험이라는 데 달려 있습니다. 대륙의 규모, 구세계의 가장 강력한 제국의 규모만큼 광대한 규모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시도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고귀한 이상이며,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이상이며, 필요할 때 많은 것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 이상입니다. 우리의 이상은 모든 사람을 각 사람에 대한 가장 우호적인 형제애의 정신으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 1912년 3월 20일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진보당 후보 연설 중 사람들(People)에[80] 의한 통치 관련 연설. 소수의 폭정을 막고 다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연설로 그의 정치 신념을 보여주는 연설이다. 전문 |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9.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880 - 1911 | 입당 정계 입문 탈당 |
| 1912 - 1916 | 입당 정계 은퇴 탈당 |
| 1916 - 1919 | 복당 사망 |
10.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86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 60,435 (27.52%) | 낙선 (3위) | |
1896 | 뉴욕주지사 선거 | 뉴욕주 | 661,707 (49.02%) | 당선 (1위) | 초선 | |
1900 | 미국 부통령 선거[A] | 미합중국 | 7,218,039 (51.67%, 292명) | |||
1904 | 미국 대통령 선거 | 7,626,593 (56.41%, 336명) | ||||
1912 | 미국 대통령 선거 | | 4,119,207 (27.39%, 88명) | 낙선 (2위) |
11. 둘러보기
시어도어 루스벨트 관련 틀 | |||||||||||||||||||||||||||||||||||||||||||||||||||||||||||||||||||||||||||||||||||||||||||||||||||||||||||||||||||||||||||||||||||||||||||||||||||||||||||||||||||||||||||||||||||||||||||||||||||||||||||||||||||||||||||||||||||||||||||||||||||||||||||||||||||||||||||||||||||||||||||||||||||||||||||||||||||||||||||||||||||||||||||||||||||||||||||||||||||||||||||||||||||||||||||||||||||||||||||||||||||||||||||||||||||||||||||||||||||||||||||||||||||||||||||||||
|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81018><tablebgcolor=#e81018> '''[[시어도어 루스벨트|{{{+1 | 시어도어 루스벨트 관련 문서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81018> 일생 | 생애 | ||
가족 |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 · 친척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역대 선거 |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윌리엄 매킨리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부커 T. 워싱턴 | |||
사건사고 | 미국-스페인 전쟁 · 암살 미수 사건 | |||
조직 | 공화당 · 진보당 | |||
평가 | 평가 | |||
기타 | 테디 베어 ·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 · 루스벨트 가문 · 미국의 현대자유주의 | |||
TR 행정부 | ||||
정책 | 반독점법 · 뉴 내셔널리즘 · 스퀘어 딜 · 자유제국주의 · 자유주의적 매파 | |||
사건사고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샌프란시스코 지진 · 스티븐스 저격사건 ·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 인류학의 날 · 포츠머스 조약 | |||
| }}}}}}}}} |
미국 자유주의 관련 문서 (1934년 이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주요 이념 | 고전적 자유주의 · 급진주의 | |
연관 이념 | 1934년 이전 | 공화주의 · 대중주의 · 민주주의 · 사회자유주의 · 세속주의 · 이신주의 · 진보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유방임주의 · 자코뱅주의 · 잭슨 민주주의 · 제퍼슨 민주주의 · 폐지주의 · 평등주의 · 초월주의 | |
1934년 이후 | 자유지상주의 · 재정보수주의 · 진보주의 · 현대자유주의 | ||
연관 개념 | 건국의 아버지들 · 개인주의 · 도금 시대· 미국 혁명 · 반연방주의((주의 권리) · 법 앞의 평등 · 서프러제트 · 자결권 · 자연권 · 자유국제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코뱅주의 · 작은 정부 · 지방자치 · 진보 시대 · 종교의 자유 · 친프랑스 · 표현의 자유 | ||
정당, 계파 | 국민민주당 · 공화당*(급진파) · 공화파** · 민주공화당 · 민주당*(잭슨 민주주의) · 반행정당 · 버번 민주당 · 자유공화당 · 진보당(1912년 · 1924년) | ||
인물 | W. E. B. 듀보이스 · 랠프 월도 에머슨 · 로버트 M. 라폴레트 · 벤저민 프랭클린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앤드루 잭슨 · 우드로 윌슨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보라 · 찰스 섬너 · 토머스 제퍼슨 · 프레드릭 더글러스 · 하이럼 존슨 · 해리엇 터브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
▼ 현대 미국의 자유주의 | |||
미국 정치 관련 문서 (사회주의 · 현대자유주의(←1934년 이전) · 자유지상주의 · 보수주의(대안 우파)) * 진보 시대에는 주류, 그 외 시대에는 당 내 계파 | }}}}}}}}} |
[1] 그 유명한 엘리너 루스벨트의 친정아버지다. 엘리너는 어릴적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고.[2] J.D.(법무박사)학위는 1960년대 이후 법학대학원에서 생긴 학위라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2008년에 수여하였다.[3] 미국-스페인 전쟁 중이었던 1898년에 해당 계급으로 특별임관 되었으며 귀국 후 예편하였다.[4] 네덜란드계 개혁교회 교단이다.[5] 원래 2선까지 지낼 때까지 공화당이었지만 3선을 시도할 때 잠깐 진보당 소속이었다. 이후 대선 낙선 이후인 1917년에 복당하였다.[6] 실제 연설문의 가운데 부분이 없는데 녹음되지 못했는지 연설을 생략했는지 알 수 없다.[7] 당연히 진짜 친구들은 아니고 연설을 듣는 지지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말투도 대부분의 말투에서 동사원형을 제외하면 Be동사 비축약형과 과거형 앞에 have/has를 붙이는 등 영어 기준으로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8] 인민, 또는 국민으로 번역할 수 있다.[9] 그는 이 말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소개했으며,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은 물론 그의 개인적 인품도 잘 보여주는 말로 특히나 'Big stick'은 거의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10] 위 영상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고 여린 편인데, 이 문구를 들먹이며 수궁하는 댓글들이 많다.[11] 취임 당시 만 42세 11개월. 역대 최연소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은 만 43세 6개월에 취임한 존 F. 케네디이며, 루스벨트의 첫 취임은 전임 대통령인 매킨리의 암살로 인한 사망으로 인한 승계였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취임은 1905년에 이뤄졌다.[12]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1905년 러·일 간의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한 대가이다.[13] 미국 영어 발음은 /ˈroʊz(ə)vɛlt, -vəlt/(로저벨트·로저벌트 등)에 가까우나, 관용을 존중한 '*루스벨트'가 규정 용례로 제시돼 있다(별표가 관용 표기를 나타냄). 루즈벨트라고 표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마찬가지이다.[14] 덕분에 미국 대통령 중 윌슨, 트루먼 등과 더불어 안경을 쓴 모습이 돋보인 대통령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둘도 시어도어처럼 어린 시절부터 안경을 썼다.[15] 당시 하버드는 평균 평점이 C일 정도로 성적 부여가 매우 짰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A+의 매우 높은 성적으로 하버드를 졸업한다.[16] 그곳을 나중에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에서 대통령의 이름을 딴 "시어도어 루스벨트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놓았다[17] 먼 훗날 그가 취임한지 100년이 되는 2001년 1월 16일,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이때의 공으로 루스벨트에게 명예 훈장을 추서했는데, 이로써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명예훈장을 가진 대통령이 되었다.[18] '루스벨트 계론(系論)'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9] <<루스벨트 서한집>> 1., 최정수, <T.루즈벨트의 '世界政策'>, 2001에서 재인용.[20] 사실 먼로 대통령이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기 직전 구상 단계에도 존재했던 조항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실효를 거둘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기에 최종적으로는 제외됐던 부분.[21] 다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 전함 시대 이전에도 제국주의는 활발했다.[22] 이전 러닝메이트였던 개릿 호바트(Garret Hobart)가 1899년 병사해버렸다.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이라 남은 1기 임기의 후임자는 없었다.[23] 다만 당시의 공화당은 지금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공화당만큼의 성향성이 뚜렷한 당은 아니었다.[24] 이 법은 원래 23대 대통령이었던 벤저민 해리슨 시절인 1890년 당시 존 셔먼 공화당 상원 의원이 주도적으로 제정한 것이었지만, 정작 그 시대에는 큰 효용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무용지물이 될뻔한 법안을 루스벨트가 다시 끄집어낸 것.[25] 루스벨트 이전에는 이 셔먼 독점금지법이 노조를 탄압하는데 악용되기도 하였다. 노동조합이 노동력 제공을 독점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식이다.[26] 가령 루스벨트는 군대를 파업투쟁 해체가 아니라 노동환경 정상화, 즉 회사가 아닌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 쓴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27]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세계의 무역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넘어갔다. 그후 유럽은 침체기를 맞고 아시아는 떠올랐다.[28] 이 시기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찾아온 이승만과 1905년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태프트의 소개장을 받은 윤병구 목사를 만났다. 허나 이미 5일 전 거래는 끝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하지 말고, 정식 외교 창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시오"라는 완곡한 거절의 외교적 수사로 돌려보냈지만, 아직 국제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이상주의자 이승만은 종국엔 루스벨트에게 속은 걸 깨닫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루스벨트 사후인 1924년에야 그 실체가 공개됭닜다.[29] 다만 상기했듯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조에 대해서도 꽤 강경한 편이었다.[30] 이 관례를 깨고 2선 이상(4선)을 한게 시어도어의 친척인 프랭클린이다. 다만 FDR 사후 공화당 반발로 재선까지만 할 수 있다고 개헌하였기 때문에 이 조항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3선 이상의 대통령은 더 이상 나올 수 없게 되었다.[31]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전까지는 승계된 대통령으로서 재선한 사례가 없었다. 참고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제정된 현행 3선 이상 금지 조항은 부통령 승계자의 경우 잔여 임기가 2년 이상이면 온전한 1선으로 치고, 2년 이하면 3선 출마가 가능하도록 해놓았다.[32] 후술하겠지만 공화당 내부 경선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게 지고 이에 승복하지 못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분당했다.[33] 윌슨의 재선 득표율은 49.2%였다.[34]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컬러 사진이 있긴 있었으나(1861년) 컬러 사진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기 전이라 시어도어 이후의 대통령들도 컬러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어서 남긴 것은 이 사진이 찍히고 훨씬 더 이후의 일이다. 시어도어 사후인 1930~40년대에 들어서야 미국에서 컬러 사진이 어느 정도 그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컬러사진 사용이 흑백사진보다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 시점은 1960년대 초중반부터다.[35] 현재도 미국 급사자의 20%가 폐색전증으로 죽는 등 혈관이 막히는 질환은 현대에도 치료가 매우 어렵다.[36] 루스벨트보다 수명이 짧았던 자연사한 대통령은 제임스 포크(향년 53세), 체스터 아서, 워런 하딩(향년 57세). 뒷날 캘빈 쿨리지도 같은 나이에 죽었으나 정확히는 60년 6개월에 죽어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보다 근소하게 오래 살아서 5번째이다.[37] 현대의 미국 대통령은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부터는 못해도 80세는 넘기고 사망했다. 현재 생존 중인 대통령들 중 조 바이든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통령들이 아직은 80세가 되지 않는지라 이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있다. 허나 전부 시어도어의 나이는 넘겼다. 최연소 생존중 대통령인 오바마도 2025년 기준 63세이다. 아직 모두 정정해서 암살이나 사고 등의 사유가 아닌 이상 80세를 넘길 가능성이 높다.[38] 거기다 우드로 윌슨이 쓰러진 시점에서는 공화당도 민주당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그럴듯한 후보가 없었다.[39] 명성황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당시 현 황제(고종)의 황후이었던 사람의 무덤가에서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능의 조형물에 올라타 사진을 찍은 것은 정말 무례한 행동이 맞다.[40]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도 이 에피소드가 실려있다.[41] 이 문서에 소개된 아버지의 풀네임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2세(주니어)이니 그 아들은 3세. 덤으로 미국 대통령 중에도 풀네임이 주니어 혹은 ○세인 대통령들이 은근 있는 편이다.[42] 모하메드 모사데크 항목에 나와있는 당시 CIA 요원으로써 이란의 석유산업 국유화를 막기 위해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킨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43] 6대조가 같은 인물이다.[44] 단적으로 같은 시대 인물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12촌간이었다. 조선은 친가와는 달리 외가와의 근친에는 다소 무심했다. 친가와의 근친에 엄격한 이유는 친가는 호적상 촌수가 꼬이기 때문이다. 12촌이면 할아버지와 손자만큼 나이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23살 차이다. 그러나 가문 내 교류가 계속되었다면 꽤 가깝게 지내게 될 수도 있는 촌수다. 사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의 아버지끼리는 1831년생과 1828년생으로 10촌 형제지간임에도 촌수에 비해 나이차가 많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의 아버지가 프랭클린을 너무 늦게 가지는 바람에 그 정도로 나이차가 난 것. 프랭클린의 이복형은 1854년생으로 12촌 형제인 시어도어와 촌수처럼 나이가 비슷하다.[45] 엘리너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실상 엘리너를 키운 것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시어도어는 엘리너에게는 삼촌(큰아버지)이 된다.[46] 영어권에서 매우 아끼는 사람에게 쓰는 관용 표현이다.[47] 동아시아에서 중국 대륙 진출이 가지는 상징성은 단순히 영토 확장의 의미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중화사상이 남아있던 시대였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서 대륙진출은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일본은 서구 열강의 의도와 달리 중국 대신 러시아를 선택할 리가 없었다.[48] 이 둘을 제외하면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49] 재선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도 3선 출마 의지는 있었으나 결국 출마를 하진 않았다. 사실 테디도 처음은 선거가 아닌 전직 대통령 매킨리의 사망에 의한 승계였으니 정석적인 3선은 아니다. 물론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는 했었다. 4선도 준비는 했다만 상기했듯 출마 전에 사망했다.[50] 정치권 진보주의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미국 내에선 충분히 급진적이라 평가받는 워런, 샌더스보다 더 급진적인 놈 촘스키 같은 극좌파 성향의 경우엔 외려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51] 샌더스와 정치적 연계성이 짙은 버몬트 진보당은 계보를 타고 올라가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불 무스당)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실제 버몬트 진보당의 상징도 불 무스일 정도로 테디는 미국의 정통적 진보주의의 상징이다.[52] 대체로 진보적인 지식인 계층 특성상 지식인 계층이 시행하는 각종 조사에서 공화당 대통령들이 민주당 대통령들보다 대체로 더 낮은 순위에 랭크된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의 경우 공화당 대통령들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들이 대통령을 하던 시절에는 공화당은 전형적인 보수정당이 아니었고 이들도 따라서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링컨은 노예제를 철폐하는 매우 리버럴한 정책을 폈고 테디또한 외교적 측면에서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을 뿐 사실상 현 민주당계 정당의 주류 이념인 사회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짜로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평을 받는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인데, 그는 인기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축이지만 업적상으로는 대체로 공과가 뚜렷히 갈리는 편으로 평가된다.[53] 이 대학은 1982년 이후 자주 미국의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 정치인 등을 모아서 대통령 업적평가를 한다.[54] 다만 당시엔 시어도어 대신 우드로 윌슨이 들어갈 뻔도 했다.[55] “My father always wanted to be the corpse at every funeral, the bride at every wedding and the baby at every christening.”출처.[56] 여담으로 이는 문명6의 미국 종특으로 반영되어 있다.[57] "형편없는 실력에, 비천한 환경 속에 놓여서는 강자에게 침묵하고 약자에게 비열하게 굴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일을 준비하였다."[58] 물론 이에 대해 도장을 찍어준 사람은 루스벨트 본인이 아니라 후임자 태프트지만, 어쨌든 루스벨트도 이 일에 대해 직간접적으로는 관여를 했으므로 루스벨트 본인도 책임은 있다.[59] 19세기 말 조선과 미국의 수교조약에 '수교국 중 한쪽이 위험에 처할 경우, 다른 한쪽이 우호적 중재에 나선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 조선은 이를 미국의 준동맹 공약으로 여겨 기대를 품었지만, 미국은 이를 형식적인 우호 표시로만 여겨 별 신경을 안 썼다.[60] 당시 미 동부 엘리트 출신인 백인 특유의 오만함과 인종적 편견.[61] 물론 당연하게도 일본인보다는 같은 코카서스계인 튀르키예인이 유전적으로 훨씬 가깝다.[62] 요네가와 번의 9대 번주로 당시 요네가와 번은 재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는데 요잔은 15년간 번주로 있으면서 각종 정책을 통해 요네가와 번이 진 빚을 모두 청산했다. 심지어 그의 통치 말엽에 텐메이 대기근이 시작되었는데 요네가와 번은 이를 피해갔다.[63]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인종적인 편견이나 관련 악담을 많이 한 편이다. 러시아인에 대해서도 "흑인, 황인, 백인을 통틀어서 제일 진실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거만한 사람들이 러시아 사람들이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64] 당시 하와이 왕국에서는 일본에 서신을 보내 자신들을 병합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제 막 메이지 유신을 한 일본에 그럴 만한 여력이 있을 리 없었거니와 설령 일본이 하와이에 탐을 내더라도 미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65] 사실 이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유가 '일본의 압승' 이 아닌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는 러시아 내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에만 7년치 재정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이것도 모자라서 영국과 미국에게 채권을 판매하여 간신히 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발트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에게 박살이 나는 등 열강으로써의 체면을 구기기는 했으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재정적인 문제는 일본에 비해서 훨씬 여유로웠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진압해야 하고, 일본에서는 재정문제로 인해 전쟁 수행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러일전쟁을 마치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협상 분위기도 러시아가 '이럴 거면 그냥 전쟁 계속 하자' 는 식으로 베짱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 역시 미국의 중재가 있었다고는 하나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당시와는 달리 이것저것 마음껏 뜯어내지도 못했으며, 이는 일본 내부에서 반미 감정 폭발의 원인이 되었다.[66] 미국의 사학자 앨프리드 휘트니 그리즈월드의 미극동정책사 131페이지 참고.[67]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농무상과 법무상을 지냈다.[68] 러시아를 원래 싫어하기도 해서 이러한 말을 남긴 것도 있다. "흑인, 황인, 백인을 통틀어서 제일 진실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거만한-줄여서 말하면 절대 믿으면 안되는-사람들이 러시아 사람이다(No human beings, black, yellow or white, could be quite as untruthful, as insincere, as arrogant — in short, as untrustworthy in every way — as the Russians)"라는 말을 남기기도 해다.[69]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임 매킨리 암살을 사주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자였다.[70] 해당 사진은 루스벨트의 사진중 가장 유명한 것이고 실제로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버드 도서관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컬렉션 소속 큐레이터 헤더 콜에 따르면, 합성된 사진이다. 1912년 대통령 경선때, 뉴욕 트리뷴에 각 후보가 당을 대표하는 동물을 타는 모습으로 올릴 목적으로 Underwood & Underwood 사진 회사에 의해 합성된 것. 출처 (사실 그냥 봐도 무스와 루스벨트의 사진 해당도가 차이난다.)[71]
사진이 진짜였다면 코끼리 타고 있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왠지 더 대단해보인다. 오른쪽은 우드로 윌슨.[72] 정확하게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좋구만!"이지만 한국에서는 저 표현으로 쓰인다.[73] 참고로 독수리가 미국의 상징이 된 것은 다름아니라 로마제국의 문장이 독수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독수리를 문장이나 상징동물로 써먹고 있으며 미국 역시 독립전쟁 이후부터 줄곧 잘 써먹었다. 다만 회색곰 역시 루스벨트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국의 여러 주,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 등에서 종종 마스코트로 써먹고 있긴 하다.[74] 앤더슨이라는 사람의 여자친구가 남편이 훔친 걸 앤더슨에게 알려줬고 앤더슨은 그걸 FBI에 연락하였다.[75] 남부연합이 승리해서 미국이 분단되는 대체역사물.[76] 또한 이 대사 직전에 했던 말 역시 인상적인데 "앞으로 미국의 미래는 유럽이 있는 대서양이 아닌 중국이 있는 태평양에서 좌우될 것"이라는 21세기의 정세를 내다본 듯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 드라마가 나왔던 2018년부터 미국-중국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어서 더더욱 와닿기도 했고.[77] 이 당시 행적만 보자면 어쨌든 미화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경찰 내부 개혁파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78] 위 영상은 첫번째 문단이 나오고 이 다음부터 시작한다.[79] 당연히 진짜 친구들은 아니고 연설을 듣는 지지자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말투도 대부분의 말투에서 동사원형을 제외하면 Be동사 비축약형과 과거형 앞에 have/has를 붙이는 등 영어 기준으로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다.[80] 인민, 또는 국민으로 번역할 수 있다.[A] 대통령 후보는 윌리엄 매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