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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미드


<colbgcolor=#003458><colcolor=#fff> 조지 고든 미드
George Gordon Meade
파일:George_G._Meade_Standing.jpg
출생 1815년 12월 31일
스페인 왕국 카디스
사망 1872년 11월 6일 (향년 56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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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학사)
정당

가족 마가레타 서전트 (결혼: 1840)
슬하 자녀 7명
종교
군인 경력
복무 미합중국 육군
1835년 ~ 1836년
1842년 ~ 1872년
최종계급 육군 소장
주요참전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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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 육군의 장군으로 동부전역 주력군이었던 포토맥군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메릴랜드 주에 소재한 미 육군 정보대인 포트 미드(Fort Meade)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 생애

1815년 12월 31일,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던 무역상의 아들로 스페인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역시 필라델피아의 거상 출신으로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군과 식량을 거래하던 상인이었다.

그야말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미드가 군인이 된 점에 대해 의아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스페인편에 섰다가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1817년 모국인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했을 정도로 집안이 쇠락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원래 법학자를 꿈꾸던 미드는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갔는데, 당시에는 군인 대우가 별로 좋은 편도 아니었고 본인의 원래 꿈도 아니었기 때문에 학업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56명의 동기 중 19등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2차 세미놀 전쟁에 종군해 제3포병연대를 이끌면서 처음 현장 지휘를 맡았고, 명예 중위로 진급했다.[1] 하지만 영 군생활이 안맞았는지 결국 1836년 퇴역해 처남과 함께 철도 사업을 준비했고, 장교 경험을 살려 민간 노선 측량단을 구성해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강 삼각주 지역 등을 측량했다.

하지만 1842년 의회에서 민간인의 측량을 제한하자 중위로 재입대해 대서양과 인접한 해안에서 등대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재커리 테일러 장군과 로버트 패터슨 장군, 윌리엄 패터슨 장군의 참모로 종군해 승리를 이끌었다. 이 성과로 명예 중위를 탈출해 진짜 중위로 진급했고 필라델피아 시로부터 금장검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군생활을 이어나가 1856년에는 대위로 진급했고 오대호의 호수 조사 임무를 맡아 남북전쟁이 발발하는 1861년까지 수행했다.

2.1. 남북전쟁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미드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의 도움을 받아 예비군 제2여단을 이끄는 준장으로 승진했다. 처음에는 워싱턴 D.C. 방위를 위해 동원되었다가 조지 B. 매클레런(George B. McClellan) 산하 포토맥군에 합류해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과 7일 전투에서 활약했다. 미드 본인이 등과 오른팔에 총상을 입는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싸워 앤티텀 전투를 즈음하여서는 제1군단장인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산하의 사단장이 되었다.

앤티텀 전투를 포함한 메릴랜드 전역에서 맹활약한 미드는 이때 군단장 후커의 찬사를 받기도 했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소극적 군지휘에 대한 책임을 물어 포토맥군 총사령관을 매클레런에서 앰브로즈 번사이드(Ambrose Burnside)로 교체한 이후에는 예비군 소장으로 승진해 남군 주력인 북버지니아군이 승리한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거의 유일하게 스톤월 잭슨에게 한방 먹이기도 하였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포토맥군 총사령관이 번사이드에서 후커로 교체되었는데 이 후커가 바로 앤티텀 전투에서 1군단장으로 함께했던 조지프 후커다.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후커에게 적극적인 진격을 요구했으나 후커가 이를 거부해 미드가 이끄는 사단을 후방 예비군으로 남겨두었고, 덕분에 북군은 이길 수 있는 전투를 상대측 우회기동에 당해 패하고 말았다.

미드는 이에 대해 매우 크게 실망했는지 전투 이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후커가 모두를 실망시켰다고 크게 책망하기도 했다. 물론 실망한 것은 미드 뿐만 아니라 링컨 대통령도 마찬가지였고, 링컨 대통령은 즉각 후커를 해임했다. 그리고 이때 후커에게 적극적인 공격을 주문했던 미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1.1. 게티즈버그 전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게티즈버그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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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6월 28일, 링컨 대통령은 미드를 포토맥군의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미드에게는 여유롭게 군을 재편할 시간이 없었는데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로버트 E. 리가 이끄는 북버지니아군 주력이 빠르게 북진해 이미 펜실베이니아에 진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드는 후커를 비롯한 전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취임 4일만에 남군의 북진이 확인되자 뜸들이지 않고 바로 군을 북진시켜 이에 대응하러 나선 것이었다. 덕분에 항상 남군에게 유리한 전장을 내주던 지금까지의 모습과 달리 게티즈버그에 먼저 자리잡아 대형을 구축할 수 있었다.

북군은 제1군단장 존 F. 레이놀즈가 머리에 총격을 당해 전사하는 상황에서도 수비 대형을 유지하면서 남군을 세메터리 힐(Cemetery Hill)로 끌어들였고, 그사이 무사히 미드의 본대가 합류해 수비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한편 그간 유리한 전장 선택, 화려한 우회 기동 및 기만 전술로 북군을 유린하던 로버트 E. 리도 그간의 전투로 생긴 오만 때문인지 이번 기회에 북군 주력인 포토맥군을 섬멸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오판을 저지르며 게티즈버그에 자리잡고 있던 포토맥군에게 정면 공격을 가했고, 그 결과 3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면서 퇴각해야했다.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전투로, 남북전쟁이 시작된 이래 동부 전역에서 북군이 남군을 상대로 거의 최초로 거둔 전술적 승리이자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링컨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수뇌부와 총사령관이었던 헨리 할렉(Henry Halleck), 포토맥군의 여러 장군들이 추격전을 요구했지만 포토맥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고, 리의 기만 전술을 우려한 미드는 추격전을 포기했다. 덕분에 리는 전멸의 위기를 피해 포토맥 강을 건너 북버지니아군을 무사히 퇴각시킬 수 있었다.

북버지니아군을 격멸시킬 기회를 잃어 전쟁을 더 끌었다는 비판과 현실적으로 추격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옹호가 현재까지도 교차하긴 하지만 어쨌든 미드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와 북버지니아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긴 성과를 인정받아 정규군 준장으로 승진했고 의회의 공식 감사 결의를 받았다.

2.1.2. 그 이후

미드는 이후 포토맥군을 이끌고 버지니아주로 남하해 본영을 꾸렸지만, 이후에도 신중하게 리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선에 그치고 있었다. 한편 서부 전역에서 빅스버그 포위전과 채터누가 전역을 승리로 이끈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북군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고, 1864년 대선을 앞두고 공세를 원하던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의 중장 취임과 동시에 북군 최고 사령관을 할렉에서 그랜트로 교체했다.

그랜트가 이끄는 총사령부는 이전 총사령부와 달리 포토맥군과 함께 진주하여 직접 동부 전역 작전을 이끌었고 그러면서 미드의 존재감은 옅어졌다. 미드는 사임을 요청했지만 그랜트가 이를 반려하면서 신뢰를 표해 포토맥군 사령관 지위는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북군의 남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버랜드 전역(Overland Campaign)의 서장이었던 윌더니스 전투에서는 필립 셰리던이 이끄는 기병대에게 그랜트의 대기 지시 판단을 유보하고 젭 스튜어트가 이끄는 북버지니아 기병대에 대한 추격을 명해 남군측 핵심 지휘관이었던 스튜어트를 전사시키면서 지휘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콜드 하버 전투, 스팟실베이니아 전투 등을 거치면서 포토맥군 지휘권 문제를 두고 그랜트와 갈등을 벌이긴 했지만 선을 넘는 수준까지 가진 않았고,[2] 1865년 1월 그랜트의 제안을 에드윈 스탠턴 전쟁장관이 수락하면서 미드는 정규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와중에 의회가 윌리엄 테쿰세 셔먼, 필립 셰리든의 승진 인준보다 미드의 승진 인준을 더 느리게 하면서 경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1864년 7월 일어난 피터스버그 공성전 와중의 크레이터 전투에서는 공성을 위해 지하 갱도 폭발 작전을 준비했던 흑인 부대(4사단)을 정치적 비난을 피하겠다는 이유로 백인으로 구성된 1사단으로 급하게 교체했다가 작전에 실패하고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해 엄청난 비판을 받아야했고, 이를 기점으로 그랜트가 미드의 지휘력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인지 남군의 주발 얼리가 워싱턴 D.C. 습격 작전을 시도할 때도 셰넌도어군의 지휘를 미드가 아니라 그 부하 장수였던 셰리던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토맥군 사령관 지위를 유지했고, 남북전쟁의 마지막 국면인 리치먼드 포위전과 애퍼매톡스 전역까지 활약했다.

남북전쟁이 연방과 북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인 1865년 6월 28일, 포토맥군이 해산되면서 미드는 비로소 사령관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2.2. 재건 시기

암살당한 링컨 대통령의 후임인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지시로 탄생한 대서양 사단에 1865년 7월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868년 1월에는 애틀랜타에 위치한 제3군관구 군정장관[3]으로 보직을 옮겼다.
[1] Brevet second lieutenant. 명예직으로 중위 대우를 해준다는 소리지 실제 중위는 아니다.[2] 미드의 지휘를 신뢰하지 못한 그랜트가 포토맥군에 직접적인 작전 지시를 많이 내렸고 미드는 이를 자신의 지휘권을 침범하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3] 남북전쟁이 끝난뒤 연방 정부는 패한 남부에 대해 재건법에 따라 군정을 실시하면서 5개의 군관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