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12:02:23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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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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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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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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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일시 11월 6일 5시 ~ 11월 7일 6시 (UTC)
투표율 62.8%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리처드 닉슨
부통령 헨리 캐벗 로지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존 F. 케네디
부통령 린든 B. 존슨
선거인단
219명[1] 303명[2]
전국 득표
49.6%
34,108,157표
49.7%
34,220,984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LOBPP-003-009-p0001.jpg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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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선
3.1. 공화당3.2. 민주당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리처드 닉슨4.2. 민주당: 존 F. 케네디
5. 본선6. 선거 결과
6.1. 접전지
7. 논란
7.1. 부정선거 음모론
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제35대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60년 11월 8일 ~ 11월 9일까지 실시된 선거.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민주당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집권을 마무리하고 그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승리해 8년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대선. 최초로 해군 출신 대통령과 부통령이 탄생했다. 차이점는 케네디는 중위 출신이고 존슨은 중령 출신이다.

2. 배경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여전히 국민적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면서 3선 도전도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3], 내부적으로는 공화당에게 썩 유리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전후 경제회복 국면이 마무리되면서 임기말 경제 침체가 찾아와 195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했기 때문이다.[4] 거기다 공화당 8년 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아이젠하워 특유의 안정적이지만 모험을 하지 않는 통치 스타일이 미국 국민들에게 권태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3. 경선

3.1. 공화당

파일:A10-024-62-30-1.jpg
전당 대회에서 공식 지명을 받고 환호하는 리처드 닉슨

1951년 가결된 수정헌법 제22조로 아이젠하워의 3선 도전이 불가능해 졌지만 공화당 내에서 후보 선정과 관련된 큰 이견은 없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황태자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공화당 내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 당 내 온건파를 대표하던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가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주별 경선에서 참패하면서 조기에 출마를 포기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내 온건파 세력은 무시할 수 없었기에 닉슨은 이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피프티 애버뉴 협정(Treaty of Fifty Avenue)'이다. 닉슨은 협정에 따라 온건파의 정책제안을 당 강령으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했고, 록펠러는 닉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60년 7월 25일부터 28일, 4일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내 보수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배리 골드워터[5]를 1,321 대 10으로 압살하고 당의 공식 후보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현직 부통령으로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건 딱 100년 전인 1860년 출마했던 남부민주당존 C. 브레킨리지 이후 처음이었다.

이후 닉슨은 원래 부통령 후보로는 온건파 규합을 위해 록펠러를 지명하려 했지만 록펠러는 부통령 직에는 별로 뜻이 없었고 대신 아이젠하워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유엔 대사 헨리 캐벗 로지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게 된다. 정치인 겸 외교관인 로지를 부통령으로 지명하면서 대선의 의제를 내치보다는 본인이 자신 있어 하는 외교 문제[6]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보는 분석도 있다. 재밌게도 헨리 캐벗 로지는 1952년 매사추세츠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존 F. 케네디와 맞붙어 패배했던 경험이 있다.

3.2. 민주당

파일:John_F._Kennedy_Democratic_presidential_candidate_1960_Los_Angeles.jpg
당의 공식 지명을 받고 전당대회 현장에 도착한 존 F. 케네디

정권 교체를 노리는 민주당에서는 존 F. 케네디가 전면에 나섰다. 1956년 선거 당시 부통령 경선에서 에스테스 키포버 연방 상원의원에게 분패했던 사실을 복기하며 선거전에 나선 케네디였지만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의 종교가 가톨릭이었다는 점이다. 1928년 대선 당시 가톨릭 교도인 앨 스미스를 후보로 내밀었다가 허버트 후버에게 참패한 기억이 있는 민주당에게 이것은 너무 뼈아픈 약점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 점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젊고 에너지 넘치는 이미지와 결합시켜 자신을 가톨릭 교도라고 공격하는 사람을 꼰대로 프레이밍하는 데 성공하면서 분위기를 바꿨다. 그 덕분에 1960년 4월 5일 열린 위스콘신 경선에서 경쟁자였던 미네소타 연방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를 56% vs 44%로 누르고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당의 지지를 끌어내기 시작했다.[7]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경선은 단순히 대중적인 인기도를 확인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했고[8], 경선에서도 가톨릭 교도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겨우 이긴 거라는 폄하도 여전히 남아있어서 후보 지명이 확실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 대회를 앞두고는 세번째 대선 도전을 노리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린든 B. 존슨 연방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를 상대해야했다. 특히 존슨과의 경쟁은 그야말로 이전투구였는데 자꾸 케네디 가문의 추문을 가지고 존 F. 케네디를 공격하던 존슨의 집요한 공세[9]에 당시 형의 선거 운동을 이끌고 있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는 그야말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하지만 케네디와 존슨의 TV 토론회에서 케네디가 승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존슨이 북동부 지역에서 자신의 낮은 인기를 체감하게 되면서 점차 케네디가 공식 후보로 지명받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고 있었다.

결국 1960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케네디가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 이상의 대의원 지지를 확보하면서 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 후보였는데 케네디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경선에서 막장 싸움을 벌였던 린든 B. 존슨에게 부통령 역할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고 존슨이 이를 수락하면서 케네디 - 존슨 러닝메이트 체제가 완성되었다. 케네디의 약점인 남부 바이블 벨트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이 지명을 둘러싸고 로버트 케네디, 존슨 등 관련 인물들 사이에 여러 논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리처드 닉슨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닉슨1960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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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제36대 미국 부통령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제3대 UN주재 미합중국 대사
}}}
파일:Nixon_Lodge_1960_campaign_logo.svg

4.2. 민주당: 존 F. 케네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LOBPP-003-009-p0001.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매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
린든 베인스 존슨
텍사스 주 연방 상원의원
}}}
파일:Kennedy_Johnson_1960_campaign_logo.svg

5. 본선

파일:Kennedy_Nixon_Debat_(1960).jpg
케네디와 닉슨이 맞붙은 2차 토론회

본선에서 대결한 케네디, 닉슨 두 후보는 모두 20세기에 출생한 인물로 누가 당선되든지 '최초의 20세기 출생자 대통령'으로 기록될 예정이었다.[10] 또한 둘은 1947년 하원의원 당선을 통해 정계에 데뷔한 정계 입문 동기이기도 했다.

존 F.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 소련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뒤쳐졌다고 주장하면서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승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나온 선거 표어가 바로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이 뉴 프런티어라는 구절은 이후 케네디 캠프의 경제, 교육, 복지 정책을 망라하는 개혁을 총괄하는 의미로 확대됐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시기의 평화와 국가 번영은 계승,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반면 리처드 닉슨은 케네디가 대통령 직을 맡기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다고 주장하며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계승하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데 정작, 케네디와 닉슨은 4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설사 닉슨이 승리해서 취임했더라도 미국 역사상 네 번째로 어린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케네디가 이길 경우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대통령이 되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튼 두 후보 모두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젠하워를 대신할 미국의 새로운 시대를 상징할 만한 인물이었지만, 더 어리고 잘 생기고 활력있어 보이는 케네디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 케네디 본인이 그런 점을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어필하기도 했고 닉슨은 반대로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강조하면서 이런 면을 살리지 못했다. 거기다 선거를 앞둔 가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TV 기자회견에서 "닉슨이 부통령이던 시절 어떤 아이디어를 냈냐"고 묻자 "1주일을 더 주면 생각날지도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닉슨이 어필하던 숙련된 정치가 이미지에 찬물을 끼얹어버린다.

이후 두 후보가 네 번이나 토론회를 가졌는데, 미국 역사상 기념비적으로 이 때 처음 TV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그렇게 열린 1차 TV 토론에서 케네디가 이겼고, 그렇기 때문에 케네디가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분석이 매우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토론을 라디오로 들었던 시민들과 언론인들은 닉슨이 케네디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여겼다.[11] 실제로 라디오로 토론을 청취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9%의 청취자들이 닉슨이 승리했다고 응답한 반면, 케네디의 경우에는 21%에 불과했다.

해당 여론조사 기관은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시행했는데, 여기서도 케네디 30% - 닉슨 29%로 나와, 케네디가 압도적인 우위를 나타내지 못했다. 미국에서 TV대중화가 이루어진것이 1950년대의 일이었는데 만약 TV 대중화가 10년 정도 늦춰졌더라면 당시 닉슨이 승리했다는 여론이 분명히 우세했을 것이다.#

하지만 토론회의 내용과는 별개로 상대적으로 더 자신있는 모습을 보이고 잘생긴 케네디는 TV 광고와 토론회를 통해 그 후광을 배로 누릴 수 있었던 점은 분명했고, 당시 TV토론회를 시청한 유권자는 약 7000만명이었고 이 가운데 57%가 “TV 토론이 누구에게 투표할 지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답했다.# 결국 TV 토론회가 결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이 시점을 미국 대선사에서 이미지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다. TV 토론회를 본 사람들의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고관여층인 것은 사실이고 그들이 투표할 대상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면 당연히 그 역할을 부정하기 어려워지는 것.

캠페인이 마지막 2주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과 여론조사는 케네디가 약간 우세하다고 점치고 있었지만 아이젠하워가 선거 10일을 앞두고 정중동 행보를 깨고 본격적인 닉슨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그 영향으로 두 후보의 유세는 백중세 상태가 된 채, 선거일로 접어들게 되었다.

6. 선거 결과

최종 선거 결과
투표 시간
1960년 11월 6일(UTC +9}
투표 결과
후보자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선거인단 수 303 / 538명 219 / 538명
전국 득표 수 34,220,984표 (49.7%) 34,108,157표 (49.6%)
당선인
파일:John_F._Kennedy_color_photo_portrait.jpg
존 F. 케네디

존 F. 케네디 후보가 득표수로는 근소한 차이[12]로 이겼으나 선거인단에서 303명 대 219명의 비교적 큰 차이로 제 3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13]

선거 지도를 보면, 대체적으로 미국 서부 지역은 닉슨이, 동부 지역은 케네디가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이후 빌 클린턴이 등장할 때까지 민주당이 대선 승리를 위해 구현하려는 동서 전략의 기초가 되었다. 민주당에게는 아쉽게도 이때와 1976년 딱 2번만 구현됐지만 말이다.

전체적인 선거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케네디가 아주 적은 차이로 일리노이(케네디 49.98% vs 닉슨 49.80%)와 텍사스(케네디 50.52% vs 닉슨 48.52%)를 잡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외에도 하와이, 미주리, 뉴멕시코, 뉴저지, 미네소타, 델라웨어, 미시간에서 접전 끝에 극히 적은 차이로 케네디가 승리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표를 잃었다면 대선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이 때문인지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는 0.17%p 차이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한 후보의 압승으로 마무리된 50년대~60년대 대선 중 1968년 대선과 함께 드물게 접전을 펼친 대선으로 손꼽힌다.

1948년 이후로 남부가 본격적으로 민주당의 고정 지지층에서 이탈하는(딥 사우스 5개주 중에서도 가장 보수성이 강한 미시시피, 앨라배마가 먼저 이탈했다.) 동시에 북동부가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층으로 편입되는 '텃밭 바꾸기' 현상이 이후 2021년 현재의 정치구도로 이어지는데 이 대선 역시 그 영향이 드러난 선거 중 하나로 손꼽힌다.

6.1. 접전지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접전지
주 이름 선거인단수 승자 득표율 패자 득표율 득표율 차이 지난 승리자 이번 승리자 결과
하와이 3명 50.03% 49.97% 0.06% 신규 편입 주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획득
일리노이 27명 49.98% 49.80% 0.18%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미주리 13명 50.26% 49.74% 0.52%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에스테스 키포버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수성
캘리포니아 32명 50.10% 49.55% 0.5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뉴멕시코 4명 50.15% 49.41% 0.7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뉴저지 16명 49.96% 49.16% 0.80%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미네소타 11명 50.58% 49.16% 1.4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델라웨어 3명 50.63% 49.00% 1.63%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알래스카 3명 50.94% 49.06% 1.88% 신규 편입 주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승리
텍사스 24명 50.52% 48.52% 2.00%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미시간 20명 50.85% 48.84% 2.01%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네바다 3명 51.16% 48.84% 2.3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펜실베이니아 32명 51.06% 48.74% 2.3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워싱턴 9명 50.68% 48.27% 2.41%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사우스캐롤라이나 8명 51.24% 48.76% 2.48%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에스테스 키포버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수성
몬태나 4명 51.10% 48.60% 2.50%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미시시피 8명 38.99% 36.34% 2.65%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에스테스 키포버
해리 F. 버드&
스트롬 서먼드
-
플로리다 10명 51.51% 48.49% 3.0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위스콘신 12명 51.77% 48.05% 3.7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노스캐롤라이나 14명 52.11% 47.89% 4.22%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에스테스 키포버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수성
오레곤 6명 52.56% 47.32% 5.2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뉴욕 45명 52.53% 47.27% 5.26%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웨스트버지니아 8명 52.73% 47.27% 5.46%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버지니아 12명 52.44% 46.97% 5.47%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오하이오 25명 53.28% 46.72% 6.56%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뉴햄프셔 4명 53.42% 46.58% 6.8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아칸소 8명 50.19% 43.06% 7.13%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에스테스 키포버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수성
테네시 11명 52.92% 45.77% 7.1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켄터키 10명 53.59% 46.41% 7.18%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메릴랜드 9명 53.61% 46.39% 7.2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코네티컷 8명 53.73% 46.26% 7.47%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민주당 탈환
아이다호 4명 53.78% 46.22% 7.56%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유타 4명 54.81% 45.17% 9.6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콜로라도 6명 54.63% 44.91% 9.7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수성

7. 논란

7.1. 부정선거 음모론

소수지만 해당 대선에 대한 선거조작에 대한 음모론이 있다. 부통령에 당선된 린든 B. 존슨이 텍사스 연방 상원의원이자 상원 다수당 원내대표라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텍사스에서 선거조작을 자행했고, 케네디 또한 자기 가문의 시카고 마피아와의 연결고리를 활용해 일리노이에서 선거조작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만약에라도 해당 의혹이 사실이고, 이러한 선거조작이 없어 닉슨이 텍사스와 일리노이에서 승리했다면, 닉슨은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단순한 의혹 수준인데다가 리처드 닉슨 본인이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14] 공화당에서 결과 뒤집기를 위해 일리노이, 텍사스 등 11개 주에서 재검표를 1961년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시도했지만 오히려 재검표 결과 원래 닉슨이 승리했던 하와이를 케네디에게 내주는 망신만 당했다.

이후 선거 통계학자들에 의해 접전주에서 몇몇 통계적 오류가 밝혀지긴 했으나 아무리 닉슨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고 해도 결과를 뒤집을 정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현재까지 이 의혹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극성 공화당 지지층의 음모론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8. 관련 문서


[1] 닉슨이 승리한 오클라호마에 배정된 선거인단 8명 중 1명이 민주당의 해리 F. 버드 연방 상원의원에게 배반 투표했다.[2] 미시시피앨라배마에서 민주당 후보가 된 존 F. 케네디에 반대해 선서하지 않은 선거인을 따로 지명해 해리 F. 버드에게 각각 8명, 6명이 불충실한 투표를 하면서 표를 잃었다. 조지아에서도 같은 시도가 있었지만 여기선 막혔다.[3] 프랭클린 D. 루스벨트 4선 성공 이후 아예 수정 헌법을 만들어 3선 도전 불가를 명문화한데다 아이젠하워는 수정 헌법 22조에 따라 3선 금지 조항을 적용받는 첫번째 대통령이였던터라 현실화되지는 않았다.[4] 연방 상원에서 민주당이 64-36, 하원에서 283-152으로 압승했다. 이때 민주당이 상원에서 15석을 획득한 것은 아직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승리로 남아있다.[5] 물론 그가 실제로 출마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 강경보수파가 그에게 표를 던졌다.[6] 대표적으로 부통령 시절 소련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과 주고 받았던 했던 부엌 논쟁이 있다.[7] 이 경선 승리를 기준으로 갤럽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 내 1위로 올라선다.[8] 실제로 경선 결과와 실제 후보가 달랐던 사례가 여럿 있었다. 1968년의 휴버트 험프리가 대표적이고 1952년에도 에스테스 케포버가 경선에서 압승하였으나(3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대의원에서 밀려 애들레이 E. 스티븐슨에게 후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에스테스 케포버는 1956년에도 후보 자리를 노렸으나 이번에는 경선에서도 스티븐슨에게 밀렸고 대신 위에서 말했듯이 부통령 경선에서 케네디를 누르고 부통령 후보가 되나 패배한다.) 지금처럼 경선에 선거인단 선출이 결합된 시스템은 1976년에 가서야 시작된다.[9] 오죽하면 케네디의 비서였던 이블린 링컨은 1993년 인터뷰에서 존슨이 존 에드거 후버로부터 얻은 케네디의 여성 편력 관련 증거물을 가지고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협박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10] 나이는 1913년생인 닉슨이 1917년생 케네디보다 네살 연상이었다.[11] 라디오로 들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부통령 후보였던 린슨 존슨이다. 그 당시에 라디오 들으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쟤(케네디) 토론 완전 망쳤구먼!(The boy's blown it!)[12] 득표율 0.1%p차, 득표 수로도 10만 여표 차[13] 비슷한 예시로 2016 미국 대선이 있는데,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은 클린턴 후보보다 적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300명 정도를 얻으며 생각보다 크게 이겼다.[14] 이후 닉슨은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에 퇴임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축하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