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퀜틴 루스벨트 Quentin Roosevelt | |
출생 | 1897년 11월 19일 |
미국 워싱턴 D.C. | |
사망 | 1918년 7월 14일 (향년 20세) |
프랑스 제3공화국 차메흐[1]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부모 | 시어도어 루스벨트 (아버지, 1858 ~ 1919) 에디스 캐로 루스벨트 (어머니, 1861 ~ 1948) |
형제자매 | 앨리스 루스벨트 (이복누나, 1884 ~ 1980)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형, 1887 ~ 1944) 커밋 루스벨트 (형, 1889 ~ 1943) 에셀 루스벨트 (누나, 1891 ~ 1977) 아치발드 루스벨트 (형, 1894 ~ 1979) |
학력 |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
종교 | 종교 |
직업 | 군인 |
소속 |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
서명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들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원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2. 생애
미국 워싱턴DC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두번째 아내 에디스 캐로 루스벨트의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이복누나인 앨리스 리 루스벨트가 있어서 4남 2녀 중 막내였다.안 그래도 루스벨트 가문은 미국 독립 이전부터 막대한 부와 토지와 정재계에 주요 인사들을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아버지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퀜틴이 태어난 시점에 이미 뉴욕 주 경찰청장과 미 국방부 해군담당 차관보를 역임하고 있었기에 퀜틴 역시 태어나자마자 매우 유복하고 풍족하게 자랐다. 더욱이 이 시점에서 루스벨트는 불과 39세였다. 40세도 안 되는 나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쌓고 싶어도 못 쌓는 이런저런 직책을 벌써 역임한 것이다.
퀜틴이 불과 1살(생후 14개월) 때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임기 2년의 뉴욕 주지사가 되었고, 3살 때인 1900년에는 시어도어가 임기 중 사망한 개럿 호바트 대신 매킨리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미국 부통령이 되고,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01년 9월에는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시어도어가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퀜틴은 불과 생후 3년 10개월도 채 안 되었을 때 미국 대통령의 영식이 되었다.
형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그는 태어나자마자 금수저 중의 금수저를 몰고 태어났기에 온갖 특혜를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리며 성장했다. 어린 나이부터 귀하게 자라다 보니 백악관에서 심한 장난도 많이 치고 그랬는데 퀜틴은 종이뭉치에 물을 묻혀 미국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에 던지는 장난을 많이 쳤다. 심지어는 외부인인 친구들까지 백악관에 데려와 철 없는 장난도 많이 쳤다.[3] 어린 자식들이 백악관에서 장난을 치면 오냐오냐 하고 도리어 본인도 같이 장난을 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였지만[4] 퀜틴은 유독 장난이 심해 그조차도 퀜틴에게 여러 번 주의를 줬을 정도였다.
퀜틴은 그러다가 아버지가 대통령직에서 임기 만료로 퇴임하면서 불과 11살에 백악관 생활을 마쳤다.[5]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12년 대선에 진보당 후보로 출마하여 퀜틴 역시 백악관에 다시 입성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가 낙선함으로서 이루지 못했다.[6]
그래도 그렇게 철 없던 시절과는 달리 자라면서 철이 들었는지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가하기로 하자 그 역시 형들과 마찬가지로 1차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1918년 7월 14일 전투기를 몰다가 프랑스 차메흐에서 격추되어 전사하며 20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시어도어는 겉으로는 막내아들의 전사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사석에서는 아들의 전사를 매우 슬퍼했다. 1912년 대선의 패배 이후에도 대통령 3선에 미련이 남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차대전 종전 후 비록 승전했지만 우드로 윌슨의 실정이 두드러진 것을 계기로 우드로 윌슨을 집중 공격하며 1920년 대선을 노렸으나 퀜틴의 전사를 계기로 건강이 나빠져 1918년 후반기 들어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쇄약해졌고 아들이 죽은 지 6개월도 안 된 1919년 1월 6일 잠자던 중 관상동맥혈전으로 사망하여 아들의 곁을 따랐다.[7]
3. 활동
4. 여담
[1] Chamery[복수전공] [3] 바다건너 영국에서도 왕세자 시절의 에드워드 7세가 18살 때 잉크를 바닥에 부어 시녀들을 미끄러트리는 장난을 치긴 했다.[4] 그래서 시어도어의 후처이자 퀜틴의 모친인 에디스 캐로 루스벨트는 "애를 6명이 아니라 남편까지 7명을 키우는 느낌이다"라고 했을 정도.[5] 한 술 더 떠서 존 F. 케네디의 장남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태어나기 17일 전에 아버지가 1960년 대선에서 당선되어 생후 두 달도 안되어 백악관에 입성했다가 3살이 되기 사흘 전에 아버지가 댈러스에서 암살되어 불과 3살도 되기 전에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사실 미국 대통령들 중엔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비롯해 대통령 자녀가 어린 인물이 여럿 있다. 한국에선 대통령 자녀가 어린 경우가 대통령 시절 박정희의 자녀들 뿐이어서 매우 생소해 보일 뿐.[6] 이때 아버지 시어도어가 공화당을 나와 진보당을 창당하여 표가 분산되어서 떨어진 것일 뿐,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당시 공화당 현직 대통령이던 태프트보다는 표를 압도적으로 많이 받아서 단일화가 잘 되었다면 시어도어가 3선을 했을 수 있었다.[7] 웃긴 건 우드로 윌슨도 뇌졸중으로 쓰러진 상태임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처럼 3선 욕심이 있었다. 물론 1920년 대선에서 윌슨이 당선되었다면 실제 우드로 윌슨의 사망일이 1924년 2월 3일이니 임기인 1925년 3월 4일을 채우지 못하고 테쿰세의 저주 대상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