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요선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fff> 종류 | 지난 선거 | 다음 선거 |
대통령 선거 | 2020년 2020년 11월 3일 | 2024년 2024년 11월 5일 | |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
중간선거 | 2022년 2022년 11월 8일 | 2026년 2026년 11월 3일 | |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
상원의원 선거 | 118대 2022년 11월 8일 | 119대 2024년 11월 5일 | |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
하원의원 선거 | 118대 2022년 11월 8일 | 119대 2024년 11월 5일 | |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
주지사 선거 | 2023년 2023년 11월 7일 | 2024년 2024년 11월 5일 | |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
주무장관 선거 | 2023년 2023년 11월 7일 | 2024년 2024년 11월 5일 | |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 |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2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 | ||||||||
{{{#!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px" | 데이비스 136인 | ✔ (71.9%) 382인 쿨리지 | }}}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20년 11월 2일 1920 대선 | → | 1924년 11월 4일 1924 대선 | → | 1928년 11월 6일 1928 대선 |
선거 일시 | 11월 4일 5시 ~ 11월 5일 6시 (UTC) | |||||
투표율 | 48.9% | |||||
선거 결과 | ||||||
후보 | 대통령 캘빈 쿨리지 부통령 찰스 G. 도스 | 대통령 존 W. 데이비스 부통령 찰스 W. 브라이언[1] | '''대통령 부통령 버튼 K. 휠러''' | |||
선거인단 | ||||||
382인 | 136인 | 13인 | ||||
전국 득표 | ||||||
54.0% 15,723,789표 | 28.8% 8,386,242표 | 16.6% 4,831,706표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대통령 당선인 | 부통령 당선인 | }}} | |||
공화당 {{{#!wiki style="margin: -5px -10px" | }}} |
[clearfix]
1. 개요
1924년 11월 4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선거 결과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 캘빈 쿨리지와 부통령 후보 찰스 G. 도스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존 W. 데이비스와 부통령 후보 찰스 W. 브라이언을 꺾고 미국의 제30대 정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2. 배경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례 없는 압승을 거둔 워런 G. 하딩 대통령은 취임 후 막대한 감세정책을 통해 인기를 유지했다. 1921년의 단기공황을 잘 해결하면서 1924년 대선에서 무난히 재선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취임 불과 2년 후 뇌경색으로 숨을 거두었고, 부통령 캘빈 쿨리지가한편 민주당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민주당의 큰 두 기둥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노년기에 접어들고 우드로 윌슨은 사망하면서 당 내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 1920년 대선에서 제임스 M. 콕스가 대참패한 후, 민주당은 1922년의 단기불황을 공격하며 1922년 중간선거에서 선전해 정권 재창출을 노렸다. 그러나 1923년 경기가 회복되면서 민주당의 지지율도 낮아졌고, 캘빈 쿨리지의 적폐청산으로 민주당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지며 민주당의 선거 승리 가능성은 나날이 떨어졌다. 도리어 1922년 중간선거의 대승은 여러 민주당 대권주자들을 희망회로에 빠트려 안그래도 심각했던 당권투쟁을 격화시키는데에만 일조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미국 원주민들이 모두 시민권을 취득한 후 그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첫번째 선거였다. 또한 금주법이 시행된지 4년이 된 해이자, 남부에서 쿠 클럭스 클랜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에 이루어진 선거였다.
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공화당 내에서는 현직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했다. 쿨리지 대통령은 매우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었고, 재선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기퍼드 핀초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찰스 에번스 휴즈 대법원장, 허버트 후버 상무장관 등 유력주자들이 일찍이 대선 출마를 포기하며 쿨리지의 독주가 이어졌다. 쿨리지 대통령은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정책과 사회보수주의적 성향으로 공화당 내에 얼마 남지 않아있던 진보 세력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대중에게 쿨리지는 여전히 인기가 많았기에 공화당 진보파의 반란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실제로 1920년 대선 때 공화당 예비선거에서는 하이럼 존슨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전체 1위인 30.3%를 득표하며 그 위력을 보였지만, 1924년 대선의 예비선거에서는 쿨리지가 68.4%를 차지하고 사실상 진보 단독 후보였던 존슨은 28.6%로 무려 40%p차로 쿨리지에게 뒤지는 모습을 보였다.[2]
결국 1924년 6월 클리블랜드 전당대회에서 하이럼 존슨, 로버트 라폴레트 등 주요 진보주의자들이 입찰을 포기한 가운데, 캘빈 쿨리지는 만장일치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캘빈 쿨리지는 당의 좌우 분열을 우려하여 보다 진보적인 인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싶었다. 물망에 오른 것은 중도개혁주의자 허버트 후버 상무장관과 아이오와주 항소판사 윌리엄 캐넌이었지만 둘다 지명을 거부하였다. 쿨리지는 서부 진보파의 거두이자 보스인 윌리엄 보라에게 부통령 후보직을 제안했지만, 보라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은 프랭크 로던 전 일리노이 주지사였으나 로던 역시 후보직을 거부하며 부통령 후보 선정에 난항을 겪었다.
쿨리지는 최종적으로는 허버트 후버를 가장 선호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나마 가장 대중적 호소력이 높고 공화당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인물인 찰스 G. 도스가 부통령의 후보로 결정되었다.
3.2. 민주당
민주당은 상술했다시피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북부와 남부가 원하는 것이 달랐으며 이에 따라 전당대회에서도 분열상이 드러났다. 가장 처음 치고 올라온 후보는 1920년 대선의 프론트러너였던 윌리엄 깁스 매커두 전 재무장관이었다. 매커두는 윌슨의 사위로 당 기득권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철도청장을 지내면서 철도노동자 8시간 노동제 등을 추진하여 노동계가 가장 선호하는 후보였다. 한편 남부 출신으로 남부 대의원에게도 가장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북부 민주당은 매커두를 탐탁지 않아했는데, 그 이유는 매커두가 노골적인 인종주의자였을 뿐더러 같은 이유로 쿠 클럭스 클랜이 매커두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당의 북부파는 매커두를 KKK단의 대변자이자 꼭두각시라고 비난하며 매커두 지명 거부 운동을 벌였다.처음 매커두에 대항한 사람은 오스카 언더우드 앨라배마 상원의원이었으나, 남부가 매커두를 언더우드에 비해 더욱 선호했을 뿐더러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언더우드를 싫어했기 때문에 언더우드의 캠페인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앨 스미스 뉴욕주지사였다. 스미스 주지사는 매커두와 여러모로 대조되었는데, 그는 민주당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흑인에게 동정적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매커두보다 진보적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기업의 역할을 강조해 매커두보다 우파로 간주되었다.
매커두와 앨 스미스는 전당대회 내내 경쟁했다. 주요 화두는 KKK단과 금주법 문제였다. 앨 스미스는 KKK단을 크게 비판하였으며, KKK단은 스미스 지지자들은 남부에서 린칭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KKK단은 매커두가 아닌 그 누구도 선호하지 않았는데 가령 민주당원인 헨리 포드를 "가톨릭 신도에게 차를 선물했다는 이유"로 친흑인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했다. 매커두는 KKK단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지지를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KKK단 비난 강령을 채택해야한다는 앨 스미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아직 민주당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던 고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역시 당의 분열을 우려해 매커두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으로 금주 문제에 있어서 매커두는 금주법을 지지했으나 스미스는 반대했다. 스미스는 금주법이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마피아에게만 이익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뉴욕주의회에서 통과된 추가적인 금주 조치를 모두 반대한 바 있다. 매커두는 자신의 장인인 윌슨이 금주법에 반대한 것과 상관 없이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금주법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앨 스미스를 "알코올에 중독된 난봉꾼"이라고 비판했다. 지지 기반도 극명히 차이났는데, 스미스는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도시 거주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매커두는 남부 농민과 노동계, 백인 하류층, 농촌에서 지지를 더 많이 받았다. 훗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웬델 윌키는 스미스를 지지한 뉴욕 대의원이었으며, 그와 1940년 대선에서 맞붙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욕 대의원의 일부로 스미스를 지지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3][4]
그러나 스미스와 매커두 모두 지명될 수 없었다. 당시 민주당은 2/3 대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룰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미스와 매커두의 세력이 1:1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탓에 두명 모두 계속 2/3 동의를 얻는데 실패했다. 그렇게 101번이나 재투표를 했는데도 매커두와 스미스는 모두 대통령 후보 지명에 실패했다. 현재까지 이는 미국 대통령, 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데 가장 많은 재투표가 시행된 기록이며 앞으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결국 103차 투표에서 스미스와 매커두는 타협을 보아 모두가 대통령 후보가 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건 남부와 북부 사이 중간에 있는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하원의원이자 외교관인 존 W. 데이비스였다. 존 W. 데이비스는 다소 보수적인 후보였으며, 전국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장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KKK단의 사진은 전국적으로 민주당의 평판을 깎기 충분했으며 103번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듣보잡 대선후보자는 민주당의 지지율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사실상 앨 스미스와 윌리엄 깁스 매커두라는 두 정치 보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을 포기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3. 라폴레트의 진보당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진보와 거리가 먼 후보자를 옹립하자, 진보주의자들은 분개했고 특히 "투쟁가 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저명한 진보주의자 상원의원 로버트 M. 라폴레트는 더욱 분노했다. 라폴레트는 양 후보의 보수성을 비난하며 진보당을 창당해 제3지대 후보로 출마했다.당대 여러 진보적 조직이 라폴레트를 지지했다. 전미 최대 노조인 전미노동연맹(AFL)을 비롯해 여러 노동조합이 라폴레트 지지를 선언했으며, 유진 V. 데브스 사회당 서기장도 그의 노선에 동감하며 미국 사회당이 라폴레트를 지지하였다. NAACP의 리더 W. E. B. 두보이스는 라폴레트의 흑인 민권에 대한 정책에 호감을 표했고, 대선에서 라폴레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로 했다. 1912년 이래 주요 흑인 조직이 공화당을 지지하지 않은 2번째 대선이었다.[5]
라폴레트의 정책은 경제적, 사회적 진보주의였다. 그는 금주법에 반대했으며, 노동조합의 권익 향상을 지지했고, 아동노동 불법화, 철도와 전기의 국영화, 농민을 위한 저금리 대출 등을 주장했다. 외교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전주의를 주장했는데, 윌슨의 1차대전 참전을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또다시 큰 전쟁에 참전할 때는 국민투표를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흑인 민권에 있어서도 가장 진보적이었는데, 그는 세 후보 중 유일하게 KKK단을 비난했다.
4. 선거 진행
5. 선거 결과
<rowcolor=#000>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대통령 후보 | 득표수 | 비고 | |
부통령 후보 | 득표율 | ||
정당 | 선거인단 | 당락 | |
캘빈 쿨리지 (Calvin Coolidge) | 15,723,789 | 1위 | |
찰스 G. 도스 (Charles G. Dawes) | 54.04% | ||
| 382명 | 당선 | |
존 W. 데이비스 (John W. Davis) | 8,386,242 | 2위 | |
찰스 W. 브라이언 (Charles W. Bryan) | 28.82% | ||
| 136명 | 낙선 | |
로버트 M. 라폴레트 (Robert M. La Follette) | 4,831,706 | 3위 | |
버튼 K. 휠러 (Burton K. Wheeler) | 16.61% | ||
| 13명 | 낙선 | |
- | 그 외 후보 | 155,370 | 낙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0.53% | ||
계 | 총 투표수 | 29,097,107 | 유지 |
전국 득표 | 선거인단 | ||||
쿨리지 | 데이비스 | 라폴레트 | 쿨리지 | 데이비스 | 라폴레트 |
<rowcolor=#000,#fff> 54.04% | 28.82% | 16.61% | 71.94% | 25.61% | 2.45% |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공화-민주 맞대결이어도 양호한 경제 상황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쿨리지-도스 티켓에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민주당이 보수 성향의 지명도 낮은 후보를 내고 이에 반발하여 진보파가 독자 후보를 내는 상황이 되면서 결국 쿨리지 대통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1952년 대선 이전까지 공화당 후보가 매사추세츠와 로드아일랜드에서 승리한 마지막 대선이다.
민주당 데이비스 후보가 기록한 28.8% 득표율은 역대 민주당 후보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인데 남북 전쟁 직전에 치른 1860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스티븐 A. 더글러스보다도 낮은 수치다. 당시 더글러스가 남부민주당의 독자 출마로 상당한 손해를 본 점을 고려하면 데이비스의 기록은 안 좋은 방향으로 독보적이다.
다만 양당 후보 득표수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투표권 부여에도 불구하고 4년전 대선 대비 오히려 줄었는데(공화당 하딩→쿨리지 -425,000 / 민주당 콕스→데이비스 -750,000), 제3당 후보인 라폴레트가 무려 17%를 득표하는 기염을 토한 영향이다.
6. 관련 문서
[1] 전 민주당 대선후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남동생이다.[2] 이 당시의 예비선거는 당원의 후보 선호도를 파악하는 것 이외에는 큰 기능이 없었다.[3] "정치적 전장의 행복한 전사"라는 연설인데, 몇년 전 소아마비를 겪어 루스벨트의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 모두들 생각했지만 루스벨트가 직접 휠체어를 끌고 연단에 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4] 1940년 대선 때, 양 후보로부터 동시에 지지를 받은 특이한 경력을 가지게 된 앨 스미스는 루스벨트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윌키를 지지했다.[5] 1912년 대선 때 NAACP는 우드로 윌슨의 경제적 진보주의를 지지하면서 윌슨을 대선 후보로 지지했다. 하지만 1913년 취임 직후 윌슨이 인종주의적 정책을 추진하자 1916년에는 공화당 휴스를, 1920년에는 공화당 하딩을 지지했다. 이후 두보이스와 NAACP는 1928년에도 양비론을 주장하며 사회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와 별개로 흑인들은 70% 이상 공화당을 지지했기에, NAACP의 지지 선언은 일정 이상의 효과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