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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 |
출생 | <colcolor=#000000>1860년 3월 19일 |
미국 일리노이주 세일럼 | |
사망 | 1925년 7월 26일 (향년 65세) |
미국 테네시주 데이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정치인 |
재임기간 | 제41대 국무장관 |
1913년 3월 5일 ~ 1915년 6월 9일 | |
서명 | |
정당 | |
학력 | 일리노이 칼리지[학사] 노스웨스턴 대학교 로스쿨[석사] |
약력 | 네브래스카주 제1구 하원의원,(1891-1895), 미국 제 41대 국무장관,(1913-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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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신들은 노동자의 이마에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 없습니다! 인류를 금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
제41대 국무장관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 다만 후술하듯이 국무장관을 지낸것보다 대선 후보로 여러 번 나온 것으로 더 유명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세 번이나 낙선한 인물.[3][4][5] 그러나 당대 미국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공이 있는 인물로 미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권익에 신경쓰면서 혁신적인 공약과 정책을 내걸었다.
당시 브라이언이 주장한 독과점 기업 규제와 노동자 권익 보호, 여성 참정권의 보장을 통한 완전한 보통선거, 1일 8시간 근무제도 도입, 소비자보호법, 상원의원 직선제, 중앙은행의 설립 등은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 치하에서 법제화되었고, 마저 도입되지 못한 법안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에서 시행되었기에 대통령만 되지 못했지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미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치인인 셈.
사실 브라이언 이전만 해도 미국 민주당은 인종차별적인 당원들이 당당하게 활동해서 미국 남부지역에서 흑인들의 투표권을 제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는데[6], 브라이언의 민주당은 인민당과의 연합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많은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굴했으며 인종간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이후 민주당이 20세기 들어 진보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도 평가되기에 단순히 정치인 정도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비중이 제법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일리노이주 세일럼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장로회 교인이 되어 14살의 나이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후일 브라이언은 세례를 받은 날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고 회상했다.일리노이 칼리지에서 졸업하고 Union Law College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된 그는 잭슨 민주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890년 네브래스카에서 하원의원이 된 것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890년과 1892년 네브래스카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기업가와 부유층의 횡포에 맞서 서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89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존 멜른 터스튼에게 패배하며 야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 순회연설을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유명세를 쌓았고, 이러한 것들이 인정받아 1896년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이때 나이 36세로 현재까지도 양당 통틀어서 역사상 최연소 대선후보이다.[7]
이 때 당시 전당대회에서 금본위제를 반대하며 했던 연설이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남아있다.[8]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당시 언론들이 트러스트들에 장악되어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어찌됐건 높은 관세와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에 맞서 저관세와 은화 자유 제조를 주장했지만 브라이언의 공약들은 대부분 부유층에 불리했기에 그들은 매킨리에게 엄청난 선거지원금을 퍼부었고 결국 매킨리가 승리하게 되었다.
2.1. 1896년 대통령 선거
1896년 대선, 득표 710만(51%) 대 649만(47%)로 매킨리의 승리. 선거인단은 271:176.
당만 바꾸면 2020년대 미국 정치 지형도와 비슷하다.[9]
브라이언은 중서부와 남부를 석권했지만,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라 미국 인민당(포퓰리스트 당) 등과의 제휴에 따른 중부 권역 압승(46명)은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되려 웨스트버지니아와 켄터키(18명)를 잃었으며, 선거에서 더 이기려면 결국 뉴욕주를 이겨야 했다. 물론 캘리포니아(2천표, 0.64%)와 켄터키(277표(!), 0.06%)에선 초박빙이었으며, 인디애나(15명)와 오리건(4명)에서도 2%대의 박빙 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북부의 뉴욕 등에서는 압도적인 공화당 몰표가 나왔으니, 오하이오의 5% 차 가 최소 격차였고 북부 대부분이 두 자리수 이상의 % 차이가 났다.
북부 버몬트는 무려 80%, 매사추세츠, 메인 주, 로드아일랜드에서는 각각 69% 공화당 몰표가 나왔고, 남부 미시시피에서는 91% 민주당 몰표. 서부인 콜로라도, 네바다, 몬태나에서도 각각 85%, 81%, 79% 민주당 몰표가 나왔다. 한편 사우스다코타에서는 183표(0.22%) 차로 민주당이 간발의 승리를 거두었다. 인구가 적은 와이오밍에서도 789표(3.7%) 차로 승리. 결국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오하이오에서 5% 이상은 격차를 좁혀야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뉴욕주(36석)에서는 매킨리 57.6% vs 브라이언 38.7%, 펜실베이니아주(32석)에서는 매킨리 61.0% vs 브라이언 36.3%였다. 뉴욕주와 펜실베이니아의 참패 때문에 브라이언은 사실 대선에 당선될 수 없었다.
또한 민주당 내에서 이탈표가 나와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 이른바 금본위 민주당)이 브라이언에 반대하고 나서 0.96%의 득표를 했으며, 금주당도 0.9%의 득표를 벌었다. 캘리포니아와 켄터키에서의 패배는 이런 이탈에 기인한 것이다.
낙선한 그는 미국 대선에 전례없는 미덕을 남겼는데, 바로 패배한 후보가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당선인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관행을 만든 것이다. 선거 승리를 확정지은 윌리엄 매킨리 당선인에게 선거일 이틀 후 "축하드린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미국 국민에게 맡겼고, 그들의 의지가 곧 법이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대선 정국에서 대립과 갈등의 경쟁 구도에 섰던 두 후보가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때 처음 시작한 것. 이후 이 '낙선 승복 메시지'는 대선 때마다 당선자와 낙선자 간 화합의 장 역할을 하며 관례로 자리매김했으나,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낙선자)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당선자)의 승리를 축하하지 않으면서 처음으로 깨지게 되었다.
2.2. 1900년 대통령 선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터지게 되자 시민군을 조직하고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장티푸스로 인해 쿠바에 가지 못했다.그리고 1900년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어 본선에 진출하면서 재선에 도전하는 공화당 소속의 현직 대통령 매킨리와 재대결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공화당과 매킨리를 비난했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제국주의는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주류 사상이었고 대세론을 뒤집지 못한 채 또다시 낙선하였다. 45.5% 득표를 하며 북부의 지지세 일부를 좁히고 켄터키(12명)를 회복하였으나, 인민당과의 제휴가 멀어지는 등 서부에서 되려 큰 격차로 지면서 선거인단 33명을 잃은 탓이 컸다.
2.3. 1908년 대통령 선거
1904년에는 판사 출신인 앨턴 B. 파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 자리를 내주었으나[10], 파커 후보는 본선에서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배해 낙선했다.4년이 흐른 뒤 1908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했고, 절치부심하여 민주당 내 경선에서 승리, 후보로 지명돼 세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공화당 후보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게 패배했다. 이 선거에서는 그동안 자신을 지지해준 미주리주까지 태프트 후보에게 내주고 말았는데, 자신이 출마한 대선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인 43%를 얻으며 쓸쓸히 낙선했다.
2.4. 국무장관 재임
연이은 세 번의 낙선으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접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은 듯했으나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를 지지하며[11] 선거운동을 지원해주었고,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며 마침내 자신이 속한 민주당이 집권하는 정권 교체를 달성했다. 이후 윌슨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국무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정치적으로 재기하는가 했지만, 윌슨이 외교 정책 전반에 폭넓고 세세하게 관여하면서 대외 정책과 외교 협상에서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인도적 의미로 중립을 강력히 주장했지만[12],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루시타니아 호가 침몰하는 등, 반독감정을 자극하는 일이 자꾸 터지면서 이에 대해 중재하려다가 결국 취임 2년여 만인 1915년에 사임하며 물러났다.
2.5. 말년
별다른 실력 발휘 없이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같은 당 소속이라는 사실에 대한 유대감은 있었는지, 이듬해인 1916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한 윌슨 대통령을 지지하며 선거 유세를 도와주었다. 재선에 성공한 윌슨의 2기 행정부가 출범하고 얼마 안 있어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로 하자 자신도 함께하겠다며 백악관에 의사를 전달했지만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거절당했다.이후 여성 참정권 운동에 앞장서는 등 각종 사회 개혁 입법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지병 악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3. 여담
-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 그래서인지 진화론을 믿지 않았으며, 말년인 1925년에 그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에 원고측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그가 참여한 1심에선 승소하였으며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사망. 상기된 진보적 행적과 비교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13], 사실 브라이언 뿐 아니라 초창기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의외로 진보적인 사회관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도 많았다. 사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세속 정치에 대한 관점까지 보수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이는 도덕에 기반한 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의 특성상, 당대 기준으로 '가장 도덕적인 사상'[14]으로 보였던 기독교 근본주의에 끌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대한 입장도 사회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 생물학적 진화론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 것에 가깝다. 진보주의자들 중에서, 진화론이나 기타 자연과학 이론이 나치 독일같은 극우들의 창궐에 기여했다는 논리로 반지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한편 그의 이런 행적으로 인해 스코프스 재판을 연극화한 <신의 법정>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악역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진짜 말년에 연극 하나 찍고 간 셈.
- 그의 빼놓을 수 없는 비판거리이자 민주당의 어두운 그림자는 역시 흑인 인권이었다. 그의 인종관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는 악명높은 짐 크로 시대의 사람이고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남부를 지배하던 민주당의 당수였음에도 인종차별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그의 시대에 남부 인종차별이 완화되기는 커녕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192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쿠 클럭스 클랜 공식 비난 결의 제안에도 반대했다.[15] 다만 그 개인적으로는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 별명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The Great Commoner(위대한 평민)[16], Boy Orator of the Platte(플래트[17]의 꼬마 연설자) 등이 있다.
- 비록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도 미국 내 몇몇 군데에서 꽤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 대학 등.
- 적하 효과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사용은 '정부에는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민주당은 대중을 번영시키는 법을 통해 부유층도 번영시킬 생각이다.'라는 주장이었으며, 어찌보면 적하효과와 동시에 분수 이론이라는 용어 역시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와 막역한 사이였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9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네브래스카 제1구 | | 32,376 (44.49%) | 당선 (1위) | 초선 |
189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3,784 (44.90%) | 재선 | |||
189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네브래스카 | 17 (12.88%) | 낙선 (3위) | ||
189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6,511,495 (46.73%, 176명) | 낙선 (2위) | ||
1900 | 미국 대통령 선거 | 6,358,345 (45.51%, 155명) | ||||
1908 | 미국 대통령 선거 | 6,406,801 (43.05%, 162명) |
[학사] [석사] [3]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유력정당에서 대통령에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다 낙선한 인물은 헨리 클레이와 브라이언이 유일하다. 동시대 사회당의 유진 데브스가 다섯 차례나 출마했다가 낙선한 적도 있지만, 그는 1912년 최대 6%를 득표한 군소후보였다. 참고로 1900년 대선은 브라이언의 두번째 도전이자 뎁스의 첫 출마였는데, 뎁스는 불과 0.63%를 득표했다. 1908년에는 2.83%를 득표하며 표를 갉아먹어 브라이언에게 나름 고춧가루를 뿌렸다.[4] 19세기의 미국 대선 2인자이자 역시 대통령은 못되었지만 미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헨리 클레이 역시 대선에 3번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첫번째 출마인 1824년 대선은 민주공화당의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한 것이었다. 단, 이 당시인 호감 시대가 사실상 민주공화당 일당체제여서 민주공화당 내에 수많은 파벌이 있었고, 4명의 주요 후보자 모두가 대선에 민주공화당 소속으로서 출마했다. 경선 자체가 민주공화당 소속 의원 240명 중 66명만 참가하는 등 불복의 여지가 크기도 했다.[5] 비록 본선 진출은 못했으나 브라이언처럼 민주당 이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면서 여러번 출마한 인물로는 휴버트 험프리도 있다. 험프리는 민주당을 친 흑인•진보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본선에는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단 한 번 진출했지만 1952년, 1972년 2번이나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고 1976년에도 지미 카터에 반대하는 세력이 험프리를 추대하려 시도했다.[6] 이 당시 민주당은 1860년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링컨의 공화당에 반기를 들고 남북전쟁을 일으킨 남부 세력이 주축 중 하나인 정당이었다. 공화당 급진파들을 비난하던 리디머와 부르봉 민주당 등이 대표적이다.[7] 참고로 매킨리는 그보다 17세 많은 53세였다.[8] 개요 첫머리에 적힌 가시면류관, 금 십자가 관련 글귀가 바로 이 연설에서 한 발언이다.[9] 사실 디테일을 조금 보태면, 2020년대 기준 워싱턴 주와 네바다 주, 콜로라도와 뉴멕시코 주는 민주당이 강세고, 노스다코타 주는 공화당이 강세다. 한편 북부의 산업주였던 웨스트버지니아(공화당)와 남부의 큰 주였던 버지니아(민주당)는 여전히 같은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데, 20세기를 거치면서 웨스트버지니아가 낙후되어 처지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 남부와 농민들은 경제적 농본주의를 이유로 민주당을 지지했다면 20세기 후반부터는 문화적 보수주의를 이유로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사실 당대만 해도 북부는 공화당 텃밭 역할이고 남부는 민주당 텃밭 역할이었으며 서부 산악지대가 스윙스테이트 역할을 했는데, 그 해는 민주당이 유난히 서부에서 선전했어도 당선되지 못한 해였다.[10] 앨턴 파커는 본래 브라이언의 지지자였으나 1904년 당시에는 당 지도부와 금본위제주의자들에게 지지받고 있었다. 그에게 맞서서 출마한 것이 당시에 급진진보주의자이자 브라이언의 동맹으로 유명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지만 허스트는 당내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후보로 지명받는데 실패했다.[11] 당시 민주당 선두주자는 태머니홀의 지원을 받는 미주리 출신의 중도•보수파 챔프 클라크 하원의원이었다. 하지만 부패한 태머니홀을 혐오한 브라이언은 진보파에 속해있던 윌슨을 지지하며 그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12] 심지어 그는 영국의 독일 봉쇄조차 반대했다.[13] 심지어 해당 재판의 반대측 피고 변호인이었던 클래런스 대로는 한때 브라이언의 경선 캠프에 참여한 적도 있는 지지자였다. 허나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향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14] 예로부터 미국이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나라였으니만큼, 지금보다도 종교의 영향이 강했던 20세기 초반에는 그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일 법도 했다. 괜히 막스 베버가 개신교적인 도덕관을 차용하여 사회 변화를 논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집필한 게 아니다.[15] 다만 당시 민주당의 주요 기반인 남부 지역을 잃을 수 없었던 것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로 흑인 민권 지지 강령이 도입된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남부가 독자후보를 내세우면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재선이 위협받은 적도 있었다. 또한 쿠 클럭스 클랜 문제의 경우 공화당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 역시 명확한 입장을 내길 거부했고, 그렇다고 대표적인 민주당내 반KKK파였던 오스카 언더우드 상원의원이 친흑인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느정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야한다.[16] 영국에서는 귀족 작위 수여를 거부한 정치인(예를 들어 윌리엄 글래드스턴, 윈스턴 처칠 등)에게 주로 쓰이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정치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17] 그가 살던 네브래스카에 흐르던 강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