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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락스칼텍인들 |
1. 개요
현 멕시코의 틀락스칼라 주 일대에 존재하였던 원주민들의 연맹 국가.각각 나와틀, 오토미, 피노메어를 쓰는 3개의 민족이 현 틀락스칼텍에 자리를 잡고 연방제로 공동 의회[1]를 만들어 하나의 정체를 이뤘는데 중앙 아메리카의 대세에 따라 나와틀 민족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를 틀락스칼텍이라고 부른다.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을 도와 아즈텍 제국의 멸망과 나와틀 문화의 소실에 기여해 현대 멕시코 민간에서는 매국노라는 평가가 많지만, 애초에 당시는 멕시코라는 근대적 국민국가가 없어서 사실상 문화만 공유하는 다른 민족이었기에 중립적인 시각에서 일종의 외교로 봐야한다는 시각이 공존한다.
2. 정치 체계
이들의 정치 체제가 어떠한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리는데 스페인어 위키백과에는 República de Tlaxcallan(틀락스칼란 공화국)이라고 서술되어 있고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トラスカラ王国(틀락스칼라 왕국)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틀락스칼텍을 대표할 지도자를 둔 적은 없었기 때문에[2] 이로쿼이 연맹과 비슷하게 부여, 고조선, 이스라엘 왕국 같은 초기 왕국이 되기 직전 과도기의 부족 연합 상태였다. 상술한 스페인어로 틀락스칼텍을 '공화국'이라 부른 건 현대적 의미로 군주가 없는 공화정 정부를 채택한 정부 체제의 의미로서 '공화국'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치 도시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정치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며 이런 '국체'를 가지고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는 그리스-로마 고전적, 르네상스적 의미의 '공화국'이다. 따라서 독일사에서 나오는 라이히란 단어의 번역 문제처럼 사실 저런 근대적 의미가 아니라 르네상스적인 의미에서 '공화국'의 뉘앙스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틀락스칼란 연맹'이 더 정확하다. 당시 스페인 공문서를 보면 카스티야, 아라곤, 안달루시아 같은 엄연한 자국 영토들도 '이 공화국들(estas republicas)'이란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3. 역사
3.1. 아즈텍 제국과의 관계
1519년 아즈텍의 세력 지도. 틀락스칼텍이 아즈텍에 둘러싸인 지형이다. 목테수마 1세 시기 아즈텍의 메소아메리카 정복 활동의 영향. 또 틀락스칼텍이 아즈텍 영토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틀락스칼라가 아즈텍에 완전히 복속된 국가가 아님을 지리적으로 보여준다.
두 국가가 발원한 14세기경 중앙아메리카는 토착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치치멕 세력과 신흥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틀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같은 나와틀 계열이었던 틀락스칼라와 테노치티틀란은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공격해나갔다.[3]
그와중 야금술과 농업의 발흥과 중앙집권화로 인해 테노치티틀란의 도시화와 문명화가 급격히 진전되었고, 틀락스칼텍은 딱히 머릿수에서 엄청나게 불리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력 경쟁에서 열세에 처하게 된다. 이에 더해 테노치티틀란에서 목테수마 1세가 즉위하고 테노치티틀란의 팽창정책이 시작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틀락스칼텍이 주변국을 지원하며 테노치티틀란을 견제하고자 했지만 소용 없었고, 테노치티틀란은 약소한 도시국가들에 조공을 받을 정도의 제국으로 성장한다.
많은 이들이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을 무슨 대제국과 밀림 원주민 부족 수준의 격차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틀락스칼텍은 단 한 번도 아즈텍에게 함락된 적이 없었을 정도로 강한 도시국가였다. 이는 틀락스칼텍이 역으로 아즈텍을 침공한 일이 있었다는 것과 훗날 구대륙의 화포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조차도 틀락스칼텍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메소아메리카 지형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세력싸움을 벌이던 형태와 더 유사하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는 목테수마 1세 시기까지만 해도 틀락스칼라는 테노치티틀란도 절대 우습게 볼 수 없을 정도의 강대국이었으며, 그래서 목테수마 1세도 세력을 먼저 불리기 위해 우악스텍과 토토낙 등의 도시국가를 먼저 점령했다. 이후 테노치티틀란이 확실히 제국의 기반을 다진 이후에도 틀락스칼라의 저항은 매우 거셌으며, 아즈텍의 침공은 빈번히 좌절되었다.
그렇게 제국인 아즈텍과 강대한 도시국가인 틀락스칼텍의 소모적인 교착전이 지속되가던 와중, 혹독한 메소아메리카 환경의 특수성인 기근과 냉해 등의 자연재해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한 배경에서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주변국의 공통된 종교적 필요와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상호합의하에 제안된 국지전 형태의 종교의례적 전쟁 제도가 바로 그 유명한 꽃 전쟁이다. 따라서 아즈텍이 틀락스칼텍을 제압하고 인간 가축으로 삼았다는 속설은 스페인의 완벽한 역사왜곡이다. 다만 시작은 합의에 의한 것이었어도 느슨한 동맹조약같은 걸 체결했을 뿐 애초에 서로 적국이었는데다가, 이것이 갈수록 주변국에게 공물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이어진 부분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이는 훗날 원주민들이 스페인의 침략에 가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적대 부족과 싸움을 붙여 이들을 공멸시키려는 몬테수마 2세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 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텍인들과의 전투였다. 애초에 틀락스칼라는 아즈텍을 상대로 오래동안 표면상으로나마 동맹국 지위를 유지할 만큼 강대한 도시국가였으므로 화포로 무장한 콩키스타도르라도 이들을 상대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결과였다.[4]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콩키스타도르가 오랜 숙적이었던 테노치티틀란을 멸망시키려는 걸 알게 되자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되었다. 속설과 다르게 틀락스칼텍 역시 당대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행했다. 또한 상술한대로, 애초에 틀락스칼텍은 테노치티틀란의 속국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종교성이 강한 연합체에 포함될 뿐인 오랜 라이벌 격의 적국이었다.[5] 물론 테노치티틀란이 제국으로 성장한 뒤 전쟁과 공물과 관련해서 오래 시달렸단 점도 거짓은 아니나, 인육 조공을 받았다는 설은 명백하게 콩키스타도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다.[6]
처음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이방인 침략자라고 생각해서 저항한 것이었는데, 이후 양 측의 소모전이 지속되고 협상 자리에서 스페인인들이 아즈텍을 침략할 계획을 설명하며 동맹을 제안하자 몇 번의 내부 회의 끝에 이를 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스페인측 기록에는 틀락스칼텍이 마치 아즈텍의 속국이자 인신공양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스페인 본국의 독자들에게 정복자들을 영웅화하고 그들을 도운 원주민은 쳘저하게 무지하거나 피해자인 존재로 포장될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인신제의에서 인육 섭취가 과정에 있었느냐의 논쟁과는 별개로, 식량으로서의 인육 대량 섭취를 위한 인간 공물을 요구했다는 인터넷 썰은 완전히 낭설이라는 것이다.
굳이 식량이 부족하므로 인간 가축이리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더라도, 애초에 메소아메리카 종교에서 인간의 피는 악성으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신만이 인간의 토날리를[7] 온전히 얻을 수 있고 인간은 이를 섭취할 시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기에 인육을 식량으로 섭취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8] 설령 종교제의에서 인육 섭취가 있었다고 주장했던 스페인 선교사들의 기록이 사실이더라도 여기에는 '엄숙한 분위기 하에 사제들만이 종교 의례로서 소량의 인육을 밍밍한 국물의 고명으로 올려 먹었다.'라 쓰여있고, 이런 주장마저도 현대에서는 명확히 인육을 먹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반론이 많다.[9] 따라서 한국 인터넷에 퍼진 인간가축 설은 이미 현지와 서구권에서는 콩키스타도르가 자신들의 전적을 부풀리고 영웅화하기 위해 퍼트린 왜곡으로 밝혀져서 진작에 사장된 지 오래다.
자세한 내용과 경위는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 참조.
3.2. 콩키스타도르와의 동맹
비록 두 국가간의 감정적 골이 깊어지는 것은 불가피했으나, 꽃 전쟁을 통해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어 이전의 문명들처럼 어느 한 쪽이 자연재해와 혼란으로 멸망하지는 않는 그런 형태의 관계는 15세기 전반에 걸친 200년간 성공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가 메소아메리카에 도래한다. 콩키스타도르는 그 수가 적었지만, 그들은 신대륙 정복의 첨병으로 아즈텍군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그 중 하나였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당대 콩키스타도르치곤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코르테스는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가능한 한 현지 부족들과 협상하여 동맹을 이끌어내는 외교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반아즈텍 원주민 군대와 함께 아즈텍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대담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한다.
베라크루스와 푸에비아 지역을 지날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텍스코코 호수에 도달할 뻔했던 스페인 군대를 주춤하게 한 것이 바로 틀락스칼텍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제국을 상대로 표면상으로나마 독립국 지위를 유지한 국가답게 전투력이 강했다. 틀락스칼텍인 군대는 기습을 주로 활용했고 흑요석 검과 천갑옷을 사용했다.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는 척하면서 진영을 염탐하게 하는 기만전술을 펼치기도 하고 콩키스타도르들이 총포를 쓰지 못하도록 밤에 매복기습을 하거나, 수만 명의 대군을 축차투입해 소수인 콩키스타도르 검병들의 진을 빼는 등 아무리 죽어나가도 포기하는 법 없이 저항했다. 이들의 용맹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콩키스타도르 중기병이 돌격하며 내지른 창을 맨손으로 잡아채고는 흑요석 검으로 그 기병을 말 째로 베어 쓰러뜨렸다고 한다.
코르테스 군대의 뛰어난 기수인 페드로 데 모른은 다른 기병 3명과 함께 원주민 전사들의 대열로 돌진하다가 기병창을 적에게 붙잡혔다. 그가 창을 빼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원주민 전사가 그들이 사용하는 날이 넓은 흑요석 칼로 페드로에게 중상을 입혔다. 기수가 타고 있던 암말을 내리 베어서 몸에서 머리가 잘려나가 가죽만 붙어 매달린 상태에서 말은 곧 쓰러져 죽었다.
- 베르날 디아스 디 카스티요의 기록
- 베르날 디아스 디 카스티요의 기록
모른 외에 큰 피해는 없었다지만 보통 당시 중미 원주민 문명은 숫적으로 압도적이고 전황도 유리한데도 소수 기병의 도박성 돌격에 상급자가 당해서 허무하게 패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음을 생각하면 감투정신만큼은 정말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있다. 이렇게 악에 받혀 죽으려고 달려드는 틀락스칼텍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코르테스는 거짓 화친에 야음을 틈탄 매복기습까지 실패한 뒤에야 교섭에 응한 틀락스칼텍에게 완전히 동등한 군사동맹과 공동투쟁을 제안했다. 틀락스칼텍을 이루는 세 개 부족 중 두 부족의 족장은 이 강력한 이방인들과의 동맹에 찬성했지만 가장 세력이 큰 나와틀 부족의 지도자 젊은 치코텐카틀[10]은 반대했다.
하지만 코르테스와의 동맹을 찬성하는 족장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다수결 합의제에 따라 틀락스칼라 부족연맹체는 공식적으로 코르테스의 동맹이 되었다.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 원정을 갈 때 틀락스칼텍 전사 8천명을 지원군으로 보낸 것을 시작으로 슬픔의 밤 사태로 인해 위기에 몰린 코르테스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돕던 부족들 중 하나였다. 오툼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코르테스는 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노획한 아즈텍 총사령관의 군기를 선물하면서 혈맹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후에 이어진 아즈텍 정복 전쟁에서 스페인을 위해 가장 중요한 지형정보를 주는 건 물론이고 각종 물자와 인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될 때는 최대 20만 명의 병력를 지원했고 반란을 일으킨 젊은 치코텐카틀을 부족원들이 붙잡아 코르테스에게 압송하기도 했다. 이때 치코텐카틀은 반기를 들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3.3.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
아즈텍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으로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로부터 보상과 자유를 보장받았다. 코르테스가 스페인으로 압송된 뒤에도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의 '파트너'로서 스페인 왕실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말을 탈 권리[11], 총기를 휴대할 권리, 귀족 신분을 유지할 권리(기존 통치구조를 유지할 권리) 등을 인정받았으며 스페인 왕가로부터 문장과 권리를 하사받기도 했는데 스페인은 이 약속은 지켜 틀락스칼텍의 특권들은 스페인이 멕시코 독립전쟁에 의해 물러나는 그날까지 유지되었다.스페인에서 독립한 지금도 이들이 받은 세습작위는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 멕시코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마치 한국에서 친일파의 후손을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하다. 그러나 개요에도 서술되어 있다시피, 이 시기는 근대가 아닌 중세에 해당하기에 19세기에 발흥한 제국주의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공존함을 유의하여 무조건적인 비난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틀락스칼텍이 스페인의 메소아메리카 침략 활동의 선봉장을 자처했고, 이것은 스페인이 명백히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19세기까지 이어져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오래 기득권 지위를 누린 것 역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다. 스페인이 멕시코의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할 때는 가장 앞장서서 군사 지원을 했으며, 오히려 다른 원주민들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고 심지어 스페인의 지원 하에 치치멕이 지배하던 구역[12]으로 이민 가서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13] 테노치티틀란 함락 때 살아남아 투항한 아즈텍인들도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철천지 원수들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 식민정부와 협상을 해서 개척지 영구 보유 및 세금과 부역 완전 면제라는 특권을 얻어냈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 정복 당시 모든 잉카인들을 멸족 직전까지 몰아갔지만(잉카 제국 문서 참고) 여기선 상당히 유화적이었다.[14]
가톨릭에 대한 개종도 틀락스칼텍이 가장 앞장서서 진행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인신공양 풍습을 자체적으로 없앤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있지만,[15] 스페인의 아즈텍 문화 및 종교 탄압 정책에 가담했다는 점은 현재도 비판받고 있다. 다만 스페인의 앞잡이로서 그들로부터 가장 우호적인 민족임을 인정받아 스페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나와틀 문화를 어느정도 보존하고 지속시켰다는 측면도 있기는 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멕시코인 중에서 원주민식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틀락스칼텍인 조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주민 문화가 스페인의 정복으로 뿌리뽑힌 지금에는 라이벌이자 숙적인 아즈텍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틀락스칼텍인을 연구하는 몹시 미묘한 일도 일어난다. 특히 틀락스칼텍인들과 아즈텍은 같은 나와틀어를 썼기 때문이다.
다만 동맹이라고 해서 없던 면역력이 생기는 건 아니라서 스페인인이 들고 온 천연두와 홍역같은 전염병에 의한 피해를 가장 크게 봤다. 한때는 몇만의 병력을 제공하던 틀락스칼라의 틀락스칼텍인들이 500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민 등으로 인구가 많이 빠져나갔던 것도 컸고 혼혈이 잘 이루어지다 보니 그만큼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3.4. 멕시코 독립 이후
그러나 이런 전성기는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막을 내린다. 멕시코 연방은 끝까지 친스페인파였던 틀락스칼텍을 연방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틀락스칼텍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사방이 멕시코 연방에 합류한 시점에서 결국 자치권을 넘겨주고 멕시코 연방 틀락스칼라 주가 된다.근현대 멕시코 연방은 아즈텍 제국으로부터 바로 계승된 것도 아니고 편입되고 나서도 대규모의 유혈 정치보복 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멕시코는 그간 스페인으로부터 기득권 지위를 부여받아 앞잡이 노릇을 하던 틀락스칼라를 좋게 볼 수가 없었고, 친스페인 성향이 강한 틀락스칼라 주를 1/5크기로 강제 분할해버린다.
현재 인프라는 덜 신경써서 그런지 멕시코 중부지역 중에서 취약한 편에 속한다. 버스를 예로 들면 멕시코 시티로 가는 버스는 있어도 케레타로로 가는 버스는 아르코 노르테(Arco Norte)가 개통되고 나서도 생겨나지 않았다. ADO와 IMASA 경계를 나누는 과정에서 틀락스칼라는 배제되었다. 아무래도 틀락스칼텍을 좋게 바라볼 수가 없는 현대 멕시코의 상황이 틀락스칼라 주를 소외시키는 것으로 보인다.지금도 멕시코 시티 사람들과 지역감정이 남아있는 듯하다. 서로를 매국노의 후손, 식인종의 후손으로 부르면서 싸우는 모양.(...)
사실 상술했듯이 비록 틀락스칼텍의 기득권 지위가 19세기까지 이어져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제국주의에 협조한 측면이 분명 있긴 했어도 어쨌든 스페인에 가담했던 시기 자체는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이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던 15세기 중세였기에 뿌리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긴 하다. 또한 아즈텍 역시 대규모 인신공양이 있긴 했지만 당시 메소아메리카 역사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야만적으로 볼 일도 아니었고 이걸 즐겼던 식인종이라는 비난은 더더욱 터무니없는 왜곡이었으니, 이런 상황은 같은 나와틀 문명권에 속한 민족끼리 서로를 지역감정으로 도가 지나치게 비하하며 물어뜯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결국 따지고보면 이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의 원인은 모두 스페인의 침공과 식민정책에 원인이 있으므로 결국 멕시코 역사의 비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4. 오해
촘판틀리 유적이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되면서 폭정을 일으킨 아즈텍 제국과 피해자인 평화를 사랑하는 틀락스칼텍이라는 이분법이 종종 유포되지만, 사람들이 가장 크게 간과하는 것은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마야 문명과 머나먼 잉카 문명 역시 공유하고 있으며 틀락스칼텍을 비롯하여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부족들에게도 널리 퍼진) 메소 아메리카의 토착문화였다는 점이다.[16] 틀락스칼텍도 포로를 잡으면 인신공양을 했으며, 꽃 전쟁도 아즈텍이 틀락스칼텍에게 패배한 적이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아즈텍 제국 문서 참조. 무엇보다 틀락스칼텍은 이후 몇 세기가 넘도록 스페인의 앞잡이를 자처해 나와틀 문화에 대한 탄압에 가담하였기에 현대 멕시코에서는 피해자 코스프레하지 말라는 비난을 훨씬 많이 받는다.스페인 역사가 디에고 무뇨스 카마르고(Diego Muñoz Camargo)가 기록한 <틀락스칼라 역사(Historia de Tlaxcala)>에 기술된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1384년 틀락스칼텍과 또다른 도시국가인 우에쇼친코[17]의 전쟁에서 승리한 틀락스칼텍은 그들이 섬기는 신인 카막스틀리에게 바치기 위해 수많은 포로들을 인신공양하고 잡아먹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해당 서술은 스페인 역사가에 의해 서술된 내용이기에 과장과 왜곡이 많이 들어가 있음을 유의할 것. 아즈텍을 비롯해 메소아메리카 식인설도 현재는 점차 부정되어 가거나, 다른 문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식민사관에 의해 아주 과장되었다고 밝혀지는 추세다.
5. 미디어 매체에서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의 몬테수마 캠페인에서도 스페인과 함께 플레이 문명인 아즈텍의 주적으로 등장한다. 첫 시나리오를 제외한 모든 시나리오에서 등장하기에 오히려 스페인보다도 더 질기고 짜증나는 존재.
- 대항해시대 3에서 이벤트로 재현이 가능하다. 보통은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으로 바로 가는데 아즈텍 제국을 발견하면 황제 몬테수마 2세가 플레이어를 보고 놀라면서 '당신은 신인가?'라고 질문한다. 여기서 신이라고 대답하면 플레이어에게 제위를 선양하겠다면서 태양석과 금화 1만 닢, 그리고 플레이어 측 국가로 테노치티틀란 남쪽에 있는 도시 트라파를 넘겨준다. 신이 아니라고 하면 금화 2만 닢을 주지만 태양석도 도시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틀락스칼라에 먼저 들르면 도시 사람들이 신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면서 같이 아즈텍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실제 역사대로 아즈텍의 압제를 받던 도시국가들과 연합해 아즈텍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정복 플레이로 이어진다. 이 경우 대도시였던 테노치티틀란은 완전히 박살나 중소도시 멕시코로 변해 버린다. 연합을 거절하면 "맙소사, 신께서는 우리 보고 죽으라고 하신다!"라고 한다. 사실 테노치티틀란을 먼저 들러서 아즈텍을 발견하더라도 역사대로 코르테스가 결국 아즈텍을 멸망시켜 버린다.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아메리카스 캠페인에서 플레이 가능 세력으로 나오는데 주변 영토가 다 아즈텍에 둘러싸여 있어 심히 암울하다. 그래도 시작시 풀 군단 4개가 주어지고 아즈텍군은 도시마다 소규모 군단이 주둔하니 각개격파로 쳐부수자. 원래 역사대로 뉴 스페인과 동맹 맺는 플레이도 도움이 된다. 사실 플레이어가 어느 쪽을 잡느냐에 따라 운명이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플레이어가 틀락스칼텍이라면 초기에 주어진 풀 군단으로 아즈텍을 각개격파해 버릴 수 있지만 아즈텍을 잡으면 흩어진 병력을 모아 1~2턴 내에 틀락스칼텍의 풀 군단을 뭉개버리고 멸망시킬 수 있다.
[1] 약 50명에서 200명 가량의 공동 대표가 의회를 구성했다.[2]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이 된 후에는 사실상 스페인 국왕이 틀락스칼텍의 군주 역할을 했다.[3] 이 과정에서 인신공양을 행한 흔적이 있다. 통념과 달리, 본래 중남미 일대에서 인신공양은 흔한 풍습이었다.[4] 특히 기습을 잘 사용했다고 나오는데, 이런 방식은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군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잘 사용한 것처럼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상대하는 데 유용한 전술이다.[5]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와 비슷하다.[6] 자세한 사항은 아즈텍 제국의 '꽃 전쟁' 항목 참조.[7] 인신제의의 목적이 이 토날리라는 것을 태양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모든 존재에 깃든 기운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8] 이런 '인육을 먹으면 병이나 저주에 걸린다.'라는 믿음은 다른 문화권의 종교들에서도 자주 관찰되는 신앙이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종교적 믿음이 인류가 동족포식으로 걸릴 수 있는 쿠루병같은 질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서 작용했다고 본다.[9] 그러나 스페인의 침략과 식민화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기에 아즈텍 제의의 정확한 과정을 알기는 어려워지고 말았다.[10] 사실 그의 아버지인 늙은 치코텐카틀이 부족장이고 그는 전쟁지도자였지만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젊은 치코텐카틀은 아무래도 갑자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스페인에 대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끝까지 의심하면서 스페인 세력과의 동맹을 반대했다.[11] 스페인 측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에게 말을 타지 못하게 규제한 이유는 이들이 기병대를 만들어 군사력을 키울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꽃 전쟁이나 반(反) 스페인 항쟁 등으로 상당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부족들의 힘을 제한하고자 했다. 이런 규제에도 불구하고 틀락스칼텍인이나 아즈텍인의 친척뻘 민족인 코만치족이 스페인인 이주민들의 농장에서 말을 훔치거나 도망쳐나와 야생화된 말을 길들여 유목민이 된 후에는 스페인 식민당국을 상대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약탈과 살인이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데, 당연히 스페인의 식민사관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12] 지금의 미국 뉴멕시코, 애리조나 주. 이들의 상당수는 현지 백인과 결합하여 완전히 백인화되었다.[13] 스페인은 이 지역을 개발하여 농경지로 만들고 싶어했는데 스페인 본토인들은 이 지역의 기후와 맞지 않았고 현지인들은 치치멕 등의 유목민이어서 복속시켜도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주민족이었던 틀락스칼텍인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농경지로 개간하도록 한 것이다.[14] 잉카 제국 또한 스페인군이 페루와 에콰도르 등 잉카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남미 지역의 피지배 원주민 부족들을 먼저 정복하거나 회유한 뒤 침공했다.[15] 아즈텍처럼 대규모 인신공양까지는 아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제국과 도시국가간 규모의 차이였을 뿐이다. 애초에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은 인신공양을 상호합의 하에 진행했던 만큼 틀락스칼텍인들 역시 자체적인 인신공양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16] 실제로 틀락스칼라 지역에 거주하는 현지인, 심지어 틀락스칼텍의 후손들도 인신공양에 대해 대화할 때 이 점을 들어 틀락스칼텍에 대해 오해하지 마라고 한다.[17] 멕시코시 남동쪽의 우에쇼친코라는 나와틀족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