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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스페인 보르본 왕조 제6대 국왕 카를로스 4세 Carlos 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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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8년 11월 11일 | ||
나폴리 왕국 포르티치 포르티치 궁전 (現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 광역시 포르티치 궁전) | |||
사망 | 1819년 1월 20일 (향년 70세) | ||
교황령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 | |||
재위기간 | 스페인 국왕 | ||
1788년 12월 14일 ~ 1808년 3월 1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70243><colcolor=#fff> 가문 | 보르본 가문 | |
이름 | 카를로스 안토니오 파스쿠알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후안 네포무세누 호세 하누아리오 세라핀 디에고 (Carlos Antonio Pascual Francisco Javier Juan Nepomuceno José Januario Serafín Diego) | ||
아버지 | 카를로스 3세 | ||
어머니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
형제자매 |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루이사, 펠리페, 페르디난도 1세, 가브리엘, 안토니오 파스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 ||
배우자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1] (1765년 결혼 / 1819년 사망) | ||
자녀 | 카를로타 호아키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마리아 이사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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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국왕. 카를로스 3세와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차남이었으나 형 펠리페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정신질환을 앓아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명됐다.[2]2. 생애
2.1. 즉위 전 시절
부왕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었을 때 포르티치 궁전[3]에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인 페르난도 6세가 자식 없이 승하하면서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게 되자 차기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동생 페르디난도가 물려받았다.그는 레슬링을 좋아하고 좋은 체격과 체력을 지녔으나 지적인 면이나 치정에 대해서는 명군인 부왕 카를로스 3세의 반도 못 쫓아갔으며 주변사람으로부터는 정직하고 선하지만 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부왕은 늘 그를 못미더워하였으며 "카를로스, 넌 바보다." 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정신질환이 너무 심한 형 펠리페보다는 훨씬 낫지만 단지 그뿐이었다.[4] 사촌여동생인 파르마 공녀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이 확정되었을 때 그때까지 여자랑 교제해 본적이 없던 그는 어쩔 줄 몰라했고 그때 부왕은 "바보같은 카를로스, 여자 따위는 모두 같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2.2. 재위 시절
1788년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4세는 스페인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버지와 달리 국정을 상당히 어려워했고 사냥을 좋아하여 사냥에 열중하였다. 그러자 왕비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남편 대신 다른 남자들과 대놓고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그중에서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근위병 출신에서 총리대신으로까지 임명되었다. |
마누엘 고도이, 프란시스코 바이유 作 |
왕은 정치 스트레스를 사냥에 열중하며 놀기에 바빴는데 사실상 실권자였던 고도이가 전횡을 일삼으면서 정치를 쥐락펴락했고 그에 따라 고도이에 대한 대신들과 백성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페인을 속국 정도로 취급했고,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의 대패 후 친프랑스 정책을 버렸다. 나폴레옹이 1807년에 러시아 제국에 승리를 거두면서 고도이는 다시 친프랑스 기조로 전환했지만, 프랑스는 더 이상 스페인과의 동맹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프랑스와의 동맹도 고도이의 지배를 약화시켰고,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모색하는 페르난도파(페르난도 왕세자의 지지자)는 활기차게 활동을 개시하였다.
2.3. 폐위와 말년
1808년 스페인 국민들은 총리인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 y Álvarez de Faria)와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무능한 왕의 전횡을 더는 참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을 내쫓았고 페르난도 왕세자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옹립했다.그러자 스페인의 상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화해를 주선한다는 목적으로 카를로스 4세 부부와 고도이, 페르난도 7세를 비요나로 불러들이고 그들을 감금시킨 뒤 카를로스 부처와 고도이는 퐁텐블로 성, 페르난도 7세를 발렌시아 성에 가둔 뒤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왕 호세 1세로 세웠다.
1813년에 페르난도 7세는 왕으로 복위하는 동시에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카를로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이에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갔으며 1819년 로마에서 고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카를로스 4세 (Carlos IV) |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colbgcolor=#ffffe4,#323300> 펠리페 5세 (Felipe V) | |
프랑스 왕세자 루이 (Louis, dauphin de France) | |||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5] (Maria Anna Victoria) |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Maria Elisabetta di Parma) | |||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di Parma) | |||
팔츠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6] (Dorothea Sophie von Neuburg)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von Sachsen) | |||
아우구스트 3세 (Augustus III) | |||
아우구스트 2세 (Augustus II) | |||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베르하르디네 (Christiane Eberhardine von Brandenburg-Bayreuth)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Österreich) | |||
요제프 1세 (Joseph I) | |||
브라운슈바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 (Wilhelmine Amalie von Braunschweig)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포르투갈의 왕비 카를로타 호아키나 (Carlota Joaquina, Queen of Portugal) | 1775년 4월 25일 | 1830년 1월 7일 | 주앙 6세 슬하 3남 6녀[7] |
2녀 | 스페인의 안토니오 파스콸 왕자비 마리아 아말리아 (María Amalia, Infanta Antonio Pascual of Spain) | 1779년 1월 9일 | 1798년 7월 22일 | 스페인의 안토니오 파스콸[8] |
3녀 | 에트루리아 왕비 마리아 루이사 (María Luisa, Queen of Etruria) | 1782년 7월 6일 | 1824년 3월 13일 | 루도비코 1세 슬하 1남 1녀[9] |
1남 | 페르난도 7세 (Ferdinand VII) | 1784년 10월 14일 | 1833년 9월 29일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
포르투갈의 마리아 이자벨 슬하 1녀 |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아말리아 |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슬하 2녀[10] | ||||
2남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Infante Carlos, Count of Molina) | 1788년 3월 29일 | 1855년 3월 10일 |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슬하 3남 |
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자 공주[11] | ||||
4녀 |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라 (María Isabella, Queen of the Two Sicilies) | 1789년 7월 6일 | 1848년 9월 13일 | 프란체스코 1세 슬하 6남 6녀[12] |
3남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 (Infante Francisco de Paula) | 1794년 3월 10일 | 1865년 8월 13일 | 양시칠리아의 루이사 카를로타 슬하 5남 6녀[13] |
테레사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14] 슬하 1남 |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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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 프란시스코 데 고야 작,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
- 위 그림은 카를로스 4세가 궁정화가인 프란시스코 데 고야에게 그리도록 명령한 그림이다.
혁명의 불길 속에서도 부르봉 왕가는 건재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의미를 담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고야는 이 작품을 비꼬는 의미를 담아 그렸다. 가령 왕은 중심부에서 물러나 있고 왕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비가 왕 대신 왕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고 왕비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천박하게 그려진 반면에 왕은 무기력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야 본인은 초상화 맨 뒤편에서 굉장히 냉소적인 표정으로 국왕 일가를 노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이 그림은 뒷날 한 미술평론가에게 복권에 당첨된 빵장수의 가족 같다는 평가를 얻었다.
[1] 카를로스 4세의 조부 펠리페 5세의 7남인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차녀이다. 즉, 친사촌이다.[2] 어차피 펠리페가 카를로스 3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1777년, 향년 30세. 정신질환 때문에 처자식도 없었다)에 카를로스 4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일찍 죽었기 때문인지 펠리페는 남아있는 초상화가 어린 시절의 모습밖에 없다.[3] 포르티치는 나폴리 근교의 도시로 포르티치 궁전은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시칠리아 국왕으로만 재위하던 시절 여름 별궁으로 사용했던 궁전이다. 현재는 나폴리 대학교 농업대학으로 사용하고 있다.[4] 참고로 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슬하에 6남 7녀를 두었는데 그 중 딸 5명은 갓난아기 때나 영유아기 때 요절했고 장남 펠리페와 요절한 6남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제외하고도 4남 2녀가 있기는 했지만 딸 하나는 한평생 미혼, 딸 하나는 신성 로마 제국에 황후로 시집갔고 3남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받아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웠으며 5남 안토니오 파스콸은 카를로스 3세가 죽을 때까지도 미혼이었고 그나마 늦게 결혼한 상대조차 친조카딸이라 논란이 많았다. 거기다 직계까지 결국엔 끊겼으니... 차남 카를로스 4세 말고 그나마 나은 4남 가브리엘도 있긴 했지만 카를로스가 죽기 직전 천연두로 36세에 요절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자식이 못나보여도 동양의 양녕대군이나 본국의 돈 카를로스급의 사건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왕위 계승자를 멋대로 뛰어넘기는 짓은 어느 시대에서든 충분히 논란이 될 법 하기 때문에 결국은 카를로스가 왕이 되었다.[5]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딸.[6]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7]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페드루 1세, 미겔 1세 등[8] 카를로스 4세 본인의 친남동생으로 즉, 친삼촌과 조카딸 사이에 결혼한 것이다. 아무리 유럽 왕실이 친척 간 결혼이 당연한 것이라도 이 정도로 가까운 친가 친척끼리의 결혼은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같은 삼촌조카끼리 결혼한 이웃나라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페드루 3세의 결혼보다도 더 논란이었던 결혼이었다. 그러다 마리아 아말리아가 사산아를 낳고 죽으면서 남은 자녀는 없게 되었다.[9]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 등[10] 이사벨 2세, 몽팡시에 공작부인 루이사 페르난다 공주[11]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언니이다. 자신의 제부와 결혼한 것.[12]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도 2세, 브라질의 황후 테레사 크리스티나 등[13]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등.[14] 귀천상혼[15] 영문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