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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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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4대 국왕
후안 2세
Juan II
파일:후안 2세(카스티야).jpg
<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출생 1405년 3월 6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토로
사망 1454년 7월 21일 (49세)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
재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
1406년 12월 25일 ~ 1454년 7월 21일
배우자 아라곤의 마리아 (1418년 결혼 / 1445년 사망)
포르투갈의 이자벨 (1447년 결혼)
자녀 카탈리나, 레오노르, 엔리케 4세, 마리아, 이사벨 1세, 알폰소
아버지 엔리케 3세
어머니 랭커스터의 캐서린
형제 마리아, 카탈리나
서명
파일:후안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4대 국왕.

2. 생애

1405년 3월 6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토로에서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3세와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딸 캐서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마리아, 카탈리나가 있었다. 당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 엔리케 3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직감하고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아스투리아스 공에 선임한 뒤 아들의 섭정을 맡을 이들을 기술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1406년 12월 25일 나스르 왕조의 본거지인 그라나다를 정벌할 준비에 착수하던 엔리케 3세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왕의 유언장이 즉시 공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캐서린 왕비와 디에고 로페즈 데 에스투니가, 후안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 루이 로페즈 다발로스, 그리고 후안 2세의 동생이자 카스티야 남부 지역을 관할하던 페르난도 왕자에게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보필할 것이었다.

많은 귀족들은 1살 밖에 안 된 갓난아기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리라고 여기고 페르난도 왕자에게 카스티야 국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형의 유언에 충실하겠다며 거부하고 조카 후안을 카스티야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 후 페르난도가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캐서린 왕비와 고위 사제 및 귀족들이 내치를 담당하는 동안, 후안 2세는 세고비아의 알카시르 성에 지내다가 바야돌리드에 있는 산 파블로 수도원에 이송되어 조용히 지냈다. 그는 이 시기에 아라곤 귀족 알바로 마르티네스 데 루나의 아들이며 궁정에서 시종으로 일하던 알바로 데 루나(1390 ~ 1453)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407년 8월,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7세가 카스티야 왕국이 어린 왕의 즉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하옌을 포위 공격했다. 이에 페르난도가 하옌 구원에 나서자, 무함마드 7세는 곧장 철수했다. 페르난도는 그해 9월 론다로 남하해 공성포의 활약으로 자하라 델라 시에라와 오르테 시자르를 공략했다. 다만 뒤이은 세테닐 공략에 실패하고 세비야로 회군했다. 1408년 2월, 무함마드 7세는 알카우데테 성을 포위해 공격을 퍼부어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수비대의 저항이 극렬한 데다 구원군이 다가오자 결국 철수했다. 그 후 페르난도는 캐서린 왕비와의 정쟁으로 입지가 불안해지자 무함마드 7세가 제의한 휴전 협약을 받아들였다.

1409년 공세를 재개한 페르난도는 1410년 긴 포위전 끝에 안테케라(오늘날 말라가)를 공략하고 '페르난도 데 안테케라'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던 1410년 5월 31일 아라곤 국왕 마르틴 1세가 왕위를 이을 적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위가 비어버리자, 페르난도는 아라곤 왕위에 도전하여 2년간 경쟁자들과 치열한 정쟁을 벌인 끝에 1412년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로 즉위했다. 이후 아들의 섭정을 단독으로 맡은 캐서린은 알바로 데 루냐와 한 자리에서 함께 자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알바로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아들을 염려해 알바로를 궁정에서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순종적인 아들이었던 후안 2세가 알바로를 지키려고 애쓴 데다 알바로를 후원하는 귀족들이 반발하자 어쩔 수 없이 궁정에 그대로 있게 했다.

1418년 6월, 캐서린 왕비가 사망했다. 그 해 10월 20일에는 페르난도 1세의 딸 마리아와 후안 2세의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419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후안 2세는 자신이 성년이 되었으므로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1420년 7월 14일, 산티아고 기사단장 엔리케가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페르난도 1세의 세번째 아들로, 최고 권력을 놓고 형제 후안과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후안이 나바라 왕국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수리아 공주와 결혼하자, 엔리케는 이러다가 자신이 후안에게 밀려날 것을 우려해 정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후안 2세는 토르데시야스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엔리케의 수중에 넘어갔다. 엔리케는 후안을 따르던 관료들을 모조리 경질하고 1420년 8월 여동생 마리아와 후안 2세의 예정된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코르테스를 소집해 자신의 정변을 승인하게 했다. 한편, 팜플로나에 있던 후안은 툴레도 대주교로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경고를 전해듣고 아내를 나바라에 남겨둔 뒤 페냐피엘로 가서 추종자들을 소집한 후 엔리케를 물리치려 했다. 이에 엔리케는 후안 2세를 산티아고 기사단의 영지로 이송시키려 했다.

이때 알바로 데 루냐가 왕을 탈출시키기로 마음먹고 1420년 11월 29일 탈라베라에 구금중이던 왕을 구출한 뒤 푸에블라 데 몬탈반 성으로 데려갔다. 엔리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소집해 몬탈반 성으로 쳐들어갔지만, 12월 10일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공성전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여러 귀족이 왕을 구하러 진군하자 모스톨레스로 철수했다. 엔리케의 형제 후안은 즉각 국왕을 찾아가서 부당한 짓을 저지른 형제에 맞서 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후안 2세는 자신을 구해준 것에 보답하고자 알바로에게 산 에스테반 데 고르메스 백작령을 수여했다.

그 후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를 오카냐에 군대를 집결시킨 엔리케에게 보냈다. 알바로는 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한다면서, 만약 기사들을 대동하여 왕을 뵈려 한다면 후안 왕자와 톨레도 대주교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반역으로 간주하고 토벌하려 들 테니 홀로 오라고 권고했다. 엔리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때까지는 왕을 만날 수 없다며 뻗댔지만, 부하들이 연이어 이탈하면서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어쩔 수 없이 1422년 9월 23일에 군대를 해산시키기로 했다. 이에 후안 왕자와 톨레도 대주교가 이끄는 왕실군 역시 해산되었다.

1423년 6월 12일, 마드리드로 향하던 후안 2세는 핀토에서 엔리케와 대면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엔리케를 즉각 체포하여 모라 성에 감금시키고 그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 3명을 체포한 뒤 반역죄로 기소했다. 엔리케의 아내 카타리나와 나머지 추종자들은 왕실군에 잡히기 전에 아라곤 왕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후안 2세는 엔리케에게서 빼앗은 영지와 재산을 그의 형제 후안에게 넘겨주고 알바로 데 루냐에게 카스티야의 근위대장 칭호를 하사했다.

아라곤 국왕이자 엔리케의 형인 알폰소 5세는 엔리케가 모라 성에 구금되고 그의 재산이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카스티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알폰소 5세의 동생 후안 왕자를 알폰소 5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1425년 9월 3일, 양국은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을 체결했다. 엔리케는 이 조약에 따라 석방되었고 체포 후 압수된 모든 재산과 수입을 돌려받았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장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었다.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 체결 후, 카스티야 고위 귀족 일부가 후안 왕자를 중심으로 연합해 알바로 데 루냐의 왕권 강화 정책에 맞섰다. 후안은 귀족들과 함께 알바로 데 루냐를 궁정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고, 후안 2세는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1427년 9월 5일 알바로 데 루냐와 추종자들을 1년 반 동안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후안 2세의 삼촌인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아르호나 공작으로 지명되었지만, 후안 왕자를 중심으로 뭉쳤던 귀족들은 이제 자기들끼리 권력 분쟁을 벌였다. 급기야 일부 귀족들이 파드리케와 후안의 전횡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알바로의 복귀를 요청했고, 후안 2세는 즉시 받아들여 1428년 2월 6일 알바로를 5개월만에 복귀시켜 총독 직위를 맡겼다.

1428년 6월 21일,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의 조언을 받아들여 후안 왕자와 엔리케 왕자에게 궁정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뒤이어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페냐피엘 성에 감금되어 1430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1429년 1월 일레스카스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그라나다의 무슬림 토후국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4천만 마라베디를 거둬들여 군대를 육성한 뒤 엔리케와 후안을 공격했다. 이에 알폰소 5세가 두 동생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1429년에서 1430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하면서 양국의 전쟁이 발발했다.

후안 2세와 알바로 데 루냐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엔리케와 후안이 카스티야 영내에 가지고 있던 모든 영지를 그들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안 그래도 아라곤 왕국을 적대시했던 귀족들은 기꺼이 왕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고 앞다퉈 아라곤군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알폰소 5세는 자드라케에서 자신의 아내이자 후안 2세의 누이인 마리아의 설득을 받아들여 마자노에서 휴전 협정을 맺기로 했다. 양국은 5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후안 2세는 후안과 엔리케의 소유였던 세구라 성, 알부케르케 성, 알바 데 토르메스 성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왕자는 다른 재산을 돌려받지 못했고, 카스티야 왕국에 입국할 수도 없었다. 알폰소 5세는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수용했다.

알부케르케 성에서 여전히 저항하던 엔리케와 페드로는 조약을 수용하길 거부하고 2년간 항전했다. 그러다 1432년 7월 알바로 데 루냐가 페드로를 체포하자, 엔리케는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동생을 석방시키는 대가로 카스티야를 떠나기로 했다. 이후 엔리케, 후안, 페드로 형제는 알폰소 5세가 머물고 있던 나폴리로 향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아라곤 내의 모든 영지와 요새는 후안 2세와 알바로 데 루냐에게 몰수되었다. 이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라곤 왕국의 침공이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격퇴되었고, 1436년 9월 22일 양국은 톨레도 협약을 맺으면서 최종적으로 화해했다. 이때 평화 협상을 중재한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의 딸 수리아 2세와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 4세의 결혼이 합의되었다.

아라곤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알바로 데 루냐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자, 귀족들은 강한 반감을 품었다. 특히 1437년 8월 13일 대표적인 레온 귀족 페드로 만리케가 알바로의 권고를 받아들인 후안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자, 페드로의 친척과 지지자들이 카스티야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를 중심으로 뭉쳐 왕을 상대로 내전을 단행했다. 1438년 8월 페드로 만리케는 내전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푸엔테 도냐 데 타호 요새를 탈출한 뒤 1439년 2월 파드리케 엔리케스 등 여러 귀족과 함께 후안 2세에게 "알바로 데 루냐와 그의 모든 친척들을 추방하지 않으면 반란을 멈추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반란군은 그해 3월 중순에 바야돌리드를 공략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아라곤 왕자이자 나바라 공동 국왕인 후안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후안 왕자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카스티야 왕국에 들어섰지만, 반란군 지도자들로부터 "우리를 도와준다면 빼앗겼던 영지를 되돌려받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이내 그들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1439년 6월, 후안은 두 반대 세력의 지도자들을 토르데시야스에 집결시킨 뒤 4개월간 논의한 끝에 1439년 10월 알바로를 6개월간 추방하고 양자가 화해하며 왕은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평화 협약을 수립했다. 그러나 알바로를 지원했던 귀족들이 그가 소유했던 영지를 되돌려주기를 거부했고, 알바로 데 루냐는 궁정 내에 있던 자신의 파벌을 통해 왕과 계속 접촉하자, 후안은 알바로를 적대시하는 귀족들과 함께 후안 2세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우리의 조언 외에는 어떤 것도 듣지 말 것이며 어떤 것도 위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메시지를 받은 다음날인 1440년 1월 17일, 후안 2세는 아들 엔리케 4세와 알바로 데 루냐 및 지지자들과 함께 아빌라로 탈출했다. 이에 후안 왕자는 중재자로서의 태도를 벗어던지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 편에 섰고, 그의 여동생이자 후안 2세의 아내인 마리아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여러 도시가 잇따라 반군 편으로 넘어가면서, 후안 2세는 점점 고립되었다. 급기야 반군 세력은 왕이 도피했던 아빌라으로 진군하면서 왕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의 근위대장은 당신의 모든 신체와 힘을 악마 같은 마법으로 묶고 있다. 왕권과 명예를 회복하고 싶으면 그와 결별하라."

결국 1440년 5월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와 지지자들을 영구적으로 추방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 4세와 나바라 왕의 딸 수리아 2세의 결혼식이 1440년 9월 15일 바야돌리드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1441년 1월 초, 후안 2세는 엔리케 4세와 함께 또다시 탈출하여 세비야 대주교와 세고비아 주교가 이끄는 알바로 데 루냐의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이후 6개월간 수차례의 전투가 벌어진 끝에, 6월 28일 후안 2세의 근거지인 메디나 데 캄포가 공략되면서 반란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며칠 후, 포로 신세나 다름없던 후안 2세는 반란군의 요구에 따라 알바로 데 루냐를 6년간 추방하기로 했다.

이후 왕을 보좌할 코르테스를 구성할 의원을 놓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던 1443년 7월 9일, 카스티야 제독 파드리케 엔리케스 등이 정변을 일으켜 후안 2세를 납치한 뒤 라마가 성채에 가두었다. 그들은 알바로 데 루냐가 권좌에 복귀하기 위해 후안 왕자와 엔리케 왕자의 보좌관인 후안 파체코를 체포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이를 막기 위해 예방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후안 왕자의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엔리케 4세는 1444년 3월 29일 카스티야 고위 귀족들을 규합한 뒤 아버지를 불법적으로 납치한 후안과 '외국인'들을 몰아내겠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알바로 데 루냐가 엔리케 4세에게 가담하여 엔리케 왕자와 함께 왕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은 1년간 이어지다가 1445년 5월 19일 올메도 전투에서 엔리케 4세와 알바로 데 루냐가 이끄는 왕실군이 대승을 거두고 후안 왕자를 아라곤 왕국으로 내쫓으면서 막을 내렸다.

1445년 오빠 후안을 돕다가 유폐와 복귀를 반복하던 마리아 왕비가 사망하자,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냐의 조언에 따라 1447년 8월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아들 주앙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다. 알바로는 새로운 왕비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했고, 십지어 부부 생활까지 간섭했다. 이에 분개한 이자벨은 은밀히 전 왕비 마리아의 아들인 엔리케 4세와 동맹을 맺고 알바로를 질시하는 귀족들을 은밀히 끌여들었다. 그러던 1450년, 아라곤 왕자이자 나바라 국왕 추안 2세와 아들 카를로스 4세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알바로는 이번 기회에 나바라 왕국을 공략함으로써 누구도 자신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위상을 끌어올리기로 마음먹고,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중 배치했다.

1451년 8월, 카스티야군은 알바로 데 루나의 지휘하에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가 부라돈 성을 함락하고 카를로스를 에스텔라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아라곤의 후안은 아들을 돕기 위해 사라고사로 진군했지만, 아버지를 믿지 못한 카를로스는 카스티야군과 동맹을 맺기로 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영토 상당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일은 오히려 알바로가 후안 2세의 신임을 잃은 계기가 되었다. 후안 2세는 자신의 허가도 없이 군대를 마음껏 운용한 알바로에게 경계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이자벨은 그런 왕의 마음에 알바로에 대한 의심이 박히도록 유도했다.

1453년 4월, 왕실의 최고 회계관 알론소 페레스 데 비베로가 괴한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알론소 페레스는 왕비의 부름을 자주 받기도 했는데, 알바로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끝에 그가 왕비의 지시를 받들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단정하고 암살을 사주했다고 한다. 카르바할 연대기에 따르면, 알바로의 아들 후안 데 루나가 알론소 페레스를 살해한 뒤 범죄를 감추기 위해 창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이에 이자벨은 왕국의 고위 관리를 제멋대로 죽여버린 알바로를 고발했고, 후안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알바로를 알론소 페레스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했다. 그 직후, 이자벨과 엔리케 4세는 왕의 허락을 받고 정변을 일으켜 알바로의 측근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후 알바로에게 전 왕비 마리아를 독살한 혐의를 추가로 뒤집어씌우고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6월 2일에 바야돌리드 광장에서 참수했다.

알바로를 의심한 끝에 죽이긴 했지만, 어려서부터 깊이 의지하고 총애했던 신하가 한 순간에 사라지자 깊은 상실감과 슬픔에 빠진 후안 2세는 건강을 해쳤고, 1454년 7월 21일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다. 사후 바야돌리드의 산 파블로 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엔리케 4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3. 가족 관계

  • 마리아(1403 ~ 1445): 아라곤 국왕 페란도 1세의 딸.
    • 카탈리나(1422 ~ 1424): 요절.
    • 레오노르(1423 ~ 1245): 요절.
    • 엔리케 4세(1425 ~ 1474):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 마리아(1428 ~ 1429): 요절.
  • 포르투갈의 이자벨(1428 ~ 1496):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손자이자 레겡고스 데 몬살라스, 벨라스 , 콜라레스의 영주 주앙의 딸.
    • 이사벨 1세(1451 ~ 1504):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
    • 알폰소(1453 ~ 1468): 아스투리아스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