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8:30:16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의 주요선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종류지난 선거다음 선거
대통령 선거2020년
2020년 11월 3일
2024년
2024년 11월 5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중간선거2022년
2022년 11월 8일
2026년
2026년 11월 3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상원의원 선거118대
2022년 11월 8일
119대
2024년 11월 5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하원의원 선거118대
2022년 11월 8일
119대
2024년 11월 5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주지사 선거2023년
2023년 11월 7일
2024년
2024년 11월 5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9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png
{{{#!wiki style="margin: -16px -11px; letter-spacing: -0.5px"브라이언 176인 (39.4%) (60.6%) 271인 매킨리}}}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7px -11px"<rowcolor=#000,#fff> 1892년 11월 8일
1892 대선
1896년 11월 3일
1896 대선
1900년 11월 6일
1900 대선
}}}
<colbgcolor=#f0f0f0><colcolor=#0d164a> 선거 일시 11월 3일
투표율 79.3%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부통령 개릿 A. 호바트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윌리엄 J. 브라이언
부통령 아서 슈월
선거인단
271명 176명
전국 득표
51.0%
7,112,138표
46.7%
6,510,807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1896년 미국 대선.jpg
공화당
{{{#!wiki style="margin: -5px -10px"
}}} ||
1. 개요2. 배경
2.1. 1893년 공황과 금본위제 문제
3. 후보
3.1. 공화당3.2. 민주당3.3. 기타 정당
4. 본선
4.1. 윌리엄 J. 브라이언의 높은 인기4.2. 마크 한나와 공화당의 대응4.3. 브라이언 지지층의 분열4.4. 선거전 후반부
5. 결과6. 분석
6.1. 유권자 재정렬: 제4정당제의 시작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896년에 치러진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미국 역사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대선 중 하나인데, 미국의 주류 정치학계에서는 1896년 대선을 시작으로 제4정당제가 시작됐다고 보며, 이후 대공황이 터진 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당선되는 1932년까지 이 체제가 유지된다.

2. 배경

2.1. 1893년 공황과 금본위제 문제

사실 세계적으로는 1867년을 시작으로 이미 금본위제가 점차 정착하고 있었고, 미국 역시 1873년 주화법(Coinage Act of 1873)이 제정되면서 금본위제를 공식화하는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금화 유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1]에서의 금본위제 도입은 경제적 양극화를 가속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고 노동자, 농민, 소지주와 같은 서민층은 은화 제도의 유지(복본위제)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시절인 1890년 이를 절충하기 위해 공화당 주도로 의회에서 셔먼 은 구입법(Sherman Silver Purchase Act)을 제정하면서 연방 정부의 은 비축을 의무화하는 등 이들을 달래기 위한 조처를 나섰으나, 오히려 은의 가치가 이로 인해 폭락할 수 있다는 염려[2]만 키우면서 금 유출과 금리 인상이 가속화시키고 경제 침체를 일으켰다.

이에 반대하며 대통령으로 돌아온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1893년 셔먼 은 구입법을 전격 폐기했지만, 오히려 섣부른 폐지로 금 수요를 걷잡을 수 없이 폭증시켜 기업과 은행이 연쇄 파산하고 실업률이 치솟는 1893년 공황을 일으킨다. 클리블랜드 행정부는 이런 와중에 불황을 해결하지는 못한채 노동자들의 폭력적인 파업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를 강경 진압 일변도로 해결하려다 일을 더 키웠다.

결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중간선거에서 참패한채 2기 임기를 처참하게 마무리했고, 사실상 3선 도전에 나설수 없게된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최고 관심은 1893년 공황의 해결 방법과 금본위제 문제에 대한 양당의 입장에 쏠려 있었다.

3. 후보

3.1. 공화당

1893년 공황과 클리블랜드 행정부의 지지율 추락으로 1894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권교체의 호기를 잡게되었다. 당시 공화당의 프런트러너는 누가 뭐라해도 명실상부하게 전 오하이오 주지사였던 윌리엄 매킨리였다. 매킨리는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자유무역 기조에 반대하며 보호무역을 주창하며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에는 매킨리의 친우이자 오하이오의 연방 상원 의원을 재임하고 있던 마크 한나(Mark Hanna)의 도움이 컸다.

원래 한나는 매킨리가 아니라 존 셔먼(John Sherman)[3]킹메이커 역할을 하려고 고군분투했지만, 이미 노쇠한 존 셔먼이 1888년 이후 대통령의 꿈을 접은 후 방황하다가 이후 매킨리를 만나게 되고, 매킨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하게 된다. 매킨리가 큰 그림을 짜고 직접 후보로 나서는 대신 한나는 매킨리를 대신해 직접 북부 공화당의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배후 공작에 나섰다.

특히 한나는 본인이 사업가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선거 자금을 확보하는 능력이 탁월했고 그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거의 미국 전역에 매킨리의 선거 포스터, 연설문 사본, 캠페인 배지와 버튼을 뿌리면서 매킨리를 알렸다. 도이에 자신과의 협상에 응하지 않는 공화당 지도자들에 대해선 그들이 자기 선거에 집중하도록 살짝 방해공작을 가하거나, 그들의 도움을 받는 계파 정치인들을 뒤에서 후원하고 협상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매킨리의 캠페인을 막지 못하도록 뒷공작을 펼치기도 했다.[4] 이덕분에 한나의 예비후보 캠페인 방식은 최초의 현대적 예비후보 캠페인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덕분에 6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매킨리는 1차 투표에서 가볍게 압승을 거두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 자리에서 매킨리와 한나는 금본위제를 당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는데, 이에 반발한 중서부 농촌주 출신 공화당원들이 전당대회에서 퇴장하자 이들을 보고 나가라며 비아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다독이기 위해 부통령 후보로는 금본위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레비 P. 모튼(Levi P. Morton)을 대신해 뉴저지 주상원의원을 역임한바 있고, 복본위제에도 비교적 우호적인 개릿 A. 호바트를 지원해 당의 지명을 받게 했다. 마크 한나는 전당대회 직후 RNC 의장으로 선임되면서 본선 캠페인을 총괄하게 되었다.

3.2. 민주당

공화당이 윌리엄 매킨리 전 오하이오 주지사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면서 금본위제를 강령으로 확정짓자, 이에 분노한 대중들은 민주당 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대중들의 무기로 선택을 받은건 바로 윌리엄 J. 브라이언 전 연방 하원의원이었다. 물론 후보 지명으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는데 현직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비롯한 버번 민주당이 그들 앞에 강력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

브라이언은 18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고 버번 민주당이 당내 주도권을 잃은 이후, 전국 순회 연설을 다니며 '은의 자유'(Free silver), 즉 은화의 무제한적인 주조를 통해 1893년 불황을 탈출하고 서민들을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중들의 인기를 끌어모았다. 금본위제 시대를 넘어서 변동환율제 시대로 넘어온 현대에는 브라이언의 이런 주장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긴 하지만, 경제 세계화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당시의 미국 대중 입장에서는 아예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연히 은화의 무제한 주조를 허용하게 될 경우, 시중에 있는 돈의 양이 불어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만 반대로 농민과 노동자가 지고 있었던 어마어마한 빚 가치도 줄어들어서 오히려 빈민 노동자층에게 유리하고 부유층에게는 불리하게 될 수 있기 때문.[5] 브라이언은 이를 바탕으로 금-은 복본위제로의 회귀를 주장했고, 북부의 노동자들을 비롯해 남부와 서부의 농부들과 광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트러스트의 지원을 받고 있던 언론들의 냉소를 사긴 했지만, 당시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남부 농민들 사이에서 브라이언의 인기가 끝없이 치솟았고, 1895년 3월 드디어 35세가 되면서 대통령 후보 자격을 갖추게 된 브라이언은 민주당의 다크 호스로 떠오르게 되었다.

물론 이에 금본위제 유지를 주장하던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버번 민주당은 경악했고, 브라이언의 차기 대통령 후보 지명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경제 공황에 대한 책임으로 지위가 전같지 않았던지라 7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5차 투표 끝에 브라이언이 대통령 후보로 깜짝 지명을 받는 건 막지 못했다.[6]

특히 여기는 전당대회 3일차에 있었던 금 십자가 연설(Cross of Gold speech)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35분간의 이 연설에서 브라이언은 "당신들은 노동자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 없습니다! 인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라는 감동적인 어구를 남기며[7] 전당대회에 참여한 선거인단들을 휘감았다. 이덕분에 4차 투표부터 같은 복본위제 주의자였던 리처드 P. 블랜드(Richard P. Bland)를 누르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

부통령 후보로도 브라이언과 같은 복본위제주의자였던 아서 슈월이 지명되자 버번 민주당은 격분해 전당대회에서 퇴장한 뒤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을 창당하고 일리노이의 연방 상원의원 존 M. 파머(John M. Palmer)를 독자 후보로 내세우기로 했다. 팔머는 특히 '은의 자유'에 반대했는데 무제한 은화 주조가 허용될 경우 당시 은과 금의 세계 시장 가치(약 32:1)에 크게 어긋나 부작용이 클것이라고 지적했다.

3.3. 기타 정당

1892년과 1894년 선거에서 복본위제와 농본주의, 협동조합주의혁신주의를 내세우 농민층을 규합해 선전한 바 있는 인민당은 이번 대선에서는 독자 후보를 내지 않고 민주당의 윌리엄 J. 브라이언을 당의 후보로 공식 지명하면서 사실상의 단일화를 이뤘다. 다만, 독자정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부통령 후보로는 아서 슈월이 아니라 토마스 E. 왓슨이라는 별도 후보를 냈다.

마찬가지로 복본위제, 은의 자유를 주창하는 단일쟁점정당 은당(Silver Party) 역시 별도 후보를 내지 않고 민주당의 윌리엄 J. 브라이언과 아서 슈월 티켓을 지지하기로 했다.

4. 본선

4.1. 윌리엄 J. 브라이언의 높은 인기

매킨리를 후보로 선출하고 야심차게 정권교체 작업에 나선 공화당이었지만, 선거 상황은 2년전인 1894년 중간선거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비주류였던 윌리엄 J. 브라이언이 깜짝 선출된 것.

브라이언은 금본위제 문제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세우며 금-은 복본위제, 은화의 무제한 주조를 공식 공약으로 내세워 대중들의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실제로 브라이언의 유세 현장에는 매킨리의 유세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지지자들이 나타나 환호하며 매킨리 진영에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특히 브라이언은 기존 민주당 우세의 남부는 물론이고, 인민당과의 연대로 농민 비중이 높은 서부와 중서부에서도 지지율을 한껏 끌어올렸다.

4.2. 마크 한나와 공화당의 대응

이를 지켜보던 마크 한나 RNC 의장은 캠페인 전략을 다시 세우는데, 원래 보호무역 문제를 선거운동 중심에 세우려던 전략을 바꿔 금본위제를 우선하고 우선 북동부 중심의 자본가와 기업가들에게 접근했다.

브라이언 공약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매킨리에게 지원해주지 않으면 브라이언이 승리하고 경제 위기가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물론 한나가 이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기업가와 자본가들은 이를 알고 있었고, 거액의 선거 자금을 공화당 진영에 제공했다.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자본가들조차도 이번에는 공화당에 선거자금을 제공했다.[8]

한나는 은행가 찰스 G. 도스를 시카고 선거 캠프에 기용해 이렇게 지원받은 350만 달러 규모의 자금들을 접전지에 적극적으로 들이부었다. 반면 브라이언과 민주당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선거 자금을 모금하는데 어려움을 크게 겪었고, 그나마 은 채굴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광산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공화당의 1/7 규모인 50만 달러 정도를 모으는데 그쳤다.

이 자금력 차이로 인해 브라이언은 잠재적 지지자들을 투표에 동원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사이 매킨리 진영은 더 자주 집회와 연설을 열면서 '은의 자유'의 문제점을 강조하고 도잇에 브라이언 진영에 대한 네거티브를 가할 수 있었다.

4.3. 브라이언 지지층의 분열

브라이언 진영이 농민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지지층 중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도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는 캠페인이 후반부로 갈수록 영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대표적으로 “도시를 불태우더라도 농장을 남겨두면 도시는 마술처럼 다시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농장을 파괴하면 이 나라의 모든 도시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랄 것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도시와 농촌 연설이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금-은 복본위제와 은의 자유 정책이 필수적으로 가져올 인플레이션이었는데, 주요 노동조합들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도시 생활비 폭증을 우려해 브라이언 지지를 꺼리는 상황에서 공화당 지지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은 언론의 강력한 복본위제 반대 논조를 펼쳤고, 매킨리 캠프는 특히 그 중 약한 고리인 철도 및 공장 근로자들을 파고들어 브라이언 지지층을 크게 분열시켰다.

4.4. 선거전 후반부

선거전 후반부에 들어 남부와 산악 지대에서의 브라이언 우세, 동부 지역에서의 매킨리 우세가 확정적인 상황에서 승부처는 중서부가 되었다.

당시의 주별 선거인단 구도 상 이미 동부를 잃은 브라이언은 중서부의 지지까지 잃을 경우 결코 대선에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브라이언과 민주당 선거캠프는 중서부에서 철도를 이용한 직접 유세에 나섰다. 이 정도로 일반 대중에게 직접 다가선 대선 후보는 1860년 대선스티븐 A. 더글러스 후보 이후 36년만에 브라이언이 처음이었다. 18,000마일을 철도를 통해 이동하면서 퍼레이드와 밴드 음악까지 동원하여 철도를 통해 무려 두달만에 500번이 넘는 대중 연설회를 열었고 수백만명을 동원하며 히트를 쳤다.

공화당은 압도적인 자금력과 언론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를 역으로 이용했는데, 매킨리는 대중유세에 나서기보다 오하이오주 자택에서 소위 '현관 유세'를 진행하며 마크 한나가 동원한 50만명 정도의 유권자들을 상대로 철저하게 기획된 유세를 펼쳤다. 덕분에 브라이언 진영에 비해 훨씬 정제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메시지가 전파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고, 언론에서는 이런 매킨리 진영과 브라이언 진영을 대조하면서 매킨리 쪽을 추켜세웠다.

특히 선거전이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같은 메시지만 전달하는 브라이언 진영이 이전과 같은 대중적 열광을 이끌어내지 못한데 비해 매킨리는 더 많은 선거 전문가들을 동원해 세련하고 다양한 메시지로 브라이언 진영을 과격파로 몰고갔으며, 이 와중에 1893년 불황이 서서히 마무리될 기미를 보이자 대중들 역시 브라이언의 과격한 메시지에서 매킨리의 보수적 경제 정책쪽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이와중에 브라이언 진영이 또 하나의 실책을 벌이는데,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등 소위 어퍼 사우스(Upper South)와 서부 유세에 집중하자는 제안을 브라이언이 걷어차고 본인이 사실상 승리할 가능성이 없는 북동부 지역 유세에 나선 것. 물론 이상주의적 시선에서야 통합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라도 좋은 행보지만, 이미 승부처가 정해진 선거전 종반부에 선택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5. 결과

<rowcolor=#000>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득표수 비고
부통령 후보 득표율
정당 선거인단 당락
파일:F4527307-6210-4C4F-BF18-51E4D94F8A0E.png 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
7,111,607 1위
개릿 A. 호바트
(Garret A. Hobart)
51.03%


271인 당선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윌리엄 J. 브라이언
(William J. Bryan)
6,509,052 2위
아서 슈월 | 토마스 E. 왓슨
(Arthur Sewall) | (Thomas E. Watson)
46.70%


|
176인 낙선
- 그 외 후보 316,298 낙선
- 2.27%
총 투표수 13,936,957


탈환
전국투표 선거인단
브라이언 매킨리 브라이언 매킨리
<rowcolor=#000,#fff> 46.70% 51.03% 39.37% 60.63%

매킨리가 동부와 북동부의 든든한 지지를 바탕으로 결국 승리를 거두고 공화당이 4년만에 다시 정권을 탈환했다. 다만 남부, 서부, 중서부에서 큰 지지를 얻은 브라이언과 민주당 덕분에 득표율 격차는 4.33%p 수준으로 예상보다 적었다. 물론 이것도 결코 적은 격차는 아닌 것이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재선에 성공한 1872년 대선 이후 24년만에 가장 큰 격차다.

선거인단 차이는 득표율 차이보다 다소 벌어졌는데, 선거인단이 많이 배정된 북동부 뉴욕,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에서 모두 매킨리가 승리한 덕이었다. 브라이언이 기존 공화당 우세주였던 중서부 농업주와 서부 산악주들을 싹쓸이하면서 추격했지만 오히려 웨스트버지니아켄터키까지 추가로 공화당에 내주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인민당과 민주당의 연대 이후 사실상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 대결이 되면서 양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는데, 특히 민주당 내에서 브라이언에 반대하며 독자 후보를 낸 국민민주당은 단 0.97%만 득표하며 그야말로 참패했다. 그나마 켄터키에서 1.17%를 득표하며 민주당의 표를 갈라먹어 공화당의 매킨리가 0.07%p 차 신승을 거두는데 기여하며 민주당에게 엿을 먹인 정도가 유일한 성과. 참고로 이게 공화당의 창당 이후 첫 켄터키주 대선 승리다.

6. 분석

6.1. 유권자 재정렬: 제4정당제의 시작

1896년 대선을 기점으로 이전과 달리 공화당과 민주당 두 정당과 지지층의 성격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노예제와 인종 문제, 남북전쟁의 후속 처리에서 입장 차이가 있었을뿐 경제·사회적 입장, 문화적 입장에서 두 정당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브라이언의 등장으로 민주당이 인민당을 흡수하고 농민·노동자 계층을 핵심 유권자로 포섭하면서 진보·혁신적 성향을 띄게 되는 대신, 반대로 공화당은 대도시·부유층의 지지를 받는 자유방임주의, 보수주의적인 제국주의 정당으로 탈바꿈한다.

지역적으로봐도 산업적 기반이 강한 뉴욕 등 북동부 주의 공화당 지지세가 매우 굳어지는대신 농민, 광산 노동자들이 많은 중서부와 남부에서의 민주당 우세 역시 굳어진다. 물론 이로 인해 인구 구조와 선거인단 제도 상 문제로[9] 제3정당제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선에서 공화당의 우세가 이어졌다.

물론 브라이언 한 명만의 역할은 아니고 남북전쟁 세대의 노쇠화와 경제적 재분배를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이민의 증가로 생겨난 새로운 이민자 유권자 블록의 등장 등이 도화선이 되었고 브라이언은 여기에 불씨를 던진 것이다. 이런 체제는 대공황이 터진 이후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당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부상할 때까지 이어진다.

7. 관련 문서


[1] 1850년대 골드 러시로 금 유통량이 많이 증가하면스 금화 역시 숨통을 트이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부유층 및 거대 사업체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지방 농민과 도시 소시민 같은 서민층에게는 소액권 역할을 맡게 된 은화의 가치가 매우 중요했다.[2] 정부가 은의 가치를 일정 이상 담보하는 역할을 맡게 되니, 이틈에 은화 내지 은을 금화나 금 그 자체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역설적으로 은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3] 셔먼 독점 금지법, 셔먼 은 구입법 등 입법을 주도한 정치인이다.[4] 이런 마크 한나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매킨리는 후일 한나의 마리오네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5]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채권자의 부와 소득이 채무자에게 이전되는 효과가 나타난다.[6] 36세때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역대 최연소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7] 사실 이때 처음 쓴 문구는 아니었고 1894년 의회 연설때부터 브라이언이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의회 내 정치가 지금처럼 대중에게 낱낱이 공개되고, 대중이 쉽게 정치에 접근할 수 있고 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전당대회에 와서야 이 연설을 처음 접하게 되고 환호한 것.[8]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민주당의 지난 대선 후보는 금본위제와 자유무역을 강조하던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보호무역을 주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복본위제주의자들에게 온화적이었던 당시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 전 대통령보다는 구미에 맞는 후보였다.[9] 인구가 많은 북동부 주들이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