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1:46:14

페르난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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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이브레아 왕조 제9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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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4세
Fernando IV
파일:페르난도 4세.webp
<colbgcolor=#AA0044> 출생 1285년 12월 6일
세비야
사망 1312년 9월 7일 (36세)
하옌
재위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의 왕
1295년 4월 25일 ~ 1312년 9월 7일
배우자 포르투갈의 콘스탄사 (1302년 결혼)
자녀 레오노르, 콘스탄사, 알폰소 11세
아버지 산초 4세
어머니 마리아 데 몰리나
형제 이사벨, 알폰소, 엔리케, 페드로, 펠리페, 베아트리스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별칭은 "엘 엠플라자도(el Emplazado: 소환된 자)".

2. 생애

1285년 12월 6일 세비야에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산초 4세와 몰리나 영주 알폰소의 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이사벨, 알폰소, 엔리케, 페드로, 펠리페, 베아트리스가 있었다. 그는 세비야 대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직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사모라 시에서 양육되면서 대표적인 레온 귀족이었던 페르난도 페레스 폰세와 페르난도 페레스의 아내인 우라카 구티에레스 데 메네세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1291년, 산초 4세는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대면해 디니스 1세의 딸 콘스탄사와 아들 페르난도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294년에 마음을 바꿔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인 블랑슈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지만, 이 계획은 1295년 4월 25일 톨레도에서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산초 4세 사후 9살된 아들 페르난도가 페르난도 4세로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다. 1295년 바야돌리드의 코르테스에서 엔리케 데 카스티야 왕자[1]가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는 듯했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시민 대표들을 포섭한 끝에 투표에서 앞서면서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산초 4세 치세 때부터 종종 반기를 들었던 후안 왕자[2]가 "산초 4세와 마리아의 결혼은 교황청으로부터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니[3]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산초 4세에게 밀려난 뒤 아라곤 왕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알폰소 드 라 세르다[4]를 국왕으로 추대했고, 비스카야의 영주 디에고 로페스 5세 데 하로, 라라 가문의 영주인 누뇨 곤살레스 데 라라, 후안 누녜스 데 라라도 여기에 가세했다. 게다가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이득을 마음껏 보려는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프랑스 왕국이 반란군을 은밀히 지원했다.

1295년, 후안 왕자는 나스르 왕조의 지원을 받으며 바다호스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고, 그 대신에 코리아와 알칸타라 성을 공략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에 귀순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알폰소 드 라 세르다를 왕으로 옹립하는 데 동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해 여름 바야돌리드 코르테스를 마친 마리아 왕비는 엔리케 왕자와 함께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대면했다. 그들은 포르투갈 국왕의 딸 콘스탄사와 페르난도 4세의 결혼을 예정대로 집행하고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를 디니스 1세의 아들 아폰수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와 동시에, 디에고 로페드 5세 데 하로가 비스카야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허용되었고, 후안 왕자 역시 산초 4세에게 몰수당한 재산을 회복하는 대가로 반란을 멈추기로 했다.

그러나 1296년 초, 후안 왕자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스투딜리오, 파레데스 데 나바, 두에냐스를 공략했고, 그의 아들 알폰소는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를 점령했다. 1296년 4월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가 빌려준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군해 레온 시로 입성한 뒤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로부터 레온, 세비야 갈라시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후안 왕자와 합세한 뒤 사하군으로 갔고, 이번에는 후안 왕자가 카스티야, 톨레도, 코르도바, 무르시아, 하옌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국왕을 자처한 두 사람은 마요르가를 포위 공격했지만,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인해 후안 왕자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페드로 데 아라곤 등 수많은 장교와 장병이 병사하면서 기세가 꺾이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후안 왕자와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포르투갈군과 합세해 마리아 왕비와 페르난도 4세가 있는 바야돌리드 시를 공략하려 했다. 아라곤 왕국은 이와 별도로 무르시아와 소리아를 약탈했고,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는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하며 각지를 약탈했으며, 비스카야 영주 디에고 로페스 5세는 페르난도 4세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

마리아 왕비는 디니스 1세에게 알폰소 데 라 세르다와 후안 왕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면 전년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디니스 1세는 더 이상 반란군을 돕지 않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에 관료를 임명한 뒤 본국에 돌아갔다. 포르투갈군이 끝내 오지 않자, 후안 왕자는 레온으로 철수했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왕국으로 돌아갔다. 1296년 10월, 마리아 왕비는 반격에 착수해 후안 왕자의 아내인 마리아 디아즈 데 하로가 아들 로페와 함께 있던 파레데스 데 나바를 포위했다.

한편, 엔리케 데 카스티야는 반란군을 지원하는 나스르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그라나다에 가 있었다. 그는 협상 도중 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이 물러났고 마리아 왕비가 친히 파레데스 데 나바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다간 마리아 왕비에게 완전히 밀려나 페르난도 4세의 가정교사 직마저 잃겠다고 여기고 카스티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나스르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을 다시 공격하자,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과 다른 기사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을 물리치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아르요나 전투는 카스티야군의 완패로 끝났고, 엔리케는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이 구출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으로 귀환한 엔리케는 파레데스 데 나바 공방전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 왕비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기사들은 무슬림들이 쳐들어왔는데 내전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겨 엔리케의 말에 따랐다. 이리하여 정부군은 1297년 1월 파레데스 데 나바 공격을 중단하고 바야돌리드로 귀환했다. 엔리케는 뒤이어 나스르 왕조의 침략을 멈추게 하려면 타리파를 저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타리파를 지키던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이 강력하게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는 알카니케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캄포마요르, 올리벤자, 오우겔라, 산 펠리시아스 데 로스 갈레고스 등 알폰소 10세가 탈취했던 포르투갈 영토를 돌려주고, 알메이다와 카스텔로 봄, 카스텔로 메호르, 케스텔로 로드리고, 몬포르테, 사부갈, 사스트레스 비야 마요르 일대도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을 그만두고, 두 왕국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자신들의 영지와 특권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두 왕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도시 길드, 카스티야와 레온 귀족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양국의 국경은 현대까지 거의 변경되지 않았기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국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이 다시 확인되었고,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약혼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디니스 1세는 마리아 왕비를 돕기 위해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어낸 마리아 왕비는 1297년 말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을 레온 왕국으로 보내 레온 영토를 계속 지배하고 있는 후안 왕자를 물리치게 했다. 후안 왕자는 후안 누녜스 데 라라의 지원을 받으며 이에 맞서 싸우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위조된 동전을 대량으로 주조했다.

1298년, 후안 왕자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왕비는 토로에서 디니스 1세와 재차 만나서 후안 왕자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4세와 후안 왕자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후안 왕자는 점령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영토가 페르난도 4세에게 귀속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 모인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마리아 왕비로부터 뇌물을 받고 디니스 1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298년, 마리아 왕비는 또다른 아들 펠리페를 갈리시아 왕국으로 보내 그곳의 귀족들이 카스티야 왕국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레모스와 사리아의 영주 후안 알폰소 데 아부케르케와 페르난도 로드리게스 데 카스트로 등 몇몇 갈리시아 영주들은 펠리페 왕자를 신경쓰지 않고 사실상 독립했다.

1299년 봄,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마린 왕조의 지원군과 합세한 뒤 세비야 인근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했다. 엔리케는 다시 한 번 타리파를 할양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반대에 부딪쳐 실패했다. 무함마드 2세는 무력으로 타리파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알카우데테를 공략하고 하옌 일대를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해 4월, 마리아 왕비가 파견한 군대가 알폰소 데 라 세르다 추종자들의 손아귀에 있던 몬손과 베세릴 데 캄포스를 탈환했다. 그리고 카메로스의 영주인 후안 알폰소 데 하로와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지지자인 후안 누녜스 데 라라를 체포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에게 포위된 로르카를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해 8월 왕실군을 동원해 팔렌추엘라를 포위 공격했다.

감옥에 갇힌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그의 여동생 후아나가 엔리케 왕자와 결혼하고 페르난도 4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다시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오스마, 팔렌주엘라, 아마야, 두에냐스를 헌납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마리아 왕비는 이 땅을 충성파 귀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와 페르난도 4세에 대한 충성심을 확고히 다지려 했다. 1300년 3월,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디니스 1세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을 매수할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바야돌리드 회의에서 귀족들을 몰아붙인 끝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아들과 콘스탄사의 결혼을 합법화하기로 마음먹을 만큼 막대한 뇌물을 준비하게 했다. 당시 기근이 카스티야와 레온 전역에 돌면서 자금 마련이 곤란했지만, 귀족들은 마리아의 강경한 주장에 굴복하여 교황에게 은화 10,000 마르크를 보냈다.

1300년 6월 26일, 후안 왕자는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에 부담을 느낀 끝에 페르난도 4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후안 왕자의 소유권은 카스티야 정부에 좀더 일찍 항복한 디에고 로페스 5세 데 하로와 마리아 디아스 데 하로에게 넘어갔다. 얼마 후 마리아 왕비와 엔리케 왕자, 후안 왕자는 디에고 로페스 5세 대 하로와 함께 아직까지 반란을 이어가는 알마산 마을을 포위했지만, 조기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엔리케 왕자의 강력한 철수 요구에 따라 물러났다. 1301년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가 군대를 파견해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이 소유하고 있던 로르카를 포위하자, 카스티야군은 즉시 반격을 가하여 알카라와 물라 성을 공략한 뒤 하이메 2세가 머물고 있던 무르키아 시를 포위했다. 하지만 아라곤 왕국과 이 이상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마리아 왕비는 협상을 제안했고, 하이메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물러났다.

1301년 11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전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와 마리아 데 몰리나 왕비의 결혼을 합법화하고 페르난도 4세의 왕위 계승도 합법적이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페르난도 4세와 포르투갈의 콘스탄사의 결혼도 허가했다. 이리하여 1302년 1월 23일, 페르난도 4세는 바야돌리드에서 포르투갈의 콘스탄사와 결혼했다. 후안 왕자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여러 귀족을 포섭해 반란을 또다시 도모했지만, 마리아 왕비가 무장 봉기를 시사하는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며 상당한 뇌물을 건네자 귀족들이 마음을 금세 바꿔먹는 바람에 실패했다. 1302년,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연합해 카스티야 왕국을 협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출진하기 직전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303년 초, 페르난도 4세는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결혼을 진행시키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났다. 이때 그는 디니스 1세가 일전에 가져간 영토 일부를 되돌려주기를 희망했지만, 디니스 1세가 단지 "그대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할 뿐 영토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자 매우 실망했다. 그러는 사이, 엔리케 왕자와 디에고 로페스 5세, 후안 마누엘이 로아 데 두예로에서 회담을 갖고 장시간 논의한 끝에, 알폰소 데 라 체르다가 레온의 왕이 되어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이사벨과 결혼하고, 페르난도 4세의 남동생 페드로는 카스티야 왕으로 선포되고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하이메 2세와 접촉할 인사로는 후안 마누엘이 선정되었다.

엔리케는 나중에 바야돌리드로 가서 마리아 왕비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왕국의 평화를 이뤄내고 마리아 왕비의 자녀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마리아 왕비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해체되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당시 후안 왕자와 친밀해진 페르난도 4세도 후안 왕자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주장했지만, 마리아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마리아가 계속 반대해서 계획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엔리케, 후안 마누엘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은 페르난도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무르시아 일대를 아라곤 왕국에 넘기고 하엔 왕국을 알폰소 데 라 체르다에게 넘기는 대가로 아라곤 왕국의 지원을 얻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엔리케 왕자는 곧 심각한 병에 걸려 본거지인 로아에 돌아갔다가 곧 사망했고, 그의 영지는 마리아 왕비에 의해 왕실의 직할지로 회수되었다.

한편, 나스르 왕조에서는 무함마드 2세 사후 아들 무함마드 3세가 타이파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벌인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함무 이븐 압둘 학크 이븐 라후가 이끄는 나스르군은 베드마르 등 하옌 인근의 성들을 공략했다. 그러나 1303년 잇따르는 반란에 직면한 무함마드 3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4세가 파견한 사절단의 대표 페르난도 고메스 데 톨레도는 그라나다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고, 무함마드 3세는 그 대가로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의 봉신이 되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이리하여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은 페르난도 4세는 아라곤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는 협상을 요청했고, 1304년 두 국왕은 토랄레스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아라곤 왕국이 1296~1300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의 내전을 틈타 빼앗아갔던 무르시아 주요 지역을 카스티야 왕국이 돌려받되 카르타헤나, 오리후엘라, 엘체, 카우데테, 엘다, 알리칸테 등지는 아라곤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럼에도 국경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자, 1305년 5월 19일 토랄레스 협약을 수정한 엘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서는 카르타헤나가 아라곤 왕국의 영역에서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며, 양국의 경계는 세구라 강으로 정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알바, 베야르 및 지브랄레온 일대의 영주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과의 분쟁을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은 페르난도 4세는 어머니에게 압력을 행사해 정치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그 후 내전이 한창일 때 카스티야 왕국의 남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한 나스르 왕조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1308년 12월, 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알칼라 데 에나레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나스르 왕조를 협공하며 단독으로 강화를 체결하지 않고, 나스르 왕조의 영역을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1309년 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은 함대를 집결시켜 그라나다 습격을 준비했다. 무함마드 3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전쟁 준비에 나섰으나, 그해 3월 14일 궁정 쿠데타로 인해 폐위되고 나스르가 타이파에 올랐다.

무함마드 3세의 갑작스런 폐위로 인해 나스르 왕조가 혼란에 빠져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페르난도 4세는 이 때를 틈타 원정을 감행해 지브롤터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뒤이은 알헤시라스 공략은 수비대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하다가 후안 왕자가 도중에 이탈하는 바람에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한편 아라곤군 역시 알메리아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하자, 앞서 맺었던 협약을 깨고 나스르 왕조와 휴전을 맺고 물러났다. 이후 나스르는 마린 왕조가 두 나라와 연합하여 공격해오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알헤시라스, 론다, 세우타를 마린 왕조에 넘기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11년 1월, 나스르 왕조를 상대로 재차 원정을 떠난 페르난도 4세는 부르고스에 당도한 뒤 알헤시라스 공방전 중 탈영해버린 후안 왕자와 국왕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든 자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후안 왕자가 이를 눈치채고 살다냐 시로 도망치자, 페르난도 4세는 후안의 지지자들을 심하게 박해했다. 뒤이어 후안 왕자에게 부여된 모든 특권과 칭호를 박탈하고 그와 그의 아들 알폰소의 재산을 몰수했다. 여기에 후안 왕자를 따라 살다냐로 도주한 동생 페드로의 '마요르(Mayor, 최고 관료)' 직책을 박탈하고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에게 넘겼다.

그러나 후안 마누엘이 왕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후안 왕자와 손잡고 다른 귀족들도 왕이 자신들까지 해치려들 것을 우려해 반기를 들 준비를 하자,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에 전념하길 원했던 페르난도 4세는 은퇴 생활을 보내던 어머니 마리아를 소환해 이들과 협상하게 했다. 15일간 협상한 끝에 후안 왕자와 그의 아들 알폰소의 칭호를 복구하고 재산을 돌려주며, 귀족들은 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친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일로 페르난도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1311년 가을 후안 왕자와 후안 누녜스 2세 데 라라 등의 주도하에 페르난도 4세를 타도하고 페드로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페드로의 양육을 담당하던 마리아 왕비가 완고하게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에 귀족들은 페르난도 4세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를 섬기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고, 페르난도 4세는 그들의 뜻에 따라 귀족, 고위 성직자, 도시 신하의 관습, 후예 및 특권을 존중하고 귀족이 왕실에 속한 지대와 토지를 박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후안 왕자에게 사과의 뜻으로 폰페라다 시를 양도했다.

1311년 12월, 페르난도 4세는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칼라타유드에서 대면했다. 두 사람은 하이메 2세의 딸 마리아와 페르난도 4세의 동생 페드로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고, 그라나다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312년 당숙이자 매부인 아부 사이드 파라즈가 말라가에서 반란을 일으켜 그라나다를 포위하자, 나스르는 페르난도 4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공세에 착수해 알카우데테를 포위 공격했다. 1312년 9월 5일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하옌으로 돌아가서 후속 병력을 집결시켜 그라나다로 진군하려 했다.

그러던 1312년 9월 7일, 페르난도 4세는 하옌 시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아무도 그가 죽은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기에, 왕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페르난도 4세는 자신을 따르던 기사 후안 알폰소 데 베나비데스를 죽인 혐의를 받던 페드로 카르바할과 후안 알폰소 데 카르바할 형제를 처형하게 했다. 이때 두 기사들은 자신들이 죽은지 30일 후에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페르난도 4세는 하옌에서 날마다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다가 형제가 처형된 지 30일째 되던 날에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그가 혈전증, 급성 폐부종, 심근경색, 색전증 등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페르난도 4세의 유해는 코르도바 시로 옮겨진 뒤 코르도바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유일한 아들인 알폰소 11세가 1살의 나이로 카스티야 연합 왕국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포르투갈의 콘스탄사(1290 ~ 1313):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의 딸.
    • 레오노르(1307 ~ 1359):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의 장남 하이메와 초혼,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와 재혼. 알폰소 4세 사후 자식들을 데리코 카스티야 왕국으로 피신한 뒤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에 대적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에 의해 살해됨.
    • 콘스탄사(1308 ~ 1310): 요절.
    • 알폰소 11세(1311 ~ 1350):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1] 페르난도 3세의 아들[2] 알폰소 10세의 아들이자 산초 4세의 동생이다.[3]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마리아가 산초 4세와 가까운 친척이고 산초 4세의 사생아 중 한명의 대모인 점을 문제삼아 결혼을 불허했다.[4] 알폰소 10세의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