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3:18:22

조너스 소크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과학자들 & 사상가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90329_400.jpg
버니바 부시 에르되시 팔 자크 쿠스토 마거릿 미드 로버트 노이스
버트런드 러셀 페트릭 스텝토
로버트 에드워즈
존 폰 노이만 이언 윌머트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오 베이클랜드 라이트 형제 알렉산더 플레밍 로버트 고다드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에드윈 파월 허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장 피아제 엔리코 페르미 리키 패밀리
필로 판즈워스 쿠르트 괴델 레이첼 카슨 윌리엄 쇼클리 앨런 튜링
조너스 소크 제임스 듀이 왓슨
프랜시스 크릭
팀 버너스 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이 보기: 지도자 & 혁명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영웅 & 아이콘 부문 }}}}}}}}}

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
Jonas Edward Salk
파일:external/imgc.allpostersimages.com/dr-jonas-salk.jpg
출생 1914년 10월 28일
뉴욕주 뉴욕시
사망 1995년 6월 23일 (향년 80세)
캘리포니아주 라호이아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가족 배우자 프랑수아즈 질로(1970년 결혼)
학력 타운샌드 해리스 고등학교 (졸업) (1927-1930년)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 (화학 / B.Sc.) (1930-1934년)
뉴욕 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 / M.D.) (1934-1939년)
미시간 대학교 의과대학원 (박사후과정)
서명
파일:Jonas_Salk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소아마비 백신 개발4. 태양에도 특허를 붙일 겁니까?5. 이후6. 여담

[clearfix]

1. 개요

에드워드 머로: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입니까?(Who owns the patent on this vaccine?)"
소크 박사: "음, 사람들이겠죠.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Well, the people, I would say. There is no patent. Could you patent the sun?)"

1950년대 초, 온 나라에 소아마비 전염병의 위기가 닥쳤다.(in the early 1950's the polio epidemic hurled a nation into crisis.)
소아마비는 어린아이들이 대상이었다. 국가가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고심하자, 한 과학자가 이에 대한 답변인 백신을 전달했다.(polio targets children. desperate for a solution a nation rallied together a scientist answered the call and delivered the vaccine.)
소크 백신은, 소아마비 박멸을 위해 전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the salk vaccine is used worldwide to eradicate polio.)
미국의 의사이자 바이러스의학자로, 소아마비 백신을 처음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1] 또한 소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연구 결과에 대한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보급되는 소아마비 백신의 공급 단가는 단돈 100원에 불과하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소아마비 환자는 백신 출시 이전의 1% 이하 수준으로 감소했다. 소크 덕분에 인류는 소아마비의 공포에서 사실상 벗어났다.

또한, 얼마 뒤인 1961년에 생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앨버트 세이빈(1906~1993)과의 생백신 VS 사백신 마찰로도 유명하다. 세이빈은 말년까지도 소크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방식은 다를지언정 둘 다 수억 명의 사람을 살린 것은 마찬가지이다.

2. 생애

1914년 10월 28일, 뉴욕의 가난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일반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소크의 성공을 보기 위해, 그가 13살이 되자 지역 영재들을 위한 공립학교인 타운샌드 해리스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그곳에서 성적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이후 뉴욕시립대에 진학해 공부를 하던 그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가 되길 바라는 그의 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국 의사로 진로를 잡게 된다. 뉴욕시립대 화학과 졸업 후 뉴욕의과대학에 진학, 그곳에 재학하면서 소크는 단순 개업의 및 봉직의보다는 내과의학 연구자가 되기로 하였다.
파일:external/www.jewoftheday.com/JonasSalk.jpg
1947년 피츠버그의과대학 연구실에 들어간 그는 1948년, 소아마비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3. 소아마비 백신 개발

당시 소아마비는 전 세계적 문제였으며 미국에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소크 백신이 개발되고 배포된 1955년 이전에는 매년 소아마비에 걸리는 아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1952년은 미국 역사상 전염병이 가장 심각하게 발생한 해로 수많은 어린이들이 이 질병으로 고통받았는데, 한해에 58,000건의 소아마비가 보고되었고 그 중 3,145명이 사망하였으며 21,269명이 마비가 되었다. 소아마비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어른이라 할지라도 걸리면 마비가 오는 끔찍한 병이었고,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마저도 소아마비의 희생자 중 하나였다.[2] 2009년 PBS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당시 분위기는 "원자폭탄을 제외하고도, 미국은 소아마비에 떨고 있다." 라고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소아마비를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고, 치료와 동시에 이를 예방할 백신을 만들기 위한 기금을 설립하였다.

역사학자 윌리엄 오넬은 '전염병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평할 정도였다.
"도시 지역의 시민들은 매해 여름 이 끔찍한 방문자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다."
그렇기에 소아마비 백신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고 국가적으로 소아마비 백신 개발 사업에 대한 지원이 대폭 증가하던 시기였다. 1948년, 소크는 소아마비 국립재단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연구에 몰두했고 장장 7년간 소아마비 백신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피츠버그 연구실에서 하루 16시간씩 휴일 없이 개발에 몰입했던 그는 마침내 백신 개발에 성공하게 되었고, 1953년 11월에 최초 임상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대상자는 바로 조너스 소크 본인이었다. 이후 1954년, 소크 박사의 멘토이기도 한 미시간 대학교의 프랜시스 교수의 주도 하에 20,000명의 의사와 공중 보건 관계자, 64,000명의 학교 직원들과 220,000명의 자원봉사자들, 1,800,000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중맹검법에 의한 임상시험을 시행했다.

그리고 1955년 4월 12일, 이 소아마비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또한 강력하다는 것이 세상에 공표되었다.

4. 태양에도 특허를 붙일 겁니까?

파일:external/newsmomsneed.marchofdimes.org/Salk-newspaper.jpg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540329_400.jpg
1955년 4월 13일자 주요 신문 1면 타임지 표지에 실린 소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lk_Ike_55.jpg
1956년 1월 27일 아이젠하워로부터 메달을 수여 받는 소크
1955년 4월 12일, 소크가 개발한 소아마비 백신이 효과가 있음을 공표하는 기자회견이 미시간 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10주기인 이 날 라디오로 송출된 소아마비 백신 발표를 접한 미국인들은 환호하였고, 당시 미국의 모든 사람들이 소크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돌 정도였다. 발표 직후부터 그는 전국적인 존경을 받으며 백악관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인류의 은인"으로 기리는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의회로부터는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았다. 두 훈장 모두 미국 최고의 영예다.

이때 백신 개발로 인해 수많은 제약회사에서 그에게 특허를 양도하라는 제안을 했는데, 만약 소크가 이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돈방석에 앉았을 것이다. 당시 그가 특허를 양도했다면 지금까지 벌어들였을 돈이 무려 70억 달러, 한화로 약 8조 원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일을 하면서 버는 돈으로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며 제약회사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소아마비 백신을 무료로 풀었다. 그 결과 소아마비 백신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혜택을 보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후 그는 <Global Citizen Festival>라는 TV 인터뷰에서 백신의 특허권을 누가 갖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는데,[3] 여기서 그는 그 유명한 대답을 하게 된다.
"글쎄요, 아마도 사람들이겠죠. 특허 같은 건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Well, the people, I would say. There is no patent. Could you patent the Sun?)"
신약개발에 쓰이는 비용과 시간을 따진다면 신약 특허 포기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익보다 공익을 더 중요시한 그의 선심 덕분에 소아마비 백신은 값싼 가격에 팔리며 전세계에 널리 퍼졌고 오늘날 소아마비가 세계에서 종적을 감추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연간 35,000여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나오던 미국의 경우, 백신 배포 2년만인 1957년에 소아마비 발병이 이전 대비 90%가 감소되었으며 1979년에는 공식적으로 "미국에서는 더 이상 소아마비가 발병하지 않는다."라고 퇴치 판정이 내려졌다. 전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오늘날 소아마비 발병건수는 무려 99%나 감소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만 토착성 바이러스로 인한 발병이 지속되고 있을 뿐인데, 여기선 그 악랄한 탈레반이 소아마비 백신이 기독교의 화학무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금지했기에 이뤄진 게 많다.[4] 결국 백신이 보급되지 않아 소아마비는 무수히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파키스탄 스와트 주를 장악한 탈레반은 되려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욕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탈레반 본인들의 아이들이 소아마비에 걸리는 일이 터지고 나서야 소아마비 백신 금지를 그만두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크가 개발한 백신은 사백신이며, 앨버트 세이빈이 개발한 백신은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한 생백신으로 차이가 있다. 두 백신은 일장일단이 있어서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우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대에도 사백신과 생백신을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백신의 경우 생백신에 비해서 부작용이 없다시피한 장점이 있지만, 접종을 반드시 주사로 해야 하므로 일회용 주사기, 거즈, 소독약, 이를 다룰 의료인력, 냉장고, 냉장운송장비 등 기초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1회 접종으로 면역이 생기는게 아니라 여러번 접종받아야 하는데, 의료 선진국이라면 몰라도 의료시설도 부족하고 행정력도 부족한 후진국에서는 매우 큰 단점이다. 특히 아프리카를 비롯한 열대지방의 후진국들은 여러번 백신을 맞출 행정력의 부족, 전기가 자주 끊기는데다 자금 부족에 기인한 안정적 냉장 인프라 및 의료 인프라의 부족, 미신 등에 의한 의료인 불신 등 때문에 WHO에서도 사백신은 비효율적이라고 인정했다. 한편 생백신은 진짜로 소아마비가 발병해버리는 심각한 단점이 있다. 물론 그 자체는 발병 확률이 매우 낮으며 통계상으로는 백신으로서의 효과가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 백신 접종으로 인해 집단 면역이 이뤄진 곳에서는 오히려 소아마비에 걸릴 확률보다 (생백신을 쓸 경우) 백신 때문에 소아마비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는 역전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생백신은 경구 투여가 가능해서 냉장 인프라를 비롯한 기초 의료 인프라가 필요없고, 살아있는 균이기 때문에 접종하지 않은 일부 인원도 접종효과를 누릴 가능성이 있으며, 1회 접종만 하면 추가 접종이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때문에 생백신과 사백신이 전부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백신의 경우 부작용이 아예 없다는 장점 때문에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선진국에서 주로 쓰고, 생백신의 경우 보급이 쉽다는 장점 때문에 구 소련권이나 아프리카 등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주로 사용된다.

5. 이후

소아마비 백신 이후 그의 다음 목표는 HIV/AIDS 백신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끝내 HIV/AIDS 백신을 개발하지 못하고 1995년 6월 23일, 81년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후 엘 카미노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개발하고자 했던 에이즈 백신은 지금까지도 나오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HIV 노출 후의 감염율을 낮추거나, HIV 감염 이후 에이즈의 발병을 막고 에이즈의 진행을 늦추거나 증상을 개선하는 수준까지만 가능할 뿐, 일반적인 백신처럼 접종하면 이후의 감염을 막아주는 형태의 에이즈 백신은 아직 없다.

6. 여담

  • WHO에서는 10월 24일을 세계 소아마비의 날로 지정했다.
  • 2014년 10월 28일, 소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이 올라왔다. #
  • 애기장대의 돌연변이 일련번호 중 이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일련 번호가 있다(SALK_여섯 자리 숫자).[5]
  • 소크가 창립한 <소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의 연구소 건축물도 대단히 유명하다. 20세기의 손꼽히는 건축가 루이스 칸의 대표작이다. 건물에 대해서는 루이스 칸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 2020년 5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통해 소크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 이야기가 소개됐다.
  • 한국에선 태양에도 특허를 내기 위해서 유료로 푼 것이라는 왜곡 개그 짤방이 있다. 이 개그를 이용한 게임 관련 디시콘 역시 존재하는데 해당 글의 댓글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도 태양에다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이 존재한 적이 있었다.
  • '누구먼저 살려야할까?' 라는 책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의 콧구멍에 야생 독감바이러스를 분무한 실험에 참여했다고 한다.


[1] 주사 형태의 사(死)백신(IPV)을 개발하였으며, 이후 1961년 앨버트 세이빈 박사에 의해 내복약 형태의 생백신(OPV)이 실용화되었다.[2] 39살에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다.[3] 인터뷰어는 에드워드 머로였다.[4] 덧붙여, CIA가 파키스탄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찾는 방법이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한다면서 아이들의 DNA를 채취하여 빈 라덴의 DNA와 대조하여 포위망을 좁히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테러범은 물론이고 파키스탄 주민들도 백신을 불신하게 되었다.[5] 애기장대의 유전자에 T-DNA를 넣어 만든 녹아웃 돌연변이들에 이런 번호를 부여했다. 원하는 유전자와 어떤 돌연변이인지 확인하고 주문하면 미국에서 종자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