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4년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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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슨 패밀리
<colbgcolor=#000><colcolor=#fff> 찰스 맨슨 Charles Mans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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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모습 ▼
본명 | 찰스 마일즈 맨슨 Charles Milles Manson |
이명 | 지저스 크라이스트 찰스 마일즈 매덕스 더 데빌 |
출생 | 1934년 11월 12일 |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 |
사망 | 2017년 11월 19일 (향년 83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스필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57cm[1] | 70kg | O형 |
직업 | 前 음악가 |
배우자 | 로잘리 윌리스 (1955년 ~ 1958년, 이혼) 캔디 스티븐스 (1959년 ~ 1963년, 이혼) |
자녀 | 2명 |
IQ | 109 |
죄목 | 모살, 모살 음모 등 |
형량 | 사형 → 무기징역[2] |
수감처 | 코르코란 캘리포니아 주립교도소 |
종교 | 前 사이언톨로지교[3]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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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범죄자이자, 맨슨 패밀리의 수장. 1950년대~1960년대 히피 문화의 주요 인물이자, 1969년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인 배우 샤론 테이트와 레노 라비앙카 부부를 비롯한 총 7명이 살해당한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사건을 지시한 것으로 유명하다.직접 누군가를 살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4]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마라고 알려진 이례적인 케이스의 인물이다. 당시 맨슨 패밀리에게 희생된 인물이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고, 당시 희생자의 유족이 다름아닌 로만 폴란스키라는 점, 그리고 히피 문화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흐름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2. 생애와 행적
2.1. 출생 및 성장
1934년 11월 12일 오하이오 신시내티 출생으로, 당시 성씨는 매덕스(Maddox)였다. 맨슨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흑인 혈통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인종주의자가 알고 보니 유색인종의 자식이더라' 식의 자극적인 내용 탓에 퍼진 소문일 뿐 별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새아버지인 윌리엄 유진 맨슨(William Eugene Manson, 1909 ~ 1961)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여 맨슨(Manson)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찰스 맨슨은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맨슨의 어머니 캐슬린(Kathleen, 1919 ~ 1973)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었고, 맨슨의 주장에 의하면 창녀였다. 그를 기르던 어머니와 삼촌이 강도질을 벌이다 체포되자 찰스 맨슨은 이모 집에 맡겨졌다. 몇 년 후 출소한 캐슬린은 짧은 기간 동안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맨슨을 기르려 노력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위탁 가정에 맡기려 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했다. 맨슨은 10대 초반 처음으로 술과 담배를 접했고, 얼마 안 가 대마초를 시작으로 각종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찰스 맨슨이 16세였을 때 찍은 사진 |
찰스 맨슨의 결혼사진 |
1958년에 석방된 이후 맨슨은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를 일으키며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 했고, 맨슨 패밀리 사건을 일으키기 전까지 장장 17년을 연방 교도소에서 썩게 된다.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던 그는 교도소 시절 기타를 배워 상당한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교도소 내에서 다른 수감자들에게 성적으로 학대 당했으며, 이후 맨슨 역시도 다른 수감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 결국 그는 복역기간동안 교화되지 못했으며, 1967년 형기를 다 채우고 석방되었다. 출소할 때 자기는 나가도 갈 곳이 없다며 교도소에 더 있게 해달라고 투정을 부렸다고 한다.
출소한 뒤 맨슨은 당시 미국 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히피 문화를 추종하는 그룹과 어울리게 되며 히피의 전반적인 생활상을 학습했고, 얼마 안 가 강한 카리스마로 그들을 휘어잡아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끌어모았다. 이것이 1960년대 후반 미국 전역을 경악에 빠뜨린 맨슨 패밀리의 시작이었다.
2.2. 맨슨 패밀리
체포되기 전의 맨슨 패밀리[5] |
그 후 여느 히피들과 마찬가지로 맨슨 패밀리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살게 되는데, 이때 거처를 제공 받는 대가로 맨슨 패밀리 소속의 여자들을 성적 상대로 제공했다고 한다. 비틀즈를 동경했던 맨슨은 여전히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해 음반을 몇 차례 냈지만 큰 반응은 얻지 못했다. 음반제작 과정에서 비치 보이즈 멤버들과 안면을 트기도 했는데, 당시 멤버들은 그들을 좀 특이한 사람들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세부적으로 설명하자면, 비치 보이스의 멤버이자 윌슨 가의 차남인 데니스 윌슨이 비치 보이스의 중기 즈음 해서 히피 생활을 하던 중에 맨슨을 만나게 되어 그를 레코드 회사에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데니스는 맨슨을 썩 좋게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치 보이스의 조력자인 반 다이크 파크스의 회상에 따르면 몇 번의 협업 이후 다툼이 벌어졌다.[8] 맨슨이 데니스의 가족을 상대로 패드립을 치자[9] 데니스가 맨슨을 개 패듯이 팼고, 이후 맨슨과의 관계는 끝났다고 한다. 맨슨은 계속 데니스에게 집착했지만 데니스 밑에서 일하던 가정부에게 총알을 건네 보여주는 방식으로 거부했고 범행 직후 맨슨의 협박 역시 거절했다.
데니스는 이후 인터뷰에서도 맨슨을 비난했으며[10], 일부 전기 작가들은 데니스가 마약과 술에 빠진 계기가 맨슨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필이면 샤론 테이트의 지인이었던 테리 멜처가 데니스의 지인이기도 했고, 이로 인해 연결고리가 생겼기 때문.
참고로 비치 보이스의 '20/20' 앨범에 실린 'Never Learn Not to Love'라는 곡이 바로 찰스 맨슨의 'Cease to Exist'라는 곡을 고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맨슨 패밀리가 전부 저학력자에 부랑아 같아 보였지만 맨슨 패밀리 구성원 중 메리 브루너는 굉장한 고학력자였는데 위스콘신 대학교/매디슨 캠퍼스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가 교도소에서 갓 석방된 찰스 맨슨을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해준 것을 계기로 맨슨 패밀리가 되었다.
2.3.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사건
자세한 내용은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2.4. 이후
1970년 맨슨 패밀리의 멤버들은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포함한 여러차례의 연쇄살인 혐의로 체포, 기소되었다. 살인을 지시한 찰스 맨슨과 살인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찰리 왓슨, 패트리샤 크렌빈켈, 수전 앳킨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72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형제가 폐지되면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감형되었다. 맨슨 패밀리 멤버들 중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망을 보는 역할을 했던 린다 카사비앙은 살인사건에 대한 증언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사법거래를 받아 기소가 면제되어 풀려났다.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하켄크로이츠 문신[11] |
캘리포니아 주 형법은 복역 후 25년이 지나면 무기수도 가석방 심사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맨슨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살인사건의 횟수가 많고 피해자도 10명이 넘어가며,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끼쳤기 때문에 사실상 주 정부가 그를 가석방시켜줄 확률은 0%에 가까웠다.[12] 2012년 78세의 나이로 신청한 가석방도 실패했고, 다음 가석방 심사는 5년 뒤인 2017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같은 해 11월 19일에 사망하면서 그는 교도소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다.
2012년까지 13번의 가석방을 신청했으며[13] 매번 기각되었다.
맨슨의 지시를 받고 살인에 가담한 패트리샤 크렌빈켈과 찰리 왓슨 역시 여러차례 가석방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는데, 이들의 경우만 봐도 주동자인 자신이 출소해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란 걸 본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가석방 신청은 하되 심사위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휴대폰을 소지하다가 적발 당하기도 했다.[14] 부하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교정 당국의 교화 프로그램에도 제대로 참여 중인 데 반해, 맨슨은 끝내 교화되지 못했으며 교정당국의 어떤 시도에도 비협조적으로 일관했다. 그가 저질렀던 범죄의 잔혹성만이 가석방 거절의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위도식하며 가만히 지낸 것은 아니며, 팬(...)들에게 지원을 받아 교도소 내에서 음반 작업을 하고 책도 출판하는 등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또 다른 논란을 일으켰다. 교도소 재소자가 책을 쓰거나 음반을 만든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15] 단지 범죄와 관련된 서적을 출판했다면 그 수익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돌아가는 식으로 실질적인 이익은 보지 못하게 막을 뿐인데 어차피 교도소 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복역하는 사람들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으니 이런 데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2년 9월 5일, 팬들의 지원에 힘입어 곧 앨범이 발매될 것이란 뉴스가 나왔다. 제작비 모금이 진행된 웹사이트에 따르면 27명의 지지자가 미화 4,099달러(2015년 기준으로 약 461만 원)를 기부했으며, 1,000명 가까운 인원이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찍었다고 한다.
애프턴 일레인 버튼과 찰스 맨슨 |
흉악범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껴 구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일은 딱히 드문 현상은 아니다. # 이런 현상을 정신적 증후군으로 정의 내리는 용어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일레인 버튼의 진짜 목적은 맨슨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돈을 노린 것으로 밝혀졌다. 맨슨의 나이를 보아 길어도 5~10년 내에는 교도소에서 병사할 텐데, 그때는 그의 시신이 배우자가 된 버튼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일레인 버튼은 그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전시해서 돈을 벌려는 속셈이 있었다.
실제로 비슷한 선례가 있는데, 살인범이라는 걸 알고 행한 것은 아니고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거라 이 사건과는 다르다. 젊은 여성이 찰스 맨슨과 굳이 결혼까지 하는 이유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의 조사로 결국 들통났고, 이를 알게 된 맨슨은 파혼한 후에 자신이 "불사신"이라며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례는 2015년 3월 20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되었다. 결국 허가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식을 못 올려 결혼이 무산되면서 일레인 버튼의 돈벌이는 수포로 돌아갔는데, 정확히 3년 뒤 맨슨이 죽어 버렸다.
2.5. 사망
샤론 테이트의 자매인 데브라 테이트[16]는 맨슨이 복역한 교도소로부터 그가 현지 시각 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8시 13분에 인근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언론사 TMZ에 전했다. # 로만 폴란스키와도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사인은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였다. 유언은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한다.
3. 음악
맨슨은 음악 활동도 해 왔으며, 그가 만든 노래들은 노래 자체보다는 저작자인 찰스 맨슨의 유명세에 따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맨슨 패밀리를 결성한 이후에도 음악작업을 해왔다. 그가 열성적으로 좋아했던 밴드는 비틀즈, 비치 보이즈, 나인 인치 네일스 등이 있다. 1969년 종신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녹음 작업을 계속했고 수감된 뒤에도 계속 미공개 곡을 발표했다. 그렇게 낸 음반은 총 9장이다.Look At Your Game Girl |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래는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유튜브 등지에 찰스 맨슨의 다른 노래들도 많이 업로드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틀어서 보면 이런 재능을 갖고도 본인의 인성 자체가 바닥까지 썩어 문드러진 나머지, 어리석게도 자신의 삶도 사회에 도움이 될 음악적 재능도 감옥에 묻어 버린 셈.[17]
3.1. 음반
- Lie: The Love and Terror Cult(1970) - 데뷔 음반. 1967년부터 1968년까지 LA에 있는 골든 스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며 이 중 <Cease to exist> 는 그 유명한 비치 보이즈와의 콜라보 곡이다. 맨슨이 살인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는 비치보이즈가 맨슨의 목소리를 제거한 단독 버전을 내놓기도 했다. 음반작업 자체는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끝내놓았지만, 앨범은 맨슨이 수감된 뒤에 발매됐다. 맨슨의 앨범 중 스튜디오의 깔끔한 음향이 녹음된 유일한 앨범인데, 이유는 당연히도 1집 이후 앨범들은 전부 교도소 내에서 테이프 레코더를 가지고 녹음한 것이기 때문이다.
- Poor Old Prisoner Boy(1989) - 2집 정규 앨범으로, 사이드 A와 B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6곡이 들어가있다. 이 때부터는 교도소 안에서 녹음했기 때문에 음질도 조약하고, 교도소 내의 소음까지 다 들린다. 이 중 9번 트랙의 <A tribute to hank willams> 는 행크 윌리엄스를 기리는 곡이다.
- Live at San Quentin(1993) - 3집 정규 앨범으로, 당시 수감되어 있는 샌퀀틴 교도소 독방에서 녹음했다.
- Commemoration(1995) - 찰스 맨슨의 첫번째 베스트 앨범으로, 역대 앨범의 수록곡과 미공개 녹음본이 수록됐다.
- All The Way Alive(2003) - 1967년 녹음한 그의 미발매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All The Way Alive(줄여서 ATWA)는 맨슨 패밀리의 구호이다.
- One Mind(2005) - 4집 정규 앨범이자 맨슨 생전 마지막 정규앨범. 역시 샌퀜틴 교도소 독방에서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했으며 16곡이 수록되어 있다.
- Air(2010) - 1967년 녹음된 미공개 녹음본.
- Trees(2011) - 미공개 녹음본 3번째.
- 1967(2023) - 1967년 9월 11일 녹음된 미공개 곡들을 모은 사후 발매 앨범.
여전히 추종자들이 있는 듯 하다
4. 기타
찰스 맨슨의 1990년도 인터뷰 영상[18] |
기자: 오늘날 당신을 보는 사람들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대답해 줄 수 있나요?
찰스 맨슨: (갑자기 온갖 표정을 지은 후) 아무도 아니야. 난 그 누구도 아니야. 부랑자, 거지, 떠돌이 일꾼, 박스 카[19], 와인 통. 네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면 날카로운 면도칼이 될 수도 있지[원문2].
찰스 맨슨: (갑자기 온갖 표정을 지은 후) 아무도 아니야. 난 그 누구도 아니야. 부랑자, 거지, 떠돌이 일꾼, 박스 카[19], 와인 통. 네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면 날카로운 면도칼이 될 수도 있지[원문2].
- 1990년도에 촬영된 인터뷰 영상이 굉장히 유명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 기자의 물음에 대뜸 온갖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더니 'Im nobody'로 시작하는 섬뜩한 말을 남긴다. 기자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괴랄한 표정을 연달아 지어대는 찰스 맨슨 모습의 임팩트가 상당히 강해서 처음보는 사람은 적잖이 놀랄 수 있다.
-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제작 당시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맨슨 패밀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영화의 중심 내용은 아니다. 작중 찰스 맨슨은 데이먼 헤리먼이 분했는데, 맨슨 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홍보가 무색할 만큼 엑스트라 수준의 분량 이었다.
- 가수 마릴린 맨슨의 이름은 배우 마릴린 먼로와 이 사람에게서 따온 것이다. 마릴린 맨슨의 유명곡 중 하나인 'The Beautiful People'은 전주 부분에 맨슨 패밀리의 일원이었던 찰스 텍스 왓슨(Charles "Tex" Watson)의 발언[21]을 녹음한 것을 음성변조해 집어넣었다. 샘플링을 워낙 심하게 변조해 놔서 얼핏 들으면 사람 말을 녹음한 것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 건즈 앤 로지스는 'The Spaghetti Incident?' 앨범에 히든 트랙으로 이들의 노래를 커버해 물의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댓글엔 액슬 로즈에 대한 욕설이 베스트 댓글에 올라와 있었다. 찰스 맨슨이 그동안 녹음했던 음반은 소규모로 풀리긴 했다. 2009년에 'Manson My Name Is Evil'이란 이름의 DVD를, 2010년에 'Air'란 이름의 앨범을 낸 것 같다. 음악적 재능 자체는 상당한 듯하며, 교도소 내에서 이익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작업을 했던 걸 보면 나름 이 분야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
- 대배우 안젤라 랜스버리가 1971년 화려한 할리우드 생활을 버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아일랜드로 돌아간 이유였다. 하필 딸이 찰스 맨슨이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도 맨슨 패밀리와 엮여있었다.
-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의 가사에 한 번 언급된다.
- 사우스 파크 시즌 2 16화에서도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맨슨이 탈옥하고 나서 정상적으로 사회에 교화된다. 그리고 오히려 맨슨이 스탠 마시에게 교훈을 준다. 이 에피소드는 꽤 오래 전의 에피소드이며, 당시 제작진들은 자유의지주의에 근거하여 맨슨이 사회에 교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 같다. 물론 현실의 맨슨은 죽기 직전까지 추호도 갱생하지 않은 인간 말종이었다.
- 마인드헌터 시즌 2 5화에서 찰스 맨슨에 대한 내용이 다뤄졌다. 배우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나온 그 배우이다.
-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온다. 타락한 목사, 연쇄살인마 커플, 부패 경찰등의 악마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히치하이킹을 하는 주인공을 태워주고 함께 신시내티로 향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감독의 코멘트에 따르면 주인공이 끝까지 악마와 함께한다는 의미였다고.
- 데스 그립스의 데뷔 믹스테잎 "Exmilitary"의 첫 트랙인 'Beware'의 전주로 찰스 맨슨의 인터뷰의 일부가 나온다. 세계 종말을 외치는 익스페리멘탈 힙합 밴드답게 파격적인 첫 인사를 건넨 셈이다.
[1] 본인은 170cm라고 했다.[2] 캘리포니아 주에서 1972년 사형제도가 폐지되어 감형[3] 수감 생활을 하던 시절에 연구한 바 있다. 1961년 7월엔 자신의 종교를 사이언톨로지교로 작성하기도 했다. 이후 석방되자 직접 접촉하기에 이른다.[4] 그래서 죄명이 살인이 아닌 모살, 모살음모이다.[5] 우측 하단에 리넷 프롬의 모습이 보인다.[6] 비슷한 예로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도 LSD를 상시 투약하였다.[7] 위에 언급된 것처럼 맨슨은 어린 시절부터 술과 담배를 했으며 마약도 이미 성년이 되기 전부터 접하고 있었다.[8] 하술할 'Never Learn Not to Love' 녹음 도중 작곡자 명의를 가지고 싸웠다고 한다. 데니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충분한 돈을 줬는데도 더 원했다고 한다.[9] 총알을 꺼내서 니 애들(데니스의 가족)이 안전하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협박했다.[10] 다만 증언대에 서는 건 거부했는데, 어떤 식으로도 얽히기 싫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11] 원래는 X자 모양이었으나 재판 도중에 덧그렸다고 한다.[12] 무기수들의 가석방은 주지사가 직접 서명을 해야 되는데, 흉악범들을 풀어줄 경우 민심이 나빠져 다음 선거에서 지지율이 떨어지기에 주지사들은 흉악범들을 가석방시키는 걸 꺼린다. 특히 90년대 이후 범죄율이 늘어나 정부 차원에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면서 주 정부도 예산을 투입해 교도소를 더 짓더라도 이들의 석방은 막는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교정정책을 운영하고 있다.[13] 찰스 맨슨이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 미국의 형벌 제도는 지나친 장기형이 드물고, 사형과 수십 년 정도를 복역한 뒤 가석방이 가능한 일반적인 무기징역, 다소 긴 유기징역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백 년, 수천 년 등의 장기형이 일반화된 것은 1970년대 이후 엄벌주의 여론에 의한 것이다. 특히 레이건 행정부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에는 일부 주에서 삼진아웃 제도까지 만들어 중범죄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예산을 대폭 늘렸다.[14] 미국 교도소에서는 Write up이라는 벌점 제도를 운영하는데, 이게 많이 쌓이면 가석방 심사에서 불리하게 작용하기에 석방에 대한 기대를 가진 죄수들은 이것을 안 받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 허나 맨슨의 경우 가석방 확률 자체가 희박하기에 규칙 위반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던 것. 애초에 가석방이 거의 불가능한 높은 형량을 받은 죄수들은 잃을 것 하나 없기에 그냥 규칙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15] 연방정부 건물에 폭발물 테러를 행한 혐의로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시어도어 카진스키(유나바머)도 사망할 때까지 교도소에서 여러차례 책을 출간하였다.[16] 1952년생으로 샤론보다 9년 늦게 태어났으며, 2017년 유방암 판정을 받아 투병에 들어갔다.[17] 이 영상의 유튜브 댓글 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어느 세상에서는 찰스 맨슨이 비틀즈 뺨치는 음악인일 것이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평범한 화가로서 먹고 살고 있을 것이다.''이다.[18] 다소 불쾌감이 들 수 있으므로 시청 주의[19] 컨테이너용 화물차. 한국어로는 '유개차'라는 용어로 번역된다.[원문2] Nobody. I am Nobody. I'm a tramp, a bum, a hobo. I'm a boxcar, I'm a jug of wine. And a straight razor if you get too close to me[21] "...swoop down on the town... ...kill everyone that wasn't beautiful(마을을 덮쳐서... (중략)... 아름답지 않은 자는 모조리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