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4:21:49

무자헤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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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지하드 깃발.svg
무자헤딘의 상징기. 검은 바탕에 샤하다를 적어 놓은 것으로 현재 이 도안은 알카에다 등 수 많은 테러단체에서 이용하고 있다.

1. 개요2. 역사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1989)2.2. 제1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1992)2.3.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1996)2.4. 탈레반 정권 (1996~2001)2.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2021)
3. 최근 상황4. 전술
4.1. 베트남 전쟁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개요

Mujahideen / مجاهد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들을 지칭하는 말. 아랍어로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를 뜻한다. 알파벳 표기로 MU(~하는 사람)+JIHAD(지하드)+IN(복수형)을 합한 것으로 모자헤딘, 무자히딘, 가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지하디스트'. 좁게는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을 뜻하지만 넓게는 단어의 뜻대로 지하드에 참전한 자로써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가 선포한 성전을 수행하여 반정부 단체나 무장 게릴라 조직이나 타국의 전쟁에 자기 스스로 나아가 개입한 외국인 이슬람 무장단체 등을 통칭한다.

즉, 한국으로 치면 의병과 딱히 다를 게 없는 표현이며 원칙적으로는 탈레반이나 헤즈볼라, 하마스 등의 이슬람주의 군사조직 모두 하는 일로 치면 무자헤딘이라고 할수 있으나 포괄적인 의미와는 달리 무자헤딘이 최초로 등장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부터 이들이 진화한 탈레반의 악명이 높다 보니 단어의 첫인상이 보통의 의미들보다도 훨씬 좋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흔하며 보통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 군사조직을 무자헤딘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도 사실은 다민족에 부족연합체들, 종파별로 따로따로 뭉쳐 있다. 차이가 있다면 탈레반, 헤즈볼라, 하마스 등은 출발이 지역에 뿌리를 둔 군벌 집단이지만 알카에다, IS, 보코 하람 등은 지역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원래 테러를 위해 떠돌아다니던 국제 범죄집단이 거대화, 체계화된 케이스다.

다만 이들이 모두 이슬람인 건 아니고 마오주의자들도 이쪽에서 싸운 경우가 꽤 많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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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M을 매고 예배를 드리는 무자헤딘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1989)

파일:main-qimg-275cb003b6c09299d5d50266fa3ae800-c.jpg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무자헤딘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침공하여 기존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소련을 돕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을 때 저항에 나선 사람들을 무자헤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보다 앞서 전년도인 1978년 군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공산당 정부군과 반군 군벌 세력 간에 내전이 벌어지는데 이들 반군 군벌을 무자헤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은 돌풍작전(Operation Cyclone)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에게 ISI(파키스탄 정보부, Directorate for Inter-Services Intelligence)를 이용해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고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60,000,000 달러를 지원하는 위엄을 보였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었던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과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마크탑 알히타맛(MAK, Maktab al-Khidamat)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 정보부에게서 집중으로 지원받으면서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무기를 공급하고 해외에서 오는 무자헤딘들을 훈련하게 했다. 중국 역시 무자헤딘에게 많은 양의 중국제 무기를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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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트에 '평화의 길로 가는 반소련 전사들'로 묘사된 무자헤딘들과 그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중국과 독일(당시 서독) 등을 위시한 반소 및 서방 국가들이 물자를 생산하고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하고 파키스탄 정보부가 이것을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자헤딘 알선책 역할을 담당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국가에 득시글한 실업자들을 막대한 오일머니로 고용해 파키스탄으로 보내고 파키스탄 정보부는 미국에서 오는 지원의 분배와 이슬람 국가에서 고용된 실업자들을 무자헤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은 하루에만 비자를 수백 명씩 받아갈 정도로 인적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관계도 아닌 만큼 하루에 비자 수백 개를 발급한다는 것은 실상 제대로 확인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 비자를 마구 '퍼 주었다는' 뜻이다. 즉, 이 사람들과 탈레반의 탄생에는 두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물론 소련과 미국의 공헌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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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전사들'로써 레이건 정부 시절 백악관에 초청된 무자헤딘 전사들

정부군을 상대로 내전을 치르던 무자헤딘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소련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무자헤딘들은 산악 지대와 협곡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로 소련군에 대항했다. 이때 이슬람권 전역에서 무슬림 전사들이 소련에 대항하고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은 무자헤딘을 적극으로 지원했고[1] 같은 이슬람 계열 국가들인 파키스탄과 이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도 이들을 지원했다.[2] 결국 소련은 10년간 15,000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1989년 2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2.2. 제1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1992)

파일:14_ch1_14.jpg
1992년 카불 공세 당시 나지불라 정부군을 향해 AKM 소총을 난사하는 무자헤딘 반군병들

소련이 물러났지만 무자헤딘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여전히 소련이 세우고 간 친소 정권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최대의 후원자인 소련이 물러났지만 소련군 철수 후에도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에 무자헤딘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의해 친족이 죽거나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 유가족들과 수도인 카불 시민들을 정치적 지지층으로 확보하던 나지불라 정권은 무자헤딘의 공격에도 건재함을 과시했다.[3] 한편으로 나지불라 정권은 내전 기간 동안 무자헤딘 진압을 앞세우면서 한편으론 무자헤딘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하거나 무자헤딘 반군병들에게 정부군으로의 항복, 귀순을 권유하여 투항한 무자헤딘 출신 반군병을 정부군 소속 민병대로 편입시키는 등의 삼중 전략도 사용하여 무자헤딘 세력들을 압박하기도 했지만 1990년 나지불라 정권을 겨냥한 정부군 장성들의 군사 쿠데타 시도가 벌어진 후 나지불라 정권은 정부군의 장성들을 쿠데타 혐의로 모두 숙청했는데 이로 인해 정부군의 군사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전세는 무자헤딘 측에게 유리해졌고[4] 1991년에는 나지불라 정권의 버팀목이었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해체된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다. 결국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외교,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던 소련마져 해체되고 국제사회의 여러 다른 나라들도 나지불라 정권의 몰락을 기정 사실화하고 무자헤딘들을 향후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을 차지할 신진 세력으로 인정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나지불라 정권은 1992년 4월 수도 카불을 겨냥한 무자헤딘의 대공세로 무너졌고 무자헤딘이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동년 무자헤딘의 지도자였던 시브가툴라 모자데디가 과도 정부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모자데디가 사임한 이후에는 망명 무자헤딘 수장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2.3.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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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역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대통령)
인물 아흐마드 샤 마수드 · 이스마일 칸 · 압둘 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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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국기(1992-1996).svg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의 국기

소련과의 10년간의 전쟁과 3년간의 공산정부와의 기나긴 전투는 무자헤딘의 변질을 불러왔는데 소수의 무자헤딘을 중심으로 뭉친 군벌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에겐 여전히 막강한 화력이 있었고[5] 자신의 거점을 기준으로 많은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었는데(주로 같은 민족) 이로 인해 점점 정치적 성향을 띄거나 이권을 추구하는 단체로 변해 버렸다. 비록 공산정권이 붕괴하고 라바니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민족(부족)의식이 매우 강한 아프가니스탄에서 2류 민족인 타지크족 출신인데 다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강경 원리주의 무슬림도 아니었다. 점점 힘을 가지며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군벌들이 라바니 정부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다시금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내전은 크게 80년대 대소항쟁과 1990년대 초 나지불라 정권에 맞서서 싸웠던 무자헤딘의 파벌들중 타지크계의 라바니마수드, 이 이끄는 자미아트-이 이슬라미와 파슈툰계의 굴부딘이 이끄는 히즈브-이 이슬라미 세력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는데, 도스툼이 이끄는 우즈베크계 준비시-이 밀리나 마자리가 이끄는 하자라계 히즈브-이 와흐다트처럼 수많은 군벌들이 라바니 측에 붙기도, 굴부딘 측에게 붙기도 하면서 점점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민중은 점점 전쟁에 신물이 나게 됐는데, 이때 내전을 종식시키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며 등장만 멋있게 한 단체가 탈레반이었다. 탈레반은 처음에는 굉장히 건전한 주장을 하며 빠른 속도로 민중의 지지를 얻으며 세를 불려갔는데, 많은 군벌들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협력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거대화하게 된다. 결국 1996년에는 탈레반이 라바니 정권을 무너뜨리고 수도 카불을 차지했고, 아프가니스탄 90%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정부 취급을 받게된다.

2.4. 탈레반 정권 (1996~2001)

파일:taliban government in kabul.jpg
수도 카불에 입성하는 탈레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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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에 대항하던 북부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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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은 북부동맹, 나머지는 탈레반이다

탈레반 정권 수립 이후에 무자헤딘의 각 파벌들은 탈레반에 흡수되거나,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개중 향후 위협이 될 만한 무자헤딘 지도자들은 살해당했다[6]. 민족, 사상적 기반에 의해 탈레반과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은 구 나지불라 정권 시절 생존자들과 힘을 합쳐 북부동맹을 창설하여 반 탈레반 무자헤딘들을 규합해 맞서 싸웠다.

2.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2021)

북부동맹의 무자헤딘들은 국제적 지원을 호소하며 탈레반과의 수적 열세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탈레반의 계속되는 전방위적 공격에 의해 점점 몰려가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던 와중 알카에다9.11 테러로 인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무자헤딘 세력은, 걸출한 지도자들이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테러에 희생됐음에도 불구하고[7]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란에서 파견된 특수전부대원들의 협력과 공중지원을 통해 테러 발발 2개월 만에 카불을 재탈환하며 헤라트 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무장 봉기를 통해 탈레반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건국 후, 이들은 정부 지침을 통해 공식적으로 무장을 해제했으며, 각 파벌의 유력 지도자들은 정계와 중앙정부의 요직에 발탁된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인해 형성된 군벌로서의 지역 장악력은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개혁을 시도하는 정부에게 있어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비록 북부동맹의 무자헤딘들이 탈레반에 맞서 현대화 개혁과 여성인권 증진 및 교육 권리의 향상에 적극적이었을지라도, 정부의 중앙집권체제화에 사회 안정에 있어서는 일종의 적폐세력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적지 않은 파벌 지도자들은 시기를 타서 탈레반과의 관계를 끊고 아프간 정부에 전향한 이들이라[8] 오히려 탈레반이나 시행할 악법을 국회를 통해 합법적으로 통과시키곤 했으며, 거의 대다수가 정치적 암투와 이권 갈등에 있어서는 폭력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아프간 정부와 협력하는 국제 협력 기구와 국제 안보지원단, 미군 중부사령부의 몰이해, 그리고 하미드 카르자이의 탈레반 포용 정책 강행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9] 이러한 상황에서 탈레반은 파키스탄 정보부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번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치안 공백이 큰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2021년 탈레반 대공세 때 구 북부동맹 출신 군벌 지도자들은 중앙정부에 협력해 탈레반에 대항하긴 했으나, 상상 이상으로 무능한 아프간 정부군의 졸전과 비협력적인 태도에 의욕을 잃고 항복하거나 해외로 도피하기까지 이른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의 도주와 카불 함락과 동시에 이들은 20년에 걸친 탈레반과의 항쟁에서 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탈레반과 싸우며 무자헤딘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

3. 최근 상황

한편 1988년, 소련군이 아프간서 철수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됐던 해외 무자헤딘들에 의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장 독립'이란 명분이 점점 흐려짐에 의해 투쟁 방향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주적 소련이 물러나고 나니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에 계속 남아 있자니 목표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무슬림들은 주로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 출신들이었는데 이런 국가에서는 이 무자헤딘들이 돌아오면 감시, 체포, 감금을 일삼고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이 강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게릴라전 경험을 쌓고 온 무자헤딘들을 각국의 세속주의 독재 정권이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다수 아랍 국가가 제조업이 발달되지 않은데다가 한창 원자재 값은 바닥으로 떨어지던 때였던 터라 경제력이 침체하여 실업자가 넘치는 상황이었기에 번듯한 직장을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닌지라 무자헤딘 처지에선 본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도 경제가 한창 성장하고, 풍족했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의 무자헤딘 용병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명예와 번듯한 직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아랍 등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외국인 용병은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몇 타 이슬람권 국가 출신 무자헤딘들은 소련 철수 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소련이 철군한 이후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의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에서 나지불라 정부군과 싸우기도 했고, 중동권 외의 다른 이슬람권 분쟁 지역을 찾아서 일종의 군사 고문관이나 용병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타지키스탄 내전,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체첸 전쟁, 아체 독립 전쟁, 필리핀 내전 등에서 군사훈련의 부재를 겪는 편에서 섰는데 이런 무자헤딘 중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이븐 알하타브(Ibn al-Khattab(ابن الخطاب)이다.

다만 부작용이 있다면, 전쟁 때는 좋았는데 이게 계기가 돼서 중동 본토 직송 와하비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 같은 것이 현지에 퍼지는 골 때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지 수니파 세력으로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의 주범인 샤밀 바샤예프를 비롯한 무자헤딘과 친한 세력들의 민폐와 또라이 짓에 학을 떼고 러시아에 붙은 체첸의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좋은 예시다.

그 악명 높은 예가 바로 알카에다. 더욱 나아가면 다에시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이후 항복을 거부한 판지시르 주가 반탈레반 성향 무자헤딘을 중심으로 저항군을 조직중이다. 잔존 아프간 정부군들 역시 합류중이고 부통령 암룰라 살레 역시 탈출해서 저항을 천명했다.

4. 전술

베트콩과 상당히 비슷하다. 초강대국 둘을 이긴 무장단체이기에 전투력이 강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게릴라 전술로 싸우면 소련군을 곧잘 엿먹인 건 사실이지만 정면 대결했을 때 소련군에게 늘 털리는 게 일상이었던 것까지도 베트콩과 똑같다.[10] 단지 무자헤딘이 골칫거리였던 것은 앞서 말한 게릴라 전술의 달인이였다는 것과 민간인과 도저히 구분이 어려웠다는 것뿐이였다. 애초에 정규군, 그것도 세계 1, 2위를 다투는 군대와 일개 게릴라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무장 조직의 전투력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다만 그렇게 털리고 또 털려도 덤빈다는 점에서 정신력은 충분하며, 결과적으론 소련이 철수하는 결과를 이끌어냈고, 이 전통이 쭉 이어지며 미국까지도 철수하게 만들면서 인류 역사상 최강의 강국들을 연달아 몰아냈다.

전술의 싸움에선 압도적 열세였지만, 전략적 우위를 쥐고 있었다는 얘기.

4.1. 베트남 전쟁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은 냉전 시대의 이념의 대리전의 양상이었다. 베트남전은 자유진영인 남베트남 정권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참전했고(물론 통킹만 사건이라는 빌미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참전함) 소련은 공산주의 성향인 북베트남에 암암리에 무기 및 장비를 지원했으며 반대로 아프간전은 소련이 아프간 내 공산주의 정권을 비호하는 명목으로 참전했고 미국 등 서방은 암암리에 무자헤딘(이슬람 저항세력)에 무기 및 군사기술을 전수해 소련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결국 전쟁은 미국, 소련 둘 다 장기전 끝에 철수로 종결된다.

다만 차이점은 북베트남은 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권 국가의 지원이 있어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력이 존재하던 군대였고, 무자헤딘은 서방의 무기지원을 받았으나 근본적으로는 토착세력이 스스로 자국과 이슬람 이념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민병대 성격으로 이렇다 할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릴라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현지에서 무장투쟁을 지휘하는 남베트남 중앙위원회(COSVN)를 넘어 하노이베트남 공산당이라는 그 권위가 도전받지 않는 유일무이한 정치적 지도세력이 있었다. 전쟁기 남베트남 내 투쟁 과정에서 전략, 전술은 어느 정도 현지 조직의 판단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열강의 군대로 치면 임무형지휘 같은 군사적 측면에서 일정부분 자율을 보장한 거지, 정치적으로 남베트남 베트콩이 하노이 중앙당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베트남의 경우에는 남베트남 내부의 베트콩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통합된 정부의 지휘를 받는 막타를 날려줄 국경 밖의 동조 정규군 세력 또한 있었다.[11] 이러니 베트콩이 실컷 게릴라전으로 남베트남과 이를 지원하는 미군과 미국의 전쟁 수행의지를 꺾어놓으면 남은 일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휩쓸고 내려와 이미 거의 시체인 남베트남을 주워먹기만 하면 되는지라 베트남은 일단 1975년 종전 이후 중국과의 국경분쟁 한번 빼곤 내외적으로 큰 분란없이 안정적인 통합 민족 국가를 성립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아무리 무자헤딘이 소련과 소련의 비호를 받는 현지 공산정권을 뒤흔들어 놓아도, 주요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모두 그 권위를 인정하는 정치적 구심점 자체가 없었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처럼 국민적 존경을 받으며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지도력을 보여준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들도 결국 실질적으론 여러 군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베트남의 경우는 이미 북베트남이라는 내부적인 정통성과 통치력이 검증된 경쟁 정권이 전략적으론 아무리 게릴라전이 중요했어도 어쨌든 부수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 전쟁 이후 패망한 월남 정권을 정규군으로 접수했던 반면 아프간에서는 아무리 무자헤딘들이 카불에서 공산정권을 몰아내도 국권을 접수하고 인수인계할 대안 집단이 없다 보니 결국 무자헤딘들은 사오분열하고 서로 권력다툼을 벌이다 이후 등장한 탈레반이란 신진 세력들에 의해 휩쓸려 버렸다.


[1] 이를 상징하는 영화가 람보 3,007 리빙 데이라이트다. 모두 주인공 존 람보제임스 본드가 무자헤딘과 손잡고 소련군을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2] 다만 미국이나 사우디, 파키스탄, 이란의 군사지원을 또 다른 외세 개입으로 여기고 지원을 거부하며 자력으로 소련을 몰아내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무자헤딘 반군들도 있었다.[3] 아예 나지불라 정부군이 무자헤딘의 공격을 격퇴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까지 있었다.[4] 무자헤딘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험이 있던 군 장성들까지 해임 또는 사형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5] 소련의 원조 중단과 나지불라 정권 몰락 이후 이들이 노획한 나지불라 정부군의 소련제 중화기와 차량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에 고철로 팔려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T-55, T-62, MiG-21 등을 소수나마 운용해 내전에 투입했다고 한다.[6] 하자라 족의 군벌 지도자 압둘 알리 미자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7] 9.11 테러 전날에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암살당했고, 압둘 하크는 미군 지원을 받아 탈레반 장악 지역에 침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탈레반에게 생포당해 살해당했고, 하크의 형이자 소련-아프간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아우 하크와 함께 소련군, 나지불라 정부군과 싸웠던 하지 압둘 카디르는 탈레반 정권이 붕괴된 지 약 1년 뒤인 2002년에 탈레반 및 알카에다 잔당 세력들을 색출하던 중에 알카에다 잔당이 저지른 폭탄테러에 암살당한다.[8]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대표적이다.[9] 물론 그 와중에도 탈레반 잔존 세력에 대한 싸움과 부정부패 척결에 적극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압둘라 압둘라 박사와 암룰라 살레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10] 그 예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말기인 1988년에 있었던 3234 고지 전투에서 3234 고지를 지키는 39명의 소련 공수부대와 약 250명 가량의 무자헤딘이 맞붙었으나 무자헤딘 측은 괴멸한 반면 소련군은 6명만이 전사했다.[11] 그나마 파키스탄군이 이에 근접하긴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은 무자헤딘에게 군수물자와 훈련을 제공하고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것 이외에는 직접적인 간섭은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