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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14388><colcolor=#fff> 제시 루이스 잭슨 1세 Jesse Louis Jackson Sr. | ||
출생 | 1941년 10월 8일 ([age(1941-10-08)]세) |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린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정당 | ||
학력 | 노스캐롤라이나 A&T 주립대학교 (사회학 / B.S.) 시카고 신학대학교 (목회학 / M.div) | |
가족 | 배우자 재클린 브라운 잭슨 아들 제시 잭슨 주니어, 조너선 잭슨 딸 샌티타 잭슨 이외 자녀 3명 | |
종교 | 개신교 (침례회) | |
경력 | Rainbow/PUSH 창립자 겸 초대 회장 1984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198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연방 예비상원의원 (1991~1997 / 워싱턴 D.C.[A])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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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목사, 정치인, 흑인 민권운동가. 1984년과 1988년 민주당의 대통령 예비선거 후보였으며,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미국 예비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마틴 루터 킹의 수제자로 그가 암살당했을 때 바로 옆에 있었던 전설적인 운동가이다.[2] 1970년대 킹의 유훈을 이어 흑인들이 주류 정치권과 재계에 편입되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버락 오바마 역시 잭슨의 도움을 받았을만큼[3] 현대 흑인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흑인 민권 운동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가정부를 비롯한 여러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인 16살에 33세 남자와 속도위반으로 애를 낳았다. 제시 잭슨이 1살일 때 어머니는 지역 우체국 청소부였던 헨리 잭슨과 결혼했고, 제시는 계부의 성을 물려받았다. 불우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미식축구 팀에서 활동했으며 고등학교 학생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이너리그 야구에 영입 제의를 받기도 하고,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으나 미식축구 팀 내의 인종차별에 절망해[4] 선수로서의 꿈을 접었다.대신 신학교에 진학했으며, 1964년 사회학과 학사 학위를 딴 후 신학 장학금을 받고 시카고 신학 대학원의 석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을 받아 흑인 민권운동에 집중하게 되면서 1966년 3과목을 덜 이수한 채로 석사 과정을 중퇴하고, 시카고 지역의 민권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잭슨은 남부로 내려가 SCLC(남부 기독교 목회자 연맹)에서 활동했으며, 마틴 루터 킹의 주목을 받아 그곳에서 주요 간부 직을 지냈다. 마틴 루터 킹이 죽기 얼마 전부터는 시카고에서 빈곤 퇴치 운동을 펼치며 흑인들의 경제적, 구조적 차별과 모순에 집중하는 활동을 벌였는데, 이는 킹의 사후 직전 사회주의적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했을 때 잭슨은 킹의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었고, 잭슨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잭슨은 킹의 품에 안겨 죽었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증언도 있으나[5] 킹과 잭슨의 사이가 매우 가까웠던것 만큼은 확실하다.
2.2. 무지개 연합의 창설
킹의 사후, 그는 랄프 애버내시 등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을 조직해나갔다. 그러나 누가 킹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에 대해 애버내시와 잭슨이 갈등을 빚게 되었다. 애버내시는 보다 남부를 중심으로 한 캠페인을 전개하고자 했던 반면, 잭슨은 북부와 동부, 서부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싶었다. 1971년 랠프 애버내시가 빈곤퇴치 계획(Operation Breadbasket)의 사무실을 시카고(잭슨의 본거지)에서 애틀랜타(애버내시의 본거지)로 옮기라고 명령하자, 잭슨은 이를 거부했고, 애버내시는 그 대응으로 잭슨을 간부 직에서 해임했다.애버내시의 반응은 SCLC 내에서도 심각한 반발을 일으켰다. 알 샤프턴 등 많은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애버내시에 반발해 SCLC를 탈퇴했으며, SCLC 주요 간부진 35명 중 30명이 잭슨 해임에 반발하기 위해 직책을 사퇴하였다. 사실상 이로 인해 랄프 애버내시의 리더십은 끝장이 났으며, 잭슨은 "전통적 민권운동은 끝났다"라고 선언하며 새로운 민권 조직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 결과 잭슨의 구호였던 무지개연합(Rainbow Coalition)은 레인보수/퍼시(Rainbow/Push)라는 조직으로 계승되어 1971년 12월 창립되었다. Push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의 연합(People United to Save Humanity)의 약자이다.
무지개연합이라는 말을 창시한 것은 흑표당의 리더 프레드 햄프턴이었는데, 햄프턴은 잭슨이 무지개연합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극렬 마르크스주의자인 햄프턴이 보기에 자유주의 좌파인 잭슨의 해결책은 너무 온건하고 친기득권적으로 보였기 때문. 아이러니하게도 잭슨은 1969년 시카고에서 열린 바비 실의 재판에 출석해 흑표당을 위한 유리한 증언을 하였으며, 햄프턴은 재판이 열리던 도중 FBI의 압수수색 과정에서의 과잉진압으로 자신의 집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2.3. 민권 운동에 미친 영향
잭슨은 그 이전의 민권운동가들과 달리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킹을 비롯한 주요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반면, 잭슨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부정적이었고 자유주의적 해결책을 중시했다. 즉, 흑인 자본주의(Black Capitalism)을 통한 해결책과 광범위한 보이콧, 캔슬 컬처 등을 이용하여 백인 기득권을 압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백인 민주당 정치가들과 어울리면 흑인을 위한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킹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혐오했던 반면, 제시 잭슨은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 등 민주당의 주요 정치가들과 친교를 맺었을 뿐 아니라 후배 민권운동가들이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 활동을 하도록 장려했다. 존 루이스나 앤드루 영 같은 주요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1970년대 말 민주당에 입당해 의원이나 주지사 등으로 당선되는데에는 잭슨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으며, 버락 오바마도 잭슨의 입김이 없었다면 민주당의 말단 의원 공천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68혁명 당시 미국의 반베트남전쟁 운동을 이끈 톰 헤이든은 68혁명의 종결이 제시 잭슨과 같은 정치가에 의한 급진 시민운동의 온건화 및 제도권 안착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실제로 잭슨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이전에는 흑표당과 같은 극렬 공산주의, 흑백 분리주의, 흑인 우월주의 조직이 흑인 민권운동 계열에서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었으나[6] 닉슨-카터-레이건 시대의 보수화와 맞물려 잭슨 목사의 경제 투쟁 노선으로 인하여 이러한 기조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잭슨 목사의 영향을 받은 현대 흑인 민권운동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분명하게도 미국의 흑인 인권은 1968년 이후 비교할 수 없이 개선되었으며 흑인 중산층 역시 크게 늘어났다. 민주당에서 원내 흑인 코커스(Congressional Black Caucus)가 설립되고 잭슨의 영향을 받은 흑인 정치인들이 어렵지 않게 민주당 고위직에 오르는 등 흑인의 정치적인 영향력도 커졌다. 말할 것도 없이 이전의 폭력 노선에 비해 보이콧, 캔슬컬쳐 등을 이용한 문화적, 비폭력적 투쟁은 흑인 민권운동을 제도권에 안착시키는데에 성공시켰다. 반면 현대에 들어 잭슨식 민권운동이 갖는 한계도 부각되고 있다. 그것이 정말로 흑인의 제도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한지 의문일 뿐더러 보이콧과 캔슬컬쳐의 부작용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2020년대 이후로는 BLM 운동을 통해 이러한 잭슨식 민권운동의 양상도 크게 변화하는 양상이다.[7]
2.4. 두 번의 대통령 도전
2.4.1.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기존 당권파를 대표하던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과, 중도개혁파 게리 하트가 맞붙었는데, 제시 잭슨은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후보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확고한 진보좌파적 의제를 주장했기 때문에[8] 흑인과 백인 진보파의 지지도 일부 확보해 뉴햄프셔 주 프라이머리에서 6%에 달하는 득표를 얻기도 했다.[9] 이 외에도 흑인이 밀집한 뉴욕에서 25%, 펜실베이니아에서 15%, 루이지애나에서 67%에 달하는 유의미한 표를 얻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흑인들은 휴버트 험프리[10]의 수제자인 먼데일을 더욱 지지했으며, 미국 남부 프라이머리에서도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에서 먼데일이 승리했다. 잭슨은 먼데일을 험프리의 발치에도 따라오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먼데일이 승리한 이후에는 마지못해 먼데일을 지지했다. 한편, 잭슨은 선거운동 도중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브루클린을 "하이미타운"(Hymietown)이라 불러 유대인 혐오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4.2.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마이클 두카키스가 중도와 진보를 아우르는 후보로 부상하면서 제시 잭슨 열풍은 다소 가라앉았다. 3월 미시간 프라이머리에서 제시 잭슨이 깜짝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1984년 예비선거 때의 유대인 혐오 논란이 불거지며 에드 카치 뉴욕시장을 비롯한[11] 많은 민주당 정치가들이 제시 잭슨을 지지하지 않으며 잭슨은 북부의 여러 경선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1988년 5월 잭슨은 경선 승리가 불가능함을 직감하고 두카키스를 지지한다. 제시 잭슨은 1988년 예비선거도 패배하긴 했지만, 1984년에 비해 더욱 선전해 전체 민주당 예비선거 득표의 29.3%를 얻고 남부 6개 주를 포함한 11개의 경선에서 승리하였다. 이 기록은 버락 오바마가 꺾기 전까지는 미국 역사상 유색인종이 거둔 가장 큰 대통령 예비선거 승리였다. 여전히 오바마를 빼면 이만큼의 기록을 거둔 사람이 없다.
제시 잭슨은 두카키스의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잭슨과 정반대 성향인 로이드 벤슨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두카키스를 열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전당대회 연설에서 "마이클 듀카키스의 선조는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고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앞 세대가 무슨 배를 타고 왔든 그와 나는 한 배에 함께 타고 있습니다."라는 감동적 연설을 하여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2.5. 이후의 삶
1988년 예비선거 패배 이후에는 다시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레인보우/퍼시 조직을 이끌며 흑인 민권 운동을 계속 이끌었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에는 빌 클린턴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시스터 술자"라는 민권운동가가 "흑인은 흑인끼리 죽이지 말고 차라리 백인을 죽이자"라는 과격한 발언을 하자, 클린턴은 이를 데이비드 듀크의 리버스 버전이라며 비판했고 제시 잭슨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클린턴에게 사과를 요청했다. 클린턴은 제시 잭슨이 너무 극단적인 민권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잭슨 역시 이런 클린턴을 안좋게 봐서 처음에는 그의 제3의 길 노선을 타협적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클린턴의 노력 끝에 두명은 화해하는데 성공했고, 심지어 두명은 사적인 친구 관계로도 발전했다.[12]클린턴 행정부에서 잭슨은 비공식 친선 대사로 활약하며 의외의 외교관 기질을 드러내기도 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도 만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로도 고려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다만 후일 베네수엘라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우고 차베스 장례식장도 다녀와서 한소리 듣기는 했다.
워싱턴 D.C. 시장직 등 여러 공직에 출마해야한다는 제안을 꾸준히 받긴 했지만, 제시 잭슨은 스스로가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계속 출마를 고사했으며 대신 알 샤프턴과 같은 동료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1990년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예비상원의원직에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되긴 했지만 이 자리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6년 후 임기가 만료되자 재선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 다시 시민운동가로 돌아가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2000년과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각각 앨 고어와 존 케리를 지지하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8년 대선에서는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출마를 도와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13]2016년 대선 당시에는 버니 샌더스, 힐러리 클린턴 두명과 사적 친분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2020년에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고, 조 바이든이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자 "비록 조 바이든이 경력 초반에는 흑인 민권운동의 적이었지만, 나는 그가 변했다고 믿는다"라며 바이든 지지를 촉구했다.
2023년 7월, 건강이 악화되어 레인보우/퍼시 회장직에서 은퇴했다. 이로서 제시 잭슨은 평생 몸담아온 흑인 민권운동 분야에서도 물러나게 되었으며, 현재는 민주당과 흑인 민권운동의 원로로서 대우받고 있다.
2024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하마스를 비판했으나, 팔레스타인 학살에 반대하며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 이스라엘 시위에 지지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는 팔레스타인 건과 상관 없이 카멀라 해리스와 팀 월즈에 반드시 투표해야한다고 밝혔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0 | 연방 상원의원 선거 | 워싱턴 D.C. | | 105,633 (46.80%) | 당선 (1위) | 초선[A] |
4. 가족
자녀 6명 중 2명이 하원의원이 되었다. 장남 제시 잭슨 주니어는 어린 나이에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유능함을 보여준 덕택에 일리노이 상원의원이나 부통령 등으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주목을 많이 받은 탓인지 도덕적 결함[15]과 횡령 논란이 불거지며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횡령 건으로 구속되어 2015년 출소했다.차남 조너선 잭슨은 2022년 일리노이 제1구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2024년 또다시 당선되어 현재 재선 의원이다.
5. 어록
킹 목사와 마찬가지로 웅변가로, 여러 명언을 남겼다.Keep hope alive (희망을 계속 살아있게 하라)
1988년 대선 슬로건 中
1988년 대선 슬로건 中
마이클 두카키스의 선조는 유럽에서 이민선을 타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제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타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선조가 무슨 배를 타고 왔던 두카키스와 저는 지금 미국이라는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저는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빈민가는 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국기 색은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색은 빨간색, 노란색, 갈색, 검은색,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무지개색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소중한 아들 딸들입니다.
공통의 토대. 많은 길이 만나는 교차로인 예루살렘을 생각해봅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세 종교의 발상지가 된 작은 도시를 말입니다. 이 도시가 왜 그렇게 축복받았을까요? 그것은 다양한 사람이 만나고, 다양한 문화, 다양한 문명이 만나 공통의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교차로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항상 꽃이 만발합니다. 그곳의 공기는 새로운 봄의 향기로 가득합니다. 이제, 역동적인 대도시인 뉴욕을 생각해봅시다. 무엇이 뉴욕을 특별하게 만들까요? 그것은 자유의 여신상에 세겨져있습니다.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 너의 풍요의 기슭에서 버림받은 가련한 이들을 내게 보내라." 이 말은 영어로 세겨져있지만 꼭 영어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문화들, 많은 언어들: 그것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숨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모세와 예수의 문화로 묶여있지만, 이슬람과 모하메드로도 묶여있습니다. 세 위대한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아브라함 헤셸 랍비와 묶여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우리가 공통의 토대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나누는 피, 함께 나누는 희생에 의해서도 묶여있습니다. 우리는 지적으로, 종교적으로 묶여있으며, 인종 차별, 성차별, 군국주의, 반유대주의에 의해 함께 희생양이 되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인 희생양으로서 서로 분열하기에는 너무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손가락질이 아니라 악수를 해야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해야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야지 서로에 맞서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 위대한 곳을 함께 가야합니다.
양심, 구원, 확장, 치유 그리고 통합의 부름이 있습니다. 정치는 이러한 부름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우리의 사명을 달성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중립적이며, 현실을 저절로 바꾸지 않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용기와 주도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세대도, 자신이 태어난 시대나 환경을 택할 수는 없지만, 정치를 통해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계몽의 시대로, 일자리의 시대로, 평화의 시대로 그리고 정의의 시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6. 여담
- 2018년 민중당 인사들과 접촉해 한반도 평화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후에도 민중당의 후신인 진보당 및 NL 계열의 인사들과 공식, 비공식적으로 교류하고 있으며,[17] 남북 평화 문제에 대해 뜻을 함께 하고 있다.
- 마이클 잭슨과 생전 각별한 사이였으며 아동성추행 재판 때도 마이클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 장례식에서 추도 연설도 했다.
- 민주당 강경좌파의 아버지 격으로 평가받는 인물중 하나이지만, 낙태에 관해서는 친생명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로 대 웨이드가 결정된 날 이 판결을 제2의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라고 주장하며 낙태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의 강력한 반낙태 정책에는 반대를 표했다.
- 브레이킹 배드에서 서브 주인공 제시 핑크맨이 집을 구할 때 아무렇게나 둘러대던 가명이 제시 잭슨이다. 고등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지식 수준도 형편 없는 핑크맨이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인 잭슨을 생각 없이 갖다 붙인 것이지만 워낙 유명한 시민권 운동가이다보니 이 이름을 들은 집주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7. 둘러보기
[A] 표결권이 없는 비공식 예비의원(Shadow senator)으로, 미국의 주가 아닌 지역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는다.[2] 다만 증언에 따라 잭슨이 킹의 암살 당시 어느 정도로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 오바마는 하와이 태생이지만, 잭슨 목사의 정치적 기반인 일리노이 주에서 잭슨의 지원을 받아 주의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4] 대학 팀이 인종 편견 때문에 그가 쿼터백이 될 수 없도록 막았다.[5] 앤드루 영을 비롯한 킹 목사의 보좌관들은 잭슨이 킹의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은 맞지만 킹이 잭슨의 품에 안겨 죽은 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가 사망했을 때 잭슨은 1층으로 내려가있었다고 주장한다.[6] 1968년 여론조사에서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에 반대하고 맬컴 X의 폭력 노선에 찬동하는 흑인이 전체의 20%를 넘었다.[7] 잭슨 본인은 BLM 운동에 지지를 표명했다.[8] 1970년대 진보좌파의 대명사인 조지 맥거번이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상당히 선전했지만, 그 역시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진보적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 출마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기에 경선에서 물러났다.[9] 별거 아닌것처럼 보이지만 뉴햄프셔주는 백인 비율이 90%가 넘어가는 미국 대표 백인주이다.[10] 1948년 민주당의 인종평등 강령 채택을 주도한 인물이었고 이후로도 꾸준히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해서 "노동자와 흑인의 히어로"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흑인으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은 정치가였다.[11] 카치 시장은 잭슨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두고 잭슨을 미치광이라고 비난했는데, 이 때문에 흑인 표가 돌아서면서 1989년 시장선거에서 4선에 실패하게 된다.[12] 정치 성향이 어쨌든 클린턴은 남부 빈민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흑인 문화에 익숙했고 그래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고도 불린다.[13] 당선 축하 유세 현장에 직접 참석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A] [15] 수차례의 불륜 의혹이 일었다.[16] 출처[17] NL 측과 연이 있는 몇 안되는 미국 정치가 중 한명이다. 그 외에는 사회주의와 해방당과 아메리카 공산당이 세계반제플랫폼 소속으로 민중민주당과 교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