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1:55:00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전개
2.1. 인디애나폴리스함의 정보2.2. 극비임무와 격침2.3. 죽음의 5일2.4. 여론재판
3. 재평가와 밝혀진 진실4. 대중매체5. 기타6. 외부 링크

1. 개요

I would not have hesitated to serve under him again. His treatment by the Navy was unforgivable and shameful.
저는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군이 그에게 내린 처사는 용서할 수 없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1999년 설립 추모비 앞에서, CA-35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 플로리안 스탐
1945년 7월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CA-35 USS 인디애나폴리스함이 오키나와 남부, 에서 레이테 섬으로 이동하던 중 함의 대처 능력을 벗어난 일본 제국 해군잠수함 I-58의 뇌격을 받고 침몰하였고, 이후 해군의 적절치 못한 대응으로 희생자 수가 늘어났음에도 임무 실패의 책임을 인디애나폴리스함 함장 맥베이 대령에게 전가한 사건.

2. 전개

2.1. 인디애나폴리스함의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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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폴리스함(USS Indianapolis)은 1930년대에 취역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자매함들 중 2번함으로, 사건 이전에는 개장을 몇 번 받아 화력과 대공지원능력을 향상시켜 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의 기함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오키나와 공격에도 참여했으며 카미카제 공격으로 피해를 입는 와중에도 혁혁한 전과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런 대형 전투함은 자체 스크루 소음이 크기 때문에 음파로 잠수함을 탐지하는 대잠 작전 관련 장비는 탑재하기가 어려우므로, 따라서 구축함 등 대잠능력이 있는 호위함이 필수적으로 동행해야 했다.

2.2. 극비임무와 격침

1945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인디애나폴리스는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의 지휘 아래 승조원 1196명을 태우고, 미 육군 항공대B-29 폭격기가 출격 대기 중인 티니안 섬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역사를 뒤바꿀 물건인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재료. 고농축 우라늄을 싣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은 이 임무를 극비임무로 취급하고 일본 해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단독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당연히 이러한 항해가 위험한 줄 잘 아는 맥베이 대령은 구축함 등 대잠 호위함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지휘부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1945년 7월 28일, 무사히 화물을 실어나른 인디애나폴리스는 다음 작전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섬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원폭 재료를 하역하여 비밀 준수가 필요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지 않아서 단독으로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7월 30일 새벽. 일본군 잠수함 I-58이 이를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 2발을 명중시켰다. 이 공격으로 인디애나폴리스호는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각종 개장으로 선체 상부 구조물의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웠기 때문에, 한 번 무게중심이 깨져 균형을 잃자 불과 12분만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피격 직후 함장은 즉시 구조 신호를 보내고, 승조원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려, 폭발 직후 사망한 300여 명을 제외한 승조원 대부분이 탈출에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900명에 가까웠다. 빨리 구조되었더라면 대다수가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는 오지 않았다.

결국 격침 후 나흘이나 지난 8월 2일,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해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처음으로 바다 위에 떠다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여 구조하였고, 그 후 약 이틀간 구축함까지 동원되어 생존자를 건져올렸다. 그래서 최종 생존자는 3분의 1 남짓한 316명으로 줄어들었다.

2.3. 죽음의 5일

약 닷새간 생존자들은 바다 위를 떠 다녔는데, 식수나 의약품이 매우 부족하였다. 바다 위에서 탈진한 승조원들은 서서히 죽어가거나 환각 증세를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변 해역은 상어떼 출몰지인 탓에 상어들이 시체와 부상자들의 피냄새를 맡고 이들을 공격하여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1] 당시 생존자들은 맥베이 대령이 지휘하는 그룹과 군의관이 지휘하는 그룹, 또 다른 장교 한 명이 지휘하는 그룹까지 총 세 무리로 나뉘어 표류했는데, 군의관이 지휘하는 그룹에서는 군의관이 사망하는 승조원들의 인식표를 일일이 모으다가 자기 그룹에 속한 군종관이 사망하자 절망해 모아둔 인식표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2] 또 다른 그룹에선 몇몇 승조원들이 심각한 환각 증세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인육을 먹는 행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맥베이 대령은 이 순간까지도 조명탄, 거울까지 동원해 구조 신호를 계속 보내었다.

침몰 직후 보낸 구조 신호를 근처 미 해군 통신 중계소가 감지했지만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한 수신소는 당직사관에 취해서 자느라, 다른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노느라, 또 다른 수신소는 일본 해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해서 구조 신호를 무시했다.

후에 맥베이 대령이 구조된 후 해군본부에 바다에 떠있는 닷새간 왜 구조가 없었는지 따졌으나, 해군본부는 그런 구조 신호는 없었다고 답했다. 일본이 패전할 조짐이 짙어지는 무렵이라 그 누구도 감히 미 해군의 함선을 가라앉히리라 의심하지 않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피해가 발생하긴 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하기 6일 전 같은 해역에서 버클리급 호위구축함 USS 언더힐함이 가이텐에 피격당하여 격침당했을 정도였으니 확실히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그러나 해군본부는 함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는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거니와, 7월 31일 레이테섬에 도착해야 할 배가 행방불명이 된 상황에서도 관심 한 줌 기울이지 않았다. 이 사건의 책임은 해군본부에게도 일정부분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2.4. 여론재판

미국 입장에서 이 사건은 해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참사였다. 특히 사건 전날에는 진주만 공습의 완벽한 복수전인 구레 군항 공습을 성공시켰기에 충격은 더욱 심했다. 이 소식은 미국 곳곳으로 빠르게 퍼졌고 미국 내에서는 해군의 실책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해군은 책임 떠넘기기로 맥베이 대령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미 해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군함 약 700여 척을 잃었지만 자기 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에 회부된 함장은 맥베이 대령이 유일했다.[3]

맥베이 대령의 죄목도 '적의 공격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함을 침몰시킨 것'이라는 가관스러운 것이었다. 자세히는 '어뢰 회피를 위한 지그재그 기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원칙상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지그재그 기동을 하면 속도와 항속거리가 많이 줄어드는 데다가 항해시간도 꽤나 길어지기 때문에 적 잠수함이 매복했을 확률이 높은 수역에서나 주로 한다. 게다가 배수량만 1만 톤에 가까운 인디애나폴리스라면, 갑작스레 적 잠수함이 쏜 어뢰를 발견했다고 작고 잽싼 구축함처럼 즉시 지그재그 기동을 하기란 무리다.[4] I-58의 함장 하시모토 모치츠라 중좌도 종전 후 미국에 인디애나폴리스에 적재된 화물을 노리고 공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불려갔다. 물론 I-58은 인디애나폴리스에 실린 화물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고 그저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기에 사냥한 것에 불과했다. 이 때도 하시모토 중령은 인디애나폴리스가 어떤 기동을 해도 격침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했지만, 이미 미 해군은 맥베이 대령 죽이기에 들어갔으므로 증언을 무시했다.

맥베이 대령은 이후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사면하여 복직하였으나, 1949년 소장 계급을 끝으로 예편되었다. 전쟁 중 생존한 항해/항공병과 동기들이 대부분 중장이나 대장으로 예편했음을 생각하면 사실상 불명예 전역이었다. 결국 해군의 책임까지 모조리 떠맡고 유족들의 비난을 혼자서 뒤집어쓴[5] 맥베이 제독은 1968년 향년 70세로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으나, 발견 당시 자신의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줬던 해군 인형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

3. 재평가와 밝혀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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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폴리스 생존자들 중 일부는 함장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하였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97년 전혀 다른 곳에서 이 사건이 재조명받았는데, 재조명받은 계기가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헌터 스콧이란 한 12살 소년(1985년생, 플로리다주 펜사콜라 출신)이 National History Day라는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서 승리와 비극(Triumph & Tragedy)이라는 그 해의 테마에 어울리는 미국 역사 기념물을 준비하는 참이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죠스가 실제 사건을[6]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 흥미가 생겨 자료를 모았다. 그런데 실제 기록이 별로 없어서 생존자 150명 가량을 직접 인터뷰하여 자료를 모았다. 이 과정에서 맥베이 제독이 억울한 누명을 썼음을 알고는 숙제를 넘어서서 제독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탄원 운동을 시작했다. 이 소식은 언론에까지 보도되었고, 1999년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 의원이 미의회 공식 결의안으로 올렸다.

그리고 엄청난 편지가 존 워너 의원 앞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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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상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 의원 귀하

저는 당시 USS 인디애나폴리스함에 공격을 감행했던 일본 제국 해군 잠수함 I-58의 함장이었던 전(前) 제국해군 중좌 하시모토 모치츠라입니다. 저는 귀하의 결의안이 1945년 7월 30일 격침된 미 해군 중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고(故) 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대령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어뢰 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인으로서 저는 맥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계 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전 인디애나폴리스가 어떤 상태라도 격침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에서 살아남은 용감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당신의 국가 입법부가 그들의 함장의 명예를 복권하도록 촉구하고 싶습니다.

저와 인디애나폴리스의 승조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맥베이 대령에게 씌워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 전직 I-58 함장, 제국해군 중좌 하시모토 모치츠라(橋本以行, 1909 ~ 2000)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킨 I-58의 함장 하시모토 모치츠라 당시 중좌가 직접 편지를 보내었다. 이 편지에서 하시모토는 인디애나폴리스가 무슨 회피기동을 하든 I-58이 어뢰로 격침할 수 있었고, 자신이 편지를 보낸 목적은 맥베이 제독의 명예 회복임을 밝혔다. 이후 하시모토 중좌는 이듬해 2000년 10월 25일 91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조금이라도 결의안이 늦었다면 사건에 가장 관련된 당사자의 증언이 담긴 적절하게 편지가 도착하지 못할 뻔했다.[7] 그리고 시기 적절하게 보안문서들이 해금되어 맥베이 제독이 구조 신호를 분명히 보냈지만, 해군 수신소가 의도적으로 구조신호를 무시했음이 밝혀졌다.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맥베이 제독을 복권하고, 그를 포함하여 당시 생존자 316명에게 은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살아남은 승조원들은 맥베이 함장[8]의 무덤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이 소식을 전했다. 당연히 미 해군은 반발했지만 복권을 받아들였고, 이후 미 해군은 충분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함을 손실/대파시킨 함장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게 되었다.

4. 대중매체

1975년작 영화 죠스에서 주연 3인방 중 한 명인 퀸트 선장이 이 사건의 생존자인 것으로 나온다. 상어 사냥을 떠난 오르카호에서 가진 술자리에서 퀸트와 후퍼가 바다에서 당한 상처자국을 보이며 서로 허세를 부리는데 마지막에 실실대던 퀸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인디애나 폴리스에서 당한 거라고 말하자 후퍼 역시 굳은 표정을 짓고 퀸트가 동료들에게 표류 중 동료들이 상어에게 먹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한 함선들을 의인화&모에화한 게임인 벽람항로에 등장하는 인디애나폴리스도 입수 대사에서 핵폭탄이 뭐냐고 시치미를 떼며, 자신은 반응이 느리다는 등 이 침몰 사건에 대해 간접적인 묘사를 한다. 캐릭터 일러스트에서도 (생긴 게 팻 맨이긴 하지만) 핵폭탄에 앉아있다. 핵에 노이로제가 강한 일본에서는 핵폭탄의 핵마크를 고양이 그림으로 변경. 벽람항로에서는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한 이58을 모티브로 한 이58에게는 아예 중순양함 사냥꾼이라는 특성이 존재하며, 인디애나폴리스의 자매함이자 언니 포틀랜드를 이58이 만나기 꺼리는 것으로 이 사건을 재현했다.

아카데미 과학에서 1/350 스케일로 인디애나폴리스I-58을 세트로 내놓았다. 구경은 여기서. I-58함상의 가이텐도 포함. 실제로 타임-라이프 월드 워2에 실려 있는 I-58함장 인터뷰에 따르면, 인디애나폴리스 격침 당시 I-58에는 가이텐 및 운영요원이 승함하고 있었지만 함장은 가이텐이 아닌 탑재 어뢰를 발사하도록 명령했고 인디애나폴리스 격침 확인 이후 환호하는 승조원 사이에서 가이텐 운영요원들은 저런 큰 목표에 가이텐을 쓰지 않았다며 불만을 드러냈단다.[9] 그리고 귀환 과정에서 보급선단을 확인, 탑재 가이텐을 전량 발진시켰다고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고증에 어긋나지 않다. 다만 디오라마로 내기엔 너무 끔찍한 사건이기에 아카데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0] 사실 예전에 타미야에서도 비슷한 구성으로 발매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개봉하였다. # 2016년 5월 개봉을 목표로 했으나, 동년 10월 14일으로 연기되었다. 영화 이름은 USS indianapolis:Men of courage. 니콜라스 케이지가 맥베이 대령 역을 맡았다. 예고편.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한데 CG도 별로고 고증도 영 맞지 않는 관계로 평이 상당히 나쁘다.

5. 기타

  • 함장의 복권 운동을 벌였던 헌터 스콧은 해군 ROTC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 후 임관, 2012년 기준 대위 계급으로 MH-60R 조종사로 복무하고 있다.
  •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천안함의 함장이던 최원일 항해중령을 왜 처벌하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한 반박의 근거로 이 사건이 자주 언급됐다. 실제로 당시 군검찰에서는 처벌을 논의했으나, 해군의 어느 하사가 인트라넷에 이 사건을 근거로 처벌론을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해군 내에서는 장비의 문제가 아니라 승무원들의 안이한 근무 태도가 원인이었다고 교육자료에 명시했고 생존 승무원들 또한 불이익을 받아왔다는 생존 장병의 인터뷰가 있다. 최원일 함장은 한직을 전전하다 대령으로 전역, 멕베이 대령이 받은 대우와 거의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1]
  • 일본 극우 인사들 중에는 "우라늄을 티니안 섬에 내려놓기 전에 인디애나폴리스가 격침되었다면..." 하고 안타까워하는 자들이 있으며, 실제 그런 내용으로 일본이 원폭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가공전기도 여러 건 존재한다. 물론 그랬을 경우 리틀보이 이송전에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했다면 다른 함선이 리틀 보이를 이송했을 것이고, 리틀 보이를 이송중에 침몰했다면 두 번째 폭탄이었던 팻 맨이 첫 번째 폭탄이 되어 투하작전에 쓰였거나, 아예 계획이 틀어진 미군이 '이렇게 된 이상 소련이 진주하기 전에 닥치고 몰락 작전으로 간다' 식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관점에서 만약 미국의 원폭투하가 충분히 지연됐다면, 소련이 남진을 많이 할 때까지 일본정부가 항복결정을 하지 못해 홋카이도는 소련령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 2017년 8월, 태평양 전쟁에서 침몰한 함정들 중 발견하지 못한 잔해들을 수색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이 인디애나폴리스를 침몰 72년만에 찾아냈다. 기사 침몰한 위치의 정확한 좌표는 잔해 보존을 위해 비공개했다.
  • 인디애나폴리스 침몰 사건 당시 살아남은 승조원 316명중 현재 생존해 있는 승조원은 해럴드 브레이로 2023년 현재 95세로 생존중이다. 비 승조원 출신 마지막 생존자는 해병대원 에드가 해럴(1924~2021)이 있었고, 마지막 장교 생존자는 돈 호이슨(1921~2020)이다.
  • 생존 승조원들은 1960년부터 매년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이름이 유래된 도시인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모여서 모임을 가졌다. 함장의 복권 운동을 주도한 헌터 스콧은 해당 모임에 방문하여 생존 승무원들과 인터뷰를 했었다. 2015년부터는 많은 생존 승무원들이 90대 고령에다가 노환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전보다 모임이 축소 되었고 2022년에 생존자중 한명인 클레아투스 르보우가 사망한 이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생존자인 해럴드 브레이만 홀로 생존 승조원으로 참석하고 있다.

6. 외부 링크



[1] 상어 때문에 사망한 생존자 숫자를 두고 적게는 수십 명에서부터 많게는 150명까지 논란이 상당하다.[2] 이 참상을 1975년 개봉한 영화 죠스에서 생존자 퀸트 선장이 이야기한다. 참으로 얄궂게도 퀸트 선장은 이후 자신이 당시 동료들이 상어에게 어떻게 죽었다고 이야기한 거의 그 내용대로 죽었다.[3] 진주만 공습 당시 지휘관이었던 허즈밴드 킴멜도 보직해임되고 불명예 전역하는 선에서 끝났지 군사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다.[4] 중순양함급 정도 되면 보통 속도가 아무리 높아봐야 30노트 초중반대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운용한 산소어뢰는 속도가 48노트에 달했거니와, 잠수함용 산소어뢰는 400 kg 작약을 탑재하여 파괴력도 강해서 중순양함 정도는 간단히 격파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항적조차 적어 발견하기도 어렵다. 대잠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중순양함이 (대잠 장비를 갖춘 구축함이나 경순양함이 호위하지 않는) 단독작전에 나섰는데 주간도 아닌 야간(새벽)에, 완벽한 기습에 성공한 잠수함이 투사한 어뢰를 발견하고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렇게 완벽한 기습이라면 전함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공고급 순양전함과 장갑이 비슷한 시나노가 미국 잠수함의 뇌격에 가라앉은 상황과 I-19에 의해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자기를 노리고 직접 사격한 것도 아닌 눈먼 어뢰 한 대 맞고 중파된 사례도 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경우 와스프를 노린 어뢰가 흘러나가 맞았는데 이 경우 제대로 걸리면 전함도 큰 손상을 입는다.[5] 유족들이 계속해서 살인마라고 비난하는 편지와 전화를 보냈다고 한다.[6] 주역인 퀸트 선장이 인디애나폴리스에 타고 있었고 표류중 상어에 동료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뒤 평생을 상어 사냥에 바쳤다는 설정이다.[7] 참고로 하시모토는 1945년 12월 열린 맥베이 대령 재판에도 증인으로 출석했었고, 1946년 초에야 일본으로 돌아왔다.[8] 생존한 승조원들은 자신들의 함장을 기리는 마음에서 그가 제독으로 전역했음에도 끝까지 '함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 해군의 Captain은 대령/함장 두 가지 뜻이 있다.[9] 전쟁 말기에 징집된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일그러진 투쟁 의식과 동료 장병에 대한 묘한 부채의식을 품은 경우가 많았다.[10] 다만 이 부분은 생각해보면 그냥 억지 주장이기는 하다. 이런 논리로 나오자면 침몰하면서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된 타이타닉호는 아예 프라모델로 발매되면 안 되지만, 이미 타이타닉은 전세계 모델메이커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다뤄지고 있다.[11] [人터뷰+] "넌 천안함이니까 싫어. 가까이 오지 마" , 천안함 영웅? 뒤에선 "패잔병"…두 얼굴의 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