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21 16:58:54

에르난 코르테스

<colbgcolor=#000,#050505> {{{#fff 오악사카 계곡 후작
돈 에르난도 "에르난" 코르테스 데몬로이 이 피사로 알타미라노
Don Hernándo "Hernán" Cortés de Monroy y Pizarro Altamirano, marqués del Valle de Oaxaca}}}
파일:external/www.nndb.com/hernando-cortes-1.jpg
출생 1485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엑스트레마라두라 바다호스 메데인[1]
사망 1547년 12월 2일 (향년 62세)
스페인 왕국 카스티야 데 라 쿠에스타
국적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왕국
직업 콩키스타도르
신체 약 158~163cm[2]
배우자 카탈리나 후아레스
자녀 돈 마르틴 코르테스
도냐 마리아 코르테스
도냐 카탈리나 코르테스
도냐 후아나 코르테스
마르틴 코르테스
레오노르 코르테스 목테주마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614px-Hernan_Cortes_Signature.svg.png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아메리카로2.3. 슬픔의 밤과 그 이후2.4. 말년과 최후
3. 정복에서 유리했던 점
3.1. 화약3.2. 강철 무기들3.3. 기병3.4. 주변 원주민들의 지지
4. 도시전설: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5. 평가
5.1. 자질
5.1.1. 정치적 역량5.1.2. 군사적 역량
5.2. 온건함5.3. 학살자 논쟁
5.3.1. 코르테스 옹호 측5.3.2. 코르테스 비판 측
5.4. 전쟁 행위 및 자체에 대한 책임5.5. 멕시코 현지의 평가
6. 가계7. 기타8. 대중매체9. 참고 문헌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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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콩키스타도르이다.

한국에는 '에르난 코르테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코르테스는 페르난도 코르테스, 페르난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다양한 이름을 썼고 그가 가장 자주 썼던 이름은 페르난도 코르테스인지라 해외에는 페르난도 코르테스로 잘 알려진 경우도 있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485년 엑스트레마라두라 바다호스 메데인에서 마르틴 코르테스 데몬로이와 도냐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코르테스의 공식 전기작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고마라는 코르테스의 부모가 모두 이달고 출신이며 그의 뿌리가 유서깊은 귀족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코르테스에 비판적인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 신부는 시종의 아들이며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단 그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그의 아버지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바 있고 그의 어머니 역시 도냐(doña) 칭호로 불리었기 때문에 최소한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시에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할 기회는 없다시피했고 많은 스페인인들이 레콩키스타나 이웃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부귀영화를 노렸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마르틴 코르테스는 아들을 관리로 승진시키기 위해 코르테스가 14세이던 시절 살라망카로 유학 보냈다.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체류 시절에 대해선 말이 많다. 코르테스가 고작 2년밖에 안 되는 시간에 대학이라도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고마라는 그가 프란시스코 데발레라의 집에서 2년간 문법을 배웠으나 건강 문제로 중단했다고 기술했다. 세르반테스 데살라사르와 안토니오 데솔리스도 주장은 동일했으나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질병과 적성,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다고 다르게 말했다. 코르테스의 친척인 후안 수아레스 데페랄타는 코르테스가 바야돌리드 시에서 법원 서기로 취직해 1년간 머물며 글과 서기의 사무에 배워 능통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코르테스를 싫어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코르테스가 법학사 자격을 땄으며 라틴어를 배워 구사할 수 있었다는 등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시절을 실패로 묘사한 전기작가들과는 다른 주장을 하였다. 법학사 자격에 대해서는 베르날 디아스도 코르테스가 그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으나, 정작 코르테스 본인은 법학사 자격이 있다고 밝힌 적이 없다.

그러던 중 라레스 기사단의 기사인 수사 니콜라스 데오반도가 제3대 산토도밍고 도독으로 임명되면서 자신의 고향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이달고들을 대거 모집하여 데려갔다. 이때 신대륙으로 향한 이달고들로 알론소 포르토카레로, 곤살로 데산도발, 안드레스 데타피아 그리고 코르테스가 있었다. 오반도는 코르테스의 친가 쪽 친척이었기에 코르테스는 연줄을 사용해 채용되었다. 하지만 다치는 바람에 첫 신대륙행은 무산되었고, 몇년간 스페인 남부를 떠돌다가 1504년 마침내 배에 올랐다. 코르테스의 아메리카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2. 아메리카로

1504년 코르테스는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알론소 퀸테로(Alonso Quintero)[3] 선장의 배를 타고 출발하여 산토도밍고에 상륙했다.

오반도는 코르테스를 아수아 시의 서기로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그곳에서 6년간 서기로 근무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집, 건축용 부지, 경작지를 보유하게 되었고 큰 수입을 얻는 등 부유해졌다. 1511년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 제독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쿠바 정복과 통치 임무를 맡겼는데 코르테스는 300명의 쿠바 원정대에 포함되었다.

스티븐 메리맨 등은 코르테스가 쿠바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뒷받침되는 증언이 없는데다가 스페인의 쿠바 정복은 쿠바 원주민들로부터 별 저항을 받지 않았으므로 대단한 업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4] 그나마도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맡은 임무는 행정직으로, 페르난디나 섬(현재 쿠바)에 건설된 바라코아 시의 알 칼데로 일했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관리로서의 성공은 물론,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어냈고 목장과 금광 경영을 통해 유복한 삶을 살았다.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 도독의 처제와 내연관계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에게 처제를 책임지라며 결혼을 강제했다.

그러던 중 1517년 쿠바에서 페르난데스 데코르도바(Francisco Hernández de Córdoba)라는 사람이 노예 수급을 위해 탐험 중 유카탄 반도를 발견하는 일이 있었고 그 섬[5]의 참포톤(Champotón)이란 마을에 상륙했다 원주민의 야습으로 26명의 사람들이 죽고 상당수가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탐험대의 수장인 페르난데스도 간신히 살아서 페르난디나 섬(쿠바)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원주민들이 금이 많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당시 신대륙을 담당하던 사람은 인도[6] 부왕(Virrey de las Indias)의 대행[7]이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de Cuéllar)였는데 이 보고를 들은 디에고는 유카탄 반도를 탐험하기로 마음을 먹고 후안 데그리할바(Juan de Grijalva)를 탐험대장으로 삼아 탐험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후안의 탐험대는 탐험으로 얻은 보물을 1척의 배에 실어 페르난디나 섬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계속 유카탄 인근을 탐험한다. 그리고 도착한 보물을 본 디에고는 (코르테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크게 실망하고 이번에는 탐험중이라 돌아오지 않는 후안 데그리할바를 찾는다는 구실로 다시 탐험대를 계획한다.[8]

그리고 이 3차 탐험대를 꾸리는 과정에서 (코르테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산티아고의 알단테를 맡고 있던 코르테스와 접촉하는데 당시 코르테스는 나비오 선박 3척과 상당량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때문에 탐험대 자금의 2/3를 코르테스가 지원하여 탐험대를 편성했다고 코르테스는 주장한다. 이후 1518년 10월 코르테스는 디에고에게 원정대장[9]으로 임명되어 원주민들과 물건을 거래할 권한만을 가진 채 유카탄으로 떠났다. 사실 벨라스케스가 코르테스를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코르테스의 충성심이 확고해 보였기 때문인데 이 시기 코르테스는 노골적으로 벨라스케스의 요구를 한참 넘어, 식민지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정복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코르테스의 정적들은 벨라스케스에게 로비를 하여 벨라스케스에게서 코르테스의 대장 임명 취소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내린 출항 중지를 씹고 1519년 2월 10일 600명의 스페인인, 300명의 안티야스 원주민, 12필의 말, 10문의 대포를 실은 10척의 배와 함께 유카탄 탐험에 나섰다. 명백한 항명이었다.

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상륙 직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게로니모 데아귈라르를 구조했다. 아귈라르는 선박 침몰로 떠내려왔다가 마야인들의 노예가 되었는데, 코르테스의 상륙 직전에 탈출한 몸이었다. 신대륙을 정복해 금을 열심히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코르테스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한 원주민들과 성대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멕시코 정복사의 첫 단원을 시작하며, 협상이 가능한 부족에게서는 금을 뜯어내고, 아닌 부족은 그냥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금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오로지 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 근처를 헤집고 다닌다. 이 와중에 포톤찬에 자리잡은 마야 계열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게 된다. 아길라르는 스페인어와 마야어를 알았고, 말린체는 마야어와 나우아틀어를 알았기에 이후 코르테스 원정대는 "코르테스 ↔ 아길라르 ↔ 말린체 등 마야인 ↔ 멕시코 원주민"의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의외겠지만, 이 탐욕스러운 이방인들을 중앙아메리카 근방의 모든 부족들이 적대한 건 아니었다. 특히 아즈텍인신공양을 위한 가축취급을 받던 약소 부족들은 (이유야 어쨌건) 증오스러운 아즈텍 부족들을 탈탈 털어버리는 콩키스타도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금과 각종 자원[10]을 제공하며 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했고, 코르테스는 이 동맹을 존중할 것을 맹세하며 동맹 부족들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된다. 이때 이전에 표류해와서 원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스페인인 선원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황금으로 가득한 제국'인 아즈텍에 대한 이야기가 코르테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고작 수백 명을 이끄는 안달루시아 촌뜨기는 인구 수백 만에 수만의 군대를 가진 대제국을 털어서 황금을 잔뜩 뜯어낸다는 미친 발상을 하고 만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금)을 찾아 열심히 서진을 시작하게 되고, 진군 도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부족들은 전부 다 때려잡았다. 다만 흔히 오해되는 것과 같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 형상은 모조리 과녁으로 간주하며 피로 물든 행군을 해나간 건 아니며, 가능하면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마주치는 부족마다 족족 몰살한 다음 약탈을 수행하면서 진군하기에는 코르테스가 지닌 인적 자원은 너무 적었고, 코르테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항하는 부족들에게 코르테스에게 협력하라는 전언을 보내두기도 하였다. 또한 아즈텍 동맹 부족들 중에서도 코르테스에 협력하는 부족들도 많았다. 가령 아즈텍의 동맹이었으나 그 지배를 환멸하던 한 부족장인 치코메코아틀은 코르테스를 환대하며 코르테스가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베라크루즈를 세우는 걸 도와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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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소식은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있는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에게도 전해졌다. 사실 몬테수마는 히스파니올라쿠바 섬의 학살로부터 도망쳐 온 원주민들을 통해 이 범상치 않은 이방인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후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장차 제국에 위협이 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는지 몬테수마는 코르테스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제국 각지로 첩보원들을 보내 이들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한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철제 무기나 불을 뿜는 막대, 타고 다니는 괴상한 짐승 등에 대한 정보가 황제에게 전해질 때마다 몬테수마가 이들에 대해 느끼는 위협과 공포심은 커져만 갔다. 비록 머릿수는 적을지라도 아즈텍인의 눈에 콩키스타도르들은 약점 따위는 없어보이는 무적의 군대처럼 보였다.

베라크루즈를 건설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던 코르테스에게 몬테수마가 보낸 사절이 와, 금을 선물하며 전쟁을 피하자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 사절들은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원한다며 사신을 모욕적으로 대하며, 콩키스타도르들이 가진 화약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여 쫒아낸다. 2번째로 온 사절은 더 많은 금을 선물로 건네며, 코르테스를 테노치티틀란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적대 부족과 싸움을 붙여 이들을 공멸시키려는 몬테수마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 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텍인들과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자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된다. 처음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인들처럼 자신들을 잡아먹을 거라 생각해 죽어라 저항했는데 스페인인들은 로마제국시절부터 인신공양식인이 엄격히 금지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 설득해서 화해한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던 코르테스는 평소보다 많은 아즈텍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한다. 코르테스는 여기서 물자를 보충할 계획이었지만, 촐룰라가 이상할 정도로 요새화되어 있는 것을 경계한 휘하 틀락스칼텍인들은 반대한다. 또한 몬테수마의 사절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도시의 지도자는 코르테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사실 스페인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코르테스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 이상 확인 같은 건 하지 않고 촐룰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는 촐룰라 학살로 이어진다.[12]

2.3. 슬픔의 밤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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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의 소식이 테노치티틀란에 전해지자 몬테수마는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이미 수적으로 훨씬 열세인 상태에서 틀라스칼텍인들을 막아냈고, 이번에는 아예 동맹 도시 하나를 함락시켜 버린 이 미지의 군대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느낄 만도 했다. 코르테스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말에 대한 공포심을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서 죽은 말의 시체를 묻어 철저히 은닉하기도 했다. 몬테수마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아즈텍의 군사력으로 이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얼마나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던 황제는 결국 직접 나와 이들을 환영하기로 결심한다.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에게 환대받았다.[13][14]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낸다. 이때 몬테수마의 딸과도 눈이 맞아 그녀를 애인으로 사귄다.

하지만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되고만다.[15]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천 명의 용맹스러운 콩키스타도르들과 수천 명의 틀락스칼텍 전사들을 지휘해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는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어버린다.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처형당하고만다.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세번이나 겪지만('슬픔의 밤', 1520.6.30), 코르테스 본인에겐 천만다행으로, 그리고 아즈텍에게는 애석하게도, 이때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는 마르틴 로페스는 무사히 생존해 후일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때 핵심인이 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재물들의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보물을 적게 소지한 자들은 생존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러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를 위한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가 압수해버렸다. 어차피 몰수 당할 보물에 뭐하러 집착하다가 목숨을 잃었는지...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km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즈까지 이어졌다. 후퇴과정이 고난이었는데 식량부족에 시달린 데다 아즈텍의 추격자들뿐만 아니라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이 난관을 코르테스는 부하들과 함께 질풍처럼 돌파했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한 적이 수차 있었다.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도 그렇게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창을 잘 써서 투창이 정확했다.

한편 그렇게 도망치던 도중 아즈텍의 유혈이 낭자한 의식인 인신공양을 목도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들은,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해 의식을 다 때려 엎고서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하고, 의식의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었던 1만 명이 넘는 아즈텍인을 살려내 귀가케 했다. 당시 아즈텍의 인신공양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얼마 후 아즈텍 원주민들로부터 유럽에서와는 다르게 소나 말, 돼지 같은 고기를 다량 제공하는 대형가축의 부재로 인하여 그 탓에 아직까지도 인신공양 풍습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서 피의 의식을 금지하고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게끔 명했다. 그 덕분인지 이후 인신공양은 사라지게 되었고, 제사의식은 가축을 도축하여 바치는 방식으로 바뀐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는 종교적 미화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건 코르테스가 다른 부족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는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16]

베라크루즈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가 보낸 나르바에스의 진압군과 마주하여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이번엔 무장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하여 또 한번 놀라운 승리를 거둔다. 게다가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세력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현지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던 데 있었다.[17]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고, 심지어 같은 스페인군끼리 전쟁도 벌여야 했다.

한편 오늘날 코르테스가 스페인 왕실에다 남긴 편지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그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텍은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황제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피사로의 무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18]

어쨌든 나르바에스를 격파하고 그 포로들을 자군으로 흡수한 코르테스는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마침 그가 슬픔의 밤으로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베라크루즈에 도착하였다. 이에 힘입어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공세를 펼쳤다. 아즈텍은 무력으로 주위 부족을 식민화하여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인신공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근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한 오랜 반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200년 동안이나 아즈텍에게 인간목장 취급을 당했던 원한으로 코르테스를 적극적으로 도운 부족은 틀락스칼텍인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부족들도 200년의 원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코르테스는 그 균열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 보장) 등으로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 병력을 지원받았다. 한편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천연두는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아즈텍의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아즈텍 제국의 중심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아즈텍 수도를 공격했다.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올 경우 아즈텍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정복군의 군함에는 대포까지 있어 거기서 포격을 당하니 아즈텍의 피해가 엄청났다.

그래도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갔지만, 코르테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아즈텍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총 인구 500만, 수도 20만[19]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다만 전투가 끝나고 아즈텍이 완벽하게 멸망해버린 건 코르테스의 의지보다는 동맹군의 원한이 더 컸다. 당시 아즈텍은 주변 부족을 공격하는 걸 거의 정육점에 고기 사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 했기에, 수백년 동안 인육과 종교의식의 제물로 사용되어온 데 따른 원한이 승리의 순간 폭발적으로 해방된 동맹부족들은 아즈텍의 거의 모든 인간을 학살해버렸던 것. 물론 코르테스와 그 부하들은 이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수십배가 넘는 동맹군의 폭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20]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까지 갔던 길이 훗날 멕시코 150번 국도가 되었으며, 1962년에 이를 고속화한 도로인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50번 국도의 선형을 보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갔던 길과 상당히 유사하다.

2.4. 말년과 최후

1521년, 아즈텍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한동안 떵떵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 본국은 한창 정권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던지라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일까지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야심만만한 젊은 새 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취임하자마자 곧장 독일에서의 내전과 대프랑스 전쟁, 대오스만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신대륙에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522년 코르테스는 공식적으로 테노치티틀란 도독에 임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코르테스는 1526년까지 멕시코쿠바에서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 그리고 1519년에서 152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자신의 무용담과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서한을 새 국왕에게 송달했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 아즈텍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밝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정복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적받고는 있지만.

하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여념이 없어 그저 코르테스가 보내오는 막대한 공물에 만족했던 카를 5세도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자 슬슬 코르테스의 위치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코르테스는 본국의 큰 지원도 없이 약간의 보급과 지원병만 가지고 멕시코를 통째로 정복한 인물로 군벌을 넘어 경쟁 식민지 국가를 세운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방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카를 5세는 1526년 코르테스를 월권 혐의로 전격 파면했다.

당연히 코르테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었지만, 자신을 파면한 카를 5세는 시시한 쿠바 원정대나 아즈텍인들 따위와는 현격하게 격이 달랐다. 그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은 데다 이탈리아까지 석권 중인 당대 유럽 최강의 승자였다. 파면에 대한 항거는 곧 대규모의 유럽 최정예 군대와의 전쟁, 즉 죽음을 의미했다.

별 수 없이 일단 귀국길에 오른 코르테스는 황제를 알현해 직접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황제의 환심을 얻으려 노력한 끝에, 코르테스의 호방함과 아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카를 황제는 코르테스를 다시 신임 해주기로 한다.

이리하여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1540년까지 다시 10년 이상 도독으로 군림하며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코르테스에게 왕의 대행자인 부왕의 지위 만큼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할 일이 없어지자, 1540년, 코르테스는 예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고 한다. 그는 드넓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자신이 당연히 큰 환대를 받으리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카를 5세의 태도는 냉담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카를 5세의 관심이 식은 것은 물론, 새로운 경력을 이어가기엔 코르테스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카를 5세는 그에게 두번 다시 신대륙에서 활동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그의 성공을 시기한 수많은 정적에게 시달려야 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활약을 멈출 생각이 없던 코르테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황제에게 지위와 연금을 달라고 탄원했지만, 카를 5세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이룬 업적에 부담을 느껴서 줄곧 무시했다. 코르테스에 대한 관심이 식은 이상 카를 5세에게 코르테스는 잠재적 정치 핵폭탄이었을 뿐. 하지만 코르테스의 끈질긴 탄원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한 번 알현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알현식 와중에, 절차에 따라 코르테스에 스스로를 소개할 것을 요구한 카를 5세는 이런 답변을 듣는다.
저는 폐하의 조상들이 물려주신 도시들보다 넓은 영토를 폐하께 바친 사람입니다. #

이 대답에 마음이 움직인 카를 5세는 이후 독일에서의 신구교 전쟁의 장교로 코르테스를 등용해 다시 한번 경력을 잇도록 허락한다. 코르테스는 여기서도 큰 활약을 하며 성공가도를 걸었다. 예순이 넘은 고령에 그냥 은퇴해서 지금까지 번 재산으로 먹고 살아도 무방한데 끝까지 활약을 멈추지 않은 것에서 코르테스의 기량이 돋보인다.

이런 활약상에 크게 감명받은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고, 코르테스는 카를 5세가 직접 참가한 원정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코르테스의 마지막 경력이 되어버렸는대, 알제리 원정 도중 폭풍을 만나면서 스페인의 함대가 박살나버리고, 코르테스와 카를 5세도 죽을 뻔 하다 간신히 살아 돌아올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실패였기 때문.

이에 크게 분노한 카를 5세가 코르테스를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대거 해임해버렸고, 이후 코르테스가 직위를 얻으려해도 카를 5세는 다시는 코르테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카를 5세의 계속되는 냉대에 지쳐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고, 출항을 위해 세비야로 왔으나 이질에 걸려 쓰러졌고, 설사병에 시달리다가 나중에는 흉막염으로 악화되었다. 그가 살해한 사람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상당히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코르테스는 1547년 12월 12일에 아내 후아나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난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서자들을 모두 적자로 인정했으며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누에바에스파냐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3. 정복에서 유리했던 점

아래의 사항들은 유독 코르테스만이 지닌 이점이라기보다는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공유하는 점들이다.

3.1. 화약

고작 중대나 대대 정도에 불과한 규모의 촌놈들, 그것도 일확천금을 노리고 모인 어중이떠중이들의 집합체로 사람이 고기보다 많은 (...) 아즈텍과 맞설 궁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무장의 압도적 우세 덕이다.

화약, 즉 대포라면, 제아무리 제국이라지만 기껏해야 돌로 만든 창과 나무 몽둥이가 주력무기인 놈들 상대로 싸워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적어도 도시 밖에서 대포를 쏴날리면서 협박하면 무언가 뜯어낼 것은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었고, 몬테수마 2세가 굳이 코르테스 일당을 테노티치틀란 내부로 들여보내는 본인들에게도 위험한 책략을 써야만 했던 이유기도 하다. 그 결과 코르테스 일당이 개박살나버렸지만, 아즈텍 제국도 고위 귀족 600명이 도륙당하면서 무주공산이 되었으니 그만큼 화포를 이용한 협박은 효과적인 대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든 콩키스타도르들이 금 만큼이나 절실하게 찾아다니던 것이 원주민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초석이었다. 프리츠 하버가 질소 합성법을 발명하기 전까지, 초석은 질소 화합물의 유일한 공급원으로써 절대적인 전략 자원이었으며, 비료의 핵심 원료임과 함께 화약의 원료였다. 의외로 아즈텍 제국에도 초석은 상당량이 존재했으나, 화산 꼭대기까지 등반해야 겨우 캐낼 수 있을 만큼 영 좋지 않은 위치에 있던지라, 굳이 쓸모가 있지 않다 여겨 초석의 활용법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별 시답지 않은 낮은 부가가치를 가진 저질 광물 나부랭이가 그렇게 무서운 물건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기사의 시대를 끝장내버린 화약의 위력은 아즈텍 입장에서 아무리 고급지고 두꺼운 가죽 갑옷을 둘러도 막아낼수가 없는 재앙과 다름없었다.[21] 맞으면 뭘 갑옷으로 입던 그냥 죽는 병기가 천둥치는 소리를 연상케 할 만큼 크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터져대니 더욱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총에 맞으면 그냥 죽고 안 맞아도 무섭다. 콩키스타도르의 입장에서는 명중되어도 적을 압도하고 빗나가도 압도한다. 게다가 당시 아메리카 문명의 방어구가 일반 병사들은 그냥 국부만 가린 맨몸, 그나마 주요 전사나 고위 귀족들이나 천갑옷과 가죽을 착용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승총까지 갈 것도 없이 원정대가 총과 함께 가져간 쇠뇌만으로도 살상력이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코르테스와 아즈텍간의 전투들을 보면 쇠뇌 사용 사례도 많이 나온다.

때문에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은 아무리 신뢰하는 원주민에게라도 절대로 화약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만들 정도로 엄청나게 친한 여자인 말린체에게조차도 다른 소원은 다 들어줘도 오직 초석으로 화약을 만드는 비법만은 일절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정복과정에서 화약무기는 결국 초기의 충격효과를 상실하게 된다. 계속 부딪히는 원주민들도 어쨌든 사람인지라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 익숙해져서 폭음 때문에 사기가 곤두박질 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들기도 했고, 습한 기후와 초석을 안정적으로 보급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총기나 대포의 유지 및 보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22] 당시 총기의 성능을 보면 알겠지만 연사나 속사가 불가능하였고, 그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개발된 전술들이 많았지만, 또 그러기엔 보유한 화기의 수량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원주민 제국들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흔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화약무기의 일제 사격에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무너지는 원주민 군대 같은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23]

3.2. 강철 무기들

어쨌든 제 아무리 총과 대포가 강력한다 한들, 총탄과 포탄과 화약이 허공에서 뿅하고 튀어나올 수는 없고, 실제로 코르테스 일당은 정복 전쟁 후반에 들어서는 심각한 보급 부족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총포가 없어도 콩키스타도르는 충분히 치명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톨레도강철로 만들어진 각종 냉병기와 갑옷들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이며 철제 무기를 극한까지 발달시킨 유럽인지라, 당시 세계 어디를 살펴도 유럽제 보다 대단한 철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유럽보다 훨씬 뛰어난 초특급 철광을 가진 몇몇 나라들 밖에 없었다. 다마스쿠스 강철만큼의 명성은 아니어도, 스페인도 엄청나게 품질이 뛰어난 철광들을 보유하고 있어 철제 무기들의 품질이 대단하기로 유명했다. 마드리드 남부 톨레도 지방의 철광산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스페인은 형성과정에서 긴 전쟁통을 겪은 나라이며, 무슬림과도 기나긴 싸움을 해왔기에 금속을 사용한 무기제련에 둘째간다면 서러울 나라였다.[24]

단단한 강철무기로 아즈텍인들의 빈약한 가죽갑옷 정도는 갑옷째로 절단할 수 있었고,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은 흑요석 무기로는 흠집은 커녕 오히려 내리친 흑요석 무기를 박살내버렸다. 같은 강철 무기로도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풀플레이트를 두르고 있는 중무장 전사를 아즈텍인들이 쓰러트릴 방법이라곤 때거지로 달려들어 두들겨 패서 죽이는 것 뿐이었다.[25]

이에 수백년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발달한 스페인 군인들의 전투실력이 더해져 원주민 전사들을 무참히 무찌를 수 있었다. 반면에 아즈텍 제국의 전사들은 소위 '꽃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사살보단 포로획득을 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치뤄 왔으므로 살상을 위한 기술이 아닌 제압과 포획을 위한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물론 통상적인 절멸전쟁을 치른 경험도 있었으니 충돌 과정에서 전멸 전쟁의 경험도 살아났을 테지만, 여전히 흑요석과 강철의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3.3. 기병

더불어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지 않던 을 이용한 기병들의 공격은 아즈텍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상대였다. 사실상 원주민 군대는 기병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했다. 오툼바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숙련된 기병 한명이 튼튼하게 무장한 채 달려가 적진을 돌파하고, 지휘관을 살해하여 아즈텍군을 무너뜨리는 모습이 아즈텍 정복과정에서 수차례 나온다.

3.4. 주변 원주민들의 지지

그 외에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코르테스는 주변 원주민들의 정보를 상당히 수집했고, 아즈텍이 인신공양, 약탈로 인하여[26] 타 부족들의 원한을 산 점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당장 틀락스칼텍만 해도 수천명의 전사들을 지원했고, 수차례의 전투 뒤에 결국 코르테스 쪽으로 돌아선 부족들에 의해 아즈텍은 포위된다. 콩키스타도르들의 숫자는 한 줌밖에 안 되었지만, 수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아즈텍과의 전투에 동참했다.

4. 도시전설: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

"처음 본 백인들에 놀란 원주민들은 그들을 신으로 여겼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은 환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서 아즈텍을 멸망시켰다."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곳 원주민들도 다른 대부분의 문화권들에서 그러하듯이 매우 낯선 이방인들에게 적개심을 느꼈으며, 이를 전투로 해결하려 했다. 심지어 코르테스 이전에도 원주민들은 이미 백인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콩키스타도르들도 자신들이 금을 약탈하러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콩키스타도르들이 신으로 환대받으며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는 잘못된 지식은 사실 복합적인 요소와 정보의 왜곡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전설인데, 우선 몬테수마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환대하는 듯한 서신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서신이 코르테스가 아즈텍 부족들을 초개처럼 쪼개면서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중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는 탐욕스러운 신을 환대하는 것이 아닌, 강력한 정복자에게 보이는 굴복으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코르테스 자신도, 아즈텍 정복의 정당화와 스페인 본국에서의 입지 향상을 위해, 자신의 행적을 필요 이상으로 장식했다.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분명 '우리들을 신으로 여겼다.'라고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코르테스가 몇 번의 군사적 승리를 거둔 뒤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원주민들은 일단 코르테스의 요구에 굴복해 금을 주는 일도 있었으나 결국 코르테스 + 코르테스 측에 붙은 원주민 동맹군들과 치열한 대전쟁을 벌였으며 슬픔의 밤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르테스는 하마터면 원주민들이랑 싸우다가 부하들과 함께 모두 황천길 갈 뻔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코르테스가 중재용으로 내세웠던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의 경우 분노한 원주민들에게 중재역이 되긴커녕 오히려 죽임당하기까지 했다. 이것만 봐도 아즈텍 제국의 원주민들이 그를 뭘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동맹군들이 된 원주민들도 순순히 협력한 게 아니라 초기엔 죽어라 그들과 싸우다가, 스페인 측이 인신공양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아즈텍을 친다는 목적이 같아서 협력한 것에 가깝다. 물론 이들도 인신공양이나 식인의 풍습을 지니고 있었고, 초기엔 이들이 이를 답습 못하게 막았던 코르테스도 결국 그들과 함께 싸우면서 사기 증진용이랍시고 가끔은 이런 짓을 하게 허가해주기도 했다.

사실 아즈텍을 완전히 함락했을 때 코르테스 입장에서 아즈텍 고위층들이 다 골로 가는 것과 수도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은 이후의 통치를 생각해볼 경우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코르테스는 동맹군의 무차별 학살과 파괴를 최대한 말려보려 했으나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동맹군은 그간 아즈텍에 시달림으로써 쌓인 원한과 울분을 마구잡이 학살로 풀려 했고, 코르테스도 끝내 그들을 막지 못했다. 이를 볼 때 코르테스는 자기 아군이었던 동맹군 위에서도 늘 완벽하게 신처럼 군림하지는 못 했음을 알 수 있다.

콩키스타도르와 케찰코아틀을 연관지은 건 그 신격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케찰코아틀 문서에서도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이 이야기는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 후에 만들어진 전설에 가깝다. 애시당초 당대에 코르테스와 동일시된 건 주신 케찰코아틀이 아니라 토필친 케찰코아틀이므로 설령 동일시됐더라도 복수심을 품은 영웅에 가깝지 신으로 섬겨질 리는 없다.

5. 평가

5.1. 자질

분명 탐욕스럽고 음험한 일면이 있었다. 콩키스타도르의 중남미 정복은 상호간에 배신과 반목,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었고 그 경쟁에서 코르테스가 승자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가장 교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뛰어난 리더로서 콩키스타도르를 통틀어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치력, 법률 지식,[27] 행정 경험, 군사 지휘, 일신의 용맹에다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의지까지 여러 자질을 겸하고 있었다. 여타 콩키스타도르들과 마찬가지로 하급 귀족이었지만 10대 중반의 유학생활을 통해 고급교육을 수학하고, 시청 서기로 시작해 20대 대부분을 행정업무로 보낸 경험은 그에게 여타 콩키스타도르들과 차별화되는 장점을 갖게 해주었다.

전염병과 우수한 무기로 손쉽게 이겼다는 아즈텍 정복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사실은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던 원정을 대장 코르테스의 개인의 역량(그리고 어느 정도의 행운)으로 뒤집은 원정이다.

5.1.1. 정치적 역량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정치적 역량으로, 아즈텍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 코르테스 최고의 무기였다.

흔히 아즈텍 멸망의 원인으로 폭정과 인신공양을 통한 주변 부족들의 원한을 거론하는데, 인신공양의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커진 몬테수마 1세 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폭정이 지속되었음에도 왜 코르테스가 당도한 이후에야 보복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멕시코 중부의 부족들은 영역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국사고조선이나 가야와 비슷하게 본체는 도시국가 체급에, 주변 지역 각 세력들을 느슨하게 결속하고 간접 지배하는 형태의 정치체제로 머물러 있었다. 강 건너, 정글 너머는 그냥 남이었고, 풍속도 이해관계도 상이해 서로 통합이 되지 않았다. 테노치티틀란 주변 부족들은 메히카족에게 원한이 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동질감은 전혀 없었고, 그들끼리도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그렇기에 느슨한 간접지배 형태를 취한 아즈텍이 어렵지 않게 각개격파하고 찍어누르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코르테스가 발을 들이는 그 순간까지도 이들은 한 깃발 아래 뭉치지 못했다. 그래서 연구가 진척을 거듭하고, 수정주의가 대두된 지금도 아즈텍에 큰 원한을 갖고 있는 데다 수적으로 주력이었던 원주민 동맹군을 아즈텍 정복의 주역으로 보는 연구자는 없다. 코르테스 원정대의 무력과 코르테스의 정치력 외에는 그 원주민들을 한데 뭉칠 가능성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코르테스 원정대와 순순히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코르테스가 협상을 요구해도 난생 처음 보는 이들을 바로 믿는 원주민 부족은 드물었다. 특히 아즈텍에 대한 원한이 그 누구보다 거대했던 틀락스칼텍조차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코르테스에게 맞섰고, 코르테스가 그걸 모두 막아내고, 스페인인들이 패배자를 잡아먹지 않으며 목표는 아즈텍 공격이라고 설득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코르테스의 밑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끌어들인 부족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배신할 위험이 있어서 후속 관리도 중요했다. 물론 아즈텍 바로 옆에 있어 배수진을 친 틀락스칼텍은 동맹을 끝까지 지켰지만. 즉, 코르테스를 신뢰하지 않는 도시와 부족들의 공격을 큰 피해 없이 막아낸 다음, 그들과 협상해 동맹을 맺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후속 관리까지 해야 했는데 이걸 상호간에 동질감이 없는 멕시코 중부 전역의 부족들로 확대해야 했다. 일단 2개 이상의 세력을 산하에 두면 이해관계와 행정 소요도 배가 된다.

말린체를 비롯한 협력자들을 통해 현지 사정을 빠르게 파악한 다음 자신의 원정대를 도시국가 연합체의 '패권 도시국가' 위치로 받아들이고, 각 부족들은 그 패권 도시국가 중심의 연합체에 속하는 '예속 도시국가'로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예속 부족들의 갈등과 정치적 상황을 조율해서 자신이 지배자를 임명했고,[28] 예속 부족들 간에 갈등이 생기면 직접 조율하고, 아즈텍의 공격을 받으면 군대를 끌고 가서 방어에 협력하기도 했다. 아즈텍에게 누구보다 큰 고통을 받던 틀락스칼텍부터 테노치티틀란과 삼각동맹을 형성하던 텍스코코까지 다양한 원주민 동맹군들을 성공적으로 조율해 일찍히 중미 어느 부족들도 하지 못했던 테노치티틀란 공략을 해냈다.[29]

원주민만 신경 쓰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콩키스타도르는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벨라스케스에게 찍힌 코르테스는 그의 친척 판필로 데나르바에스에게 공격받았고, 원정대에 벨라스케스의 인척이나 가까운 부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벨라스케스와 가깝지 않더라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추진된 원정에 불만을 품는 부하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원정 초기 월권 행위에 반발하는 벨라스케스파를 회유하고, 원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땐 타고 온 배를 파괴해 가라앉혀 원정대 분열을 막았다.[30] 슬픔의 밤으로 모든 걸 잃고 틀락스칼라로 물러났을 때 겁에 질려 베라크루스로 물러나길 원하는 부하들을 강하게 휘어잡아 끝내 테노치티틀란 공략을 성사시켰다. 이때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서 얻은 황금 대부분을 잃어버린 데다, 만일을 대비해 틀락스칼라에 남겨둔 돈과 귀중품을 그의 시종들이 가지고 주인을 찾아나섰다가 아즈텍에게 붙잡혀 살해당해서 가진 건 걸치고 있는 옷과 검뿐인 빈털터리였다. 여론을 제어하지 못해 아타왈파를 죽게 하고, 알마그로와 반목하다가 나중에는 본국인 에스파냐의 왕인 카를 5세와도 대립한 피사로와는 대조적이다.[31]

5.1.2. 군사적 역량

10대 중반과 20대 전부를 행정관료로 보냈음에도 수준급 전투 지휘관으로 잉카를 정복한 피사로보다 월등히 위로 평가받는다.[32]

감안해야 할 점은 아즈텍이 화약무기와 강철이 없다고 그냥 만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즈텍중남미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며 산악지형을 끼고 있어 수비 부담이 적은 타라스칸조차 참패하고 수세로 전환할 정도였다. 인터넷 상에선 꽃전쟁을 강조하며 그들이 마치 절멸전쟁을 못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33] 타라스칸을 상대로 한 전쟁은 일반적인 절멸전쟁이었다. 슬픔의 밤 때 특히 아즈텍은 거마책(拒馬柵)을 세워서 기병의 기동을 차단하고 투창기와 투석, 궁시로 보병의 움직임까지 제한한 다음 화공으로 괴멸시켜려 들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을 세워 공격했고 전술 습득도 빨랐다. 그리고 모든 남아를 군인으로 키우는 병영국가 체제라서 병사 충원도 쉬웠다.

물론 코르테스의 스페인인들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수가 겨우 수백이었다. 코르테스가 쿠바 총독을 속이고 원정에 나섰을 때 총 병력 580명 중에 석궁으로 무장한 궁수는 30명, 화승총을 든 총병은 2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코르테스는 상관인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의 복귀 명령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출항한 탓에 쿠바로 물러나거나 대대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병력은 수백에 불과해 조금의 실수도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어 선택지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러니 막 싸워서는 결코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원거리 지원을 담당할 궁사 자원이 극소수에 고위 장교와 정예 병력이 청동제 무기와 갑주를 무장했을 뿐 나머지는 경보병들로 이뤄진 잉카와 달리, 아즈텍은 틀락스칼라를 비롯한 피지배민족들에게 엄청난 공물을 착취해 말단 병사까지 당시 중남미 원주민들에게는 고급 방어구인 누비갑옷으로 충실히 무장시켰고 투척 무기도 풍부했다. 승리를 위해선 많은 고민과 치밀함, 용맹이 요구되었는데 코르테스는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오툼바 전투에서의 용맹도 그렇거니와, 나르바에스와 싸울 땐 비 때문에 밀랍을 막아놓은 대포를 탈취하는 특공에 앞장서 참여해, 400명으로 1,400명에 23문의 대포를 보유한 나르바에스 병력을 이렇다 할 손실 없이 제압했다. 콩키스타도르 중에서 이 정도 숫자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사례는 보기 힘들다.[34] 늘 옳은 판단을 내린 건 아니지만, 손에 들어왔던 테노치티틀란을 놓기 싫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낭패를 본 슬픔의 밤 한 번을 제외하면 원정대를 위기에 빠뜨릴 만큼 큰 오판은 없었고 그마저도 끝내 수습해냈다.

5.2. 온건함

과거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르난 코르테스는 무자비한 침략자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에 대한 평가는 차차 바뀌게 된다. 실상 그는 어떤 콩키스타도르보다도 원주민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지배자들 중 가장 온건하게 그들을 포용했다. 무작정 학살만 벌인 게 아니라 매수와 유도 등 피를 흘리지 않는 수단도 적절히 활용해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잔혹한 압제를 가하던 아즈텍을 타도하기 위해 침략자인 자신을 돕도록 만든 것이다. 이 정도면 제국주의 시절의 모든 정복자를 통틀어도 상당히 온건한 편에 속한다.

다른 콩키스타도르들의 아메리카 식민지 정벌과 비교해봐도 그러하다. 당장 금 때문에 서인도 제도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량 학살해서 본국 스페인에서도 비난을 받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에야르, 니콜라스 데오반도, 판필로 데나르바에스, 파나마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등 중미 지역에서 중미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잔인하게 저지르며 지금의 중미 국가들을 식민화한 바스코 누녜스 데발보아와 페드로 데알바라도,[35] 후안 데카바욘, 페드라리아 다빌라, 지금의 페루볼리비아 등 잉카 제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던 프란시스코-곤살로 피사로 형제와 디에고 데알마그로, 플로리다,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현재의 미국 남동부 지역에서 북미 원주민들을 죽였던 에르난도 데소토, 칠레에서 마푸체족 등 칠레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부려먹으며 식민지 영토 확장을 벌였던 페드로 데 발디비아,[36] 우루과이아르헨티나에서 차루아족 등 원주민들을 학살했던 페드로 데멘도사, 파라과이에서 파라과이의 원주민 민족인 과라니 족들을 학살/탄압한 후안 데살라사르, 애리조나, 텍사스, 뉴멕시코 등 지금의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아파치족이나 나바호족, 푸에블로족 등 현지 북미 원주민들을 겨냥해 학살과 착취를 자행했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코로나도와 후안 데오냐테 같은 다른 콩키스타도르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온건했다.

코르테스는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니라 충분히 위협적이며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보았고, 가톨릭 신앙과 식인 풍습 철폐만 받아들이면 현지 습속을 강제로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런 관점이 코르테스가 압도적인 전력 차를 극복하고 승리하게 해준 요인이었다. 틀락스칼라와 토토낙처럼 자신을 도와준 부족들에 대한 신의도 끝까지 지켜주었다. 반면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는 잉카의 학정에 목숨 걸고 자신을 도와준 차차포야와 카나리 원주민들을 실컷 이용해 먹은 다음 배신하고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코르테스가 본국에 소환당한 사이 코르테스의 엔코미엔다에 속한 원주민들을 다른 스페인인들이 학대하자 멕시코에 귀환한 뒤 그들을 위한 소송장을 써주었고 결국 승소했다. 이것은 자신의 영지민으로 편입된 원주민들에 대한 봉건제적 보호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코코 북동쪽 아콜우아(Acolhua)에 있는 테페틀라오스톡(Tepetlaoztoc) 엔코미엔다는 처음에는 코르테스가 다스리다, 코르테스의 심복 디에고 데오캄포(Diego de Ocampo)와 미겔 디아스 데아우흐(Miguel Díaz de Aux)를 거쳐서 코르테스의 가장 악명 높은 정적이었던 곤살로 데살라사르(Gonzalo de Salazar)에게 넘어갔는데 살라사르 수중에 들어가자마자 어마어마한 착취를 당했다. 특히 원주민과 정복자들을 잇는 중간매개로 엔코미엔다 지배체제에 편입된 원주민 상층 계급은 기존에 나눠 받던 공물수입을 살라사르에게 거의 다 빼앗겼다. 그전에 주어지던 옷, 음식, 금, 연료, 부역 혜택이 사라졌으며 엔코미엔다의 원주민 전체가 멕시코 시에 있는 살라사르와 그의 부인과 집사들이 살 집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1530년에는 살라사르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게다가 배에 싣기 위해서 베라크루스로 살라사르의 물건들을 운반하느라 200명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

한편으로는 메스티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단순히 현지처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1명과 많은 딸들을 낳았다고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생아들을 적자로 인정받게 만들려고 상당한 노력을 했고, 실제로 그 중 4명을 적자로 인정하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냈다. 유언에서 메스티소 사생아들과 그 어머니(즉 자신의 원주민 현지처)들의 생활을 챙기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비록 지금의 멕시코아즈텍 제국마야 문명의 후신을 칭하지만 그것은 명목상이고, 멕시코의 실질적, 물질적 전신은 코르테스가 세운 누에바에스파냐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노력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스페인의 사제이자 역사가인 바르톨로메 라스 카사스가 1552년에 출간한 <인도 파괴에 대한 간단한 설명(A Brief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 5장에서 코르테스를 일방적으로 비난했는데 라스 카사스의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온 생을 원주민 권리와 생명 보호에 바치긴 했지만 저술에 있어서는 사실 검증도 없이 일방적으로 서술해서 신빙성이 매우 낮다. 이 사람은 정작 아즈텍 정복 시절엔 그 동네 가본 적도 없다.

5.3. 학살자 논쟁

대규모 정복을 행한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학살 행위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5.3.1. 코르테스 옹호 측

기본적으로 코르테스는 그들과 전쟁을 했고 그 전쟁에서 이겨 복속시켜 영토를 확장했을 뿐 학살자로 볼 수 없다는 관점이다.

설령 코르테스의 부대가 마을을 불태웠다고 해도 전쟁의 일환으로 한 것이지 아무 이유없이 심심풀이로 하거나 순전히 약탈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원주민들이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으면 모를까 원주민들도 무력으로 저항을 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원주민들도 전술을 개발하여 수적 우위를 앞세워 압도적인 교환비에도 불구하고 무척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

게다가 스페인군이 왔을 때 원주민 세계는 이미 약육강식의 전쟁판이었고, 약소국은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들 사이에서의 포로는 인육이 되어 먹히는 등의 취급을 받았고, 이 지역은 당대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히 가혹한 곳이었다. 코르테스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강자로써 들어왔을 뿐 도덕적으로 원주민보다 더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코르테스에게 책임을 물 만한 학살은 많지 않다.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될 때 모여든 원주민 동맹군이 15만에 달했는데 빈약한 수의 사병(혹은 회유된 탈영병)이나 친척들만으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을 가졌던 코르테스에게 잔혹행위로 그 많은 원주민들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럴 여력도 없었고 스스로도 무력으로, 악을 악으로 갚으며 진행하길 원하지 않아서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중에도 수차례 항복을 권했고, 함락 후에 살아남은 아즈텍인들은 최대한 보전해주었다.

그의 책임이 약간이나마 있는 학살은 촐룰라(cholura) 학살이나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촐룰라 시민들이 환대하는 척 하고 함정을 파고 있었다는 코르테스의 진술을 부정한다쳐도 중요한 협력자였던 틀락스칼텍과 말린체가 중간에서 코르테스를 흔든 정황이 보인다. 틀락스칼라와 말린체는 물론 틀락스칼라보다 앞서 코르테스의 동맹이 된 토토낙조차 촐룰라를 믿지 말라 조언했다. 토토낙 족장들은 코르테스에게 테노치티틀란으로 나아가는 루트를 설명하며 촐룰라는 부유하고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유순한 민족이지만, 아즈텍에 복종하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37]

후자는 코르테스가 판필로 데나르바에스와 면담하러 간 동안 지휘권을 받았던 페드로 데알바라도의 현장판단으로 인한 학살이었다. 이때 알바라도를 부추긴 것도 틀락스칼텍인 협력자들인데 그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있다. 톡스카틀 축제가 본래 틀락스칼텍 포로들을 대량으로 잡아다 제물로 바치고 잡아먹던 행사였다. 코르테스가 궁지에 빠질 정도로 집요했던 틀락스칼텍의 원한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중남미 기준으로도 유래없이 잔혹했던 아즈텍의 원죄가 튀어나온다. 아무튼 코르테스는 전투로 인한 살상은 한 적이 있어도 죄없는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을 한 적은 없다고 봐야 한다.

5.3.2. 코르테스 비판 측

촐롤라의 경우, 아즈텍이 함정을 팠다는 내용은 당대의 전투기록이 아니라 이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다. 카를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의 직접 쓴, 나와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하여 나름대로 객관성 획득을 위해 노력하긴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대기 저자들은 코르테스가 말린체와 틀락스칼텍에게 속았다고 보았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위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했다는 주장은 현대에 등장했다. 이 사건은 통첩문을 읽어주지도 않은 채 바로 촐룰라 족장들을 쏴버리면서 진행되어 뒷날 코르테스의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코르테스의 앞뒤 행보를 보면 그게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 못하고 음모를 꾸밀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단, 적어도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에서는 말린체와 틀락스칼텍의 개입을 부정하기 힘들다.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였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다. 물론 나치처럼 대놓고 상부에서부터 학살을 주도한 케이스와는 차별점을 둘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5.4. 전쟁 행위 및 자체에 대한 책임

빼어난 능력과 큰 성취로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엘 시드의 뒤를 잇는,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기독교화의 주역인 대영웅으로 존경받았다. 페르난데스 오비에도는 코르테스를 엘 시드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먹는, 아니 그들을 능가하는 대영웅으로 평가했고 이탈리아의 파올로 조비오도 코르테스를 고대와 중세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로 높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라스 카사스 신부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영웅으로 평가받았다. 스페인에서는 한때 지폐의 모델로 쓰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피정복자인 원주민들의 관점을 중시하는 수정주의, 민족주의 사관이 대두하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코르테스는 강제 개종과 제국주의적 정복을 일삼은 악당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관이 떠오르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선 멕시코 역사가 돈 마누엘 오로스코 이 베라를 시작으로 대영웅과 학살자 사이의, 객관적 접근을 중시하는 제 3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일단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타국을 침략한 정복자인 이상 전쟁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개나 결과가 어쨌든 간에 신대륙의 부를 획득하려는 의도에서 침략을 감행했고, 아즈텍인들이 스페인인들에게 먼저 시비를 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코르테스가 다른 엔코미엔다에 비해 착취를 덜 하고 온건했다 하더라도 코르테스 역시 막대한 공물을 착취하고 자기 영지의 궁전을 짓는 데 원주민들의 부역을 동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38] 애초에 엔코미엔다가 유럽의 봉건제를 멕시코에 이식한 것이니, 코르테스도 봉건 영주로서 봉건적 착취를 수행한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코르테스는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정복을 한 것이지, 무슨 아즈텍의 압제로부터 선량한 원주민들을 해방시켜 주려고 정복을 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부려먹은 영민들에게 영주로서의 보호의무를 수행한 것은 봉건제의 상식에서 당연한 것이지, 특별히 도덕적으로 잘 했다고 고평가할 만한 일은 못 되는 것이다. 원주민 지배층을 관리로 유임한 것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정복자들은 정치적 안정화를 위해 원주민들의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막말로 일제가 조선인 관료들을 통해 식민지배를 수행했다고 그것이 조선인으로서 좋게 봐 줄 일인가?

5.5. 멕시코 현지의 평가

의외로 그렇게까지 평가가 나쁘지는 않지만, 마냥 호의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스페인어와 스페인식 이름을 사용하며 마야계 원주민이 천대받고 인구의 대다수가 혼혈, 메스티소에 정체성을 두는 현대 멕시코는 아즈텍에 대한 칭송과 별개로 스페인의 유산 또한 부정하지 않으며 코르테스는 그들에게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코르테스는 곤살로 게레로[39] 등과 함께 메스티소의 아버지라 평해지기도 한다.

1946년 코르테스의 유골이 재발견되었을 때[40]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콰우테목 동상 앞에서 화형에 처한 뒤 뼛가루는 공중에 뿌려 버려야 한다고 분개했지만 히스패닉 전통의 지지자들은 코르테스 영묘까지 만들어 가면서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41] 현재 코르테스의 유골은 그것이 보관되어 있던 병원에 딸린 성당 벽에 묻혀 있는데, 위의 사례를 보다시피 원주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이 유골을 파괴하려 올지 모르기 때문에 병원 측에서는 이 구역의 사진 촬영이나 관광을 일절 금지하고 취재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1981년에는 당시 대통령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가 코르테스 흉상을 제막하는 등 코르테스 재평가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흉상은 얼마 뒤 원주민 민족주의자들에게 파괴당했다. 포르티요는 이듬해 1982년에 한 차례 다시 코르테스 기념상 제막을 시도했다. "메스티소 기념상(Monumento al Mestizaje)"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기념상은 코르테스 뿐 아니라 말린체와 두 사람의 아들 마르틴까지 포함된 가족상으로 만들었다. 이 기념상은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항의시위가 계속되어 외딴 곳으로 옮겨졌다.

명심해야 할 것은 멕시코에서 원주민들은 빈곤계급이며 또한 인종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코르테스를 메스티소(즉, 현지의 상대적 부유층)의 아버지로 재평가하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저항에는 여기서 결부되는 계급성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한다.[42] 이 문제를 도외시하고 멕시코 현지의 코르테스에 대한 평가를 단편적으로 받아들여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6. 가계

그의 첫 번째 부인 카탈리나 수아레스 마르카이다Catalina Suárez Marcaida와는 사별하여 재혼했고,[43] 2번째 부인은 스페인 본국의 백작영애 후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데수니가(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 였다.
  • 후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데수니가Juana Ramírez de Arellano de Zúñiga
    • 루이스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아에야노Luis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 사산
    •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수니가Catalina Cortés de Zúñiga: 사산
    • 마르틴 코르테스 이 라미레스 데아에야노Martín Cortés y Ramírez de Arellano[44] - 아나 라미레스 데아레야노 이라미레스 데아레야노Ana Ramírez de Arellano y Ramírez de Arellano[45]
    • 마리아 코르테스 데수니가María Cortés de Zúñiga - 루이스 데퀴뇨네스 이 피멘텔Luis de Quiñones y Pimentel[46]
    • 카탈리나 코르테스 데 수니가Catalina Cortés de Zúñiga
    • 후아나 코르테스 데수니가Juana Cortés de Zúñiga - 페르난도 엔리케스 데리베라 이 포르토카레로Fernando Enríquez de Ribera y Portocarrero)[47]

적장남 마르틴 코르테스 수니가는 부친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으나 누에바에스파냐의 왕이 되겠다고 배다른 형 마르틴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 탈탈 털리고 땅을 빼앗긴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가 애를 쓴 덕에 목숨만은 건졌다. 반역 혐의로 한창 고문받던 도중에 카를 5세가 마르틴 코르테스의 고문관을 방문했고, 다음날 코르테스가 석방됨과 동시에 고문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휘하의 군인으로 복무하다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스페인 국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와는 달리 모국인 스페인에서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코르테스의 자손들은 아직도 스페인에서 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자 계통 혈통이 자주 끊겨 코르테스라는 성을 직접 쓰지는 않지만,[48] 어쨌든 바예 데 오아하카 후작 작위를 가지고 아직도 귀족으로 대접을 받는다. 멕시코에서도 귀족이었지만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에서는 더 이상 귀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 레오노르 피사로: 쿠바 식민개척민 여성
    • 카탈리나 피사로Catalina Pizarro 1514년-1515년 - 후안 데살체도[49]
      • 페트로 데살세도
  • 말린체
    • 마르틴 코르테스Martín Cortés 1522년 - 베르날디나 데포라스Bernaldina de Porras
      • 아나 코르테스
      • 페르난도 코르테스Fernando Cortés[50]
  • 안토니아Antonia(카세레스 원주민)/엘비라 에르모시요Elvira Hermosillo
    • 루이스 코르테스Luis Cortés
  • 이사벨 몬테수마
    • 레오노르 코르테스 몬테수마Leonor Cortés Moctezuma - 후안 데톨로사[51]
  • 아즈텍 왕녀
    • 마리아 코르테스 데몬테수마María Cortés de Moctezuma

이외에도 원주민 현지처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었는데, 이 중 애인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메스티소이다.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다만 전부 인정된 것은 아니고 4명이 인정되었는데 코르테스는 죽기 전 자신의 현지처들과 자식들을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코르테스는 멕시코 메스티소의 시조라고 불린다.

코르테스의 16대손인 아스카니오 피냐텔리가 500년만에 몬테수마 2세의 14대 후손인 페데리코 아코스타와 만나 화해의 장을 가졌다. #

7. 기타

역사적 사료가 미흡했던 시절에는 평화롭게 지내던 아즈텍 문명을 침략해 멸망시킨 유럽 침략자의 수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발굴작업이 많이 진행된 2010년대 이후에는 아즈텍 문명의 잔혹한 일면과 코르테스 본인의 의외로 온건했던 행적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이세계 전이물의 전형적인 현대인 천재론 베이스 용사의 모티브라는 우스개가 있다.

악의 제국 토벌,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일기당천하는 것, 이종족 동맹이세계인 히로인, 기술 치트 등... 그리고 이세계에서의 일이 절대 이고깽 양판소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 수 있다. 이세계물 클리셰 이세계만화 1 이세계만화 2

카카오를 처음 먹어본 구대륙 인물이기도 하다. 코르테스가 남미에 있던 동안 자연히 카카오를 섭취해 그 효능을 몸으로 느껴본 뒤, 후일 스페인에 가져와 카를로스 1세에게 진상해 귀족들과 상류층 사이에서도 퍼지고 온 유럽에도 카카오가 전파됐다. 하지만 카카오 자체는 원체 쓴 맛이 강해 호불호가 극명했고, 이를 보다 먹기 쉽게 설탕을 넣어 먹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달달한 초콜릿이 탄생하게 된다.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7촌 관계의 친척이다.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에르난도 알론소 데이노호사 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이다. 딱히 신기할 일은 아닌 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관계로 얽히고설킨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 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평가가 갈리는 코르테스에 비해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하는 페루볼리비아에서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곤살로 피사로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안 좋다. 이는 해당 국가들이 비록 메스티소 인구가 많긴 해도 각국의 전체 인구 중 메스티소가 아닌 순수 아메리카 원주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52] 이렇다 보니 페루와 볼리비아의 백인들과 메스티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를 대놓고 찬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개인사를 보았을 때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있다. 특히 첫째 아내 카탈리나 후아레스와는 관계가 매우 나빴으나 그녀가 죽고 나서 재혼한 두 번째 아내 후아나 데 주니가와의 부부관계가 좋아서 3명의 자녀를 낳았다. 원주민 처들과의 사이에서 난 사생아들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해 달라고 교황에게 탄원하여 그 중 4명이 적자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으며,[53] 후아나와 그녀 소생의 자식 3명에게 현지처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잘 돌봐 달라고 죽기 전에 당부까지 했을 정도니.

업힐/멕시코/멕시코주/멕시코 수도권 항목에 있는 파소 데 코르테스 업힐이 바로 촐룰라를 함락한 에르난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으로 갈 때 이용한 길이다. 물론 멕시코 수도권 자전거 라이더들은 아메카메카에서 파소 데 코르테스로 갔다가 다시 아메카메카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 촐룰라 방향으로는 오프로드라는 사정상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에르난 코르테스는 촐룰라에서 아메카메카 방향으로 향했다. 파소 데 코르테스 정상에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 길을 이용하는 장면의 동상이 있다. 지금은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멕시코시티 ~ 푸에블라 이동에 사용되고 있으며, 한때 베라크루스로 갈 때도 이 길이 사용되었으나, 150D번 고속도로보다 북쪽에 있는 멕시코 136번 국도가 왕복 4차로로 확장 개통한 뒤에는 답없는 쿰브레 데 말트라타 (Cumbre de Maltrata) 구간을 버리고[54] 이쪽을 경유한 뒤 멕시코 140D번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한다.

아즈텍 원정 도중 부하 하나가 현지인에게 중범죄를 저질러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부하를 살리면 현지인의 민심을 잃을 것이 뻔했고, 죽이자니 부하들의 불만을 살 가능성이 컸다. 이 때 타협안을 내놓는데, 일단 죄인을 나무에 매달아 교수형을 시키고, 멀리 떠났을 때쯤 죄수가 진짜로 죽기 전에 재빨리 구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8. 대중매체

  •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코르테즈의 행적을 까는 노래다.
  • 근육맨에서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갑옷을 착용한 거한의 초인인 것으로 나오며, 잉카 제국 군사들을 아즈텍이 아니라? 죄다 레슬링 기술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근육맨 세계관에선 콩키스타도르가 죄다 레슬링 기술 하나씩은 구사할 줄 아는 초인이었나 보다 변기맨의 부모가 코르테스에게 살해당하자 분노한 변기맨이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그의 레슬링 기술을 맞고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채(...) 헤라도맨이란 이름의[56] 초인으로 살다가 히간테맨[57]과의 경기를 통해 변기맨으로 각성하게 되었다.
  •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 달린 뱀의 주역으로, 자신을 케찰코아틀 신이라 믿는 말린체의 도움을 받아 간교한 술수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다.
  • 스팀 상점에 있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HD 판의 유저 창작 모드에서 코르테스의 아즈텍 탈출맵을 구독해서 할 수 있다.
  • 문명 5의 위대한 장군 중 하나로 나온다. 중남미 국가로 플레이하다 코르테스가 나오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케찰코아틀이 마테리얼 4권에서 ●●●● · ●●●●에게 피를 고통스러운 맹독으로 바꾸고 태양풍으로 뼈만 남긴 다음 혼을 해골에 고정시킨 채로 만 년 동안 지하 명계에 노동을 시킬 거라며 아주 지독한 저주를 퍼붓는데, 저 인물이 에르난 코르테스(エルナン ·コルテス)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섬기는 아즈텍을 궤멸시킨 인물이니 저렇게 반응할 법도 하지만, 그 아즈텍에서 하던 짓을 생각하면 적반하장으로 들린다는 게 문제.
  •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에서 주요 보물인 '아즈텍 금화'의 기원을 헥터 바르보사엘리자베스 스완에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기서 코르테스가 아즈텍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금화들을 차지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신들의 저주를 받아 그 금화를 가진 자들은 모두 언데드가 되는 저주에 걸리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9. 참고 문헌

  •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 2권, 에르난 코르테스 저, 앙헬 고메스 편, 김원중 역, 나남, 2009년.

10. 관련 문서



[1]스페인 엑스트레마두라 바다호스 주 메데인[2] 출처 유골 조사 결과 키가 158cm 정도로 측정되었지만 키가 줄어드는 파제트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어 발병 이전의 키는 163cm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3] 퀸테로는 개인적 부를 챙기고자 상관들을 통수치고 일정보다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갔는데, 코르테스의 향후 행적은 이것을 보고 배운 것 같다.[4] 이 때문에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얻은 경험으로 아즈텍을 정복했다는 일부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5] 코르테스 때까지 스페인인들은 유카탄 반도를 섬으로 알았고, 때문에 코르테스는 보고서에서 유카탄 섬으로 보고했다.[6] 신대륙을 발견할 때 스페인콜럼버스는 여기를 인도로 알았다.[7] 당시 인도 부왕은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Diego Colón)이었다.[8] 출처:에르난 코르테스,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장 첫번째 보고서, 앙헬 고메스 편집, 김원중 번역.[9] 재미있는 사실은 코르테스는 보고서에 자신을 폐하의 원정대장으로 자칭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만 쓰거나 도독을 자칭했는데, 사실 코르테스는 국왕에게 정식으로 임명받지 않았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항명&반란.[10] 개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린체 역시 이런 식으로 얻었다.[11] 마을을 굳이 조성한 이유는, 나중에 카를 5세에게 쿠바 도독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왕께 영토를 바치려고 했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베라크루즈 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영토를 갖다 바치게 되지만(...).[12] 여기까지가 코르테스의 기록. 틀락스칼텍인들은 자신들의 사신이 촐룰라에 갔다가 고문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코르테스가 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은 틀락스칼텍인들이 코르테스를 부추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에 대한 틀락스칼텍인들의 증오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13] 여기서 스페인 측의 기록에 따르면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했다고 하지만 이게 와전된 것인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다.[14] 코르테스에게 제국의 심장부를 덜컥 내어준 몬테수마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콩키스타도르들이 경계가 풀어지기까지 최대한 기다렸다가 기습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황제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는 하나 어쨌든 수십만 명의 아즈텍 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이므로 일단 전투가 벌어진다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살아나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 되었다.[15]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마저 오히려 아즈텍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거나 혹은 사망했다. 자세한 건 슬픔의 밤 참고.[16]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 의식에 도덕상 분개한 것이 딱히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중세 기독교를 기준으로도 인신공양 행위는 경악할 대상이었다. 원주민을 살해하고 그 재물 약탈을 하는 끔찍한 행위는 단지 중세 유럽인들에게 비교적 이례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더욱이 그들 원주민은 이교도였기에 이러한 행동이 더욱 합리화되었다. 즉, 유럽계 침략자들은 현대인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는 게 아니라, 도덕 관념이 현대인과는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유럽인들이 왜 하필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침략에 나섰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종교(당시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당대의 도덕은 오히려 침략 행태를 정당화해 주는 도구로 작동했던 것. 이 구조가 고도화 되어 탄생한 개념이 바로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 침략을 하는 게 아니라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의 의무다.[17] 사실 그 당시는 유럽도 중앙통제식이 아니었고 여전히 봉건제와 지방자치가 이루어진 판국인데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중앙통제가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카를 5세만 해도 걸핏하면 귀족들이 말 안 듣고 반란을 일으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본토에서조차 나 잘났다 너 못났다 식으로 맨날 투닥투닥거리는 판국에 지구-화성급으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본토를 다스리는 왕이 뭐라 하면 그쪽 도독의 반응은 당연히 "어디서 개가 짖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티나게 병신짓 하고 다니면서 왕에게 개기다가는 이 인간 꼴이 나서 목이 떨어질 수 있었다.[18] 다만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황제와 황후를 능욕한 사건도 피사로 본인이 아닌 그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가 한 일이었다.[19] 당시 유럽에도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미 흑사병의 타격을 받은 직후에도 인구 20만을 유지하던 거대도시 파리가 있었다. 그밖에 제노바베네치아 등 인구 10만 이상을 유지하던 이탈리아 대도시들도 많았다. 본 시점에서 70여년 전쯤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가 전성기 때 50만을 넘겼을 정도. 그렇지만 유럽 기준으로 보아도 테노치티틀란은 상당한 대도시인 게 맞다.[20] 코르테스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휘하의 스페인 병사는 906명(기병 86기, 석궁병과 화승총병 118명, 칼과 방패를 든 보병 700명)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동맹 원주민 군대는 총합 12만 5천명에 달했다.[21] 다만, 코르테스가 활동하던 15세기엔 아직 판금갑이 총기에 대항할 수 있기는 했던 시대다. 철제 흉갑을 두껍게 만들면 머스킷 총탄에 대해 일반적인 교전거리 내에서도 상당한 방호성이 있었기에, 방탄을 보장할 수는 없으나 운이 좋다면 안 죽고 살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아즈텍에는 제철, 제강, 제련 기술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마냥 고도로 발달한 철제 장비를 만드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22] 때문에 초석을 캐기 위해 유황을 찾아 화산을 올라가는 콩키스타도르들도 있었다. 화약도 화약이지만 철제 포탄도 다 떨어져서 돌을 깎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일반 대포를 유럽에서는 도태된 사석포처럼 쓴 셈이다.[23] 그런 식으로 무기 하나로 전근대 세력을 압도하는 것은 훨씬 이후인 19세기에 기관총의 등장을 통해서야 실현된다. 그나마 좀더 앞당겨 잡으면 개틀링 건의 등장까지는 가야 한다.[24] 그래서 숙달된 스페인 검사가 톨레도산 강철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원주민의 팔과 다리를 한 번에 잘라버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25] 애초에 풀플레이트를 둘둘 두른 기사나 맨 엣 암즈들 간의 싸움은 기승전 레슬링으로 끝나는게 일반적이다. 심지어 풀플레이트는 커녕 고전적 팔랑크스가 현역이던 고전 시대에도 한쪽의 진형이 일방적으로 깨지지 않는 한 결국 기승전 레슬링이었다.[26] 인신공양식인 풍습은 당시 마야와 아즈텍 전역에 있던 풍습이라 코르테스 편을 든 국가들도 매한가지였지만 아즈텍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며, 그걸 하겠답시고 툭하면 주변국들에 대해 심한 착취와 압제를 200년 넘게 벌였다. 그 절대적인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정확한 수치야 어쨌든 이방인과 협력한다는 결정을 내릴 정도는 됐다.[27] 왜 법률 지식이 중요하냐면 상관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원정에 나선 그가 명분에서 우위를 점하고, 국왕 카를 5세의 눈에 들기 위해선 법적으로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서 법학을 이수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보여지지만 법률적 지식은 아주 해박해서 베라크루스 조성부터 시작해 아주 교묘하게 줄타기를 했다.[28] 대표적으로 텍스코코의 익스틀릴소치틀 2세가 있다. 그는 테노치티틀란 공방전에 1만 6천 척의 카누와 6만의 병력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자손 알바 익스틀릴소치틀은 원주민의 관점에서 서술된 아즈텍 정복의 역사를 남겼다.[29] 이러한 방식은 아즈텍의 전신인 테노치티틀란 왕국이 아즈텍 제국으로 발전한 과정과 흡사하다. 아즈텍 역시도 패권국인 아츠카포찰코를 쓰러뜨리기 위해 텍스코코, 틀라코판과 동맹을 맺은 바 있다. 즉 이런 식의 동맹은 아즈텍 내에서는 이전부터도 흔했고 코르테스는 이를 파악해 원주민들에게 더 쉽게 접근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놓고 보면 아즈텍의 멸망은 자신들과 비슷한 형식으로 흘러간 셈.[30] 이에 대해 코르테스는 자신이 주도했다고 적고 있으며, 반대로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고마라는 코르테스가 결단을 내린 건 맞지만 가까운 부관들과 상의해 동의를 구한 뒤에 행한 일이었다고 적었다.[31] 물론 피사로도 마냥 여론 제어를 못하고 중요한 허수아비 황제였던 아타왈파를 잃은 건 아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의 조언을 이미 받은 상태였기에 아타왈파를 포획하고 일단 허수아비 황제로 써먹었으며 그 과정에서 피사로의 둘째 동생 에르난도의 경우 아타왈파와 상당히 친해졌고 아타왈파를 죽이는 것에 반대하던 쪽에 속했다. 그러나 중도에 끼어든 디에고 데알마그로와 그 일파의 경우 아타왈파를 계속 살려두는 건 불이익이라 여겨 반대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에르난도를 비롯한 아타왈파 생존 지지파가 자리를 뜰 수밖에 없는 상태가 터졌고, 이 와중에 잉카 측에서도 여론을 흔들 법한 불안한 일이 생겼다. 엄청난 수의 대군이 피사로 일당이 주둔한 곳으로 접근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이 불확실한 와중에 여론은 더욱 불안해졌고 결국 아타왈파 사살 측으로 여론이 기우는 걸 피사로도 막지 못했던 것. 물론 아타왈파 사살 후 이 소문은 그저 루머였다는 게 밝혀졌고 피사로 일파는 아타왈파를 죽인 걸 후회했고, 다른 허수아비 황제로 망코 잉카를 앉히게 된다.[32] 애초에 피사로는 잉카를 정복할 때 코르테스의 조언을 받은 덕에 잉카 정복의 손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조언을 받긴 했지만 피사로는 잉카 지역 통치에 있어 코르테스보다 더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33] 꽃 전쟁에서도 아즈텍이 절멸전쟁이 아닌 포로 수집에 몰두했던 건 그럴 만한 힘이 없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주요 노동력과 인신공양의 제물을 주로 복속시킨 속국들에서 갈취하는 아즈텍 특성상, 절멸전쟁은 노예 후보와 제물 후보를 다 잃는 셈이니 수지타산이 영 안 맞는다. 그래서 주로 포로잡이가 편한 제압전 쪽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34] 코르테스가 밀랍으로 대포를 막아놓았다는 설이 떠도는데 이는 소설에서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는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막아놓았고, 나르바에스의 포병들은 코르테스 특공대에 상당히 격렬하게 맞섰다.[35] 이 사람은 또 코르테스의 부하였다.[36] 이 사람은 결국 분노한 원주민 노예들이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싸우다가 패하고 포로가 되어 참수당했다.[37] 반대로 틀락스칼라는 호전적이며 마음을 얻기 매우 어렵긴 하지만, 일단 손을 잡는 데 성공하면 끝까지 믿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38] 김윤경 (2013), 「16세기 아스테카 제국의 정치적 식민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39] 스페인인지만 마야 문명에 동화된 후 최후까지 마야인으로 살았으며 쳐들어온 스페인인들에게 장렬히 맞서 싸우다 마야인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 사람도 마야인과의 사이에서 메스티소 자녀들을 뒀다.[40] 왜 "재"발견이냐 하면 멕시코 독립 직후 원주민 정권에게 파괴당할까봐 유골을 소장하고 있던 병원 측에서 숨겨버린 뒤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페인에서도 몇 사람만 알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중 한 명이 스페인 내란의 여파로 멕시코로 망명하면서 지배층들에게 잘 보이려고 소재를 공개했다.[41] Benjamin Keen, The Aztecs Image in Western Thought,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1971, p  468 .[42] 즉, "메스티소 전통을 지지"한다는 것이 단순히 혈통적으로 메스티소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서의 백인의 위치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는 멕시코 뿐 아니라 칠레, 아르헨티나 등 원주민이 적게 남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문제다.[43] 코르테스와 철천지원수인 쿠바 도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케야르의 처제였다. 게다가 카탈리나는 자식을 가지지 못했고 코르테스가 원주민 처들과 자식들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그래서 카탈리나가 죽었을때 당대부터 코르테스가 암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코르테스는 사후 그녀의 형제들이 살인 혐의로 고발하여 수사를 받아야했다. 물론 수사는 코르테스가 부인을 살해했다는 증고가 없어 종결되며 증거불충분을 인정받아 코르테스가 승소한다.[44] 현재는 단절되었다.[45] 마르틴의 육촌.[46] 제5대 루나 백작.[47] 제2대 알칼라데로스 가술레스 공작.[48] 스페인식 이름은 외가들의 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데에 포함되기는 한다.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의 작위계승을 인정했다.[49] 정복자이자 엔코멘데로였다.[50] 베라크루스에서 법관으로 재직했으며 현재에도 멕시코에 후손이 남아있다.[51] 바스크의 상인.[52] 특히 적당히 유화책을 시전하기도 했던 코르테스와 달리, 피사로 일가는 훨씬 더 강압적이고 난폭하게 잉카인들을 복속시켰다. 그 중에서도 곤살로 피사로는 자기 위치만 믿고 당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망코 잉카에게 그가 학을 떼서 반란을 결심할 정도로 인권유린을 시전한 바 있다.[53] 당연하지만 보통 이런 식민지에서 난 사생아들의 경우 적자로 인정받는 일은 드물고, 아예 잊거나 무시하고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54] 과거 기름도둑 (huachicolero)였으며, AMLO 행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인해 컨테이너 및 버스를 대상으로 강도짓을 벌이고 있다.[55]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56] 헤라도는 스페인어로 '아이스크림'을 의미한다. 당시 변기맨은 지금의 잔학초인이 아닌 수수한 관절기로 상대의 기브업을 유도해 승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는데 관중들은 이 방식이 마치 아이스크림마냥 밍밍하고 재미없다며 면전에서 비난하곤 했다.[57] 히간테는 스페인어로 '거인'을 뜻한다. 여담으로 히간테맨이 변기맨의 회상 속에서 나온 코르테스와 모습도 흡사하고 사용 기술도 유사한 걸 보아 코르테스의 후손일 수도 있는데 변기맨과의 경기에서 그의 필살기인 공포의 변기 흘려보내기의 영광스러운 첫 제물이 된 걸 감안하면 변기맨은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자신의 기억도 잃게 한 원수의 후손을 쓰러트려 복수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