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6:14:02

로버트 M. 라폴레트

파일:위스콘신 주기.svg
위스콘신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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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미국 대선 진보당 후보
미합중국 제59-66대 연방 상원의원
로버트 마리온 라폴레트 시니어
Robert Marion La Follette Sr.
파일:Robert-M-La-Follette.jpg
<colbgcolor=#aeaa7a><colcolor=#fff> 출생 1855년 6월 14일
미국 위스콘신 주 프림로즈
사망 1925년 6월 18일 (향년 70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기간 연방하원의원(위스콘신 3구)
1885년 3월 4일 ~ 1891년 3월 3일
제20대 위스콘신 주지사
1901년 1월 7일 ~ 1906년 1월 1일
연방상원의원(위스콘신 클래스 1)
1906년 1월 4일 ~ 1925년 6월 18일
학력 위스콘신 대학교 (이학사)
선수 3 (하원)
3 (주지사)
4 (상원)
대수 49, 50, 51 (하원)
20 (주지사)
59, 62, 65, 68 (상원)
정당

(1880~1924)

(1924~1925)
배우자 벨 케이스 라폴레트[1]
자녀 장남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
장녀 폴라 라폴레트
차남 필립 라폴레트
차녀 메리 조세핀 라폴레트
서명
파일:로버트 라폴레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하원의원 시기와 야인 생활2.3. 주지사2.4. 상원의원2.5. 대통령 후보
3. 여담4. 선거 이력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및 법조인. 진보주의를 위해 오랜 기간 헌신한 진보 시대의 아이콘 중 하나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죽은 이후엔 서부의 하이럼 존슨, 중부의 윌리엄 보라와 함께 중서부의 공화당 진보파를 대표하며 미국에서 제일가는 세 진보주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57년에는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주도하는 상원위원회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5명의 상원의원'의 일원으로서[2]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또한, 1982년에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명의 상원의원' 목록에선 헨리 클레이와 함께 최상단을 차지했으며, 현재도 위스콘신이 배출한 훌륭한 정치인을 꼽으라 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위스콘신 주 프림로즈에서 프랑스계 미국인인 조시아 라폴레트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인 메리 퍼거슨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조시아는 그가 태어난 지 8개월만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그가 7살이 되는 1862년에 70대의 늙은 부자 존 색스턴과 재혼했는데 로버트와 새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872년 새아버지가 늙어죽은 후 상속자가 된 그와 가족들은 매디슨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쭉 살다가 1875년 위스콘신 대학교에 입학해 1879년에 졸업했다. 이때 그는 대학 총장이자 저명한 인본주의자였던 존 배스컴(John Bascom)으로부터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민주당원이었던 어머니와 달리 공화당 진보파에 이끌렸으며, 대학 재학중 그의 부인이 될 벨 케이스를 만나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눈을 뜨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는 대개 별볼일 없는 학생으로 여겨졌지만 이때부터 연설을 잘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났으며 학생신문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2.2. 하원의원 시기와 야인 생활

1880년 주 변호사 협회에 들어간 그는 데인 카운티의 지역 검사가 되면서 정치 생활을 시작한 데에 이어 1884년에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의 최연소 의원이 되었다. 아직 평범한 북부 공화당원에 가까운 성향을 띠고 있던 그는 윌리엄 매킨리의 보호무역주의 및 고관세 정책을 지지했지만, 한편으로는 철도 독과점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아 친기업 성향의 공화당 주류가 지지하지 않던 1887년 주간상업법(Interstate Commerce Act of 1887)과 셔먼 반독점법에 찬성 투표를 하는 등 진보적인 투표 기록을 가졌다.

당시 라폴레트의 정치적 성향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인종차별 문제였는데, 그는 온건한 반인종차별 기조를 띠던 공화당 주류에서 더 나아가 강한 반인종차별 성향을 띠게 되었고 딕시크랫에 맞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권을 연방 단위에서 보호하도록 하는 로지 법안(Lodge Bill)을 지지했다. 이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겸 보통선거권 지지자이자 초기 민권운동가였던 아내 벨 케이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1890년 민주당이 하원에서 86석을 얻는 초압승을 거두며 매킨리 행정부의 대표적 실책인 고관세 정책을 지지한 그는 자연스레 선거에서 패배하고 만다.[3] 이후 매디슨으로 돌아가 법조인 생활을 잠시 했을때 법정에서 열정적으로 발언하는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Fighting Bob(싸우는 밥)"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수 년간 법조인 활동을 하면서 외연 확장에 성공한 라폴레트는 중도 성향 식자층, 진보 성향 청년 유권자, 낙농업 종사자, 북유럽계 이민자, 우경화되는 공화당에 불만을 품은 진보파 공화당원들을 아우르는 정치적 동맹을 결성했으며, 당시 위스콘신 정계를 주도하던 보수주의, 친기업, 친엽관제 성향 공화당 계파인 '강건파(stalwart)'에 맞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상원의원 필리터스 소이어(Philetus Sawyer)와 같은 공화당 보수파 정치인들은 그를 매수해서 미리 공화당 진보파의 싹을 밟아놓으려 시도했지만 확고한 반부패주의자인 라폴레트에게는 전혀 먹히지 못했으며, 결국 라폴레트가 공화당 보수파에게 '매수를 통해 인민의 목소리를 닥치게 만들려고 한다'고 일갈한 것을 계기로 양측 세력은 위스콘신 공화당의 방향성을 놓고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2.3. 주지사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다시금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매킨리를 지지하며 윌리엄 J. 브라이언을 지나치게 급진적인 후보라고 규탄한 라폴레트는 곧 충성심을 인정받아 위스콘신의 진보~중도 성향 공화당원들을 이끄는 리더이자 차기 주지사 후보가 되었으며, 매킨리에게 통화감독청(OCC) 청장으로 일해줄 것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더 큰 비전이 있었기에 이를 거절하고 마침내 1900년 위스콘신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위스콘신의 거대한 중도좌파 동맹의 수장이 된 그는 매킨리 행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발생한 1893년 불황을 지켜보며 자신이 지지하던 매킨리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멀어지게 되었으며, 특히 반기업, 반독과점 성향을 더욱 강화시켜 이전까지 위스콘신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추고 있던 인민당의 표심을 완전히 흡수했다. 라폴레트는 이전까지 보수파가 주도해 자신을 포함한 공화당 진보파 후보들을 경선에서 번번히 탈락시킨 위스콘신 공화당에 큰 실망을 느끼고 지역당의 후보 간접선출이 아닌 예비선거의 실시를 골자로 삼는 경선개혁을 추진했으며, 진보적 세제개혁과 지역 철도의 독과점 해체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공화당 보수파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주의회, 그리고 특히 철도 업계와 척을 지게 되면서 세제개혁 법안에 불신임 투표가 이뤄지기도 하고 재선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더러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라폴레트의 열정적인 정치 행보에 감명받은 유권자들은 부패한 지역 정치인들이 아닌 그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경선개혁 법안이 통과되면서 보수파 정치인들이 대거 물갈이된 이후 곧바로 철도업계와 각종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부유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주의 재정상황을 크게 개선시켰다.

이후, 남은 2번째 주지사 임기 내내 세금을 가난한 자들이 더 적게, 부자들이 더 많이 내야 한다면서 직접소득세의 도입을 주장했고 감리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진보적 교육운동인 셰토콰(Chautauqua)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흑인들을 공직에 기용하기도 하는 등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누가 봐도 확고한 진보주의 기조를 갖게 되었다.

라폴레트의 정치적 성향은 위스콘신 이념(Wisconsin Idea)으로 정의되는데, 본래 1904년 위스콘신 대학교의 찰스 밴 하이즈(Charles Van Hise) 총장을 비롯한 일련의 독일계 교육인들이 공립교육 체계의 확대와 교육계-정계 간의 연계,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등을 주장하던 것을 그가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위스콘신의 정치와 사회 전반까지 폭넓게 자리잡게 되었다. 직접민주주의가 시민의 의견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이고 철도 업계가 이를 근본적으로 방해한다고 생각한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의 교수 57명을 동원해 주 규제 기관을 설립하고 이전까지의 위스콘신 정계의 관행처럼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매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담당하는 지역구에서 투표 명부를 공개적으로 낭독해 망신을 주는 참신한 방식으로 개혁안을 추진했으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1903년에는 재산세와 직접선거제를 도입, 1905년에는 주립 위원회의 세무 규제와 주 공무원 개혁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다.

라폴레트는 위스콘신이 미국 전체를 통틀어 "민주주의의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믿었으며, 자신이 '못 가진 자들'의 대변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그는 노동자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로서 노동3권을 정부 차원에서 보장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조 결성을 지원했으며, 당시 미국에 팽배하던 반이민 정서에 정면으로 맞서 독일계, 북유럽계 이민자들을 돕고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 철폐를 지지했다.

그는 중서부의 여러 추문폭로자(Muckraker) 언론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차곡차곡 인지도를 쌓아올렸으며, 3선에도 무난히 성공했지만 비단 주지사만이 아니라 더 높은 자리인 상원의원,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권까지 도전해보겠다는 더 큰 꿈을 품고 자신과 똑같은 공화당 진보파 출신의 부주지사인 제임스 올레 데이비드슨(James Ole Davidson)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식으로 주지사직을 사임한 뒤 1905년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출마, 주의회의 만장일치를 받아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2.4. 상원의원

2.4.1.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라폴레트는 이후 공화당 진보파에서도 더욱 반기업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이들의 리더가 되었다. 주지사직을 역임하면서 단순히 철도업계만 조질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재계 거물들, 특히 금융계를 박살내는 것만이 소비자이자 납세자인 모든 인민을 돕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당시 가장 거대한 기업집단이었던 JP 모건스탠더드 오일을 "이기적인 이권(selfish interests)"의 대명사로 지칭하면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행정부 하에서 거대기업을 규제하는 반독점법과 상원의원의 직접선거[4]를 적극 옹호했다.

1907년 공황으로 금융계의 후원을 받던 넬슨 W. 알드리치(Nelson W. Aldrich)[5]가 이끄는 공화당 보수파의 주도 하에 연방준비제도의 전신이 될 전국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의 창설을 허용하는 알드리치-브리랜드 통화법(Aldrich-Vreeland Currency Act)의 통과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그는 정부가 주도하는 중앙은행이 아니라 금융계가 지배하는 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이 겨우 100명도 채 되지 않는 부자들에 의해 나라의 경제 전반이 지배당하는 길로 이어질 것이라 비난하며 19시간에 걸쳐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기록을 남겼다. 라폴레트가 진행한 필리버스터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선견지명은 연방준비제도가 현재까지 보유한 수많은 문제점, 논란과 의혹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2.4.2.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행정부

태프트 행정부의 임기가 시작되자, 본래 태프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사이가 좋았다는 점 때문에 진보적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관세 인하를 실시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페인-알드리치 관세법(Payne-Aldrich Tariff Act)을 포함한 보수주의-고관세 법안들이 연이어 통과되자 크게 실망했으며, 이후 보수적 공화당원들에 맞서 진보적 공화당원을 결집해 진보적 법안들을 추진했다.

알래스카에서 탄광 이권을 보유하고 있던 JP 모건구겐하임 가문과의 유착관계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던 리처드 A. 밸링거(Richard A. Ballinger)가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어 루스벨트 행정부 시절의 환경보호 정책을 역행하며 태프트가 전임자 지우기 시도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자, 격앙된 라폴레트와 공화당 진보파는 태프트에 대적하기 시작했다. 밸링거의 불법적인 탄광산업 및 수력발전 확장을 놓고 USFS의 수장이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측근인 기퍼드 핀초(Gifford Pinchot)가 태클을 거는 핀초-밸링거 논란 사건이 발생하자 라폴레트가 밸링거의 직권남용 위법행위에 대해 의회의 감사를 주장하며 핀초의 편을 들면서 공화당 진보파-보수파 간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더이상 태프트 행정부를 눈뜨고 봐줄 수 없게 된 라폴레트는 1911년 자신과 뜻이 맞는 정치인들을 모아 태프트에게 반대하는 공화당 진보파 코커스인 국민진보공화연맹(National Progressive Republican League)을 창설했으며, 이 덕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그림자에 가려진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태프트에 맞설 진보적 공화당원들의 리더로 부상했다.

2.4.3. 우드로 윌슨 행정부

이후의 평가와는 달리 당시까지만 해도 강성 고립주의자로 분류되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그의 부분적으로 진보적인 성향과 고립주의적 태도를 괜찮게 여긴 라폴레트는 항만/선박 노동 종사자들의 노동권 및 노동환경, 최저임금을 개선하고 강제 선상노동을 금지하는 유명한 법안인 1915년 라폴레트 선원법(La Follette Seaman’s Act of 1915)과 여타 관세 인하 법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민주당과 초당적 협의를 거치는 등 그나마 협력하나 싶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우드로 윌슨이 중립법을 깨면서까지 자칭 '분쟁의 이상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해결'을 위해 참전을 시사하려 시도하면서 윌슨 행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하곤 했다. 그는 강력한 고립주의자로서 미국의 참전이 대기업을 위한 것이라고 믿으며 전쟁을 끝까지 반대한 6인의 상원의원에 합류했으며, 윌슨 행정부의 멕시코 침공, 히스파니올라 점령 등 중남미 국가들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적 행보에도 크게 반발했다.

1917년 3월 3일, 제64대 의회 임기가 26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라폴레트는 미국의 대독 참전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 예상되던 상선무장법의 통과를 막기 위해 10여 명의 다른 반전파 상원의원들과 함께 다음날인 3월 4일 9시 30분까지 하루종일 연설하는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켄터키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인 올리 머레이 제임스(Ollie Murray James)에게 총을 맞을 뻔하기도 하는 등 여러 위험에 처했다. 또한, 상선무장법의 통과 저지에도 불구하고 우드로 윌슨이 그와 동료 의원들을 "자기들의 의견 외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소수의 고의를 품은 이들"로 비난하고 무수한 황색언론의 흑색선전과 심지어는 살해 협박까지 받는 등 남은 1910년대 후반 내내 여론의 질타에 시달려야 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개인적 특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개인적 특권 문제를 제외하고는 전쟁에 참전하게 된 사건에 대해 상원에서의 시간을 할애해 검토할 생각이 없습니다.

상원의원 6명과 하원의원 50명이 선전포고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 즉시 상원의원들과 하원의원들에게 문명 사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쟁을 부르짖던 신문들과 개인들의 비난과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선전포고 이전에 우리의 참전을 반대했던 모든 이들은 겁쟁이, 또는 그보다 더 나쁜 자로 비난받았고, 대통령조차도 이러한 공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선전포고 이후 승리를 거둔 찬전 언론은 악의적인 허위사실과 무모한 명예훼손 공격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상원의원들과 하원의원들을 쫓아다니며 그들을 조국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하는 극단적인 행위까지 나아갔습니다. 우리의 참전에 반대했던 의원들에 대한 이러한 명예훼손과 인격 말살 계획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제 책상 위에는 본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선전포고에 반대한 다른 상원의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 담긴 신문 스크랩이 놓여있습니다.

(중략)

대통령 각하, 위의 스크랩은 다른 연방 판사가 저에게 보냈는데, 그 판사는 스크랩의 여백에 자신의 행위가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스크랩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동봉했습니다:

'저는 거대 기업 이권이 귀하를 상대로 조직적으로 벌인 잔인하고 부당한 공격에 크게 우울해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악령이 풀려난 때입니다. 당신이 그들과 맞서 싸우고 공동선을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한 세대 동안 당신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온 재계의 황제들은 전쟁 애국심을 공격의 원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 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곳에서 이를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뿐만 아니라 여기 미국에서도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이들이 산에 올라가 금식과 기도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땅에서 선한 세력이 악한 세력보다 더 크다는 것을 믿지만, 우리 모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면의 중심을 지키고 증오에 흐려지지 않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은혜가 내리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선한 사람의 성품을 악의로부터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봉사의 직분입니다.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당신은 이러한 방패가 당신의 것이라는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신문 스크랩이 불법적인 명예훼손의 단일 사례이거나 예외적인 사례라면, 저는 상원에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각하, 그렇지 않습니다. 제 책상 위에 있는 이 신문 스크랩은 상원이 원하지 않는 한 이를 읽도록 귀찮게 들지 않을 것이며, 지난 3개월간 이 나라의 일간지들에서 스크랩한 것의 일부에 불과합니다만, 저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상원의원들이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범죄인 내란과 이적 혐의로 기소된 것을 발견했으며, 그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증거가 어디에 존재한다는 암시조차 없이 기소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전포고에 반대했던 상원의원들이 이후의 전쟁 조치나 그 밖의 어떤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주장하진 않겠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의견에 따라 투표했고, 선전포고 이후 상원에 상정된 법안에 대해 종종 서로 갈라섰으며, 제 기억에 따르면 그 이후로 상원이 분열된 단일 안건에 대해 모두 함께 투표한 적은 없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이러한 일반적인 비방과 협박 시도에 따라 개인들과 특정 단체들이 저를 상원에서 제명해달라는 요청을 상원에 제출했으며, 그러한 요청이 상원의 한 위원회에 회부되어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저 혼자만 이러한 공격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상원의 심의를 위해 단 한 순간도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며, 저와 같이 부당하고 불공정한 공격을 받은 다른 상원의원들도 저와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권리와 의무에 대한 엄숙한 확신에 의해 제가 존재하고 통제하며 감독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들에 의해 인도되는 제가 스스로 표시한 경로에서, 군중의 함성이나 힘찬 목소리가 저를 이탈시키는 일은 털끝만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각하, 이 나라의 찬전파 정당이 협박하려는 것은 비단 의원들뿐만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주권자인 인민에게 그들의 안녕, 행복, 생명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일들이 정부에 의해 행해지는 동안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이 나라의 정직한 준법시민들은 법을 지키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이들에 의해 오늘과 지난 몇 주간 테러와 분노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며칠 동안 연락이 두절된 채 구금되었다가 결국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정에 출두하지도 않은 채 석방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수많은 진술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인 주거지가 침입당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성실하고 충직한 시민들이 체포되고, 반대 심문을 받고, 모든 미국 시민에게 보장된 가장 신성한 헌법상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을 수행하는 이들의 목적은 국가를 테러 상태에 몰아넣고, 여론을 강압하고, 비판을 억압하고, 이 전쟁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에 대한 토론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전쟁 중에는 시민이 평시에 누릴 자격이 있는 공동선을 위해 일부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 헌법 체계에 따라 자신의 정부를 통제할 권리는 이 나라의 시민이 전쟁 중에 포기해야 할 권리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 중일 때 시민은 정부를 통제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전시의 필요성을 핑계로 변명하는 행정 관료들의 자의적 행동을 지지하는 선례들이 필요성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상황이 회복되었는데도 고정된 규칙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전쟁 중 시민과 그들을 의회에서 대표하는 자들은 언론의 자유를 유지해야 합니다. 전쟁 중일 때는 보다 더 많은 언론의 자유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자유로운 공개 토론의 장이 평시보다 더 개방되고 가로막히지 않아야 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이 전쟁의 모든 중요한 국면과 그 원인, 전쟁 수행 방식,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조건에 대해 이 나라의 시민들과 그들을 의회에서 대표하는 자들이 연단과 언론을 통해 두려움 없이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질서 있게 토론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나라의 시민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부정되고 있다는 믿음이 이 땅에 널리 퍼지고 있으며, 그 엄청난 중요성을 권력자들은 아직 인식하기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이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이 전쟁으로 인해 제기되는 중대한 문제들, 즉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권리와 명예, 인류의 이익을 고려하여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위대한 기본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 권리의 행사가 이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과, 이 나라의 지속적이고 최선의 이익을 위한 평화를 위한 정부의 복지와 존립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문제에 대한 모든 토론, 평화가 체결되어야 하는 조건에 대한 모든 토론, 전쟁에 의해 달성되어야 하는 목표와 목적에 대한 모든 토론을 억압하고 전쟁에 미친 언론과 전쟁 극단주의자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중의 발언권을 독점하라는 요구를 아무런 도전 없이 인정하는 시도가 성공한다고 가정한다면, 전쟁 도중뿐만이 아니라 전쟁 이후 이 나라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917년 10월 6일, 로버트 M. 라폴레트가 상원에서 진행한 "언론의 자유와 의회에서 전쟁의 반대를 선언할 권리" 연설.[6]

1917년 9월 20일, 한 황색언론이 그가 독일의 루시타니아호 격침을 지지하는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는 오보를 내면서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반전파 의원들에 대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온갖 비난이 쏟아지며 심지어는 의원직을 박탈하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이 찾아오자 그는 격노해 1917년 10월 6일 의회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3시간 길이의 전설적인 연설인 일명 "전시 언론의 자유 연설(Free Speech in Wartime)"을 진행해 우레와도 같은 박수갈채와 환호를 받았으나, 끝내 참전을 막지는 못했다.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이후엔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과 국제연맹 가맹에 반대하는 비타협파에 합류했다. 이후, 1차대전이 완전히 종전하자 상원은 반전파 의원들에 대해 실시중이던 반역죄 혐의 조사와 계류 중이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파기하고 그동안 사용한 법률 비용을 보전해주었으며, 이를 통해 라폴레트는 윌슨 행정부를 상대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소련에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협상국 진영의 백군측 개입을 반대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윌슨의 간첩법 및 선동법을 기본권의 훼손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반대했고 유진 V. 데브스의 투옥, 팔머 공안몰이 사건(Palmer Raids)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반공/반사회주의 공안사건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자라는 사실만으로 범죄자가 될 수는 없다며 용의자들의 무죄방면을 강력히 주장했다.

2.4.4.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행정부

하딩 행정부 시기엔 재무부장관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이 주도하는 감세안이 지나치게 감세폭이 크고 부자들에게 유리한 구조라며 반대를 표했으며, 1921년엔 전국의 진보주의자, 철도 노조 지도자, 농촌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반기업주의를 주제로 개최한 진보정치행동회의(Conference for Progressive Political Action)가 열리자 진보 진영의 좌장으로서 회의의 조직을 도왔다.

볼셰비키 정권이 본색을 드러내 독재적 모습을 보인 이후인 1923년엔 소련을 방문했다가 그곳의 실상을 목도하곤 태도를 바꿔 반소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같은해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당시 보게 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에 대해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찾아볼 수 없다며 비판했다. 워런 G. 하딩이 급사한 이후 들어선 쿨리지 행정부에 이르러서는 하딩 행정부의 앨버트 폴이 저지른 티포트 돔 스캔들을 수사해 진상을 밝혀내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2.5. 대통령 후보

로버트 라폴레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기회는 크게 3번에 걸쳐 존재했다.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이 인기를 크게 실추하면서 공화당 진보파의 세가 급격히 불어나자, 당시 태프트 정권을 맹렬히 공격해 큰 인기를 얻은 라폴레트는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서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3선 출마 포기를 번복하고 다시 한 번 경선에 출마해 진보진영을 눈 뜨고 빼앗긴데다 두 사람의 다툼으로 진보파 표심이 양분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태프트를 대선 후보로 올려보내는 결과만 발생했으며,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너무 빡쳤던 나머지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고 한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당시 중서부에서 막 흥기하고 있던 농민노동당에 의해 제3정당 대선후보로 추대될 뻔했지만, 어째서인지 이를 거절하고 공화당 경선에도 제대로 출마하지 않았다. 당시 그와 마찬가지로 공화당 진보파 출신의 전국구 정치인이었던 하이럼 존슨이 공화당 경선에 출마해 굉장한 접전을 벌이다가 결판이 나지 않자 밀실 담합을 통해 워런 G. 하딩이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는데, 당시 하이럼 존슨보다 라폴레트가 인지도 면에서 더 유리했던데다 윌슨 행정부의 심각한 레임덕 때문에 공화당에서 누가 출마하든 손쉽게 민주당을 꺾을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경선에 나서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었다.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 후보 캘빈 쿨리지와 존 W. 데이비스 모두 보수적이라고 느낀 라폴레트와 진보주의자들은 사회당과 양당의 진보파 의원들을 모아 진보당을 재창당해 제3당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러닝메이트는 몬태나의 버튼 K. 휠러(Burton K. Wheeler)로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성향을 보여 훗날 일명 '공산주의자 의원'으로 불리게 될 민주당 진보파 의원이었으며, 유진 V. 데브스세계산업노동자연맹과 미국노동총연맹(AFL)을 비롯한 노조단체들, 미국의 1차대전 참전에 큰 반감을 품고 있던 독일계 미국인들 역시 이들을 지지했다.

공익사업 추진, 단결권단체교섭권 보호, 농업 구호정책, 아동노동 불법화, 중산층 감세, 반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민투표를 요구하며 활발한 선거운동을 벌인 그는 인생 최후의 불꽃을 화려하게 불태우면서 한때 선거를 교착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노구의 몸에 젊은 시절처럼 열렬한 연설과 선거유세를 지나치게 많이 벌인 것이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또한 진보당 자체가 대통령 선거를 위해 사실상 급조된 정당인지라[7], 당 차원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못한채 선거운동을 해나가야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그의 모습에 가면 갈수록 지지가 무너져 선거 당일에는 위스콘신 주만을 이기고 16.6%, 약 480만 표를 득표했으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생긴 폐렴 합병증으로 이듬해 사망했다. 사후 그가 보유하고 있던 상원의원직은 장남인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에게 넘어갔다.

3. 여담

  • 채식주의자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에너지와 명석한 두뇌를 제공했다고 한다.
  • 자식들 또한 정치계에서 활동하면서 굵직한 치적들을 여러 남겼다.
    • 장남인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는 그의 지역구인 위스콘신을 물려받아 무려 22년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지만, 차기 위스콘신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가 당시 전국에 불던 매카시즘 광풍에 힘입어 거물 진보주의자인 자신을 상대로 한 각종 표적수사를 추진하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 차남인 필립 라폴레트는 27대 및 29대 위스콘신 주지사로 재직했으며, 뉴딜 정책에는 적극 찬성했지만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세 번째로 출마하는 것에는 반대해 일명 '국민진보당(National Progressive Party)'이라 불리는 제3당 창당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 장녀인 폴라 라폴레트는 제도권에서 활동한 두 남동생과는 달리 여성참정권 및 노동운동 분야에서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191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통과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여배우로 활동하며 연극배우노조(Actors' Equity Association, 약칭 AEA)의 발족에도 참여했다.
  • 뛰어난 대중동원능력, 특히 탁월한 웅변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연설은 논리정연하고 침착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가 담겨있어 청중들을 매료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18년간 상원의원직을 역임했지만 상원에서 벌어지는 온갖 더러운 일에 학을 뗀 것 때문에 "상원은 늙고 썩어빠졌다(the old rotten Senate)"틀딱 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출처
  • 1917년 3월 4일의 상선무장법 필리버스터가 끝날 무렵 의회 사회자가 필리버스터에 반대하는 이들만 표결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억지 논리를 부리자, 크게 분노해 자리에 있던 놋쇠 타구(唾具)를 사회자에게 집어던지려 시도했고 이를 막기 위해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달려들면서 의도치 않게 국회 공성전을 발생시킨 전적이 있다.

    이외에도, 1917년 11월 자신을 친독 반역자로 음해한 위스콘신의 지역신문 '매디슨 데모크랏(Madison Democrat)'을 상대로 자신이 무죄인 것이 드러나면 정식으로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라며 고소미를 시전했고 실제로 무죄 판결이 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거의 파산 직전에 몰려있던 라폴레트 위클리를 살려내는 등등 여러모로 열혈스럽고 파란만장한 일화들을 다수 보유했다.

4. 선거 이력[9]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88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위스콘신 제3구

17,433 (48.08%) 당선 (1위) 초선
188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6,711 (50.38%) 재선
188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9,052 (49.96%) 3선
189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5,430 (46.16%) 낙선 (2위)
1900 미국 주지사 선거 위스콘신 264,419 (59.83%) 당선 (1위) 초선
1902 미국 주지사 선거 193,417 (52.89%) 재선
1904 미국 주지사 선거 227,253 (50.55%) 3선
1905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2명[10] 초선
1911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83명[11] 재선
1916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249,906 (59.23%) 3선
192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379,494 (80.67%%) 4선
1924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4,831,706 (16.61%, 13명) 낙선 (3위)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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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 법조인 로버트 라이시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마사 누스바움 · 소니아 소토마요르 · 얼 워런 · 존 롤스 · 폴 크루그먼
활동가 W. E. B. 듀보이스 · 마이클 무어 · 마틴 루터 킹 · 배티 프리댄
언론 CNN · 뉴욕 타임스 · 더 뉴요커 · 워싱턴 포스트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 MSNBC · 뉴 리퍼블릭 · 더 내이션 · 롤링 스톤 · 허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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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좌파적 경제관(경제적 진보주의) 한정. 중도우파인 사회적 의제(온건 사회보수주의)는 현대자유주의에 포함되지 않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보수주의와도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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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1년 결혼.[2] 나머지는 대니얼 웹스터, 로버트 A. 태프트, 존 C. 칼훈, 헨리 클레이다.[3] 아이러니하게도 1894년 민주당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하원 패배를 당한다.[4] 이 당시 상원의원은 당선이 아닌 주의회의 선출 형식이었다.[5] 당시 다른 금융계 종사자들과 함께 레오폴 2세가 다스리던 콩고 독립국에 대규모 집단 투자를 해 큰 수익을 올리고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에게 딸인 애비를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형성하는 등 의회 내에서 전형적인 유능하지만 부패한 정치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6] 연설 전문은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7] 1924년 이전부터 48 위원회(Committee of 48)등 통합 진보정당을 설립하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여느 진보 세력이 그렇듯 어느 성향의 진보파까지 포용하느냐 문제로 논의가 지지부진해졌다.[8] 21세기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20세기 초반 기준으로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받는 것을 반대하고 혁신주의적 관점에 의거해 금주법을 지지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일이었다. 로버트 M. 라폴레트와 그의 맏아들 겸 후계자인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는 당시 중서부에서 금주법이 가져올 해악을 꿰뚫어보고 반대하던 극소수의 의원이었으며, 특히 라폴레트 주니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수정헌법 18조 철회를 통한 금주법 철폐 시도를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9] 출처[10] 1913년 5월 31일 수정헌법 제17조 시행 이전에는 주의회에서 연방상원의원을 간접 선출했으므로 당시 획득한 선거인단수를 기입함.[11] 1913년 5월 31일 수정헌법 제17조 시행 이전에는 주의회에서 연방상원의원을 간접 선출했으므로 당시 획득한 선거인단수를 기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