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Nathan Bedford Forre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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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21년 7월 13일 |
| 테네시 채플힐[1] | |
| 사망 | 1877년 10월 29일 (향년 56세) |
| 테네시 멤피스 | |
| 묘소 | 테네시 컬럼비아 |
| 국적 | → → |
| 신체 | 188cm, 82kg |
| 직업 | 군인, 노예상, 정치인 |
| 소속 | (前)아메리카 연합군 육군 쿠 클럭스 클랜 |
| 별명 | 안장의 마법사 |
1. 개요
아메리카 연합국의 군인으로, 기병을 이끌고 남북전쟁에서 활약했다. 쿠 클럭스 클랜의 초대 회장이다. 본래는 노예제 지지자였고 본인도 노예주였으나 말년에는 흑인 차별에 반대하기도 하였다.2. 생애
테네시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1821년 태어났다. 1841년 미시시피주에서 삼촌과 사업을 시작했으나 삼촌이 매틀록 형제들과 시비가 붙어 살해당하자 총으로 매틀록 형제 둘을 죽이고 둘을 칼로 부상을 입혔다.[2] 삼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포레스트는 사업을 키워나가 노예 매매, 부동산 중개, 목화 농장 운영 등으로 미국 남부 최고의 부자 중 하나가 되었다.남북전쟁이 발발하고 고향 테네시주가 연방을 탈퇴하자 막내 동생과 아들을 데리고 남군에 사병으로 입대한다. 테네시 주지사는 병역을 기피하던 대부분의 부자들과 달리 입대한 포레스트에 감명을 받았고, 마침 남군의 열악한 사정을 본 포레스트가 테네시 병사들을 위해 자비로 말과 무기를 사겠다는 제안을 하자 아예 자신의 부대를 만들 수 있도록 포레스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기병 부대원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권한을 부여한다.
포레스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으나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며 남북전쟁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대활약한다. 전투에서의 활약들은 물론이고 북군의 후방을 기습하여 북군 장군들을 포함해 많은 포로들을 잡거나 기반 시설을 파괴해 율리시스 그랜트의 작전에 많은 차질을 빚게 하였다. 그러나 1864년 4월 12일에 흑인 포로들을 반역자로 선포하여 학살한 포트 필로우 사건은 당시에도 크게 비난을 받았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도 포레스트를 악마라고 불렀으며, 북군의 무어 장군과의 전투에서 포레스트가 전사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접했을 때 무어 장군을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포레스트의 기병대라면 아주 이를 갈았다. 기병을 지휘한 것을 감안할 때 신기하게도 잠깐이지만 북부 해군의 함선을 노획해 일종의 해군을 휘하에 두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항복한 북군 병사들(주로 흑인 병사들)이 학살당했다는 논란이 일어난 포트 필로우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부의 패전을 막지는 못하고 로버트 리 장군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포레스트도 항복했다.
저지른 만행이 있었음에도 관대했던 전후 처리로 그는 이후 아칸소주 일대에서 철도를 부설하는 사업을 했고, 앨라바마주에서도 철도 사업을 했으나 말아먹고 테네시주로 돌아가 농장을 운영했다. 이후 1870년대 초 미국과 스페인 간 전운이 고조되자 자신과 남북전쟁 당시 싸웠던 셔먼에게 자신이 참전하여 셔먼을 돕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셔먼도 감사를 표하며 영광이라 답했으나, 전쟁이 나지 않아 불발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도중 남군 출신들의 친목단체 쿠 클럭스 클랜의 초대 회장이 되었고, 이들을 이끌며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포레스트는 쿠 클럭스 클랜 탈퇴나 클랜 해산 등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1877년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 수만 명이 참여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3. KKK의 주구
한 때 "포레스트는 KKK의 극단적인 흑인 혐오 성향, 1870년 연방 대배심에서 KKK가 공식적으로 반국가적 테러 단체로 인정받을 만큼 흑인이나 공화당원들을 향한 린치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KKK를 떠났으며, 포레스트는 이 때 성향이 바뀌어 흑인의 참정권이나 인권을 지지하는 연설[3]을 하기도 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퍼져 있었으나 오늘날 미국의 주류 남북전쟁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정되며, 포레스트의 KKK 활동시기에 대한 "옹호론" 내지 "동정론"들은 결과적으로 전형적인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 전설 만들기, 프로파간다로 분류되는 추세다.애초에 KKK는 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5년 후반부에 벌써 결성이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은 패전한 남부의 인사들이 자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든 장난스러운 "비밀결사"라고는 하지만 이미 결성이 시작된지 몇 달 이내에 과격한 폭력집단화 되었다는 증언들이 바로 위에 언급된 1870년의 의회 조사에서 벌써 확인되기 시작한다. 또, 대체로 해당 조사와 이후 역사가들의 연구 등에 의해 정리가 된 초기 KKK의 근원적인 목표는,
(1) 흑인에게 참정권이 부여되는 것을 막고
(2) 백인에 의한 남부 지배를 재건하고
(3) 재건기 동안 남부에 뻗치는 북부/연방정부의 영향력을 일소한다.
(2) 백인에 의한 남부 지배를 재건하고
(3) 재건기 동안 남부에 뻗치는 북부/연방정부의 영향력을 일소한다.
이 세 가지 정도였다. 따라서 1865년에서 1870년에 이르는 5년 동안이야말로 KKK의 폭력, 테러, 살인 행각이 절정에 달해있던 시기였으며 포레스트가 KKK의 "해산 시도" 및 "탈퇴"를 결정한 1869년 바로 1년 전의 1868년은 그 패악질에 절정에 달하여 유화적인 태도로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연방정부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해이다. "KKK라는 집단이 사교클럽의 일종으로 막 시작되려던 시기에 이러한 테러단체로 돌변할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는 변명은 초대 수장을 고사한 로버트 E. 리에 적용될 여지는 있어도 포레스트가 KKK의 행태에 대해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포레스트는 결성 거의 직후부터 막나가기 시작하여 이후 5년 간 남부 전역에서 수 많은 KKK에 의한 테러행위가 발생하는 내내 그 수장이었다.
심지어 그는 과거 흑인들을 직접 학살한 포트 필로우 학살 등 인종차별적 행보도 보였다.
더구나, 앞서 언급된 1870년도 조사에 중요한 증거와 증언을 제공한 수 많은 군수사관들 및 연방수사관들은 일관되게 포레스트가 KKK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포레스트가 KKK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발을 빼며 심지어 "해산명령"을 내리고자 한 것은 결국, 막판에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자 적당히 손을 털고 모르는 척 하려고 했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흑인 인권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조차도 일개 신문 보도에 불과하며 해당 연설문의 원안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거기에 그 시점은 이미 KKK가 실질적인 목적을 다 이룬 후였다. 흑인들에게서 "노예였던 시절보다도 더 지옥같았다."고 회상되는 남부의 재건기를 거치면서 연방정부는 남부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거나 하는 것을 꺼리며 결국 구체제의 권력층을 그대로 온전시켰고, 그 백인 권력자들은 준노예에 가까운 형태로 다시 해방된 흑인들을 예속시켰으며, 흑인들의 민권은 철저하게 부정되고 참정권의 행사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 되었다.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다 달성한 상태에서 전쟁에서 한 차례 패배했음에도 온전히 권력자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좋든 싫든 적당히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연방정부의 앞에서 뭔 립서비스를 못하겠냐는 말. 기념행사 따위에서 적당히 입바른 소리 해줘봤자 남부 고향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흑인들을 자근자근 밟아가면서 살고 있었으니...
4. 여담
포레스트의 증손자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3세 준장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독일에서 전사했다. 이는 유럽 전선에서 미군 장성의 첫 전사였다.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인 포레스트는 극중에서 이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작중에서도 이 인물의 후손이라는 설정. 그러나 검프 본인은 KKK단을 두건을 쓰고 기사놀이하던 동아리로 알고 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이 인물의 이름을 딴 베드퍼드 포레스트 훈장이 나온다. 당연히 실존하지 않는 훈장으로, 잠깐 등장하지만 극 내 설정에 있어서 꽤 중요한 소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