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3:20:09

거룩한 얼굴의 팔마리아 가톨릭교회

파일:The Cathedral Basilica of Our Crowned Mother of Palmar (0).jpg
영어Palmarian Christian Church of the Carmelites of the Holy Face
스페인어Iglesia Cristiana Palmariana de los Carmelitas de la Santa Faz

1. 개요2. 기원3. 현황4. 이야기거리

1. 개요

홈페이지, 유튜브 계정, 인스타그램 계정, 페이스북 계정, 트위터 계정[1][2]

공식 명칭은 "거룩한 얼굴[3]의 카르멜[4] 팔마리아 그리스도교회(Iglesia Cristiana Palmariana de los Carmelitas de la Santa Faz)"이며 흔히 팔마리아 교회(Iglesia Palmariana) 또는 팔마리아 가톨릭교회(Iglesia Católica Palmariana)라고 부른다. 콘클라베주의 교회 중 세간에 가장 알려진 곳이다. 팔마리아 교회는 전통주의 가톨릭 운동에서 가장 극단까지 나아가 명시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다른 교회를 창립하는 데까지 다다른 대표적 사례다.[5]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세비야 주(Provincia de Sevilla)[6] 작은 마을 엘 팔마르 데 트로야(El Palmar de Troya)에 있는 '우리의 여왕 팔마르의 성모 대성당(Catedral-Basílica de Nuestra Madre del Palmar Coronada)'에 '교황좌'를 두고 있다.

1975년 12월 가톨릭교회 내 인가받지 못한 거룩한 얼굴의 카르멜 수도회(Orden de los Carmelitas de la Santa Faz)로 시작되었다가 1978년 8월 거룩한 얼굴의 카르멜 팔마리아 그리스도교회라는 이름으로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했다.

2. 기원

팔마리아 교회의 맹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발생한 공인받지 못한 '엘 팔마르 데 트로야 성모 발현'과 그 당시 활발하게 등장하던 전통 가톨릭 운동에 있다.

파일:Clemente Domínguez y Gómez (1).jpg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Clemente Domínguez y Gómez)

1968년 3월 여학생 4명(Ana, Josefa, Rafaela, Ana María)이 엘 팔마르 데 트로야 마을의 한 작은 나무 옆에서 성모 마리아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사건은 곧 '팔마르 성모 발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엘 팔마르 데 트로야를 방문했으며 순례객 중 여러 명이 파티마·가라반달·메주고리예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기적을 경험했거나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성모 발현'은 곧 수도자·사제를 포함하여 추종자 수천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평신도 추종자 사이에서 환시를 받는다는 여러 '환시자'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는 평범한 보험중개인이었다가 후에 팔마리아 교회 교황이 되는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도 있었다.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Clemente Domínguez y Gómez)는 곧 여러 '환시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1970년 '성모 발현'은 교회 당국으로부터 공인받지 못했고 엘 팔마르 데 트로야 마을 관할 교구장 주교도 이를 외면했으나 추종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밍게스는 자신이 성모 마리아께 받았다는 환시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힘썼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도밍게스에게 이단·진보주의·공산주의 등 온갖 오류를 가톨릭교회에서 제거하라고 지시하셨다.'는 것이었다. '성모 발현'이 있은 지 7년이 지나 1975년 12월 도밍게스는 이 '환시'에 따라서 '거룩한 얼굴의 갈멜 수도회(Orden de los Carmelitas de la Santa Faz)'라는 이름으로 수도회를 설립했다. 그는 이 수도회가 '바오로 6세에게 충직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수도회로 인가받지 못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보전한다는 이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거한 개혁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도밍게스가 설립한 수도회미사를 포함한 7성사를 집전하고 사제를 양성해 줄 사제와 주교가 필요했다. 도밍게스는 당시 가톨릭 교회 내 전통 가톨릭 운동의 지도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자신을 주교로 성성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청한 부탁이 거절당하자 대신 남베트남 전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큰형 응오딘툭(Ngô Đình Thục) 대주교에게 부탁을 청했다. 응오딘툭 대주교는 베트남 후에 대교구장을 역임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의원으로 참석했던 인물로서 구설수가 없지 않았음에도 나름대로 명망 있는 성직자였다. 성 비오 10세회의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International Seminary of Saint Pius X)에서 교회법을 가르치다가 거룩한 얼굴의 카르멜 수도회로 넘어온 모리스 라기제(Maurice Revaz)가 '엘 팔마르 데 트로야 성모 발현은 사실'이라며 응오딘툭 대주교를 설득했다. 대주교는 수도회 측의 제안을 수락하여 1976년 1월 11일 도밍게스를 포함 수도자 및 사제 5명을 주교로 성성했다. 응오딘툭 대주교는 이 주교 성성으로 바오로 6세로부터 파문 제재를 받았지만 얼마 안 되어 자신의 주교 성성을 후회하며 바오로 6세에게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파문당한 당해에 파문 제재를 철회받았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허락 없이 가톨릭 전통주의자 사제들을 거듭 주교로 성성했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다시 파문 제재를 받았다.

참고로 응오딘툭을 엿먹인 모리스 라가제는 원래는 평신도 교회법 전문가였다. 1976년 1월 1일 응오딘툭 대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고 열흘 뒤 1월 11일 같은 대주교에게 주교로 서품받았지만 1978년 도밍게스의 교황 '즉위'에 반대하여 팔마리아 교회를 떠났고 1990년대 후반에 교황청과 화해했다. 도밍게스가 교황으로 '즉위'하는 데는 그의 수도회 내에서도 반대가 상당했기 때문에, 마리스 외에도 주교 1명이 엘 팔마르 데 트로야를 떠났다.

1978년 8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사망하자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와 같이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황이 되라는 명령을 받는 환시를 받았다."면서 교황에 즉위함과 동시에 자신이 세운 수도회를 가톨릭 교회와는 별개의 '교회'로 독립하여 주교를 추가로 성성하고 추기경단을 구성했는데 이러한 행동은 내부적으로도 반발이 상당했다. 엘 팔마르 데 트로야 성모 발현을 추종하던 가톨릭 평신도·수도자·사제들이 상당수 공동체를 떠났음은 물론이거니와 1976년에 성성받은 주교 5명 중 2명이 공동체를 떠났다. 이때부터 팔마리아 운동은 더 이상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성원이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도밍게스는 팔마리아 교회와 그 교황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좌의 사명을 승계한 후계 교회임을 선언했다. 한편 도밍게스는 1976년 5월에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었음에도 성직자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3. 현황

팔마리아 교회의 역대 교황은 다음과 같다.

1대 그레고리오 17세[7]
1978 8월 15일 ~ 2005년 3월 22일

2대 베드로 2세[8]
2005년 3월 22일 ~ 2011년 7월 15일

3대 그레고리오 18세[9]
2011년 7월 23일 ~ 2016년 4월 22일

4대 베드로 3세[10]
2016년 4월 23일 ~ 현재

파일:The Cathedral Basilica of Our Crowned Mother of Palmar (1).jpg

우리의 여왕 팔마르의 성모 대성당

파일:The Cathedral Basilica of Our Crowned Mother of Palmar (2).jpg

우리의 여왕 팔마르의 성모 대성당 내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세비야 주 작은 마을 엘 팔마르 데 트로야(El Palmar de Troya)에 있는 '우리의 여왕 팔마르의 성모 대성당(Catedral-Basílica de Nuestra Madre del Palmar Coronada)'에 '교황좌'를 두고 있다. 대성당에는 대성당 모든 사제가 매일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15개가 넘는 제대(Altar)가 있다. 그 경내에는 팔마리아 교회의 갈멜 수녀회가 위치해있으며 전력 자급자족을 위해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여러 개가 설치되어 있다.

팔마리아 교회는 1978년부터 2021년까지 교황 4명을 배출했다. 신자 수를 두고 여러 가지로 추측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고 많다고 해봐야 만 단위를 넘지는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11] 스페인 외에 포르투갈·아일랜드 같은 서유럽은 물론 나이지리아·케냐 등 아프리카에도 선교 사제를 파견하여 사목 활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활동 중이다.

파일:Liturgy in Palmarian Church (1).jpg
파일:Liturgy in Palmarian Church (2).jpg

팔마리아 교회의 전례

팔마리아 교회의 전례는 트리엔트 전례라고는 하지만 1983년부터 나름대로 변형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는 본래의 트리엔트 전례와는 차이가 있다. 미사성제와 7성사를 라틴어로 거행하지만 경문(經文) 일부를 변경했다. 1978년 바오로 6세 교황 사망 전까지 시성된 기존 가톨릭 성인은 물론 교회 창립 후에 독자적으로 시성한 성인들도 공경하는데 이런 성인 중에는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프란시스코 프랑코 등 논란이 되는 인물도 여럿이다.

2005년 3월 22일 초대 교황 그레고리오 17세가 교통사고 사망[12]한 후 2대 교황으로 즉위한 마누엘 알폰소 코랄(Manuel Alonso Corral)은 추기경단의 선거가 아닌 초대 교황이 생전(2000년)에 한 후계자 지명 덕분에 교황이 될 수 있었다. 2011년 7월 15일 그가 사망한 뒤에는 추기경 선거로 교황을 선출한다. 마누엘 알폰소 코랄은 원래 법과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로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1975년 12월 도밍게스가 창립한 수도회 합류를 위해 법조계를 떠난 사람이었다.

2016년 4월 22일, 3대 교황 그레고리오 18세가 돌연 교황직에서 사임함과 동시에 환속했다. 그는 이미 2015년부터 (훨씬 전에 팔마리아 교회를 떠난) 수녀 출신 여성[13]과 밀회 중이었는데 결국 자신이 사랑한다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교황직을 사임하고 교회를 떠났다. 두 사람은 가톨릭 교회로 원복하고 교황직을 그만둔 지 1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후임 팔마리아 교황 베드로 3세는 前 팔마리아 교황이었던 그를 파문했다. 그러나 2018년 결혼한 부인과 함께 내부 정보원과 협력하여 대성당에 잠입해 절도 행각을 시도하다가 한 사제의 제지를 받아 3명 다 부상을 입었고 결국 부부는 절도 및 상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부부는 2019년에 가석방으로 풀려났지만 재판은 이어졌다.

파일:Joseph Odermatt (1).jpg

팔마리아 교회 베드로 3세 교황

2016년 4월 23일, 그레고리오 18세가 사임한 이튿날 니트발덴(Nidwalden) 주(州) 출신 스위스인 요제프 오데르마트(Joseph Odermatt)가 베드로 3세 교황으로 즉위했다.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15년 동안 팔마리아 교회 선교사제로 활동한 일선 사목자 출신으로, 그의 재임기간인 2019년 1월에 팔마리아 교회는 처음으로 인터넷 사이트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을 개설했다.[14] 팔마리아 교회를 추스르려는 나름의 자구책인 것 같다.

4. 이야기거리

팔마리아 교회를 연구하려는 종교학 등 외부 연구자들은 교회에 관해 신뢰할 만한 자료나 정보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는다. 팔마리아 교회는 지금까지 교회 문건 및 출판물[15]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극히 경계하고 있는 데다 언론 취재는 허락하지도 않았고 2018년까지만 해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은커녕 사이트조차 없었기 때문이다.[16] 게다가 팔마리아 교회의 교황좌가 있는 '우리의 여왕 팔마르의 성모 대성당(Catedral-Basílica de Nuestra Madre del Palmar Coronada)'[17]은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2018년까지 전(前) 신자의 증언, 부분적인 자료 유출, 정보원의 불법촬영에 의존해서 관련 자료를 모아야 했다. 탐사 보도를 하려는 외부 언론인들도 연구자들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다.

팔마리아 교회는 다른 전통 가톨릭 운동과는 다르게 상당기간 부진을 면치 못했다.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가 교황으로 즉위하고 교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1978년 교황에 즉위하고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면서 상당수 지지자가 떨어져나갔지만 2000년 도밍게스가 자신이 구성한 추기경단의 선거에 맡기지 않고 마누엘 알폰소 코랄(Manuel Alonso Corral, 1936-2011)[18]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또 한 번 상당수 신자가 떨어져나갔다.

팔마리아 교회는 당연하게도 다른 전통 가톨릭 단체들로부터 완전히 배척당하며 심지어 교황공석주의자 단체들조차도 팔마리아 교회와는 접촉을 피하는 실정이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생전에 "우리(성 비오 10세회)가 그(거룩한 얼굴의 가르멜 수도회)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엘 팔마르 데 트로야의 독립'을 비판했다.

팔마리아 교회는 이미 교회 창립 전 수도회 시절부터 스페인의 민주화 운동에 반대하고 프랑코 정권을 미화하는 등 극우 색채를 띠었다. 따라서 스페인에서 이 교회의 신자가 됨은 곧 자신이 정치적으로 극우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 신자 중에는 흑인 평신자와 흑인 성직자도 있다.

팔마리아 교회는 정치적 극우성 외에도 그 비밀주의적 성향 때문에 외부의 이목을 끌어왔다. 기존 로마 가톨릭교회도 그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서 심심찮게 언론의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되는데 하물며 출발 시부터 폐쇄적 성향을 띄는 팔마리아 교회야 이런 언론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부터 몇 년에 한 번씩 스페인 언론의 탐사·폭로 프로그램 단골소재가 되곤 한다.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엘 팔마르 데 트로야 성모 발현 추종자 상당수는 이를 인정치 않고 도밍게스의 공동체로부터 이탈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성모발현'은 믿되 팔마리아 교회는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처음으로 엘 팔마르 데 트로야에서 '성모발현'을 목격했다는 여학생 4명(Ana, Josefa, Rafaela, Ana María)은 팔마리아 교회의 신자가 되지 않았고 이 교회가 성립되기 전에 '성모발현' 추종을 그만두었다.

팔마리아 교회의 성립 계기가 된 엘 팔마르 데 트로야 성모 발현이 일어난 1968년에 스페인은 정치·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참이었다. 스페인 내전프랑코 정권은 1967년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하기 전까지 비(非) 가톨릭 종파의 공개적 활동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19]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과의 여파가 스페인에도 미치고 같은 시기 민주화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스페인의 가톨릭교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자 기득권이 흔들렸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진보적 변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형성되었다.[20] 팔마리아 교회 창립의 중요 계기가 된 엘 팔마르 데 트로야 성모 발현 추종자들도 그 반대하는 움직임의 일부였는데 그들은 곧 당시 국제적으로 형성되던 전통 가톨릭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팔마리아 교회는 댄 브라운의 소설 오리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작중 사건의 흑막처럼 언급되는데 막바지에 밝혀지는 진실에 따르면 팔마리아 교회도 피해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작가가 팔마리아 교회를 작중에 등장시키기는 했지만 교회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는 별로 없고 트리엔트 전례 관련 묘사도 없다.


[1] 원래 팔마리아 교회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 인터넷 활용을 꺼렸으나 2019년 초에 교회 사이트와 유튜브 계정을 개설했다. 유튜브 계정은 악플 때문인지 댓글 작성 기능을 정지시켰다.[2] 원래 팔마리아 교회는 오랫동안 인터넷 활용은 물론 외부 취재를 꺼렸기 때문에 사이트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 개설 전에는 이 교회에 관한 영상 자료가 잠입 취재나 내부 정보원이 불법촬영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3] 성면(聖面)[4] 또는 가르멜, 갈멜. 가톨릭 교회에도 같은 이름의 유서 깊은 수도회가 있다. 가르멜 수도회 문서 참조.[5] 대다수 전통주의 가톨릭 단체들은 가톨릭교회와 별개의 교회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전통 가톨릭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교황청 정책에 반대한 데서 출발했지만 전통 가톨릭 운동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회 내부 문제의 개선을 꾀했지 팔마리아 교회나 복고 가톨릭교회처럼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꾀하진 않았다.[6] 스페인에서 주(Provincia) 행정 단위는 미국의 주(state)나 캐나다의 주(Province) 정도의 1급 행정 단위가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의 카운티(County) 정도의 2급 행정 단위라고 보는 것이 맞다.[7]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 Clemente Domínguez y Gómez.[8] 마누엘 알폰소 코랄, Manuel Alonso Corral.[9] 세르히오 마리아 이 마르티네스, Sergio María y Martinez.[10] 요제프 오데르마트, Joseph Odermatt.[11] 영어 위키백과에는 2011년 1500여 명이라고 서술했지만 이는 스페인 국내 한정이다. 스페인어 위키백과에는 교세 추산이 아예 없는데 신뢰할 만한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이다.[12] 이미 1976년 5월 교통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은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자신을 파문한 요한 바오로 2세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13] 이 사람은 팔마리아 교회를 떠난 후 이미 전남편과 낳은 자녀 2명이 있었다. 또한 밀회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즈음에 한 신문사에 자신의 누드 사진 공개를 허락했다.[14] 원래 팔마리아 교회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 인터넷 활용을 꺼렸지만 2019년 초에 동시다발적으로 사이트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을 개설했다. 원래 팔마리아 교회는 오랫동안 인터넷 활용은 물론 외부 취재를 싫어했다. 사이트와 SNS 계정을 개설하기 전에는 이 교회에 관한 영상자료가 잠입 취재나 내부 정보원이 찍은 불법촬영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폐쇄주의적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완화하고자 SNS를 이용하는 것 같다. 다만, 현재 팔마리아 교회의 계정은 댓글을 달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15] 선교와 신자 교육을 위한 출판물들.[16] 2019년 초에 동시다발적으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과 사이트를 개설했다.[17] 1978년 착공해서 2014년 완공되었다. 대성당 경내를 전부 담장으로 둘러쳤고 곳곳에 CCTV를 설치했다. 출입하려면 경내로 들어가는 문에서 확인을 받아야 한다.[18] 클레멘테 도밍게스 이 고메스 사후 팔마리아 교회 2대 교황으로 즉위했는데 교황 이름으로는 베드로 2세를 선택했다. 2011년 7월 15일 사망했다.[19] 스페인은 1868년 혁명의 결과로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정권은 종교의 자유를 폐지했다. 내전 때 국민군 진영으로 참전한 모로코인 사병들과 연관된 이슬람이 약간의 예외적 관용을 적용받은 것을 제외한다면 개신교 등 비(非) 가톨릭 종파는 좌파만큼은 아니더라도 국민군 진영의 박해를 받았다. 내전 동안 국민군 점령지역에서는 비(非) 가톨릭 종파 외국인 성직자들을 추방하고 모든 학교 및 예배당 상당수를 폐쇄했으며 비(非) 가톨릭 성경 번역본 출판이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1945년 전후 처리가 어느 정도 끝난 다음 공포된 '스페인 권리장전'은 '개인적 신교(信敎)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지만 여전히 비(非) 가톨릭 종파는 공개 집회를 열거나 법인을 등록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집회소를 알리는 표시조차 부착할 수 없었다.[20] 프랑코 정권의 수반이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바오로 6세 교황이 즉위한 뒤 자신이 전만큼 스페인 가톨릭교회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었다는 점, 바오로 6세가 요구하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야 했다는 점,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적발된 사제와 신학생을 감형하는 등 억지로 '자유주의적' 양보 조치를 취해야 했다는 점, 그리고 이런 상황 변화가 사회에 균열을 내고 자신의 통치력에 불리하게 작용했으면 작용했지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 등에 불만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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