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2:24:39

슬픔의 밤

<colcolor=#000>슬픔의 밤
La Noche Triste
파일:The_sad_night.jpg
시기 서기 1520년 6월 30일~서기 1520년 7월 1일
장소
교전국 아즈텍 제국 스페인 제국
지휘관 불명 에르난 코르테스
결과 아즈텍 제국의 대승.
1. 개요2. 배경
2.1. 톡스카틀 축제의 숙청2.2. 늑대가 함정에 빠지다: 테노치티틀란에 돌아온 코르테스2.3. 전투의 시작2.4. 몬테수마 2세의 죽음2.5. 요피코 신전에서의 전투2.6. 협상2.7. 후퇴를 계획하다
3. 슬픔의 밤4. 피해5. 코르테스는 왜 패배했나6. 이후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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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슬픔의 밤(La Noche Triste, '라 노체 트리스테')은 아즈텍 제국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에서 1520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전투이다. 구체적으로는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의 전투를 가리킨다. 스페인어 공식 명칭은 'La noche triste'('라 노체 트리스테')라고 하며, 영어로는 'The night of sorrows', 한국어로는 '비통한 밤'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아즈텍 제국을 몰아붙이던 에르난 코르테스콩키스타도르 병력은 아즈텍의 수도에 입성했지만, 슬픔의 밤 전후로 아즈텍 병력과의 전투에 들어가 소수만이 겨우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전투 직전 아즈텍 정복전 중 가장 큰 규모로 커졌던 코르테스의 군대가 '슬픔의 밤' 동안 닷새도 안 되어 코르테스가 처음 보유했던 병력 수보다도 적은 숫자로 추락했고, 정복의 추진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슬픔의 밤'은 코르테스 개인에게도, 에스파냐아메리카 정복 역사에서도 가장 큰 사건이었다. 흔히들 아즈텍 제국하면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인해, 에르난 코르테스를 신으로 착각하여 환영하다가 손쉽게 정복당한 나라로 인식된다. 하지만 실제로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침탈 행위에 맹렬히 저항했고, 3년 동안이나 버티며 슬픔의 밤을 비롯한 전투를 통해 코르테스의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슬픔의 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래, 유럽인들의 가장 큰 패배이자 원주민들의 가장 큰 승리였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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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2월 10일,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600여명의 스페인인, 300여명의 카리브 인디오(일명 '안티야스'), 22필의 군마, 10여문의 대포를 실은 10척의 선박이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멕시코(아나우악 땅)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아나우악 동부 해안가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당시 아나우악 땅에 거주하는 여러 원주민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굴복시키고, 소문으로만 무성한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진군했다. 이에 아즈텍 제국의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였던 몬테수마 2세는 이러한 이방인들의 진군이 갑작스럽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을 어떻게서든 저지하려고 했지만 전부 실패했고, 결국엔 환영한다는 모습으로 코르테스를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코르테스가 어떻게 해야 몬테수마 2세를 굴복시켜 테노치티틀란을 자신의 군주였던 카를로스 1세에게 바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던 1519년 9월, 아즈텍 수장 중 한 명이었던 쿠알포포카가 코르테스의 부하들을 잡아 가두며 스페인인들에게 반기를 드는 적대 행위를 실행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코르테스는 쿠알포포카와 관련된 모든 아즈텍 귀족들을 붙잡고, 우에이 틀라토아니인 몬테수마 2세마저 믿을 수 없다며 강제로 감금시켰다. 이윽고 아즈텍 제국의 중심부는 코르테스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게 되었으며, 몬테수마 2세는 이방인 정복자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모든 게 코르테스의 뜻대로 흘러가는 듯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코르테스의 강압적인 힘에 아즈텍 귀족들은 굴복하는 척했지만,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의 신성모독[1] 및 강압적인 형벌방식[2]에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 틀락스칼텍인들이 스페인의 보조군이 되어 나타나 아즈텍인들을 우습게 보자 증오가 더욱 커졌다. 한편 멕시코에서 멀리 떨어진 쿠바에서는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가 코르테스의 도를 넘은 월권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여, 부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Panfilo de Narvaez)를 위시한 1,200여명의 스페인인, 카리브 인디오들로 이루어진, 일명 '코르테스 토벌군'을 보냈다.

나르바에스의 군세는 코르테스가 보유했던 400여명(그간의 원정으로 줄어 있었다)보다 배는 많았고, 코르테스는 어떻게든 이를 타파해 보기 위해 자신의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페드로 데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최소한의 인원(약 100여명)을 주어 틀락스칼텍인들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의 치안을 맡기고, 나머지 병력은 모조리 나르바에스와 격돌하기 위해 부관들에게 나누어 보냈으며, 코르테스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400여명의 스페인인들이 한순간에 4분의 1 정도로 줄어들게 되자, 아즈텍 내부에서 반(反)스페인파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항쟁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코르테스가 떠나기 전, 아즈텍 사제들과 귀족들은 아즈텍인들의 성대한 종교적 축제인 톡스카틀(Toxcatl) 축제의 개막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했고, 코르테스는 자신의 부재 중 혹시나 아즈텍의 민심이 흐뜨러질 것을 염려하여 축제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1520년 5월 10일[3], 혹은 5월 16일[4]에 톡스카틀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게 되었고, 테노치티틀란을 떠맡은 알바라도는 그 광경을 불안한 눈길로 지켜 봤다. 이것은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원정군에 대한 일생일대 최악의 사고를 알리는 불길한 신호탄이었다.

2.1. 톡스카틀 축제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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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알바라도의 초상화

신중하면서도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인 코르테스와 달리, 테노치티틀란을 맡은 알바라도는 다혈질에 충동적이고, 급한 성격에 욕심까지 많은 인물이었다.[5] 그는 100,000명이 넘는 이민족들 사이에서 소수의 인원으로 민사 작전을 수행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코르테스라고 그의 단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가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이상 알바라도가 맡아야만 했다. 왜냐면 코르테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심복으로 부관들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코르테스의 군대는 애시당초 정적이었던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군대를 빼내온 것이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고위 부관들은 쿠바 총독과 가족관계 혹은 연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코르테스의 부관 중 크리스토발 데올릿이나 후안 벨라스케스 데레온은 쿠바 총독의 친인척이었다. 디에고 데오르다스(Diego de Ordaz)의 경우, 과거 쿠바 총독 휘하에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올릿은 알바라도와 사이가 나빠 뒷날 벌어진 테노치티틀란 포위전 때 칼부림까지 벌일 뻔했다가 코르테스가 끼어들어 중재했다. 쿠바 총독이 보낸 군대와 전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군대를 맡기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았다. 결국 오랜 친구이자 그때까지 코르테스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줬던 알바라도밖에 없었다.[6]

코르테스는 나르바에스의 군세를 격파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아즈텍인들의 성대한 의식인 톡스카틀 축제를 허락해주었다. 이 축제의 실체를 생각하면 정말 큰맘 먹고 양보해준 것인데, 톡스카틀 축제는 단순히 먹고 놀면서 즐기는 일반적인 잔치가 아니라 틀락스칼라에서 대규모로 포로를 잡아 끌고 와서 인신공양을 한 이후 잡아먹고 여인들의 가죽을 벗기는, 즉 축제라고 이름만 붙인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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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5월 10일, 아즈텍 대신전을 중심으로 약 600여명의 최상층 고위 귀족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축제를 한참 동안 즐기고 있었다. 한편, 알바라도와 그의 치안병들은 혹시라도 모를 아즈텍인들의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축제를 주도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술했듯 이 축제가 매우 끔찍했다. 수백 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으로 대도시속에 남겨진 알바라도와 휘하 스페인인들은 바로 옆에서 식인 축제가 벌어지는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결정타를 날린 것은 알바라도 휘하의 틀락스칼텍인들이[7] 제공한 잘못된 정보였다. 틀락스칼텍인들은
"아즈텍인들은 믿을 수 없고, 코르테스의 부재 동안 테노치티틀란의 모든 스페인인들과 틀락스칼텍인들을 몰살시키려 한다"
는 정보[8]를 유포했고, 이에 넘어간 알바라도는 휘하 스페인인들에게 무장을 갖추게 한 뒤, 톡스카틀 축제를 즐기고 있었던 아즈텍 귀족들을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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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열린 지 둘째 날,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갑자기 포위를 하자 연유를 모른 채 그러려니 했지만 이윽고, 스페인인들의 칼질에 원래부터 살육의 현장이었던 피의 축제 현장은 대상이 달라진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먼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팔과 얼굴에 마구 칼질을 하며 죽을 때까지 공격했다. 가수들도, 심지어 구경꾼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신성한 안뜰에서 벌어진 이 살육은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서 스페인 병사들은 신정의 방으로 몰려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은 물을 나르거나, 말에게 사료를 가지고 오거나, 곡물을 갈거나 혹은 바닥을 닦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축제 참가자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칼에 베이고, 뒤에서 창에 찔린 사람들은 내장이 몸 바깥으로 나온 채 쓰러졌다. 머리가 날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머리를 베고 나서도 그 머리를 산산조각냈다. 그들이 사람들의 어깨를 치자 팔이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허벅지나 장딴지를 다치는 것은 예사였다. 배에 칼을 맞은 사람들은 내장을 땅바닥에 쏟으며 죽어갔다. 일부는 빠져나온 내장을 질질 끌며 달아나려 하다가 자기 내장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레온 포르티야의 《부러진 창》(Broken Spear)에 따르면, 스페인인들의 칼솜씨에 아즈텍인들의 배에서 장기가 쏟아져 나와, 그것이 다른 아즈텍 귀족들의 발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아즈텍의 잔혹한 축제에 질린 스페인군의 증오심으로 보인다.

알바라도가 왜 이런 잔인무도한 행위를 했는지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추려보자면 알바라도의 탐욕[9], 틀락스칼텍인들의 충동질로 인한 공포, 그리고 심지어는 코르테스의 계획된 의도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다만 황금은 고위층을 남겨둔 채 어르고 달래 뜯어내는 게 훨씬 효율적이며 바로 이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이미 황금을 잔뜩 뜯어낸 상태였다. 갑작스런 학살로 어그로를 끄는 행위는 황금이 동인이라기에는 당시 정황을 봐도 지나치게 비합리적이다. 때문에 스페인인들의 아즈텍 학살의 동인을 흔히 탐욕으로 간결화하나 당시 스페인인들의 종교관과 심리도 무시할 수 없는 동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스페인은 또 다른 십자군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 레콩키스타로 성립된 국가로, 가톨릭 신앙에 국체의 정당성을 두고 있는 강경한 가톨릭 근본주의 국가이기도 했다. 스페인 종교재판의 사례나 모리스코 추방 등 이교도나 이단을 가혹하게 대하는건 스페인인들의 공통된 국민정서 수준이었다. 특히 당시의 스페인 병사들 역시 레콩키스타에 참전한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는 신자이기도 했다.이들 눈 앞에서 진행되던 인신공양에 촘판틀리[10]아마란스에 피를 굳혀 만든 조각상, 피에 찌든 제단 등은 스페인인들의 세계관과 종교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악한 이교 행위로 비춰졌을 것이며, 아즈텍인들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공격으로 아즈텍 귀족 600명이 죄다 몰살당했다.

한편, 타쿠바의 영주 콰우테목과 이스타팔파의 영주 쿠이틀라우아크는 축제 당일, 고위 귀족들이 스페인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음을 알렸으며, 이에 많은 아즈텍인들이 反스페인 쪽으로 가세하게 되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즈텍 귀족들은 쿠이틀라우아크와 콰우테목을 중심으로 뭉쳤고, 어떻게 하면 코르테스와 스페인인들, 그리고 틀락스칼텍인들을 완전히 몰살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인들한테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황제 몬테수마 2세까지도 증오하여 그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전사들을 움직여, 알바라도와 스페인인들의 중심부였던 악사야카틀 궁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테노치티틀란의 운하 부근에 전사들을 매복시키면서, 저 멀리 나르바에스의 군대와 싸우고 있는 코르테스가 만약에 돌아왔을 경우, 도시 안에서 코르테스 원정군을 몰살시킬 계획을 짰다.

2.2. 늑대가 함정에 빠지다: 테노치티틀란에 돌아온 코르테스

한편, 멕시코 동부 해안에선 직접 300여명의 군대를 이끈 코르테스와 '코르테스 토벌군'을 자처한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의 1,200여 명의 군대가 격돌했다.

코르테스는 콩키스타도르간의 충돌에서 보기 드문 용맹성을 발휘했다. 나르바에스의 포병들이 비를 막기 위해 대포 포신을 밀랍으로 막아놓은 틈을 타 야간 기습을 감행했고, 격한 저항을 뿌리치며 기어이 대포를 접수하는데 성공했다. 기세를 몰아 나르바에스를 애꾸눈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하자 같은 스페인인끼리 사생결단을 벌일 생각이 없었던 나르바에스의 군대는 6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보상을 약속한 코르테스에게 가세했다.(셈포엘란 전투)

흔히 코르테스가 나르바에스의 부관들을 황금으로 매수해 대포를 밀랍으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이는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 달린 뱀》에 나온 창작이다. 직접 기습에 참여한 코르테스의 보고서에는 빗물이 새어 들어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막아놓았다고 기술되어 있고, 다른 진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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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리로 코르테스는 자신 휘하의 총 400여명의 스페인인들과 나르바에스 휘하에 있었던 800여명의 스페인인들을 합하여 총 1,200여명의 스페인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군마도 96기나 확충하게 되었다. 이는 이전 코르테스가 보유했던 군대 중 숫자로 보나, 질로 보나 가히 최상의 군대였으며, 이에 지나친 자신감에 취해 이전의 신중함과 주도면밀함을 잃게 되었다.

코르테스가 나르바에스의 군대를 규합하는 동안, 테노치티틀란에서 온 원주민 전령이 커다란 소요사태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이에 코르테스는 차후 전개될 비극적인 사건, 즉 '슬픔의 밤'의 원인이 되는 중대한 판단 착오를 저지르는데, 바로 아즈텍인들이 함정을 파 놓은 테노치티틀란 안으로 진군한다는 결정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은 호수 위에 세워진 수상 대도시였고, 인구도 250,000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지리상 익숙하지 않은 스페인인들이 도시 안에 들어왔을 경우, 함정에 빠질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나르바에스와의 전투에서 별 힘을 안 들인 승리 이후 자신이 살아오면서까지를 되짚어 볼 때 가장 최상의 군대를 보유했던 코르테스는 충분히 아즈텍인들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2.3. 전투의 시작

1520년 6월 24일, 코르테스의 스페인 군대 1,200명과 원주민 동맹군 8,000명은 테노치티틀란의 인근 도시인 텍스코코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듣게 되었다. 이윽고, 우에이 틀라토아니 몬테수마 2세와 부관 알바라도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코르테스는 그들을 구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테노치티틀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왔을 당시, 테노치티틀란은 어떠한 환영 인사 없이 매우 조용했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에게 반기를 든 몇몇 아즈텍 잔당들이 벌인 단순 소동이라 보고, 몬테수마 2세에게 달려가 그를 내세우면 반란은 자연스레 가라앉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反스페인을 외치는 아즈텍인들의 행위는 몬테수마 2세의 통제를 한참 벗어나 있었으며, 도시로 들어온 코르테스에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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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라도와 스페인인들이 수비하는 악사야카틀 궁전에 도착한 코르테스는 제일 먼저 알바라도를 문책했다.[11] 그가 알바라도에게
"니가 뭔 짓거리를 한 줄 알어? 제정신이야?"
라면서 질책하는 동안, 궁전 안에서 스페인인들에게 협력했던 원주민 전령 몇 명이 아즈텍인들에게 습격당해 초주검이 된 채 돌아왔고, 코르테스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채게 되었다. 알바라도의 죄는 컸지만 일단 사태가 시급한 만큼[12] 사면했으며, 아즈텍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경계하면서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안가 엄청난 대규모의 아즈텍 전사들이 악사야카틀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궁전을 포위한 아즈텍인들은 아틀라틀(투창기)을 이용한 투창과 활을 이용한 화살을 쏘기 시작했는데,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것이 어찌나 많은지 궁전밖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는 부관 디에고 데오르다스에게 2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아즈텍인들의 포위망을 뚫게 했다. 화승총병과 쇠뇌병 다수를 포함한 정예부대였고, 오르다스는 코르테스의 부관들 중 여러 전투에서 보병대 지휘를 맡은 바 있는 백전노장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즈텍인들의 거센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으며, 순식간에 스페인인 4명이 전사하고 지휘관이었던 오르다스 자신을 비롯한 80명의 병사들은 부상당한채 돌아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아즈텍인들이 스페인인들과 조우하면서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였다. 아즈텍인들은 이 전투에서 엄폐물을 이용해 스페인인들이 화승총과 쇠뇌를 쏘면 재빨리 숨고, 재장전하는 동안 공격하는 등 상당히 계획적이고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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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다스가 패퇴한 이후 스페인인들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아즈텍인들은 악사야카틀 궁전에 불을 놓아 궁전채로 태워버리려는 화공을 시도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은 이를 눈치채고 대포를 직접 배치하여 아즈텍인들을 저지했으며, 벽을 무너뜨려 번지는 불을 끄는데 성공했다. 전투는 이런 식으로 소강 상태로 흘러가고 있었고, 이러다가는 궁전 안의 1,200여 명의 스페인인들과 약 8,000여 명의 틀락스칼텍 동맹군이 먹을 식량이 매우 부족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코르테스는 직접 나가서 싸울 용맹한 병사들을 선발했다.

날이 밝아오자, 아즈텍인들은 전날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공격해오기 시작했고, 어찌나 많은지 화승총과 쇠뇌를 조준하지 않고 밖에다 쏘기만 해도 맞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대포를 쏘아 쓰러뜨려도 아즈텍인들은 그 자리에서 금방 병력을 메웠고, 이는 마치 아즈텍인들은 대포를 맞아도 죽지 않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공포 그 자체였다고 코르테스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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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최대한의 병력을 궁전에 남겨두고, 선발대를 파견하여 아즈텍인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다리를 빼앗고 가옥을 불태웠으며 다수의 아즈텍 전사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인들의 피해는 매우 미미했고, 오히려 이 공격에서 70여 명의 스페인인들이 다시 부상당했다.

결국 코르테스는 이번에도 아즈텍인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고 하루는 또 이렇게 지나갔다. 코르테스는 어떻게 하면 아즈텍인들의 돌과 투창, 화살 세례를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공 마르틴 로페스(Martin Lopez)[13]장갑차처럼 병사들이 몸을 숨긴 채, 전투를 행할 수 있는 전쟁병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악사야카틀 궁전의 들보를 뜯어 목재를 한 곳에 모은 뒤, 두꺼운 널빤지가 그 위를 덮은 장갑차를 개발했다.

이 목제 장갑차(Ingenions)는 일명 "거북"이라고 불렸으며, 20여 명의 아군 병사가 안에 들어가서 목제 장갑의 보호를 받은 채 안전하게 사격할 수 있었고, 바퀴가 있어 전진도 가능했다. 로페스가 만든 3대의 장갑차는 위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아즈텍군의 바리케이드를 파괴했으며, 병사들은 쇠뭉둥이를 소지하여 공격하는데 방해되는 가옥들을 부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에도 아즈텍인들의 공격은 더욱더 거세졌고, 코르테스는 이제 몬테수마 2세라는 최후의 카드를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2.4. 몬테수마 2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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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인들의 포위를 뚫으려는 여러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라는 최후의 카드를 쓰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아즈텍 사회는 제정일치라 우에이 틀라토아니(황제)는 신의 대리인이었으며,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를 어느 정도 파악한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를 불러 아즈텍인의 공격을 잠시나마 중지시킬 수 있도록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14] 온건파인 몬테수마 2세는 사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코르테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몬테수마 2세는 궁전의 높은 테라스에 서서 자신의 신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전투를 중지할 것을 연설했으나, 사전에 아즈텍인들이 몬테수마 2세의 폐위를 결정한 터라 그의 명령이 먹힐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아즈텍 신민들에게 '매국노', '배신자'라는 욕만 먹었고, 돌맹이와 화살 세례를 받아 그 중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아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이 몬테수마 2세의 죽음을 야기하는 하나의 큰 사건은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는데, "몬테수마 2세가 과연 어떻게 죽었나?"에 대해서이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사건에 대해, 당대 역사가였던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고마라는
"에스파냐인들에게 던진 돌이 모르고, 몬테수마 2세에 맞게 되었다"
고 적었으며,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 현장에 직접 있었던 베르날 디아스 델카스티요는
"몬테수마 2세의 부상이 치명적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죽었다."
고 기록했다.

한편 당시 종군신부였던 프란시스코 데아길라르는 몬테수마 2세가 돌멩이에 맞은 사건 자체를 부정하면서, 코르테스의 명령으로 인해 몬테수마 2세가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기에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진실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코르테스에게 반감을 가진 원주민 역사가나 유럽의 다른 비판가들이 주목하는 증언으로, 몬테수마 2세와 인질들이 코르테스에게 직접 살해당하거나 몽둥이에 구타당해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도 살해당하기 이전 몬테수마 2세가 그의 신민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된 형태이다. 이 상반된 두 증언을 절충하는 또 하나의 설명으로는 몬테수마 2세가 신민들에게 돌을 맞는 것을 보고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코르테스가 그를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죽음 과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몬테수마 2세의 죽음이 나오거나 묘사되는 작품들에선 사건을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스페인이나 몬테수마가 아닌 사건을 멀리서 경험한 제 3자의 입장에서 돌에 맞았는가, 코르테스가 암살했는가 추측을 하며 서술하기도 한다.

2.5. 요피코 신전에서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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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의 카드인 몬테수마 2세가 죽자, 코르테스와 스페인인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몬테수마 2세의 동생이었던 쿠이틀라우아크는 스페인군을 배신하고 아즈텍군에 가담하고 말았다. 그는 몬테수마 2세의 시신을 아즈텍 포로에게 주어 아즈텍 진영으로 보낸 뒤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다. 이윽고 아즈텍의 수장 몇 명이 코르테스와의 면담을 청했고, 코르테스는 그들에게 강화를 제의했지만,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과 틀락스칼텍인들이 무조건 도시를 떠나는 것이 원칙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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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 결렬되면서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고, 일방적인 방어전을 취한 코르테스는 이윽고 아즈텍인들의 "전투의지를 꺾을 수 있는 중요한 기념물"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스페인인들이 거주한 악사야카틀 궁전의 바로 맞은 편인 요피코 신전을 지목했고, 로페스의 발명품인 장갑차를 대동한 채 신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갑차 덕분에 신전 진입은 성공했지만, 아즈텍 전사들은 신전 위에서 돌과 투창을 던지며 농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요피코 신전의 계단은 100개나 되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스페인 보병과 틀락스칼텍 전사들이 올라가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가파른 계단에다가 아즈텍인들의 돌과 투창 공격을 피해야했으니... 직접 전투를 이끈 코르테스는 전투를 치르면서 신전을 오르던 도중 미끄러져 하마터면 황천길을 갈 뻔했지만 부하들이 잡아주어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 전투로 인해 코르테스는 자신이 다쳤던 손을 또 다치게 되면서 나중에는 손가락 2개를 아예 못 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한편 이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스페인군과 틀락스칼텍군 전원이 부상당했지만, 역사에 남을 맹렬한 전투였으며 적이 모두 죽은 대단한 혈전이었다."
고 기록했다. 이 요피코 신전이 점령당한 것은 아즈텍인들에게는 큰 타격이었고, 이에 아즈텍 측은 코르테스에게 재협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2.6. 협상

아즈텍 측이 협상을 요구하자, 코르테스는 요피코 신전을 점령한 것에 자신감이 차서, 아즈텍 측에 당장 강화를 하고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말했다. 이때 우리들의 요구 조건 안 들어주면 도시 전체를 불살라 버리겠다는 투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코르테스는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아즈텍의 중요한 요피코 신전을 점령했다고 한들, 테노치티틀란은 넓디 넓었고, 요피코 신전과 같은 신전은 수백 개가 산재해 있었다. 코르테스의 협박에 아즈텍 측은 코웃음치며 오히려 코르테스에게
"우리는 다수이고 너희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스페인인 1명을 죽이는데 우리 전사 25,000명이 희생된다 해도 결국엔 우리가 이긴다."
라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즈텍 측은 코르테스 군대의 식량과 물자가 바닥을 기고 있음을 눈치채고 더욱 여유를 부렸던 것이다.

결국 협상은 또 결렬되었고, 화가 난 코르테스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요피코 신전을 점령한 기세를 몰아 주변 가옥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이 공격으로 약 300채 이상의 가옥이 불탔으며, 코르테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바리케이드 역시 부숴지고 말았다.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의 격렬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운하를 파괴하고 일부러 길을 어지럽게 퍼뜨렸지만, 코르테스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오히려 테노치티틀란의 중요한 8개의 다리 가운데 4개를 점령했으며, 수많은 가옥과 신전들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사건이 긴박하게 흐르자, 아즈텍 측에서는 다시 재협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며, 코르테스가 붙잡고 있는 아즈텍 고위층 귀족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며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윽고 코르테스는
"이제 아즈텍인들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니, 더 이상의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선도 철거하라"
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격렬한 전투에 지쳐 있었던 부하들도 명령을 받아들여 휴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는 코르테스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2.7. 후퇴를 계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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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인들은 사실 협상을 맺은 척하면서, 코르테스 원정군을 궤멸시킬 전사들을 모집하고 있던 중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대규모의 병력을 갖춘 아즈텍인들은 해이해진 코르테스군을 기습했고, 코르테스가 점령했던 4개의 다리 모두가 다시 아즈텍인들에게 탈환되었다. 당시 식사 중이었던 코르테스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당황했다고 기록에 적고 있다. 아즈텍인들의 기습 공격으로 수십 명의 스페인인들과 수백 명의 틀락스칼텍인들이 살해당했고, 그동안 점령했던 다리와 신전을 빼앗겼다. 상황이 불리해짐을 알게 된 코르테스 휘하의 부관들 사이에서
"이 지옥도 속에서 빠져나갈 것"
을 권고하는 상신이 빗발쳤다. 하지만 자신이 애써 점령한 대도시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코르테스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한 채, 빼앗긴 다리를 점령하기 위한 군대를 직접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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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코르테스는 아즈텍인들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어 하마터면 포로로 붙잡힐 뻔했다. 이로 인해 전투에서 코르테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스페인인들 사이에서 퍼지기도 했다. 물론 헛소문으로 밝혀졌고 스페인인들은 다리들을 재탈환하여 도시를 빠져나갈 어느 정도의 역량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은 사령관인 코르테스의 명령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한사코 도시를 빠져나가길 거부했다.

아즈텍인들이 혼란을 위해 허물어버린 다리는 마르틴 로페스가 만든 조립식 목제 다리가 대체해 주었다. 스페인인들은 조립식 다리를 이용해 넓은 둑길을 이동할 수 있었다.

이때 '보테요 푸에르토 플라타'(Botello Puerto Plata)라는 스페인군 졸병이 있었는데, 그의 점성술예언은 매우 잘 들어맞기로 코르테스의 부관들 사이에 소문이 좍 퍼져 있었다. 푸에르토 플라타는 자신의 예언에서 코르테스의 군대가 도시를 빠져 나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했고, 부관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도시를 빠져나가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코르테스는 한때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테노치티틀란의 재화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스페인인들은 대부분 부상당해 있었고, 원주민 동맹군도 피해가 막심했다. 특히 전투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3. 슬픔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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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6월 30일 새벽, 코르테스는 지옥 같은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일련의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은 후퇴하는데 있어서 무기와 식량을 제외하곤 방해되는 일련의 물건들을 전부 다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이나 동맹군 원주민이 바쳐왔던 황금들 중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바칠 5분의 1을 빼고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뿌렸다. 코르테스와 처음부터 동행했던 400여 명의 베테랑들과 수천 명의 틀락스칼텍인들은 이 황금이 파멸적인 효과를 가져올 줄 잘 알고 있어서 적당히 가져가거나 아예 소지하지 않았지만, 코르테스에게 투항했던 과거 나르바에스의 휘하 병력 800여명은 황금에 대한 욕심이 강해서 자신의 갑옷과 옷속에 황금덩이를 가득 쑤셔박았다.

6월 30일 새벽은 때마침 태풍으로 인해 비바람과 강풍이 몰아닥쳤다. 아즈텍인들은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군대를 돌렸으니, 코르테스는 이를 천운으로 여기고 도시에서 빠져나가고자 했다. 후퇴길로는 테노치티틀란의 옆 도시인 타쿠바로 향하는 길을 택했는데, 이 루트는 스페인인들이 거주했던 곳에서 가장 가까웠기에 선정되었다. 코르테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각자의 부관들에게 지휘하도록 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 선봉부대: 곤살로 데산도발, 안토니오 데키뇨네스, 디에고 데오르다스
  • 중앙부대: 사령관 에르난 코르테스, 크리스토발 데올리드, 알론소 데아빌라
  • 후방부대: 페드로 데알바라도, 후안 벨라스케스 데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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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부대가 먼저 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가고, 코르테스가 이끄는 중앙부대가 길을 건널 때쯤, 하필이면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쇠뇌로 고발하려는 여인을 정밀사격해서 죽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15] 바로 수많은 아즈텍 전사들이 카누를 타고 오면서 후퇴하는 스페인인들과 틀락스칼텍인들을 공격하는 아즈텍인들 사이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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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앙부대의 스페인인들 중에는 과거 나르바에스 휘하의 투항군이 많이 포진해 있었으며, 황금을 넣어 무거운 몸으로 싸웠던 그들은 이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다. 적들을 피해 물로 뛰어든 스페인인들은 황금의 무게로 인해 가라앉았으며, 그로 인해 익사하거나 수영에 능수능란한 아즈텍인들에게 따라잡혀서 죽거나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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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이 설치한 다리조차 끊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원주민 짐꾼들과 아즈텍 전사들의 시체가 쌓이면서 일종의 다리를 만들어주었기에 스페인인들은 일명 시체다리를 통해 겨우 건너갈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뒤도 안 돌아보고 후퇴하여, 5기의 기병과 100여 명의 보병이 겨우 선봉부대가 먼저 자리잡고 있는 타쿠바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이 공격으로 약 600명에서 최대 800여 명의 스페인인들과 2,000명~4,000명의 틀락스칼텍인들이 사망했으며, 대포와 화승총은 전부 잃어버렸고, 군마들 또한 부상당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후방부대를 지휘한 알바라도와 벨라스케스 데레온은 중앙부대가 아즈텍인들의 기습에 끔살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는 끊어져 있었으며, 시체가 즐비한 것을 깨달은 약 80여 명의 스페인인들은 기겁하여 그 자리에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테노치티틀란 안에서 싸우다 죽겠다면서 내뺐다. 하지만 톡스카틀 축제 대학살의 원인이면서 이번 사건에 큰 책임이 있었던 알바라도는 지가 한 짓이 있으니 분노한 아즈텍인들에게 잡히면 끔살이니까 어떻게든 둑길을 빠져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아즈텍인들의 포위를 맹렬히 뚫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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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또다른 지휘관인 벨라스케스 데레온이 아즈텍인들에게 붙잡혔지만, 알바라도는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그의 도움 요청을 무시한 채 끊어진 다리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리는 끊어져 있었고 폭은 사람이 눕혀져 5명을 줄세울 길이 만큼 넓었다. 한 마디로 인간이 도저히 뛰어넘을 거리가 아니었는데, 부하들이 아즈텍인들에게 쓰러지고 자신마저 잡힐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자, 그는 이판사판으로 자신의 기병창으로 장대높이 뛰기를 하여 반대편으로 무사히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4. 피해

사령관이었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목숨을 부지한 채 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와 타쿠바에서 부대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휘하에 두었던 사상 최대인 1,200여 명의 스페인 병력은 순식간에 약 500여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코르테스가 '슬픔의 밤'에서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가장 적은 것은 단연 코르테스가 제시한 200여 명이라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일부러 피해상황을 줄이고 보고하기 위해 최소화시킨 것임이 확실함으로 맞지가 않다. 역사가 페르난데스 오비에도와 후안 카노는 1,170명에 달하는 스페인인들이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는 코르테스가 보유했던 1,200명에 근접한 수준이므로, 뒤이어 벌어질 오툼바 전투에서 남은 400여 명의 스페인인들과 비교해보자면 숫자가 맞지 않다.

학계에서는 대략 600~800여 명의 스페인인들이 살해당했다고 보고 있으며, 원주민 동맹군의 피해는 약 2,000~4,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코르테스는 후퇴당일 사로잡고 있었던 수많은 아즈텍 귀족들과 동행했는데, 이때 타쿠바로 가는 길을 알려준 타쿠바의 영주 치말포포카가 아즈텍인들과 스페인인들에게 뒤섞여 살해당했고, '도냐 이사벨'(Doña Isabel Moctezuma)로 세례명을 받고 코르테스의 애인이 되어 그의 아이를 임신했던 몬테수마 2세의 황녀도 이 자리에서 죽게 되었다.[16]

이 사건을 슬픔의 밤(Noche Triste)이라 부르게 된 사정을 설명하자면, 코르테스 원정대의 일원으로써 아즈텍 정복을 직접 경험한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가 붙인 것이었다. 아메리카 정복 역사상 가장 많은 스페인인(유럽인)이 살해당한 최대, 최악의 패전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동용 책이나 잘못된 아즈텍 지식 서적에서 '슬픔의 밤 전투'라는 식으로 아즈텍인들이 이 사건에 이름을 붙여준 마냥 쓴 모습이 몇몇 있는데, 아즈텍 측에서는 딱히 이 전투에 대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지금의 멕시코도 따로 정식 명칭을 정하지 않고 스페인과 똑같이 Noche Triste라고 하고 있으며 나와틀어로도 그냥 스페인어 그대로 따와서 Noche Triste라고 한다. "Noche Triste"라는 단어 자체를 스페인의 패배를 상징하는 말로 취급하는 듯하다.

5. 코르테스는 왜 패배했나

나르바에스의 병력을 규합한 코르테스는 1,200여 명이라는 이전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역사상 최대의 병력과[17] 원주민 동맹군 병력 8,000여 명을 합친 9,200명을 보유하게 되면서 주도면밀한 모습을 잃고 자만심에 빠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일단 주력인 1,200여 명의 스페인 병력을 믿은 채[18] 함정 그 자체였던 테노치티틀란 중심부의 악사야카틀 궁전에 간 것 자체가 크나큰 실수였다. 아즈텍인들은 바로 그것을 노렸고, 악사야카틀 궁전에 갇힌 1,200명의 스페인인들과 8,000여 명의 원주민 동맹군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 자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때문에 스페인인들의 피해가 더 막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즈텍 측은 여러차레 강화를 요청했지만, 사태 파악을 못하고 1,200명의 스페인 병력을 믿은 코르테스는 끝까지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던 것이다. 이는 일례로 그가 테노치티틀란에 처음 입성했을 때, 도시의 복잡함에 놀라 혹여나 모를 아즈텍인들의 포위를 막기 위해 쌍돛범선을 제작하도록 했던 '초심의 신중함'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아즈텍인들의 변화된 전술도 한 몫을 했다. 이전에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의 쇠뇌화승총, 대포를 매우 두려워했으며, 이에 대한 전술도 매우 부족했다.[19] 하지만 그들은 재빨리 적응했고 바리케이드를 통한 일련의 기습 공격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미군에게 행하는 공격과 매우 흡사했다. 그들은 건물을 무너뜨려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스페인 기병의 위력적인 돌진을 저지했고, 나무를 깎은 기병용 창까지 만들어 스페인 기병에 효율적으로 대처했다.

메소아메리카 전사들은 밤에는 요괴와 악귀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생각했기에 밤에 싸우는 것을 매우 꺼렸다. 다른 실용적인 이유로는 어두운 밤에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20], 그러나 6월 30일 코르테스에게 행한 기습 공격은 그마저도 타파한 매우 '파격적이고 조직적인 공격'이었다.

6. 이후

코르테스 자신과 부관들을 포함한 모든 스페인인들은 저마다 경미한 부상이나마 없는 자가 없을 정도로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96기의 군마는 대부분 죽어[21] 23기밖에 남지 않았고, 이마저 부상당해 다리를 절뚝거리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화승총과 대포는 도망친다고 모조리 다 잃어버리고 남은 거라고는 쇠뇌와 스페인인 500여 명 및 틀락스칼텍인 2,000여 명 정도였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한 채 동맹인 틀락스칼라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마음먹었고, 곧 지옥 같은 후퇴 여정을 강행하게 된다. 특히 도망친다고 식량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해서 식량 부족으로 고생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후퇴하는 동안 약 100여 명의 스페인 병사들이 탈진과 부상으로 쓰러지거나 사망했으며, 코르테스가 직접 주위에 열린 야생 옥수수를 따먹거나 지쳐 쓰러진 군마를 잡아먹을 정도였다.

'슬픔의 밤' 이후 아즈텍 측에서는 反스페인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스페인에 협력한 자들과 포로들을 모조리 참수했다. 또한 죽은 스페인 병사들과 틀락스칼텍인들의 시신들도 참수하여 목을 걸었다. 전투 중에 죽은 몬테수마 2세의 뒤를 이어 우에이 틀라토아니에 오른 몬테수마 2세의 동생 쿠이틀라우아크는 조카인 몬테수마 2세의 아들[22]을 처형시켰다.[23] 한편, 아즈텍인들이 죽인 코르테스의 병사들 가운데, 나르바에스 군대의 노예였다가 코르테스군의 소유가 된 '프란시스코 에이두라'라는 흑인 노예가 있었다. 그런데, 이 흑인 노예가 하필이면 천연두 보균자였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들은 이전까지 구대륙과 교류가 없었고, 당연히 구대륙의 전염병에 대한 항체도 없었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다들 짐작이 갈 것이다.

코르테스의 부관들은 이 참담한 패배때문에 아즈텍을 결코 정복하지 못할 거라 낙심했으며, 코르테스에게 멕시코 땅을 벗어나 스페인의 확고한 식민지쿠바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탄원서를 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그럴 경우 자신이 쿠바의 총독한테 처벌당할 것이 분명했기에[24]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고, 틀락스칼라로 가던 병들고 지친 400여 명의 스페인인과 2,000여 명의 원주민 동맹군은 아즈텍 측에서 보낸 40,000명의 대군을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의 중간지대인 오툼바 평원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7. 기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에서 이 전투가 시나리오로 나온다.


[1] 아즈텍 신들의 신상을 때려부수고, 신전에 성모 마리아 상을 세웠으며, 인신공양 역시 금지시켰다.[2] 쿠알포포카는 몬테수마 2세와 아즈텍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당했는데, 화형은 아즈텍인들에게 있어 새로우면서도 매우 이해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3] 오라스코 이베라의 견해.[4] 와그너의 견해.[5] 이것은 훗날 그가 과테말라 침략때 행한 행위에서도 잘 보여진다.[6] 틀락스칼텍인과 접촉하기 이전 토토낙인들과 동맹을 맺었을 때 토토낙인들에 대한 약탈을 금한 코르테스의 지시를 어긴 병사에게 교수형을 선고하자, 알바라도는 그냥 끌고 가 베어버렸다. 그때까지 알바라도는 코르테스의 지시를 120%로 이행하며 그의 장악력을 공고히하는 '돌격대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7] 이 사람들은 충성을 바쳤기에 특별히 스페인군의 강철 검과 창을 쓰도록 허가해주었다.[8] 톡스카틀 축제 자체가 틀락스칼텍인 포로들을 잡아먹는 축제였는데, 코앞에서 이 참극을 지켜보는 틀락스칼텍인들이 순순히 남 일로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이 사건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테노치티틀란에 오기 이전 알바라도는 틀락스칼텍과의 결혼동맹으로 인해 족장의 딸인 테쿠엘우에틋신(Tecuelhuetzin)를 아내로 맞이한 상태였다. 테쿠엘우에틋신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마리아 루이사 시코텐가틀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알바라도는 다혈질에 충동적이고 욕심까지 많은, 결코 좋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틀락스칼텍 족장의 딸은 진심으로 사랑하여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아들 '페드로'와 엄마의 이름을 딴 '레오노르'라는 딸을 낳았다. 마리아 루이사는 이 당시 알바라도와 함께 테노치티틀란에 있었기에 역사가들은 기록에 남진 않았지만, 그녀가 알바라도를 충동질 or 설득해 아즈텍 귀족들을 습격하게 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고 보고 있다.[9] 아즈텍 귀족들의 화려한 장신구에 눈독이 들었다는 추측이다.[10] 사람 머리를 꿰어 쌓아올린 해골[11] 앞서 언급한 무자비한 톡스카틀 축제 대학살 건 때문이었다.[12] 알바라도는 무식했지만 전투에서는 유능한 부관이었다. 이것은 훗날의 전투에서도 잘 나타난다.[13] 그는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전에 있어서 1등 공신이었다. '슬픔의 밤' 당시 빠져나오던 코르테스가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로페스의 생사 여부였으며,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이프러스 나무 그늘에서 부하들을 잃은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던 코르테스가 갑자기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아즈텍을 정복할 기회는 남아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테노치티틀란 포위전 당시 활약했던 13척의 쌍돛 범선도 그의 작품이었다.[14] 일설에는 몬테수마 2세가 직접 나섰다고 한다.[15] 여러 기록들에 의하면 그녀는 늙은 노파였고, 스페인인들을 발견하자 "멕시카인들(아즈텍인들을 부르는 호칭)이여! 당신들의 적들이 달아나고 있소!"라고 큰 소리로 외쳤으며, 그녀의 외침을 듣고 수많은 아즈텍 전사들이 몰려왔다고 한다.[16] 소설 《깃털 달린 뱀》에서는 코르테스와 몬테수마 2세의 황녀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었던 말린체가 강으로 걷어차서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17] 왜냐하면 그 당시 스페인은 인구가 고작 700만 명에 불과했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만 문제에 신경쓰느라 대규모의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18] 원주민 동맹군은 무장 수준이 스페인인들에 비하면 형편없었고, 근접전 담당이 주임무라서 사격 병력이 궁병과 투척병을 제외하곤 적었던 터라 기대도 안했다.[19] 틀락스칼텍인들은 그 전부터 상대해왔던 터라 두려워하지 않았다.[20] 이는 신대륙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구대륙에서도 생각보다 군 지휘관들이 야습을 자주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21] 죽은 군마들은 참수되어 죽은 스페인군 및 틀락스칼텍군과 함께 목이 내걸렸다.[22] 정신병자였다고 한다.[23] 스페인인들과 협력한 죄를 묻고, 자신의 황권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다.[24] 그동안 코르테스는 식민지와 개척지 간의 소통이 잘 안 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월권 행위를 밥 먹듯이 저질렀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투옥이었고, 운이 나쁘면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