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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سابع
영어 Muhammad VII of Granada
재위 1392년 10월 3일 ~ 1408년 5월 13일
생애 1370년? ~ 1408년 5월 13일 (향년 38세)
1. 개요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12대 군주로, 왕호는 알 무스타인 빌라 (المستعين بالله).2. 생애
무함마드 5세 사후 즉위한 아들 유수프 2세가 불과 2년도 안되어 요절하자, 유수프 2세의 아들 무함마드가 20세 전후의 나이로 계승하였다. 1393년 12월, 선대부터 이어진 휴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4천 병력을 보내어 무르시아 인근을 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카스티야 측에 재차 복속을 표하며 사죄하였고, 이미 여러 전쟁을 치른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3세에게 수용되었다. 다만 후자의 만류에도 그 제후인 알칸타라 기사단은 십자군을 선포하고 이듬해 그라나다를 침공하였다. 이에 무함마드는 출정하여 십자군을 격파, 기사단장 마르틴을 전사시켰다.[1] 그후 같은해 11월 카스티야-그라나다-아라곤 3국 간의 휴전이 체결되었다.평화 분위기에도 1397년, 이번에는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그라나다로 들어와 선교에 나섰다. 무함마드는 이를 금했으나 그들이 지속하자 채찍형을 가하였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자 처형하여 시신을 조리돌림하였다. 또한 양측 변방 영주들 간의 습격이 이어졌고, 한번은 지하드 민병대가 카르타헤나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엔리케 3세는 1404년 로그로뇨 회담에서 기독교 국가들과 반그라나다 연합을 구성하려 했으나 같은 소국 신세였던 나바라 왕국의 카를로스 3세가 그라나다 편을 들겠다 하며 무산되었다.[2] 1405년 5월 무함마드는 아라곤 국왕 마르틴 1세와 화친을 맺었고, 포로 교환 및 무역은 물론 군사적 협력에 합의하였다.[3] 결국 1406년 10월 그라나다와 카스티야 역시 마드리드에서 2년 간의 휴전 및 무역 재개에 합의하였다.[4] 하지만 휴전 체결 직후에 하엔 일대에서 양측의 군대가 충돌하여 코예하레스 전투까지 벌어지자 엔리케 3세는 전쟁 준비에 나섰으나 그해 12월 병사하였다. 그의 후계자는 아들 후안 2세였고, 정권 교체를 틈타 무함마드는 친히 출정하여 1407년 8월 하엔을 포위하였으나 카스티야측 원군이 다가오자 철수하였다. 카스티야의 섭정 페르난도[5]는 9월 론다로 남하하였고, 공성포의 활약으로 인근 자하라 델라 시에라와 오르테 시자르를 점령하였다. 다만 이어진 세테닐 포위에는 실패하고 세비야로 회군하였다. 그후 1408년 2월 무함마드는 재차 알카우데테 성을 포위하여 공성포로 성벽을 허물어 함락에 임박했으나, 결국 철수하였다. 그해 4월 무함마드는 휴전을 청하였고, 입지가 불안하던 페르난도가 수용하며 양측은 평화를 회복하였다.
휴전 직후인 5월 13일, 무함마드는 병사하였다. 죽기 직전 그는 선대부터 살로브레냐 성채에 유폐되어 있던 동생 유수프 3세에 대한 처형을 명하였는데, 유수프 3세는 마지막 소원으로 체스 게임을 청하며 시간을 끈 끝에 무함마드의 부고와 함께 지지자들에게 구출되어 술탄에 올랐다.
[1] 그라나다 측은 보병 5백이 전사한 데에 반면 십자군은 1200명이 포로가 되고 1500명이 도주한 대승이었다. 그후 엔리케 3세는 일종의 괴씸죄에 대한 처벌로 알칸타라 기사단의 경쟁 상대인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인사를 알칸타라 기사단장으로 봉하였다[2] 심지어 카를로스 3세는 배편으로 그라나다에 3백개의 공성 무기와 3척 상당의 밀을 보내주었다. 다만 나바라에서 상인으로 위장하여 육로로 그라나다에 파견된 사절단은 카스티야 측에게 구류되었다. 한편 아라곤 역시 시칠리아나 사르데냐 방면에 집중하여 그라나다 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3] 또한 그라나다는 아라곤에 4-500 기병을 제공하고 그 경비로 매달 3천 도블라 가량을 지불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대가로 아라곤은 4-5척의 함대와 30 석궁병 및 220명의 선원을 제공하였다. (다만 그 경비는 역시 그라나다가 매달 900 도블라까지 충당하였고, 전력 역시 아라곤의 동맹인 카스티야에 대해 사용할 수 없었다)[4] 양측은 국경에 관리들을 파견해 영주들을 감독하고, 서로 반군이나 부패 관료의 망명을 받아주지 말 것을 약속하였다[5] 엔리케 2세의 동생이자 후일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의 조부이자 카를 5세의 외고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