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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제국/인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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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아즈텍의 달력과 인신공양
2. 원인에 대한 가설
2.1. 단백질 부족
2.1.1. 반론
2.2. 사회, 문화적 이유2.3. 통치 수단
2.3.1. 꽃 전쟁
3. 결론4. 소멸

1. 개요

파일:external/www.tagmata.it/rowena_morrill_aztec_sacrifice%20%5B1600x1200%5D.jpg

아즈텍 제국은 고도의 기록과 국가 체제가 정비된 문명 중 대규모의 인신공양 및 그와 관련된 식인 행위가 국가 제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있었던 국가들 중 제일 근래까지 존속한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1] 사제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적군 포로의 팔다리를 구속한 상태에서, 흉부를 돌칼로 베어낸 후 심장을 꺼내어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시체는 피라미드 계단에서 굴려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는 당시 포로가 되었던 스페인 병사들의 기록에 잘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신공양을 했던 유적들이 실제로 발굴되고 있다.

아즈텍뿐만 아니라 메소아메리카는 전반적으로 인신공양이 유독 많이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이는 현생인류가 정착한 시기가 다소 늦었을 뿐더러 유라시아와는 교류가 불가능한 완전히 단절된 지역이었으며, 대형 동물의 부족으로 제물로 바치기에 합당한 가치를 가진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기원전의 올멕 문명과 테오티우아칸부터 시작해 메소아메리카 전반에 퍼진 이러한 행태에,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2] 아즈텍 이전의 톨텍 문명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대부터 중남미에서는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심장을 적출하는 등의 잔혹한 제의가 굉장히 많았으며 아즈텍의 제의 또한 결과적으로 그 연장선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그럼에도 아즈텍이 독보적인 인신공양 제국으로 꼽히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구시대 문명은 물론이고 동시대인 후기 마야잉카에 비해서도 역사적 기록이나 유적이 많이 남아있고 정치적인 이유로 고고학 연구가 가장 활발하기 때문이다.[3] 둘째로 톨텍 시절부터 이 지역의 제의는 굉장히 과격한 편에 속했는데 덩치가 커지면서 인신공양의 횟수가 늘어나 메소아메리카에서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 규모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인신공양을 기본시하는 중남미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인신공양 제사는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 제사 안식일이 1년 중에 5일에 그쳤다고 한다.

2017년 멕시코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 피라미드 지하에서 새로운 해골탑과 수백 개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이 해골 중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과 어린아이의 두개골이 발견되어 전쟁 포로 외에도 광범위한 인신공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멕시코시티 지하 아즈텍 신전서 지름 6m 원통 해골탑 발굴, MBC. 그리고 2018년, 이것이 촘판틀리로 밝혀지며 멕시코 정부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과장이라 부정했던 안드레스 데 타피아의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우에이 촘판틀리의 해골탑 일부에서 약 670구의 인간 두개골을 발굴했는데, 심지어 이는 표면에 불과하고, 실제 해골탑의 대부분은 여전히 묻혀있는 상태인데 추정치는 약 114피트(35미터)에 길이는 16피트(5미터)로,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인 136,000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고고학자들은 대신전의 시대에 대한 그들의 지식에 의거하여, 테노치티틀란이 1325년에 설립된 이래로 인신공양을 시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촘판틀리의 특정한 단계는 1486년에서 1502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 #, #, # 발견된 인골 중 75%는 전쟁으로 잡혀온 전사들로 추정되는 성인 남성의 것이고, 20%가 여성, 5%가 아이의 것이다.

대피라미드 인근의 죽음의 신 믹틀란테쿠틀리의 신상은 아마란스 씨앗을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든 뒤, 어린 아이의 피를 섞어 반죽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템플로 마요르(대신전)에서 출토된 믹틀란테쿠틀리 신의 테라코타에서 나온 성분 분석에서 실제로 인간의 혈흔이 검출되었다. #

1.1. 아즈텍의 달력과 인신공양

  • 아틀라카카우알로(2. 2. - 2. 21.)
    • 제사대상: 틀랄록
    • 제사방법: 물의 신들에게 어린아이를 바친다. 참수형으로 목을 자른 다음, 피를 양동이에 받아 밭에다 뿌리며 옥수수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 틀라카시페우알리스틀리(2. 22. - 3. 13.)
    • 제사대상: 우이칠로포치틀리
    • 제사방법: 검투의식을 통해 포로들을 희생시킨 뒤, 가죽을 벗긴다. 벗긴 피부를 입고 춤을 춘다.
  • 토소스톤틀리(3. 14. - 4. 2.)
    • 제사대상: 틀랄록
    • 제사방법: 어린이들의 심장을 꺼내고 가죽을 벗겨 매장한다.
  • 우에이토소스틀리(4. 3. - 4. 22.)
  • 에찰쿠알리스틀리(5. 13. - 6. 1.)
  • 테쿠일우이톤틀리(6. 2. - 6. 21.)
    • 제사대상: 소치필리 등
    • 제사방법: 포로들의 심장을 꺼낸다.
  • 우에이티쿠이우이틀(6. 22. - 7. 11.)
    • 제사대상: 실로넨 등
    • 제사방법: 여성을 참수한 다음 심장을 꺼낸다.
  • 쇼코틀우에친(8. 1. - 8. 20.)
    • 제사대상: 시우테쿠틀리 등
    • 제사방법: 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다. 산 채로 불태운다.
  • 오치파니스틀리(8. 21. - 9. 9.)
    • 제사대상: 토시
    • 제사방법: 젊은 여성을 참수해 바치고, 가죽을 벗겨 젊은 남성이 이를 입고 춤을 춘다. 포로를 높은 곳에서 떨어트려 죽이고 심장을 꺼낸다.
  • 테코틀레코(9. 10. - 9. 29.)
    • 제사대상: 소치케찰
    • 제사방법: 산 채로 불태운다. 이후 심장을 꺼낸다.
  • 테페이우이틀(9. 30. - 10. 19.)
    • 제사대상: 틀랄록, 마야우엘
    • 제사방법: 어린이와 두 명의 귀족여성의 심장을 꺼낸다.
  • 케촐리(10. 20. - 11. 8.)
    • 제사대상: 코아틀리케, 이스키테카틀
    • 제사방법: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 이후 심장을 꺼낸다.
  • 판케찰리스틀리(11. 9. - 11. 28.)
  • 아테모스틀리(11. 29. - 12. 18.)
    • 제사대상: 틀랄록
    • 제사방법: 어린이와 노예들을 참수한다.
  • 티티틀(12. 19. - 1. 7.)
    • 제사대상: 토나-코스카미아우, 이라마테쿠틀리, 야카테쿠틀리
    • 제사방법: 여성의 심장을 꺼낸 뒤 참수한다.
  • 이스칼리(1. 8. - 1. 27.)
    • 제사대상: 시우테쿠틀리
    • 제사방법: 포로를 '시우테쿠틀리'로 분장시킨 뒤 제물로 바친다.
  • 네몬테미(1. 28. - 2. 1.)
    • 단식주간
    • 이 기간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2. 원인에 대한 가설

2.1. 단백질 부족

어째서 이렇게 대량으로 인신공양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인신공양을 대체할 만한 가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형 야생동물도 이미 멸종한 탓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을 처음 체계화한 학자는 마이클 하너로, 발표 시점은 1977년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고기단백질을 보충하려는데, 멕시코빙하기 이후로 대형 초식동물의 멸종으로 인해 사냥할 짐승이 없었고, 칠면조를 제외하면 가축도 없었으니[4] 아즈텍인들이 동물 대신 인육을 먹는 식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인신공양을 치렀으며, 인구 20만 명이 넘는 대도시 테노치티틀란피라미드는 이러한 대량 학살이 있을 때마다 현대정육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틀라카틀올리'란 인육과 옥수수죽을 섞은 음식이 있었는데 말그대로 신에게 바쳐진 희생양의 인육을 먹음으로서 신을 먹는 것과 같다는, 즉 신과의 합일로 받아들이는 아즈텍만의 독특한 종교와 문화 분위기가 인신공양에 대한 거부감없이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묘사가 된다.

테노치티틀란과 그 부속도시들을 합쳐서 최소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주변 호수의 어획으로 먹여살리는건 당연히 급속한 남획으로 인한 수자원의 고갈로 이어져 쉽지 않을 것이고, 칠면조같은 가금류토끼같은 작은 포유류는 잡아봤자 애초에 고기양이 얼마 안 나오기 때문에 어차피 넘쳐나는 인적자원이 있다면 차라리 식인에 대한 금기를 없애고, 식인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것이 제국의 장기적 운영에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환경에 따른 식인론을 지지하는 이들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몬테야노의 논문(1978)보다 나중에 낸 저서인 《음식문화의 수수께끼》(1985)에서 몬테야노가 제시한 반론들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아즈텍인들이 칠면조로 단백질을 얻으려면 사료가 고기로 전환되면서 나오는 90%의 손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아즈텍에 잉여곡물이 충분했는가?
  • 육식동물인 개한테 옥수수를 먹여서 살을 찌우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 몬테야노와 다른 학자가 수집한 아즈텍인들의 식품 목록을 보면, 주식인 콩과 옥수수, 채소, 과일 외에 개-칠면조와 수많은 야생동물이 있다. 사슴, 아르마딜로, 물새, 들새, 물고기, 방울뱀, , 벌레, 물파리가 호수 위에 낳은 알까지 걷어서 먹었다. 몬테야노는 "이렇게 다양한 대체식품이 있으니 인육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나(마빈 해리스)는 "이렇게 다양한 대체식품을 먹는 사람들이 인육이라고 못 먹겠는가?"라고 묻겠다. 그리고 물파리 알까지 걷어먹어야 했다는 건 그만큼 단백질이 부족했다는 증명이다.
  • 위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반경 20마일(32km) 안에 거주하는 100만 명에게 분배할 수 있는 짐승고기와 생선, 새의 고기는 1년에 1인당 몇 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 구세계의 지배층은 포로를 살려두고 일[5]을 시킴으로서 고기를 더 생산할 수 있었지만 아즈텍에서는 살아있는 포로를 활용해서 고기를 생산할 수 없었다.
  • 정복한 지방에서 잉여곡물을 가져와 더 많은 칠면조를 키우려고 해도 곡물을 운반할 수단이 사람의 등짐밖에 없다. 일꾼이 왕복하면서 먹는 곡물의 양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하는 양보다 더 많다.
  • 옥수수 수확철에 많은 포로를 잡아먹은 건, 그때가 "식량이 가장 부족한 시기"가 아니라 "희생물을 살찌우기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사료로 삼아서 잡아먹을 포로를 가축처럼 살찌운 거다. 대부분의 희생물은 전쟁포로인데, 배고픈 계절은 멕시코 분지의 겨울 우기이고, 수확기는 건기이다. 전쟁은 당연히 우기가 아니라 건기에 하는 행사이다. 건기에 적지에 쳐들어가면 잘 익은 적의 곡물로 군량을 보급하고, 빼앗은 곡물을 포로에게 먹이며 포로에게 등짐을 지워 운반해온 뒤 포로를 잡아먹을 수 있다.
  • 저자의 결론: 아즈텍인들의 식인은 단백질 부족이 원인인 것이 맞으며, 포로를 살려서 노예로 삼는 것보다 죽여서 고기로 먹는 쪽이 정치/경제적으로 더 이익이 되었다.

아즈텍에서 식인이 사라진 것은 스페인의 지시에 의해 식인이 금지되고, 유럽에서 전래된 돼지가 완벽하게 인육을 대체한 이후부터이며, 또한 만주가 원산지인 대두가 유입되어 옥수수 농경으로 인해 토질에서 고갈되는 질소를 보충해주면서 옥수수 농사 연작이 가능해지고 나서 남미인들의 고질적인 식량부족도 혁신적으로 개선되었다.

2.1.1. 반론

가장 유명한 반론이라고 하면 1978년 베르나르드 R. 오르티스 데 몬테야노(Bernard R. Ortiz de Montellano)의 논문이 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과 식인은 (기근 등 식량이 부족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곡물 추수기간 등 식량이 풍족한 기간에 더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즉, 아즈텍인들에게 식인은 (미국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칠면조 요리를 먹는 수준의) 종교적, 문화적 행사에 가깝지 단백질 부족에 따른 불가피한 생존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또한 당시 멕시코에서 고기를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가정과 달리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 호수 위에 자리하여 어업이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매우 풍부한 수산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당시 기록에 따르면, 테노치티틀란이 위치한 텍스코코 호수 인근의 비교적 작은 호수였던 소치밀코(Xochimilco) 호수와 찰코(Chalco) 호수에서는 1년에 잡히는 물고기의 양이 각각 100만 마리 이상일 정도였다고 하며(출처: Freshwater Fishes of North America: Volume 2: Characidae to Poeciliidae, Melvin L. Warren, Jr., Brooks M. Burr) 실제로 당시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어업 유적이나 도구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거기다 아즈텍 제국은 [6]토끼, 칠면조, 오리 등을 식육용으로 길렀으며 특히 칠면조는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가축화와 사육에 성공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멕시코 특유의 친환경 농사방식인 '치남파'(Chinampa) 농업으로 인하여, 지력이 고갈되는 일도 거의 없이 농업 생산량도 풍부한 편이었다.

비교문화사적으로도 아즈텍 제국의 식인을 단순히 단백질 부족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대형 초식 동물이 존재하는 지구상의 다른 나라에서도 , 같은 동물은 일단 군사용, 농업용, 운송용으로 쓰이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들 동물의 도축에는 크고 작은 제한이 있었으며 고기 그 자체만을 위하여 사육되거나 하는 잦은 식용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돼지는 인간용 식량자원을 먹여 키우는 등 사료가 과다하게 투입되는 문제로, 은 풀뿌리까지 완전히 뽑아먹는 습성상 넓은 목지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키워야 하는 등의 문제로 그리 효율적으로 사육할 수 있는 식용 동물은 아니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단백질 위주의 식단은 공장형 축산이 도입됨에 따라 탄생한 것이지, 인류 역사상 육식 그 자체가 풍족했던 전근대시대는 원래 거의 없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집에서 키우는 , 가금류(, 오리) 그리고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사슴이나 토끼 등의 야생동물로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환경적인 측면에서 아즈텍이 크게 불리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육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나라의 예로 봤을 때도, 단백질 부족이 곧장 식인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약 1,200년간 육식을 기피해던 전근대 일본의 사례가 있는데, 16세기 당시 일본의 경기지방(쿄토, 오사카, 사카이 등)의 인구를 전부 합치면 약 100만 명을 넘길 정도였지만 그들은 대형 초식동물을 식용하지 않고 조류와 물고기를 먹는 식습관을 기반으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물론 전근대 일본인들은 식량 부족 등으로 인하여 마비키를 통해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에도시대 일본 열도 전체의 인구가 아즈텍 전체의 인구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점과 아즈텍 제국에도 멕시코만과 태평양, 그리고 텍스코코 호수의 풍부한 수자원과 산, 고원, 열대우림 등에서 서식하던 야생동물들이 충분히 존재했었음을 고려하면, 아즈텍인들의 식용 동물 자원이 다른 문명보다 월등히 부족했다는 증거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970년대 현대 멕시코인들의 식단보다 과거 아즈텍인들의 식단이 훨씬 더 풍족했다'는 주장까지 언급하는 학자가 있을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테노치티틀란은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주변 부족들로부터 방대한 양의 공물을 빨아들이는 체제를 갖췄음에도 식료품보다는 공예품과 사치품을 위주로 요구한 걸 보면, 영양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으며 고기 공급과 관계없이 식인을 즐긴 것은 맞다.

메소아메리카에 대두는 없었지만, 신대륙 원산인 강낭콩[7],테라피콩, 적화 강낭콩 등이 존재했고, 이를 주곡 작물 중에 하나로서 보편적으로 섭취했다. 지력 회복 효능은 대두보단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기후에 따라서는 현대에도 대두보다 더 선호되기도 한다.

도리어 유럽은 아메리카 토산 강낭콩을 지력회복작물로 도입해서 서구인에게 콩이란 곧 강낭콩으로 명명하게 된다. 그냥 bean으로 표기하면 보통 강낭콩을 가리키고, 다른 콩류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common bean이라고 부른다. 아메리카가 유럽으로부터 지력회복작물을 들여온게 아니라 정 반대로 유럽을 강낭콩으로 포밍했단 말이다.

당연히 축산업보다 강낭콩 재배가 에너지 효율이든 단위면적당 생산량이든, 공급의 안정성이든 모든 부분에서 효율적이다. 이러한 강낭콩 재배로 아즈텍인 더 나아가 메소아메리카인들은 단백질 부족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거기다, 축제나 행사시에 인신공양한 시체가 너무 많아 그냥 늪에 버렸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식량 부족이 모든 원인이라고만 하기는 힘들다. 이부분은 아래 사회 문화적 항목에서 더 자세히 나온다.

2.2. 사회, 문화적 이유

인신공양을 하는 종교적 의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사제들이 제단에 모이고 제물들은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포박을 당한 채 기다린다. 한 명 한 명 제단으로 끌고 가 눕힌 후, 사제는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정확하게 제물의 심장이 있는 쪽 가슴을 오려내고 심장을 도려낸다. 그리고 그렇게 제단에서 심장을 먼저 태운 다음 죽은 제물은 따로 모아서 교수형 자세로 불에 구워졌다.

이 의식은 아무 때나 하는 건 아니고 태양신과 관련된 시기에 적합한 여성들을 추려내어 의식을 진행했다. 이 의식에 사용되는 여성은 태양신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써 의식이 끝나면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잡아온 적의 전사를 잡아먹거나, 제물로 삼는 일도 꽤 흔했다.[8] 개중에는 짐승처럼 다리나 목에 줄을 묶어서 기둥에 매어놓고는 실력 좋은 전사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만드는 것도 있었는데, 이때 제물이 되는 전사에게는 방어용으로 비루한 무기만 지급해주고는 흑요석 칼날이 달린 곤봉과 갑옷으로 철통무장을 한 전사와 싸우라고 했다[9].

의식을 행하는 방법으로는 대표적으로 5가지가 있는데, 평균적으로 심장을 꺼내 불에 굽는 것과 여성의 경우는 제단에 눕혀 목을 치는 방법이 사용됐다. 이외에도 화살로 벌집을 만들거나 불에 굽거나, 맨몸에 칼 하나만 주고 전사와 겨루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제물이 피를 많이 흘릴수록 태양신에게서 더욱 큰 축복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군주의 생일이라든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국경일로 삼을 만한 기념일에도 수많은 사람이 제단을 지났다. 특히 테노치티틀란에 처음으로 신전을 세운 날에는 그날 당일에만 30,000명을 제물로 바쳤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나 디에고 두란 수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티소크 황제의 20,000명 처형이나 1487년 피라미드 완공 기념식에서의 80,000명 연속 처형도 있다. 티소크의 20,000명 처형 당시엔 시체를 다 감당하지 못해서 늪지에다 아무렇게나 버렸고, 80,000명 처형 당시엔 도시 밖까지 길게 줄이 늘어져 자기 차례만을 기다렸다.

이외에도 다른 지역의 식인문화처럼[10], 식인을 일종의 부족간의 합일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아즈텍 제국 뿐만이 아니라 틀락스칼라를 포함한 아즈텍 지역 전체[11]가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를 정도로 지나치게 효율적인 농사기술까지 갖춰져 있었던 것은 인신공양 열풍이 꺼지지 않는 주 요인이 되었다. 매소아메리카 특유의 농사법인 치남파는 자그마치 1년에 7모작까지 가능했다. 날씨만 괜찮으면 사람 좀 없어도 농사짓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반대로 가뭄이 들어 기근이 생기면 사람을 좀 바쳐서 해소해야 했던 것이다.

2.3. 통치 수단

아즈텍의 인신공양 역시 통치 수단의 일종이었다. 우리가 아는 익숙한 아즈텍 신화에서는 태양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만 한다며 매일 인신공양을 하는 명분을 설명했다. 그래서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으로 유럽의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마녀사냥이라든가, 심지어 근현대의 이념 이데올로기로 인한 대량학살을 들고 와서 '아즈텍인들은 이 교리를 진지하게 믿어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행위를 저지른 거지, 다른 문명권과 근본적으로 차이는 없다'고 하는 논지를 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양을 움직이기 위해 매일매일 신선한 심장을 바친다'는 신화는 제사장 틀라카엘렐이 제국 통치에 적합한 극한의 효율을 따져서 이 아즈텍 종교를 손봐서 만들었다. 그 전에는 멕시코에 태양에게 인신공양으로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태양이 움직인다는 설은 없었다. 몬테수마 1세의 아버지인 이츠코아틀 틀라토아니 시절에 침투민족인 아즈텍인들이 피지배민들을 지배할 명분으로 대대적인 신화 만들기에 나서며 아즈텍 종교가 정립되었다. 또한 당시 몬테수마 1세의 재위기는 자연재해가 빈번하던 흉흉한 시기로 적절한 인구수 조절로 황족 권력의 안정적인 통치를 꿰하는 일면도 있었다. 이 시기 이전까지만 해도 메시카 일족이라 해서 인신공양이 특별히 심하지 않았으며, 기존 마야나 주변 부족들처럼 전쟁에서 패배한 쪽의 왕족이나 전사들만 희생제물로 바치거나 왕족이 자해를 하여 바치는 선에서 그쳤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즈텍이 패권을 잡기 이전 테오티우아칸 등의 잘나가던 선진문명들도 갑작스러운 몰락을 겪으며 쇠락한 사례가 굉장히 많은데 그 배경은 신대륙 특유의 재해가 빈번한 환경과 그에 취약한 이들 주변 문명사회의 약점 때문이었다. 이런 혼란 와중에는 하극상이 굉장히 자주 일어났는데 주로 지배를 받던 평민층이 들고 일어나 지배자층들을 공격해 쫓아내고 다시 사람들이 흩어졌다가 모이길 반복하는 역사적 흔적이 거의 동일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 자연재해란 곧 지배계층의 위협과도 직결되었기에 이런 군중의 불만을 조절하는 차원에서라도 제물을 적나라하게 바치는 공포정치를 통해 아즈텍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배를 굳건히 하려 했던 것이다. [12]

이츠코아틀과 틀라카엘렐은 아즈텍 종교를 재편성하며, 아즈텍인이 기존에 쓰던 경전 및 서적과 피지배인들의 서적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아즈텍의 책[13]이든 피지배인의 책이든 기존의 책들을 죄다 검열해 새로 정립된 아즈텍 종교에 맞게 바꾸거나 없앴다. 이들은 메소아메리카 피정복민의 신화와 아즈텍인들의 고유신앙을 버무려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는데, 그런다고 사람의 사고가 바로 바뀔 수는 없는지라 기존의 역사서와 종교책들은 소각시켜버리는 일을 직접 겪어본 사람들과 이를 구전으로 들어서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생생이 살아 숨쉬며 길거리마다 널려있었고, 비록 기존의 문화는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지만 이러한 탄압이 벌어졌다는 역사는 전해지게 되었다.[14]

즉 이들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살육하고 인신공양하며 식인했던 것은 종교 권력+세속 권력으로 저지른 통치 행위, 유희 행위로서 강인한 전사를 바쳐서 제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식민부족을 바쳐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각 식민부족마다 제물 할당량을 정해서 서로서로 싸우도록 유도해 분열시키며, 아이들은 틀랄록 신이 좋아하니 바쳐 자연재해가 빈번했던 환경에서 인구 조절도 하는 무시무시하게 정교하고 사악한 설계로 짜여진 국가 시스템의 중추였으며, 당대 주변 부족민들의 증오를 썩어넘치도록 받았다. 아즈텍의 정치•사회•문화 자체에서 꽃 전쟁과 이민족에 대한 인신공양 및 식인은 재미있고 즐거운 문화 컨텐츠이자 정교한 국가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휘하 부족들의 원한을 어마어마하게 사긴 했지만 아즈텍 제국은 각 부족의 지도부를 회유하고 교육해, 부족보다는 아즈텍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유도하여 반란을 억제했다. 이들은 사실상 아즈텍의 귀족이나 다름없었고, 본인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꽃 전쟁에서 실제로 포로로 잡히고 죽어나가는 부족민들과는 단절되어 있었으며, 아즈텍에 반기를 들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한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지휘 경험이 있는 수뇌부는 친아즈텍파이고, 다른 부족과 손을 잡으려고 해도 수뇌부간의 커넥션없이 구심점이 되기는 요원했던 것이다. 물론 제국 휘하가 아닌 틀라스칼텍인에게는 생으로 증오를 받았지만 애시당초 아즈텍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고, 그들은 전쟁이 나면 '수확'하기 위한 목장이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즈텍은 톨텍도 마야도 이루어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구조는 상당히 잘 짜여져 있었기에 천재지변이나 지나친 군사국가화 등의 요인으로 아즈텍 제국이 약화되지 않는 이상 제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그러나 대륙 내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변수인 스페인 침략자들이 나타나 이들을 규합하면서 그 사이클은 깨져버렸고, 멸망으로 이어졌다.

2.3.1. 꽃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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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의 전쟁 방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꽃 전쟁이다. 꽃 전쟁은 이후 서구 역사가가 붙인 이름인데,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포로로 잡기 위한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이름과는 반대로 실상은 상당히 추악한데, 이 전쟁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이후에 인신공양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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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제국은 초기에 제국을 건설하면서 저항하는 여러 도시민들을 완전히 섬멸시키고 도시 자체를 말살시키는 일반적인 '전멸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멸 전쟁은 당연히 아즈텍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우세한 세력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로 뭉치거나, 동아시아식 조공의 형태로 충돌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만 하지만, 아래에서 서술할 인육 문제 때문에 평화적인 외교 관계가 성립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아즈텍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해야 했지만, 대규모 원정은 부담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담이 적게 드는 의례화된 전쟁으로 아즈텍 제국의 힘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인육도 확보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것이 바로 '꽃 전쟁'이었다. 아즈텍 제국은 이 꽃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상당히 독특한 제도(?)를 두었다. 귀족이나 평민 계층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주변 지리에 정통한 자를 뽑아서 일종의 외교관포치테카(pochteca)를 만들었다.

이 포치테카들은 아즈텍 제국의 속주나 주변국에 일종의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일했으나, 실상은 아즈텍 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수행했다. 포치테카들은 적당한 시기에 속주와 주변국들에서 아즈텍 제국에 위기가 닥쳤다는 거짓 소문이나, 반 아즈텍 주의를 부추기는 선전 활동을 해서 그들이 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15] 그렇게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아즈텍의 압도적인 군대에 밀려 포로로 잡혔고, 그대로 인신공양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3. 결론

논쟁이 오가기는 하지만, 가장 명확한 원인은 결국 종교다.[16] 신에게 제물로써 인간을 바쳐온 전통을 계속해서 유지한 것이 1차적 이유이며, 이 과정에서 공포정치나 (논란은 있으나)자원의 부족은 인신공양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아즈텍인들은 제물로 바치는 인간을 옥수수와 별반 다르게 보질 않았다. 그저 제물로 올리고 나면 다같이 먹는 똑같은 식량일 뿐이었다. 식인을 유희로 즐겼든 근엄한 종교 제물로 생각하였든간에, 메소아메리카인들의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인신공양은 그리 큰 이슈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소멸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걸 직접 목도한 스페인 제국콩키스타도르들과 선교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콩키스타도르들이 다 신실한 자들은 아니었지만,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고, 야만 그 자체였다. 게다가 남편을 따라 멕시코에 왔던 스페인 출신의 여성들아즈텍인들에게 사로 잡혀 인신공양되고 식인까지 되는 일까지 있었으니 아즈텍의 풍습이 당시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끔찍하고 사악한 행위로 보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고대에는 인신공양 제례가 있었다고는 하나 가톨릭 전래 이후에는 고대 레반트 지역의 인신공양 풍습이 상징화되어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라고 말하는 제사를 빼면 완전히 사라졌고[17] 중국도 시황제의 진나라 이후 사라진 풍습이었다. 순장 풍습은 진나라 이후 사라졌다가 몽골족의 원나라 때 부활해서 만주족의 청나라 초까지 지속되었지만, 하늘에 제의를 올릴 때 사람을 바치는 것과는 별개였고, 한나라 성립 이후 유교가 보편화되면서 제아무리 전제군주라 하더라도 순장을 강행하는 것은 신하들의 큰 반발을 부를 것을 각오해야 했기에 대부분 군주가 죽기 직전에야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나마도 후계자가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선왕의 순장 요구를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북유럽도 가톨릭이 보편화된 이후 인신공양 풍습이 사라졌으며, 이후 인신공양은 그 어떠한 종교가 보더라도 사라져야 할 문화였다. 일례로 스페인에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스페인 전역을 정복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으니 말 다한 셈이다. 에르난 코르테스와 선교사들이 아즈텍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필요성을 느낄 정도였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나던 도중 대대적인 인신공양 제의를 보고 경악해 대포로 제단을 부수고 석궁으로 사제를 저격하는 등 온갖 깽판을 친 뒤에 제물로 바쳐져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을 구출했다. 이때 목숨을 건진 자들이 10,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때, 구출된 자들로부터 사연을 들은 코르테스 일행은 인신공양이 벌어진 이유가 //돼지/ 같은 대형 가축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코르테스가 사비를 털어 일단 사육 난이도가 낮고 번식율이 엄청 높은 돼지[18]를 구해서 키우게 했다. 그 후 잠깐 스페인에 갔다 온 사이 돼지는 엄청나게 불어난 상태였다고.

그러나 스페인의 멕시코 일대 정복 이후 피의 의식을 금지시키고, 가축들이 대거 들어온 뒤에도 인신공양 풍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는데, 인신공양을 부추긴 가장 큰 원인이 종교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통치권과 인육 섭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변형된 종교가 오랜 세월 공고화되어 제국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이러한 인식을 하루아침에 뿌리뽑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인신공양과 인육 섭취를 막으려면 이 종교부터 어떻게든 하루아침에 뒤집어야 했는데, 이 하루아침에 뒤집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너무나도 신기한 우연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들의 인신공양 교리가 가톨릭의 성체성사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신공양 외에도 옥수수 가루를 사람 모양으로 반죽한 또띠아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도 이미 존재했다. 이 시점에서 가톨릭 선교사들의 전도 전략은 매우 명확하게 정해질 수 있었다. '또띠아로 만든 성체'와 '코치닐 염료로 염색한 음료'를 이용해서, 누구보다 고귀한 제물인 신의 아들인신공양되어 세상의 멸망을 늦춘 사건을 매주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대체는 메소아메리카인들에게 거부감은 커녕 커다란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세례성사 역시 몸과 영혼의 병을 고치는 신비한 의식으로 여겨져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졌고, 심지어 세례를 여러번 받는 원주민들[19]도 자주 나타났다.

그렇게 스페인인들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엄청난 속도로 가톨릭을 전파했고, 코르테스의 도래로부터 불과 수십년만에 주요 도시와 국가들에서 인신공양 의식을 박멸하는데 성공했다. 아즈텍의 대규모 인신공양은 그 의식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했으나, 스페인인들에게 그런 주요 국가들이 정복된 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는 점도 원인이었다.


[1] 바로 위의 인신공양 그림은 성룡이 <용형호제>의 맨 첫 장면에서 패러디하게 된다. 다만 성룡이 깽판을 치는 바람에 인신공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성룡만 공격하다가 나중에 성룡이 경비행기를 타고 도망가자 되려 그 비행기에 절을 한다.[2] 특히 마야 문명의 경우, 보남팍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에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바 있다.[3] 멕시코는 스페인에게서 독립할 때부터 메시카 민족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에 마야보다는 아즈텍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마야 문명도 무조건 홀대받는 것도 아니어서 치첸 이트사나 툴룸 등 마야 문명 시대의 유적지들도 관광지로 개발하는 등 마야에 대한 역사 연구와 관광 상품화도 이뤄지고 있을 정도이다.[4] 아즈텍보다 남쪽에 있는 잉카에서는 대량으로 제물을 바칠 필요가 있으면 가축인 라마알파카를 수백 마리씩 죽여서 제물로 바치곤 했다. 잉카에서는 인신공양을 해도 한두 명으로 그쳤고, 그 고기를 먹지도 않았다.[5] 가축을 돌보게 하거나, 가축의 사료를 생산하게 하거나, 사냥을 하는 것.[6]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테치치'라고 불리는 소형견 종이다. 오늘날 치와와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반론도 만만찮다.[7]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B%82%AD%EC%BD%A9[8] 멜 깁슨이 감독을 맡은 영화 <아포칼립토>에서는 주인공 일행을 포함한 남성들이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단, 그 영화에서 묘사하는 문명은 마야 문명이다.[9] 참고로 이렇게 했는데 외려 제물이 된 전사가 상대 전사를 죽여버리면, 곧장 풀어줘서 자유민에 편입시킨 후에 군대의 장교로 삼았지만, 당연히도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10] 예를 들어 쿠루병의 본산지인 파푸아뉴기니의 포레족은 식인 의식을 통해 그들의 영혼이 영원히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11] 메소아메리카의 나와틀인 집단[12] 식인을 포함한 인신공양이 발달된 계기가 되는데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의 공포는 식인을 정당화 시키는 종교 교리로 발전했다고 추정된다.[13] 아즈텍은 마야문명처럼 체계적인 표음문자 체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자체적인 상형문자로 적혀진 책을 만들어서 후대에게 지식을 물려주었다.[14] 재미있게도 이후의 스페인도 이와 비슷한 짓거리를 해서 마야 시절 서적 가운데 남아있는 책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마야 문자가 해독되기 이전까지 마야의 역사기록이 부실해서 연구에 난항이 있었을 정도였다.[15] 현대의 화이트 요원들과도 비슷하다. 대개 대사관 같은 외교공관에서 고위급 직원으로 위장한 이들이 현대의 '포치테카'인 셈이다.[16] 이렇게 종교에 매달린 원인은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에 대한 공포였다. 아즈텍이 조상으로 여긴 톨텍 문명도 가뭄으로 인해 약해지고 외부 침략을 당했으며 이러한 정기적 기근은 식인문화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식인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버렸다. 심지어 아즈텍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도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신에게 비는 차원에서 인신공양을 했을 정도로 일반적인 문화였다.[17]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 사라졌으며, 로마 외부의 야만족들인 바이킹슬라브도 가톨릭 전래 이후 이런 풍습이 사라졌다. 단,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규모로, 그것도 '자주' 이루어지는 일상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유라시아에서는 같은 지역 내에서도 인신공양 유무가 달랐고, 바이킹 이전 시대인 유라시아 내 청동기 시대 전투 유적을 봐도 보편적 문화로 자리잡은 곳은 전무했다.[18] 한 번 태어날 때마다 10쌍둥이는 기본이다.[19] 사실 고대 로마에서 초기 그리스도교가 퍼져나갈 때도 같은 일이 흔하게 있었으니 메소 아메리카인들이 유별난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좀 더 교리가 발전해서 세례를 여러번 못 받게 된 뒤의 로마에서도 별 다를바 없어서 죽기 전에 세례를 받는 사람이 많았다.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고? 그런데 세례는 한번 밖에 안해준다고? 그럼 죽기 전에 받으면 되지!그런 사례 중 제일 유명한게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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