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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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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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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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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파일:디에고 벨라스케스.png
본명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출생 1599년 6월 6일
스페인 세비야
사망 1660년 8월 6일 (향년 61세)
스페인 마드리드
국적 스페인
직업 궁정화가
스승 프란시스코 파체코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4. 기타

[clearfix]

1. 개요

스페인화가. 압스부르고 왕조 말기인 펠리페 4세 시절, 궁정 화가가 된 이후 평생 궁정화가로 지냈다. 바로크 시기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1]

사실적인 초상화로 유명하며, 특히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역대 최고의 초상화로 자주 거론되는 작품이다. 또한 대표작인 <시녀들>은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후대의 화가들에게까지 큰 영감을 주었다.

2. 생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12세때는 화가 프란시스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1617년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스승으로부터 문화적인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스승의 학술적인 동료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모임에 소개되었다. 1618년에는 파체코의 인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와 파체코의 끈끈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로는 솜씨있게 그린 종교화와 풍속화가 있다. 스페인은 풍속화의 역사가 짧았으나,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와 같은 작품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새롭고 정직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1622년, 젊은 화가가 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새로운 국왕인 펠리페 4세후원을 얻고자 마드리드로 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감을 안은 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1년 후에 왕의 초상화를 그려 궁정화가라는 공직에 임명되었다. 그 후 곧바로 마드리드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평생 궁정화가로 지냈다.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초상화를 벨라스케스 외에는 아무도 그리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3. 작품 목록

파일:디에고 벨라스케스 Las Meninas-시녀들.jpg
<시녀들>(Las Meninas)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크기는 316 x 276cm이며, 프라도 미술관에 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2]를 그렸다. 이 <시녀들>이라는 작품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미술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어본 작품이기도 하다. 165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처음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시녀들>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파일:인노첸시오10세의 초상.jpg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Portrait of pope Innocent X)
1650년에 제작. 벨라스케스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역대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초상화를 그릴 때 대상을 미화시키거나 정형화시키지 않고, 사실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캔버스로 옮겼는데, 이 작품에서도 특유의 화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소장.
파일:벨라스케스의 비너스.png
<비너스의 단장>(The Toilet of Venus)
1647년에서 1651년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캔버스에 유화로 크기는 177 x 122.5cm이다.

영국 런던영국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이 1906년에 구입하여 소장한다. 2023년 11월 7일 2명의 Just Stop Oil 시위자가 안전망치로 보호유리를 깨트린 이 일어났다.
파일:La infanta María Teresa de España.jpg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La infanta María Teresa de España)
1653년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캔버스에 유화이다.

펠리페 4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의 14살때의 시기를 그린 것이다. 상술한 <시녀들>의 주인공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이복언니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마리아 테레사의 새어머니인 마리아나의 초상화로 추정되었지만 후에 마리아 테레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레스가 당시 기준으로 구식이어서 그런 듯하다.[3] 초상화 속 저 패션은 이미 당대 유럽에서 구닥다리 패션으로 악명높았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사가 처음 시집갔을 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궁정에서 꽤나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그 밖에 작품으로는 <후안 데 파레하>, <무염시태>, <계란을 부치는 노파>, <펠리페 4세의 입상>,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천상모후의 관을 쓰는 성모>, <세비야의 물장수> 등이 있다.

4. 기타



[1] 후대의 화가들인 마네, 클림트, 고야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전부 그의 이름을 찬양했으며, 자기애가 엄청났던 피카소 역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른바 화가들의 화가였다.[2] 펠리페 4세와 그의 두번째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의 소생으로,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였다. 훗날 외삼촌이었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었다.[3]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안나의 초상화를 보면 드레스며,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다. 적어도 한 세대 전 유행이었다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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