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0:14:19

페란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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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o I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생몰년도 1380년 11월 27일 ~ 1416년 4월 2일
출생지 카스티야 왕국 메디나 델 캄포
사망지 아라곤 왕국 이구알라다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 국왕 1412년 - 1416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412년 - 1416년
아버지 후안 1세
어머니 아라곤의 레오노르
형제자매 엔리케 3세, 레오노르
배우자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
자녀 알폰소 5세, 마리아, 추안 2세, 엔리케, 레오노르, 페드로, 산초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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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17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23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페르난도 1세', 아라곤어로는 '페란도 1세'이다.

2. 생애

1380년 11월 27일 카스티야 왕국 메디나 델 캄포에서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레오노르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엔리케 3세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레오노르를 두었다. 1390년 아버지로부터 페냐필 공작과 마요르카 백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1390년 10월 9일, 후안 1세가 사망한 뒤 11살의 엔리케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섭정을 맡은 카스티야 의회는 엔리케 3세가 14세가 되기 전에는 페르난도 왕자의 결혼을 미루기로 했다. 만약 그랬다간 페르난도의 장인이 될 귀족이 페르난도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음모를 꾸밀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쿠에야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즈, 카스트로 일대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당시 페르난도는 카스티야 선왕 알폰소 11세사생아이자 알부르케르케 백작인 산초 알폰소의 딸 레오노르와 약혼했지만, 의회의 결정에 따라 결혼이 미뤄지다가 1393년이 되어서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레오노르는 기존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던 알부르케르케 외에 하로, 브리오네스, 빌포라도, 레데스마 등을 후안 1세로부터 선물받았다.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된 아내를 둔 덕분에, 페르난도 왕자의 영향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1406년 엔리케 3세가 사망하자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페르난도는 조카 후안 2세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자신은 후안 2세의 어머니 캐서린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1406년, 페르난도는 왕국의 남쪽 절반, 즉 시에라 데 과다라마(Sierra de Guadarrama) 산맥에서 그라나다 토후국 까지의 영역을 관할했다. 그는 엔리케 3세 통치 말년부터 왕국을 침략한 그라나다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끌었다. 지브롤터 해협에서 튀니지와 틀렘센의 술탄 편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그라나다 무슬림의 두번째 반격을 물리치고 1406년 자하라(오늘날 카디스) 시를 공략했다. 1408년 휴전을 맺은 뒤 전열을 재정비한 그는 1409년 공세를 재개해 1410년 긴 포위전 끝에 안테케라(오늘날 말라가)를 공략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페르난도 데 안테케라라는 별칭을 얻었다.

1410년 아라곤 왕 마르틴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 후 2년간 6명의 후보가 아라곤 왕위를 놓고 경쟁했는데,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어머니 레오노르가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인 점을 근거로 왕위를 주장했다.
  •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의 부계 증손자이며 마르틴 1세의 처남이었다. 마르틴 1세에 의해 왕실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 앙주 공작 루이 3세: 아라곤 국왕 추안 1세의 모계 후손.
  •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의 부계 후손. 후보들 중에서 아라곤의 역대 왕들과 혈연관계가 가장 가까웠다.
  • 후안 디 리바고르자: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의 형제. 알폰소 1세가 1412년 2월에 사망한 후 형의 뒤를 이어 아라곤 왕위를 주장했다.
  • 루나 백작 페데리코: 마르틴 1세의 아들이자 시칠리아 국왕인 마르티누 1세사생아.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마르티누 1세의 정식 아들로 인정받았다.

후보들은 의회를 열어서 왕을 결정하는 데 동의했지만,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의회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에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의 지지자였던 안톤 데 루나가 사라고사 대주교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를 암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후보들 중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이메 2세의 위신이 손상되었다. 여기에 더해 아라곤과 발렌시아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빗발쳤고, 각지에서 독자적인 회의가 열려 자기들 입맛에 맞는 후보를 왕으로 추대했다.

1410년에서 1412년 사이, 페르난도는 군대를 이끌고 아라곤과 발렌시아에 진군해 우르헬 백작의 지지자들과 맞붙었다. 1412년 2월 27일 모르베드레 전투에서 우르헬 지지자들을 격파하면서, 발렌시아는 페르난도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때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9명의 협상가로 구성된 중재 위원회를 세우라고 권고했다. 이에 14명의 아라곤계 인사들과 5명의 카탈루냐 사절단들은 1412년 2월 15일 알카니즈 의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며칠간 논의 끝에 3명의 아라곤 인사와 3명의 카탈루냐 인사, 3명의 발렌시아 인사를 협상가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에 앙주인들이 자기들을 제외시킨 것에 불만을 제기했지만 무시당했다.

선출된 협상가들은 왕을 지명하기 위해 카스페에 모였다. 1412년 6월 24일 금요일에 투표가 실시되었고, 다음날인 6월 25일에 페르난도를 아라곤 왕으로 선출하되 그가 카스티야 왕을 겸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발렌시아, 카탈루냐 등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발표했다. 그해 9월 3일, 페르난도는 사라고사에서 왕으로서 정식 선서를 했고, 우르헬의 하이메 2세, 루나 백작 페데리코, 후안 디 리바고르자 등 경쟁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토르토사로 가서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만난 뒤 베네딕토 13세가 대립 교황 알렉산데르 5세, 요한 23세와의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라곤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받는 대가로 자신을 아라곤,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의 왕으로 인정하게 했다. 11월 19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카탈루냐 의회를 소집한 뒤 카탈루냐 귀족들의 관습과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발렌시아에 들러 그곳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을 차례였지만, 1413년 봄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를 진압하느라 지체되었다. 우르헬로 진격해 반란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하이메 2세를 빌라구에르 성에 가두고 공성전을 벌인 끝에 10월 31일 항복을 받아냈다. 하이메 2세는 모든 직함과 소유물을 박탈당하고 일가족과 함께 카스티야의 우루에냐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사라고사로 가서 1414년 알하페리아 궁전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발렌시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왕이 된 직후 1410년부터 1412년까지 2년간의 공위기 동안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행정 체계 마비, 치안 마비, 소요 사태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재무부를 재조직하고, 강도와 도둑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각 도시에 군대를 배치해 치안을 바로잡았으며, 부패한 관료들을 해고하고 정부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의회에 상당한 권한을 줘서 귀족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해상 무역을 활성화시켜서 경제를 재건하고자 노력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폭력사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대관식, 순행, 경쟁자들에 대한 경제적 보상 등으로 인해 왕실 국고가 바닥나버려서, 후대 왕들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아라곤에서 입지를 어느정도 굳히고 시칠리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시칠리아는 1409년 마르티누 1세가 사망한 뒤 마르티누 1세의 미망인인 블랑슈(수리아 1세)와 사생아인 페데리코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는 4명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시칠리아로 파견하고 군대를 별도로 보내 상황을 진정시키게 했다. 1415년 위원회가 시칠리아의 평화를 이뤄내자 둘째 아들인 추안 2세를 시칠리아 총독으로 보냈다. 한편 사르데냐에서는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의 부추김을 받은 레오나르도 데 쿠벨, 후안 데 오리스타니가 1415년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들과 협상해 하이메 2세의 영지 일부를 두 사람에게 넘겨줌으로써 반란을 멈추게 했다. 또한 제노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집트 술탄과 우호 조약을 맺어 알렉산드리아에 아라곤 영사관을 복원하게 했다.

한편,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1414년 11월 5일 콘스탄츠 공의회는 지금까지 분쟁을 벌이는 모든 교황을 퇴위시키고 새 교황을 세우기로 했다. 그레고리오 12세와 발다세라 코사는 교황 직에 사임하는데 동의했지만,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물러나기를 거부했다. 이에 로마왕 지기스문트는 1415년 9월 20일 페르피냥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베네딕토 13세에게 퇴위를 권고했지만, 베네딕토 13세는 끝까지 사임을 거부했다. 이에 콘스탄츠 공의회는 베네딕토 13세를 분열주의자로 선언하고 파문에 처하고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1416년 초, 공물 납부를 거부한 바르셀로나 의회를 설득해 귀족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냈다. 이후 사라고사로 돌아가던 중 이구알라다에 들렀다가 1415년 중반부터 앓던 병이 악화되면서 1416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사후 장남 알폰소 5세가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시칠리아, 샤르데냐, 코르시카의 왕을 맡았고, 둘째 아들 추안 2세는 아버지가 카스티야 왕국 내에 가지고 있던 영지와 직위를 물려받았다. 또다른 아들 엔리케는 알부르케르케와 레데스마 공작위를 물려받았고, 페드로는 타라사, 발라그라사, 타레가 등 카탈루냐 도시와 마을, 그리고 발렌시아의 엘체와 클레빌렌테를 물려받았다.

3. 가족 관계

  •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1374 ~ 1435) :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의 사생아이자 알부르케르케 백작인 산초 알폰소의 딸.
    • 알폰소 5세(1394 ~ 1458): 아라곤, 시칠리아, 나폴리의 왕.
    • 마리아(1396 ~ 1445):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의 첫번째 부인.
    • 추안 2세(1397 ~ 1479): 아라곤, 시칠리아, 나폴리의 왕.
    • 엔리케(1400 ~ 1445): 빌레나 공작, 알부르케르케 백작, 산티아고 기사단장.
    • 레오노르(1402 ~ 1445): 포르투갈 국왕 두아르트 1세의 왕비.
    • 페드로(1406 ~ 1438): 알부르케르케 백작이자 노토 공작.
    • 산초(1410 ~ 1416) : 칼라트라바와 알칸타라 기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