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 ||||||||
| TOP 10 |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 후안 카를로스 1세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크리스토발 콜론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 아돌포 수아레스 |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 펠리페 6세 | 파블로 피카소 | 예수의 테레사 | 펠리페 곤살레스 | |||||
| 11위~100위 |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 이사벨 1세 | 세베로 오초아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호세 사파테로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 살바도르 달리 | 안토니오 가우디 | 엘 시드 | 알폰소 10세 | 페르난도 알론소 |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 프란시스코 데 고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안토니오 마차도 | 미겔 인두리안 | 미카엘 세르베투스 |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 로라 플로레스 | 펠리페 2세 | 카를로스 1세 | 로시오 주라도 | 그레고리오 마라뇬 |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 디에고 벨라스케스 | 이사벨 판토하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겔 데 우나무노 |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 비센테 페레르 | 카밀로 호세 셀라 | 페드로 두케 | 다니 페드로사 | 파우 가솔 |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 다비드 비스발 | 라파엘 나달 | 카마롱 데 라 이슬라 |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 산티아고 카리요 | 안토니오 반데라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미겔 에르난데스 | 후안 마누엘 세라 | 로페 데 베가 | 엘 그레코 |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 호아킨 사비나 |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 앙헬 니에토 | 마누엘 아사냐 |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 조르디 푸졸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 알레한드로 산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에르난 코르테스 |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 카를로스 사인츠 | 파퀴리 | 텔모 사라 | 몽세라 카바예 | 마누엘 데 파야 |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 이삭 페랄 | 플라시도 도밍고 | 미겔 길라 | 루이스 부뉴엘 | 엘 코르도베스 |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 라울 곤살레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 아만시오 오르테가 | 마놀레테 | 에두아르도 칠리다 | 페란 아드리아 |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 호아킨 로드리고 | 에밀리오 보틴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프란시스코 헨토 |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 세바 바예스테레스 | 이삭 알베니스 |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카르멘 아마야 |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 마누엘 산타나 |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 자코네로 | |||||
| ※ 출처 |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0,#050505> 오아하카 계곡 후작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 | |
| | |
| 본명 | 돈 에르난도 "에르난" 코르테스 데몬로이 이 피사로 알타미라노 (Don Hernándo "Hernán" Cortés de Monroy y Pizarro Altamirano) |
| 출생 | 1485년 12월 |
엑스트레마라두라바다호스 메데인 (現 엑스트레마두라 바다호스 주 메데인) | |
| 사망 | 1547년 12월 2일 (향년 62세) |
카스티야 데 라 쿠에스타 | |
| 작위 | 오아하카 계곡 후작 (marqués del Valle de Oaxaca) |
| 직업 | 콩키스타도르 |
| 신체 | 약 158 ~ 163cm[1] |
| 배우자 | 본처 카탈리나 후아레스 |
| 자녀 | 돈 마르틴 코르테스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도냐 후아나 코르테스 마르틴 코르테스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수마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
1. 개요
"나와 내 동료들은 황금으로만 나을 수 있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
멕시코의 강국인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초기의 콩키스타도르이다.
한국에는 '에르난 코르테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코르테스 본인은 페르난도 코르테스, 페르난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다양한 이름을 썼고, 그가 가장 자주 썼던 이름은 '페르난도 코르테스'인지라 해외에서는 페르난도 코르테스로 알려지기도 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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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에르난 코르테스/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평가
3.1. 자질
스페인 세력의 중남미 정복은 같은 콩키스타도르 파벌들 간에도 배신과 반목이 가득했다. 그 경쟁에서 코르테스가 승자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가장 교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 아즈텍 정복을 위해서는 일반적인 전쟁 외에도 이간질, 선동, 정보 교란, 문화 곡해와 사실 왜곡, 현지인 학살, 원주민 지도층 고문 및 매수 등 비열한 방법까지 가리지 않았고 이는 그의 세력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을 정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침략자로서는 탁월한 재능이 있던 자로, 이런 일들을 뒤탈 없이 벌일 수 있을 정치력, 법률 지식,[3] 군사 지휘까지 여러 자질을 겸비하고 있었다.아즈텍 제국 백성들이 인신공양 등 박해를 당하고 있다며 스페인 본국과 교황청을 선동하고[4] 예수의 이름을 팔아 이를 근절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지원금을 타낸 뒤 자신에게 협력하는 원주민들에게 기득권 지위를 부여하는 등 본국이 아즈텍 제국의 실태를 알기 어려운 상황을 최대한 영악하게 이용해먹었다.
전염병과 우수한 무기로 손쉽게 이겼다는 아즈텍 정복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반만 맞는 말로, 사실은 실패할 변수도 충분히 많았던 원정을 에르난 코르테스 개인의 역량(그리고 어느 정도의 행운)으로 뒤집은 원정이었다. 아무리 콩키스타도르에게 강철검, 기병, 화포, 배가 있었다고 하지만, 기관총이 없던 시대에는 충분한 병력차와 적절한 전술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었다. 줄루 전쟁 초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천하의 대영제국이 패배한 것, 슬픔의 밤 당시 코르테스가 죽기 직전까지 몰린 것에서도 알 수 있다.
3.1.1. 정치적 역량
당시 원주민들이 아즈텍에 200년간 불만을 갖고 있음에도 왜 코르테스가 당도한 이후에야 보복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멕시코 중부의 부족들은 영역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국사의 고조선이나 가야와 비슷하게 본체는 도시국가 체급에, 주변 지역 각 세력들을 느슨하게 결속하고 간접 지배하는 형태의 정치 체제에 머물러 있었다.틀락스칼텍 주변 부족들은 메시카족, 즉 아즈텍에게 원한이 있거나 지리상 틀락스칼텍과 더 우호적이게 지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들끼리도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그렇기에 느슨한 간접 지배 형태를 취한 아즈텍이 어렵지 않게 체급으로 협박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코르테스 원정대의 무력과 코르테스의 정치력이라는 구심점이 없었다면 그들이 서로 힘을 합해 아즈텍에 반기를 드는 그림이 나오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코르테스 원정대와 순순히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코르테스가 협상을 요구해도 난생 처음 보는 이들을 바로 믿는 원주민 부족은 드물었다. 틀락스칼텍조차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코르테스에게 맞섰고, 코르테스가 그걸 모두 막아낸 후, 스페인인들이 목표는 아즈텍 공격이라고 설득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코르테스의 밑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끌어들인 부족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배신할 위험이 있어서 후속 관리도 중요했다. 일단 2개 이상의 세력을 산하에 두면 이해관계와 행정 소요도 배가 된다.
원주민만 신경 쓰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콩키스타도르들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찍혔던 코르테스는 디에고의 친척이었던 판필로 데나르바에스에게 공격받았고, 원정대에는 벨라스케스의 인척이나 가까운 부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벨라스케스와 가깝지 않더라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추진된 원정에 불만을 품는 부하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원정 초기 월권 행위에 반발하는 벨라스케스파를 회유하고, 원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땐 타고 온 배를 파괴해 가라앉혀 원정대의 분열을 막았다.[5] 슬픔의 밤으로 모든 걸 잃고 틀락스칼라로 물러났을 때 겁에 질려 베라크루스로 물러나길 원하는 부하들을 강하게 휘어잡아 끝내 테노치티틀란 공략을 성사시켰다. 이때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서 얻은 황금 대부분을 잃어버린 데다가, 만일을 대비해 틀락스칼라에 남겨둔 돈과 귀중품을 그의 시종들이 가지고 주인을 찾아나섰다가 아즈텍인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해서 가진 건 걸치고 있는 옷과 검뿐인 빈털터리였다.
3.1.2. 군사적 역량
10대 중반과 20대 전부를 행정 관료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수준급 전투 지휘관으로 잉카를 정복한 피사로보다 월등한 상위로 평가받는다.[6]감안해야 할 점은 아즈텍이 화약 무기와 강철이 없다고 해서 그냥 만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즈텍은 중남미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국가였다.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며 산악 지형을 끼고 있어 수비 부담이 적은 타라스칸조차 참패하고 수세로 전환할 정도였다. 슬픔의 밤 때 특히 아즈텍은 거마책(拒馬柵)을 세워서 기병의 기동을 차단하고 투창기와 투석, 궁시로 보병의 움직임까지 제한한 다음 화공으로 괴멸시켜려 들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을 세워 공격했고 전술 습득도 빨랐다. 그리고 모든 남아를 군인으로 키우는 징병제라서 병사 충원도 쉬웠다.
물론 코르테스의 스페인인들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수가 겨우 수백 명이었다. 코르테스가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속이고 원정에 나섰을 때 총 병력 580명 중 석궁으로 무장한 궁수는 30명, 화승총을 든 총병은 2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코르테스는 상관인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의 복귀 명령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출항한 탓에 쿠바로 물러나거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해 조금의 실수도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어 선택지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오툼바 전투에서의 용맹도 그렇거니와, 나르바에스와 싸울 땐 비 때문에 밀랍을 막아놓은 대포를 탈취하는 특공에 앞장서 참여해 400명의 인원으로, 1,400명에 23문의 대포를 보유한 나르바에스 병력을 이렇다 할 손실없이 제압했다. 콩키스타도르 중에서 이 정도 숫자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사례는 보기 힘들다.[7] 늘 옳은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손에 들어왔던 테노치티틀란을 놓기 싫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다가 낭패를 본 슬픔의 밤 한 번을 제외하면 원정대를 위기에 빠뜨릴 만큼 큰 오판은 없었고, 그마저도 끝내 수습해냈다.
3.2. 통치 방식과 학살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와 스페인의 통치방식은 제국주의적 식민화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다만 코르테스 한 개인에 주목했을 때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비교하면 비교적 원주민에게 온건한 편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만큼 당시 다른 스페인 침략자들의 압제와 폭거는 코르테스가 양반으로 보일 만큼 악독했다는 말이기도 하다.가령 코르테스가 본국에 소환당한 사이 그의 엔코미엔다에 속한 원주민들을 다른 스페인인들이 학대하자 멕시코에 귀환한 뒤 그들을 위한 소송장을 써주었고 결국 승소했다. 이것은 자신의 영지민으로 편입된 원주민들에 대한 봉건제적 보호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코코 북동쪽 아콜우아(Acolhua)에 있는 테페틀라오스톡(Tepetlaoztoc) 엔코미엔다는 처음에는 코르테스가 다스리다가, 그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데오캄포(Diego de Ocampo)와 미겔 디아스 데아우흐(Miguel Díaz de Aux)를 거쳐서 코르테스의 가장 악명 높은 정적이었던 곤살로 데살라사르(Gonzalo de Salazar)에게 넘어갔는데 살라사르의 수중에 들어가자마자 어마어마한 착취를 당했다.[8]
물론, 그렇다고 코르테스를 타국을 침략하고 착취한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부적절하다. 그 역시 제국주의적 침략자였고, 스페인의 사제이자 역사가인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가 1552년에 출간한 《인도 파괴에 대한 간단한 설명》(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 / A Brief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 제5장의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르테스 역시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처럼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촐롤라 학살'과 '톡스카틀 축제 학살'이다. 일부 학살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촐롤라에서 함정을 팠다고 기록하지만 해당 내용은 당대의 전투 기록이 아니라, 이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 것이다.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이 직접 쓴, 나와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하여 나름대로 객관성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연대기 저자들은 코르테스가 말린체와 틀락스칼텍에게 속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촐롤라인들을 학살했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위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정황도 부정하기 힘들다. 이 사건은 통첩문을 읽어주지도 않은 채 바로 촐롤라 족장들을 쏴버리면서 진행되어 뒷날 코르테스의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코르테스의 앞뒤 행보를 보면 그게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못하고 음모를 꾸밀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역시,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이었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들은 사냥개를 풀어서 잔혹하게 살해했고, 아즈텍의 통치권을 정당하게 부여받은 콰우테목의 발바닥을 불로 지져서 고문했던 것은 그 역시 악랄한 제국주의자들 중 하나였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고, 문화유산에 대한 파괴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런 기조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사제와 사관이 처형되고 문헌들이 불타서 현재도 메소아메리카 문화와 역사 연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결국 코르테스가 원주민을 유럽인과 같은 동등한 사람으로 대했다기보다는, 완전한 정복 이후에 전략적 관점에서 일부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코르테스가 다른 엔코미엔다에 비해 착취를 덜 하고 온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막대한 공물을 착취하고 자기 영지의 궁전을 짓는 데 원주민들의 부역을 동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9] 애초에 엔코미엔다가 유럽의 봉건제를 멕시코에 이식한 것에다가 반란을 없애기 위한 탄압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었으니, 코르테스가 봉건 영주로서 봉건적인 통치를 수행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또 그렇게 부려먹은 영민들에게 영주로서의 보호의무를 수행한 것은 봉건제의 상식에서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이건 코르테스가 아주 현명했다기보다는 이 정도의 시대적 의무도 이행하지 못한 다른 콩키스타도르들이 상상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잔혹한 침략자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3.3. 전쟁 책임과 종합적인 평가
- 에르난 코르테스는 영웅인가? 아니면 침략자인가?
빼어난 능력과 큰 성취로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엘 시드의 뒤를 잇는,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기독교화의 주역인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한 때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19세기 전까지 코르테스는 라스 카사스 신부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확실히 코르테스 한 개인의 측면에서 그의 정치적, 군사적 역량은 당대에 뛰어난 축에 속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실증주의 역사학과 피정복자인 원주민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민족주의 사관이 대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시의 스페인인들이 스스로를 영웅화하고 아즈텍 제국을 악마화하는 한편,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왜곡과 편견을 가미한데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착취했다는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코르테스는 강제 개종과 제국주의적 정복을 일삼은 악당으로 재조명되었다. 때문에 스페인계 정치인과 틀락스칼텍 등 친스페인파 지배층에 의해 코르테스 우상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당연히 나머지 다수 원주민들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혀야 했고, 1820년대에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코르테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주류가 되며 현재는 이런 우상화 시도 역시 흑역사로 취급되고 있다.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전세계에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반성적 성찰이 급속도로 퍼지며, 그를 영웅시하는 시각은 침략의 당사자인 스페인을 포함해 적어도 학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10]
결국 확실히 해야 하는 부분은, 에르난 코르테스는 그의 업적을 떠나 현대 사학계에서 초창기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는 코르테스의 침략 명분이 전근대의 정복자들과 같은 영토 확장이 아닌, 제국주의자처럼 금을 약탈하고 원주민을 착취하며 부를 취하겠다는 식민화 및 사업적 명분이 강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의 콩키스타도르는 외교권을 지닌 정부 주체가 아니었으며 동인도회사처럼 국가로부터 일종의 투자를 받는 용병 내지 군벌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타국을 침략한 약탈자인 이상 전쟁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전개나 결과가 어쨌든 간에 신대륙의 부를 획득하려는 의도에서 선제공격과 침략을 감행했고, 아즈텍인들은 어떻게 보나 일방적인 피해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본국과 교황청의 식민화 및 무리한 카톨릭화 요구를 받아들여 무자비한 문화탄압을 감행한 것 역시 제국주의의 성질을 띄고 있다. 즉, 어디까지나 당대의 무식한 여타 군인 출신 콩키스타도르보다 온건했을 뿐이지, 그를 영웅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아즈텍으로부터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현대 멕시코 입장에서는 명백히 식민사관에 해당하며, 코르테스 역시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마찬가지로 침략자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 그렇다면 코르테스는 근대적인 제국주의 침략론 사상의 선구자인가?
코르테스가 초창기 제국주의적 침략의 대표적인 인물들 중 하나임은 틀림없으나, 이 시절 시작된 제국주의적 침략과 19세기에 가시적으로 발생한 사상으로서의 제국주의는 다소 구분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제국주의는 언어로 쓰여진 사상보다 그 양상이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형태로 현실에서 먼저 실현된 정치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이 18~19세기 유럽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정당화되어 심화된 게 백인의 의무같은 제국주의 침략론이다.
중세, 전근대까지의 제국주의는 남미의 황금과 사탕수수, 동인도의 향신료처럼[11] 식민지가 경제에 명확하게 도움이 되기에 침략을 감행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나 근대적 제국주의 관념이 완전히 정착된 근대부터는 설령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타국과의 경쟁심리와 국가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식민지를 늘리고 유지하려는 기조가 나타났으며, 이는 프랑스의 횡단 정책,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과 같은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실상은 프랑스 아프리카 식민지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이라는 황당무계한 것이었고,[12] 무솔리니가 그렇게 공을 들인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그냥 이탈리아의 돈먹는 적자덩어리였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사회적 배경에 기인한다. 제국주의 침략의 시작은 코르테스가 활동한 시절인 대항해시대인데, 당시는 제국주의 침략론이 언어적으로 실체화되지는 않은 중세였다. 이 때는 유럽권이 전근대적인 식민주의에서 이제 막 탈피하여 신항로를 개척하고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지닌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과 처음 조우하여 이들을 본격적으로 식민화하기 시작한 초기 제국주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즉, 중세 말에서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근대 초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극초반이었다. 따라서 그의 원정이 중세적인 영지화의 측면과 근대적인 식민화의 측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통시적인 관점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코르테스를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보는 시각은 명백히 잘못되었지만, 아예 그를 제국주의 침략론의 선구자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치부하는 시각은 객관성이 부족한 관점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큰 역사적 맥락에서 제국주의의 시작은 당대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인지한 것에서 비롯된 식민주의 광풍의 분위기에 원인을 두어야지, 그 흐름에 편승하여 개인적 성공과 영달을 추구했을 뿐인 코르테스라는 일개 콩키스타도르 한 명의 행보에서 모든 변화와 비극의 원인을 찾는 것은 학문적으로 부적합한 접근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시대적 전환의 스타트를 끊으며 세계를 휩쓸 제국주의 확산의 계기로 작용한 것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쟁적인 황금 수색이었으며,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의 탐험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실행된 것이었다.[13] 그리고 결과적으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의 성공은 '정복과 식민화, 야만인들에 대한 계도'라는 구도가 곧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성공과 국가적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당대 유럽의 제국주의적 분위기를 크게 고무시켰고, 이는 100년에 걸쳐 '정복하는 우월한 문명과 정복당하는 미개한 문명'이라는 이분법을 유럽인들에게 형성하여 곧 구체적인 근대적 제국주의 관념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코르테스의 성공은 분명 유럽권의 식민화에 대한 동기부여와 제국주의 열망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또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침략자들이 써먹은 문화왜곡 및 탄압과 강제개종 정당화론이 고스란히 유럽권의 제국주의 정당화론과 식민화 방법론으로 이어진 부분을 고려하면, 코르테스가 근대의 제국주의 사상에 아예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에르난 코르테스를 근대적 제국주의 침략론의 시조라고 보는 시각은 과장된 주장이겠지만, 코르테스의 정복 활동 자체만큼은 수많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식민화로 인해 받는 고통을 정당화하게 되는 19세기 제국주의 침략론이란 구체적인 사상이 태동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친 다수의 원인들 중 하나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3.4. 멕시코 현지의 평가
상술했듯이 영웅 취급을 받았던 것은 제국주의가 성행하던 시절의 옛말로, 학계의 연구에 따라 그의 악행들이 재조명되며 현재는 전반적으로 나쁘다. 다만 계층에 따른 이해관계로 굳이 정리하자면 소수의 부유층인 스페인계 백인 계층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나쁜 평가, 그리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들 사이에서는 전반적으로 무관심 혹은 '나쁜 놈이었긴 해도 너무 오래된 일이니까 내 알 바는 아니지' 정도의 인식이 있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한마디로 현대 미국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받는 취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1946년 코르테스의 유골이 재발견되었을 때[14]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콰우테목 동상 앞에서 화형에 처한 뒤 뼛가루는 공중에 뿌려버려야 한다고 분개하기도 했다.[15][16] 현재 코르테스의 유골은 그것이 보관되어 있었던 병원에 딸린 성당 벽에 묻혀 있는데, 위의 사례를 보다시피 원주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이 유골을 파괴하려 올지 모르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는 이 구역의 사진 촬영이나 관광을 일절 금지하고, 취재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1981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가 코르테스 흉상을 제막하는 등 코르테스 재평가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상은 얼마 뒤 원주민 민족주의자들에게 파괴당했다. 포르티요는 이듬해 1982년에 한 차례 다시 코르테스 기념상 제막을 시도했다. "메스티소 기념상(Monumento al Mestizaje)"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기념상은 코르테스 뿐 아니라 말린체와 두 사람의 아들인 마르틴까지 포함된 가족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념상은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항의 시위가 계속되어 외딴 곳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회적 평가에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멕시코에서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정치적인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는 점이다. 가령 멕시코에서 원주민들은 빈곤 계급이며 또한 인종차별의 대상이다. 과거 코르테스를 메스티소(그 중에서도 현지의 상대적 부유층)의 아버지로 재평가하려 했던 시도와 그에 대한 저항에는 여기서 결부되는 계급성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한다. 즉, "메스티소 전통을 지지하기에 스페인(또는 코르테스)의 유산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것이 단순히 혈통적으로 메스티소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서의 주류 백인 즉 "WASP(미국)"의 위치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17]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라도 객관적 역사를 따나서 계층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평가가 갈릴 수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멕시코 내에서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일 때는 이러한 인종적, 계급적, 정치적 갈등을 고려해야 한다.
4. 가계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카탈리나 수아레스 마르카이다(Catalina Suárez Marcaida)와는 사별하여 재혼했고,[18] 두 번째 부인은 스페인 본국의 백작 영애였던 후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데수니가(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였다.- 후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데수니가(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
- 루이스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아레야노(Luis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 사산
-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수니가(Catalina Cortés de Zúñiga): 사산
- 마르틴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아레야노(Martín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19] - 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이라미레스 데아레야노(Ana Ramírez de Arellano y Ramírez de Arellano)[20]
- 마리아 코르테스 데수니가(María Cortés de Zúñiga )- 루이스 데퀴뇨네스 이 피멘텔(Luis de Quiñones y Pimentel)[21]
-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수니가(Catalina Cortés de Zúñiga)
- 후아나 코르테스 데수니가(Juana Cortés de Zúñiga) -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리베라 이 포르토카레로(Fernando Enríquez de Ribera y Portocarrero)[22]
적장남이었던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부친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으나 누에바에스파냐의 국왕이 되겠다고 배다른 형 마르틴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 탈탈털리고 땅까지 빼앗겼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가 애를 쓴 덕에 목숨만은 건졌다. 반역 혐의로 한창 고문받던 도중에 카를로스 1세가 마르틴 코르테스의 고문관을 방문했고, 다음날 코르테스가 석방됨과 동시에 고문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휘하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스페인 국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 에르난 코르테스와는 달리 모국인 스페인에서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코르테스의 자손들은 아직도 스페인에서 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자 계통 혈통이 자주 끊겨 '코르테스'라는 성을 직접 쓰지는 않지만,[23] 어쨌든 바예 데 오아하카 후작 작위를 가지고 여전히 귀족으로 대접받고 있다. 멕시코에서도 귀족이었지만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에서는 더 이상 귀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 레오노르 피사로: 쿠바 식민개척민 여성
- 카탈리나 피사로(Catalina Pizarro) 1514년~1515년 - 후안 데살체도[24]
- 페트로 데살체도
- 말린체
- 마르틴 코르테스(Martín Cortés) 1522년 - 베르날디나 데포라스(Bernaldina de Porras)
- 아나 코르테스
- 페르난도 코르테스(Fernando Cortés)[25]
- 안토니아(Antonia)(카세레스 원주민)/엘비라 에르모시요(Elvira Hermosillo)
- 루이스 코르테스(Luis Cortés)
- 이사벨 목테수마
-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수마(Leonor Cortés Moctezuma) - 후안 데톨로사[26]
- 아즈텍 왕녀
- 마리아 코르테스 데목테수마(María Cortés de Moctezuma)
이외에도 원주민 현지처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었는데, 이 중 애인이었던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메스티소이다.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부친인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전부 인정된 것은 아니고 4명이 인정되었는데 코르테스는 죽기 직전 자신의 현지처들과 자식들을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메스티소의 시조라고 불린다.
코르테스의 16대손인 아스카니오 피냐텔리가 500년만에 목테수마 2세의 14대 후손인 페데리코 아코스타와 만나 화해의 장을 가졌다. #
5. 기타
카카오를 처음 먹어본 구대륙 인물이기도 하다. 코르테스가 남미에 있었던 기간 동안 자연히 카카오를 섭취해 그 효능을 몸으로 느껴본 뒤, 훗날 스페인에 가져와 카를로스 1세에게 진상해 귀족들과 상류층 사이에서도 퍼지게 되었고, 온 유럽에도 카카오가 전파되었다. 하지만 카카오 자체는 원체 쓴 맛이 강해 호불호가 극명했고, 이를 보다 먹기 쉽도록 설탕을 넣어 먹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달달한 초콜릿이 탄생하게 되었다.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와는 7촌 관계의 친척이었다.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었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에르난도 알론소 데이노호사(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였다. 딱히 신기할 일은 아닌 것이,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 관계로 얽히고설킨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평가가 갈리는 코르테스에 비해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하는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안 좋다. 이는 해당 국가들이 비록 메스티소 인구가 많긴 해도 각국의 전체 인구 중 메스티소가 아닌 순수 아메리카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27] 이렇다 보니 페루와 볼리비아의 백인들과 메스티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를 대놓고 찬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개인사를 보았을 때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있다. 특히 첫 번째 아내였던 카탈리나 후아레스와는 관계가 매우 나빴으나 그녀가 죽고 나서 재혼한 두 번째 아내 후아나 데수니가와의 부부관계는 좋아서 3명의 자녀를 낳았다. 원주민 처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해 달라고 교황에게 탄원하여 그 중 4명이 적자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보통 이런 식민지에서 난 사생아들의 경우 적자로 인정받는 일은 드물었고, 아예 잊거나 무시하고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후아나와 그녀 소생의 자식 3명에게 현지처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잘 돌봐달라고 죽기 직전에 당부까지 했을 정도였다.
업힐/멕시코/멕시코주/멕시코 수도권 항목에 있는 파소 데 코르테스 업힐이 바로 촐룰라를 함락한 에르난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으로 갈 때 이용한 길이다. 물론 멕시코 수도권의 자전거 라이더들은 아메카메카에서 파소 데 코르테스로 갔다가 다시 아메카메카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 촐룰라 방향으로는 오프로드라는 사정상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에르난 코르테스는 촐룰라에서 아메카메카 방향으로 향했다. 파소 데 코르테스 정상에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 길을 이용하는 장면의 동상이 있다. 지금은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멕시코시티 ~ 푸에블라 이동에 사용되고 있으며, 한때 베라크루스로 갈 때도 이 길이 사용되었으나, 150D번 고속도로보다 북쪽에 있는 멕시코 136번 국도가 왕복 4차로로 확장 개통한 뒤에는 답없는 쿰브레 데 말트라타 (Cumbre de Maltrata) 구간을 버리고[28] 이쪽을 경유한 뒤 멕시코 140D번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한다.
아즈텍 원정 도중 부하 하나가 현지인에게 중범죄를 저질러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부하를 살리면 현지인의 민심을 잃을 것이 뻔했고, 죽이자니 부하들의 불만을 살 가능성이 컸다. 이 때 타협안을 내놓는데, 일단 죄인을 나무에 매달아 교수형을 시키고, 멀리 떠났을 때쯤 죄수가 진짜로 죽기 전에 재빨리 구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6. 대중매체
-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인 코르테스 백작은 바로 이 코르테스가 모티브이다.[29]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코르테스의 행적을 까는 노래이다.
- <근육맨>에서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갑옷을 착용한 거한의 초인인 것으로 나오며, 잉카 제국 군사들을
아즈텍이 아니라?죄다 레슬링 기술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근육맨> 세계관에선 콩키스타도르가 죄다 레슬링 기술 하나씩은 구사할 줄 아는 초인이었나 보다변기맨의 부모가 코르테스에게 살해당하자 분노한 변기맨이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그의 레슬링 기술을 맞고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채(...) '헤라도맨'이란 이름의[30] 초인으로 살다가 '히간테맨'[31]과의 경기를 통해 '변기맨'으로 각성하게 되었다.
-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 달린 뱀》의 주역으로, 자신을 케찰코아틀 신이라 믿는 말린체의 도움을 받아 간교한 술수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다.
- 스팀 상점에 있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HD 판의 유저 창작 모드에서 코르테스의 아즈텍 탈출맵을 구독해서 할 수 있다.
- <문명 5>의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나온다. 중남미 국가로 플레이하다가 코르테스가 나오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케찰코아틀이 마테리얼 4권에서 ●●●● · ●●●●에게 피를 고통스러운 맹독으로 바꾸고 태양풍으로 뼈만 남긴 다음 영혼을 해골에 고정시킨 채로 10,000년 동안 지하 명계에서 노동을 시킬거라며 아주 지독한 저주를 퍼붓는데, 저 인물이 에르난 코르테스(エルナン ·コルテス)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황금수해기행 나우이 믹틀란>에서 코토미네 키레이가 주인공 일행과 가이드로 동행하는 원주민 테페우에게 범인류사의 중남미 문명의 산제물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에 없는 총과 기병, 산제물 의식을 거부하는 선신 케찰코아틀의 재래라는 소문을 퍼트려 몬테수마 2세를 속이면서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점거하고, 노예와 산제물로 잡혀가던 주변 부족들을 포섭해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고 언급한다. 코토미네가 말하길, 유능한 왕인 몬테수마 2세가 단순히 속은 건 아니고 산제물 의식을 계속 유지하다간 언젠가는 주변 부족들에게 아즈텍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코르테스를 포섭해 산제물 의식을 폐지하려 했지만, 말린체가 코르테스의 정부가 되면서 코르테스와 주변 부족들이 아즈텍을 멸망시키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몬테수마 2세의 영혼이 환생한 존재가 이 일로 인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면서 범인류사 자체를 증오한다.
-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에서 주요 보물인 '아즈텍 금화'의 기원을 헥터 바르보사가 엘리자베스 스완에게 설명해줄 때 언급된다. 여기서 코르테스가 아즈텍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금화들을 차지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신들의 저주를 받아 그 금화를 가진 자들은 모두 언데드가 되는 저주에 걸리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 NPC로 등장한다.
- 대항해시대 3: 플레이어와 경쟁하는 모험가 중 한 명이며, 플레이어가 아즈텍 관련 발견물을 먼저 발견하지 않았다면 코르테스가 선점하면서 아즈텍도 정복하게 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 라 프론테라 확장팩의 에피소드 연퀘에서 에스파니아 측 악역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말린체의 도움을 받아 아즈텍 정복을 노리다가 플레이어와 동맹을 맺은 콰우테목에게 쫓겨난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 NPC 제독 캐릭터로 등장하며, 다른 제독 캐릭터인 사이이다 알 후라의 연대기에도 조력자 격 선역 캐릭터로 잠깐 등장한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코르테스를 이런 캐릭터로 그렸다면 수많은 항의를 받았을 것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7. 참고 문헌
-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 2권, 에르난 코르테스 저, 앙헬 고메스 편, 김원중 역, 나남, 2009년.
8. 관련 문서
[1] 출처 유골 조사 결과 키가 158cm 정도로 측정되었지만 키가 줄어드는 파제트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어 발병 이전의 키는 163cm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2] 후술하겠지만 다른 침략자들이 코르테스보다 선해서 비겁한 수를 안 쓴 게 아니라, 코르테스만큼의 전문 지식이 없어서 아즈텍같은 큰 나라에는 쓸 엄두를 못냈거나 앞뒤 안가리고 일을 벌이다가 본국에 찍혀서 먼저 몰락한 것이다.[3] "왜 법률 지식이 중요하냐?"면 상관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원정에 나선 그가 명분에서 우위를 점하고, 국왕 카를로스 1세의 눈에 들기 위해선 법적으로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서 법학을 이수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여지지만 법률적 지식은 아주 해박해서 베라크루스 조성부터 시작해 아주 교묘하게 줄타기를 했다.[4] 속국들이 과한 조공으로 박해를 받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인 부분이 있지만, 식인 제의가 극심하다던가 백성이 탄압받고 있다던가 하는 부분은 확실히 아즈텍 왕실을 악마화해서 지원을 받으려는 의도의 선동이다. 정작 이때 핑계로 댄 착취는 정복 이후의 스페인이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는 게 함정.[5] 이에 대해 코르테스는 자신이 주도했다고 적고 있으며, 반대로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고마라는 코르테스가 결단을 내린 건 맞지만 가까운 부관들과 상의해 동의를 구한 뒤 행한 일이었다고 적었다.[6] 피사로가 잉카를 정복할 때, 코르테스의 조언을 받은 덕분에 손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렇게 조언을 받았음에도, 피사로는 잉카 지역 통치에 있어서 코르테스보다 더 많은 실책을 저질렀고 그만큼 피해도 코르테스의 원정군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적지는 않았다.[7] 이때 코르테스가 밤에 몰래 밀랍으로 대포를 막아 나르바에스의 포병들이 손놓고 당했다는 설이 떠도는데, 이는 소설에서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는 나르바에스 쪽에서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막아놓았으며, 나르바에스의 포병들은 코르테스의 특공대에 맞서 상당히 격렬하게 싸웠지 코르테스의 특공대가 들이닥쳤다고 냅다 대포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하진 않았다.[8] 특히 원주민과 정복자들을 잇는 중간매개로 엔코미엔다 지배체제에 편입된 원주민 상층 계급은 기존에 나눠 받던 공물 수입을 살라사르에게 거의 다 빼앗겼다. 그전에 주어지던 옷, 음식, 황금, 연료, 부역 혜택이 사라졌으며 엔코미엔다의 원주민 전체가 멕시코 시에 있는 살라사르와 그의 부인 및 집사들이 살 집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1530년에는 살라사르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게다가 배에 싣기 위해서 베라크루스로 살라사르의 물건들을 운반하느라 200명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9] 김윤경 (2013), <16세기 아스테카 제국의 정치적 식민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10] 한때 한국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아즈텍의 잔혹한 인신공양 유적 때문에 코르테스가 사학자들에게 재평가 받았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었으나, 해당 썰들은 과장 및 작성자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낭설로 가득 차있는 데다가 학계에서 코르테스가 재평가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무근이다.[11] 동인도 회사 문서 참조.[12] 현 시점에서야 사하라 사막에 상당한 자원이 잠들어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광물 자원의 산출량이 늘고 있으며 태양광 발전의 적합지라는 입지라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까지만 해도 사하라 사막은 그냥 똥땅이었다.[13] 역설적이게도, 이 두 국가는 황금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천연자원의 중요성을 괄시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전한 순간 몰락했다. 그래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에는 무적함대의 자리를 대영제국과 프랑스에 넘겨주고 만다. 어떻게 보면 남미에서 행한 무자비한 탐욕과 탄압의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 있는 부분.[14] 왜 "재"발견이냐 하면 멕시코 독립 직후, 원주민 정권에게 파괴당할까봐 유골을 소장하고 있었던 병원 측에서 숨겨버린 뒤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페인에서도 몇 사람만 알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중 한 명이 스페인 내란의 여파로 멕시코로 망명하면서 지배층에게 잘 보이려고 소재를 공개했다.[15] Benjamin Keen, 《The Aztecs Image in Western Thought》,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1971, p 468 .[16] 당시 백인 계열과 일부 메스티소가 영묘까지 만들어 환영하긴 했다. 다만 그때보다도 코르테스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큰 지금 이러면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것이기에 현재는 설령 상류층 백인 계열이라 해도 대놓고 칭송하는 분위기는 아니다.[17] 이는 멕시코 뿐 아니라 칠레, 아르헨티나 등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문제이다.[18] 코르테스와는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던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의 처제였다. 게다가 카탈리나는 자식을 가지지 못했고, 코르테스가 원주민 처들과의 사이에서 혼혈 자식들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부부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그래서 카탈리나가 죽은 당시부터 코르테스가 암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카탈리나 사후 그녀의 형제들이 살인 혐의로 코르테스를 고발하여 그는 수사를 받아야했다. 물론 코르테스가 부인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없어 수사는 종결되었으며, 증거불충분을 인정받아 코르테스가 승소했다.[19] 현재는 단절되었다.[20] 마르틴의 6촌.[21] 제5대 루나 백작.[22] 제2대 알칼라데로스 가술레스 공작.[23] 스페인식 이름은 외가들의 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데 포함되기는 한다.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의 작위 계승을 인정했다.[24] 정복자이자 엔코멘데로였다.[25] 베라크루스에서 법관으로 재직했으며, 오늘날에도 멕시코에 후손이 남아 있다.[26] 바스크의 상인.[27] 특히 적당히 유화책을 시전하기도 했던 코르테스와 달리, 피사로 일가는 훨씬 더 강압적이고 난폭하게 잉카인들을 복속시켰다. 그 중에서도 곤살로 피사로는 자기 위치만 믿고 당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망코 잉카에게 인권유린을 시전한 바 있었다.[28] 과거 기름도둑 (huachicolero)이었으며, AMLO 행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인해 컨테이너 및 버스를 대상으로 강도짓을 벌이고 있다.[29]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30] '헤라도'는 스페인어로 '아이스크림'을 의미한다. 당시 변기맨은 지금의 잔학초인이 아닌 수수한 관절기로 상대의 기브업을 유도해 승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는데 관중들은 이 방식이 마치 아이스크림마냥 밍밍하고 재미없다며 면전에서 비난하곤 했다.[31] '히간테'는 스페인어로 '거인'을 뜻한다. 여담으로 히간테맨이 변기맨의 회상속에서 나온 코르테스와 모습도 흡사하고 사용 기술도 유사한 걸 보아 코르테스의 후손일 수도 있는데 변기맨과의 경기에서 그의 필살기인 공포의 변기 흘려보내기의 영광스러운 첫 제물이 된 걸 감안하면 변기맨은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의 기억도 잃게 한 원수의 후손을 쓰러트려 복수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