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Tuskegee Airmen은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흑인 조종사들로 구성된 제332전투비행단을 지칭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범위가 더 넓다. Tuskegee Airmen은 제332전투비행단뿐 아니라, 미육군항공대(US Army Air Forces) 소속으로 복무했던 파일럿, 승무원, 관제사, 행정 및 의무병 등 흑인들로만 구성된 모든 항공 관련 인력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이 명칭은 이들이 훈련받았던 기지가 위치한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이들은 당시 ‘흑인은 지능이나 판단력이 부족해 전투기 조종에 적합하지 않다’는 고정관념과 제도적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운 존재들이었다. 즉 미국이라는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데에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낀 존재다.[1] 당시에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보장되었으므로 미군조차도 흑인 파일럿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였지만, 지속적인 흑인 인권운동과 정치적 압력(특히 NAACP와 루스벨트 등의 지지)에 힘입어 이들이 조종사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열렸다. 그 결과 1941년부터 터스키기 기지에서 훈련이 시작되었고, 이후 이들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실제 전투에 투입되는 과정을 거친다.
가장 유명한 제332전투비행단은 특히 폭격기 호위 임무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며, 호위 중 적의 전투기로부터 폭격기를 잘 지켜내 ‘RED TAILS’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소위 레드테일은 현재의 미국 공군에서 332 전비 이외에도 그 정신을 이어 받은 부대가 많을 정도로 추앙받고 있다.[2]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존재들의 전선에서 활약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흑인들도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전투 인력으로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버렸다.[3]
단편적으로 보면 21세기 시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 문제와 미군 내의 유색 인종 불신이 낳은 특이한 무용담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넓게 보면, Tuskegee Airmen의 존재는 그러한 인종차별 구조에 정면으로 맞선 상징이었고, 그들이 겪은 차별과 동시에 쌓아올린 성취는 훗날 1948년 미군 인종 통합 명령(Executive Order 9981)으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부대인 만큼, 이 문서에서는 단순히 전투 기록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미군 내 인종차별 철폐 과정도 함께 다룬다. Tuskegee Airmen은 단순한 군사적 성과를 넘어, 인권과 평등을 향한 미국 내 투쟁의 중요한 일부로 평가받는다.
1.1.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당시에도 미국 흑인들은 미국내에서 일종의 2등시민 취급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정치,사회 분야에서 숱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군 복무도 예외는 아니어서 흑인들의 입대는 인종을 분리한 채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육군의 경우 흑인 장병들로만 구성된 소수의 전투부대를 백인 장교의 지휘하에 운용하였으며, 실험적, 정치적인 성격이 짙었던 육군 전투부대 이외의 경우에는 물자 수송[4]이나 부대/함정 내 잡역에 동원[5] 되는데 그쳤다.항공분야의 경우, 1930년대 후반에 미 정부의 민간 조종사 양성 정책에 편승하여 흑인 조종사들이 생겨났지만 전체 조종사 수에 비하면 그 비중은 초라한 것이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군문의 차별을 없애려는 시민운동가들의 노력 덕에 1930년대 말에 흑인들도 육군의 조종사가 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고, 1941년 9월에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가 창설되었다.
1.2. 시작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전투비행중대는 이들은 최초의 흑인 항공 요원으로서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종 분리 정책이 이들의 발목을 또 다시 잡았다. 항공부대의 운용은 조종사와 항공기, 정비사만으로 이뤄지는게 아니라 전문적인 항공 의무관을 포함한 각종 지원 인력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 조종사들을 지원할 흑인 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종사, 정비사 양성과 함께 지상 지원인력의 양성도 같이 이뤄졌다. 더 큰 시련은 미 육군 항공대 지휘부의 편견이었다. 원래 계획한 규모 이상의 흑인 병력들을 터스키기에 떠넘기고 원래 목적 이외의 명령도 더해지면서 기지 운용 및 항공 요원 양성에 어려움이 더해졌다. 때문에 항공장교로 양성된 흑인 장교들은 오랫동안 백인 장교들의 지휘하에 있어야만 했다.1.3. 영광: 332전투비행단 "레드 테일스(Red Tails)"
1.4. 그늘: 477 비행대
1.4.1. 최초의 흑인 폭격 비행대
1943년 5월 흑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중대규모 폭격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이 비행대는 B-25폭격기를 운용하였으며, 이후 제477폭격비행대 휘하에 총 4개 비행중대 규모로 확장되었다. 최초 구상은 총 7개 비행중대를 배치하는 것이었으며 당시 폭격비행대 구성과 이후 실전배치까지의 기간은 약 4개월 정도 걸렸다. 고등교육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첫 흑인 폭격 비행대라는 걸 감안해도 1944년 11월에는 실전배치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러나 당시 미군 내에 만연한 인종차별은 이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1.4.2. 이어지는 차별
루즈벨트 대통령과 인권단체들의 압력으로 흑인비행대를 구성했지만, 기존의 백인 장교진들은 대부분 이들을 자신들과 같은 군인으로서 대해줄 의사가 없었다. 부대내 각종시설은 흑인용과 백인용으로 구분하였고, 공공 이용 공간은 줄을 그어서 그 너머로의 이동을 제한하였다. 흑인 장교들의 장교클럽 사용은 엄격히 제한(사실상 금지)되었고 그조차도 백인 지휘관들이 흑인 장교들을 교육생 신분으로 묶어버리면서 완전히 금지시켜 버렸다. 최초 창설 이후 2년간 부대 이동만 하면서 시설은 점점 열악해졌다. 1945년 3월 켄터키주 프리먼 비행장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여기는 B-25를 운영하기엔 열악한 환경이었다. 거기에다 고속 승진하는 백인 장교들과 달리 교육생 신분으로 묶인 흑인 장교들은 진급조차 막힌채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흑인 부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불만은 고조되었다.1.4.3.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1945년 4월 교육생 신분의 흑인 장교들을 초급 장교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에 흑인 장교들은 백인들에게만 허용된 장교클럽의 이용을 시도했다. 그러나 백인 지휘관들은 이들을 저지하고 몇몇을 체포했다. 이에 흑인 장교들이 반발하면서 이른바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이라는 시위사태로 비화되었다. 최종적으로 104명의 흑인 장교들이 체포 및 기소되었다가 인권단체와 정부의 압력으로 흑인 장교 3명만 재판에 회부되고 그 중 1명만 유죄 평결 및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었다.1.4.4. 반란 이후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이후 부대는 사정이 좀 나은 다른 기지로 다시 이전하였으나 2개 비행중대가 해체되었다. 대신 벤저민 O. 데이비스 주니어가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전투비행중대를 이끌고 날아와서 477비행대에 배속시켰다. 데이비드 자신은 혼성비행대로 변경된 477비행대의 지휘관에 임명된다. 477혼성비행대의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흑인들로 물갈이되면서 어수선한 부대 내 기강이 수습되었다. 477비행대는 대 일본전 투입을 목표로 다시 훈련에 들어갔지만 이들이 전장에 나설 기회는 없었다.1.5. 전쟁이 끝난 뒤
477비행대 반란 같은 불상사도 벌어졌지만 백인 이외의 인종이 전투에서 열등하다는 편견은 당연히 목숨 걸고 싸우던, 이들과 함께 싸웠던 백인 장병들 사이에서는 크게 사라졌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는 백인 병사들과 전우애를 나누던 흑인 병사들은 전역 후 린치에 시달리고 여전히 인종차별을 받았다.1948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군 내에서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는 행정 명령 9981에 서명하면서 특정 인종만으로 구성된 부대들은 모두 해체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역전의 제332비행대와 상처만 남은 477비행대도 포함되었다.[6]
최초의 흑인 비행대를 이끌었던 벤저민 O. 데이비스 주니어[7]는 미군의 4번째 흑인 육군 장교이자 최초의 흑인 공군 장교로 이름을 남겼으며, 한국전쟁 때는 F-86을 타고 참전했다. 1998년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미군 사정을 훌륭한 인품으로 극복하고 전공까지 세운 공을 기려서 명예 4성 장군이 되었으며, 2002년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데이비드 외에도 다수의 터스키기 출신 대원들 전후 미 공군 및 우주항공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물론 데이비드 처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물들도 많았다. "대니얼 제임스 주니어"의 경우 1975년 미국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에 연루된 477비행대의 흑인 장교들은 50년이나 지난 1995년 모두 사면 복권되었고 시위 관련 기록도 삭제되었다.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였던 제99중대는 1988년 미 공군 항공교육훈련사령부 예하 훈련비행대로 재창설되었다. 현 99중대는 2차 세계대전 때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항공기 꼬리날개 끝부분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있다.
제332전투비행대는 종전 이후 477비행대와 합쳐지면서 제332전투비행단으로 승격되었다가 행정 명령 9981의 발효로 해산되었다. 그러다 2002년 중동지역을 관할하는 제332원정항공단으로 부활하였는데, 재창설식에 2차대전중 332비행대 소속이었던 터스키지 에어맨들이 참석해 축하하기도 했다. 477비행대 역시 1948년 해산하였지만 60년만에 F-22를 운용하는 전투비행대로 부활하였다.
2006년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로도 이어진 터스키기 에어맨들의 공적을 기려서 그들 모두에게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이 수여되었다.
2009년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취임식에 생존자들 일부가 초대되어 참석했다.
2. 매체에서 등장
1995년 작으로 『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역으로 유명한 로렌스 피시번과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던 쿠바 구딩 주니어가 출연했다.[8]
스토리면에서는 나름대로 교훈적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볼 것도 있지만[9], 대체적으로 혹평을 받다고 한다. 또 TV 영화라서 매우 저예산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폭파 씬은 실제 2차대전 당시의 기록 필름을 사용했다.
- 2012년 같은 소재로 영화화한 레드 테일스가 개봉했다. 이 작품 역시 화면 연출이 최신 기술로 세련되어진 것을 뺀 나머지는 이 1995년작과 수준 차이가 없다는 평이다. 심지어 레드 테일스는 입대와 훈련 과정을 잘라버리고 실전 투입 이후만 다루는 지라 하늘을 꿈꾸는 청년들의 발랄한 대화 장면들이 줄어들고 계속 무게만 잡아서 오히려 더 지루하다는 평도 있다.
- 2024년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제작한 Apple TV 드라마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에 등장한다. 작중 후반부에 등장하는건 이들이 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가 되어서야 주인공들이 있던 북유럽 전선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공중전 보다는 주인공들과 포로가 된 이후 상황에 주로 등장한다.
[1] 공군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흑인 병사들은 전투병이 아닌 잡무, 조리병, 운전병 등의 비전투 보직에 배치되었다. 이는 '흑인은 전투에 부적합하다'는 당시 미군의 인종 편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광으로 악명이 높았던 조지 S. 패튼 장군은 오히려 실력주의자로서 흑인 병사가 잘 싸운다면 전투병 배치를 적극 지지했던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2] 제100전투비행대대(앨라배마 공군 주방위군), 제99비행훈련비행대대(텍사스 랜돌프 12 FTW) 등[3] 사실 미국 독립 전쟁때도 미국 흑인은 항상 미국을 위하여 활약했다. 약 5,000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륙군(Continental Army) 측에 복무했기 때문이다. 다만 Tuskegee Airmen이 활동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여전히 그 사실이 의도적으로 잊혀지거나 무시되었고, 따라서 다시 한 번 강하게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던 상황이었다.[4] 물자 수송임무에서 제일 유명한 사례는 '레드볼 익스프레스'로 알려진 서부전선 미군 보급부대의 트럭 운전수들이 있다.[5] 진주만 공습 당시의 모범적인 전투행위로 해군 십자장을 받은 도리스 밀러 조리 하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진주만 공습을 영상화할 때 등장하는 대공 기관총을 잡은 흑인 수병이 바로 이 사람이다.[6] 이후로도 미군 내에서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져서 21세기 시점에서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미군 내의 차별은 없다. 그러나 인종, 종교, 국적 등으로 인한 트러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7] 그의 아버지 벤저민 O. 데이비스 시니어는 최초의 흑인 육군 장군이었다.[8] 참고로 로렌스 피시번과 쿠바 구딩 주니어는 존 싱글톤 감독의 대표작인 보이즈 인 더 후드에서 부자관계를 연기했지만 이 영화에선 친구관계로 등장한다.[9] 실전최강 전투기 대전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실제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전쟁 중에도 그 이후에도 그렇게 재밌는 친구들은 다신 못만났다고 실실 웃으며 회상하는데, 그런 점이 반영됐는지 이 영화에서도 주연들의 센스있고 재밌는 대화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