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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تاسع |
영어 | Muhammed IX of Granada |
재위 | 1419년 ~ 1427년, 1430년 ~ 1431년, 1432년 ~ 1445년, 1448년 ~ 1453년 |
생애 | 1396년 ~ 1453년 |
1. 개요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15대 군주로, 호칭은 알 갈리브 빌라 (الغالب بالله)이다. 무함마드 9세는 3차례나 복위하여 재위 기간이 4분되어 있지만, 1419년 ~ 1453년의 34년 중 7년을 제외하면 전부 그의 치세라 보아도 무방하다.2. 생애
유수프 3세의 사촌으로[1], 유수프 3세 사후 옹립된 어린 종손 무함마드 8세가 1419년 마린 왕조를 도와 포르투갈령 세우타 포위에 파병했다가 패배하자 제위를 찬탈하였다. 다만 8년 후 경제 위기를 이유로 폐위되었고, 무함마드 8세가 복위된 후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로 추방되었다. 그러다 아벤세라즈 당(당주: 유수프 빈 사라즈)의 지지와 함께 1429년에 돌아온 그는 그라나다를 포위하였고, 이듬해 무함마드 8세가 항복하자 살로브레냐(유수프 3세의 감금지)에 유폐했다가 1431년 처형시켰다.하지만 일단의 귀족들이 무함마드 6세의 외손 유수프 4세를 지지, 후안 2세에게 봉신 서약을 대가로 군사 지원을 얻어 남하하였다. 그해 7월의 라 이구에루엘라 전투는 무승부였고, 후안 2세는 회군해버렸으나 궁정 내의 아벤세라즈 당이 유수프 측으로 전향하자 무함마드 9세는 조카(미래의 무함마드 10세)와 함께 말라가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1432년 1월, 유수프 4세가 즉위했으나 카스티야에 배상금을 내고 기독교도 포로를 석방하며 선교를 허용한다는 불평등 조약은 무슬림 여론의 반발을 샀다.
그러자 무함마드 9세는 같은 해 말엽 그라나다로 돌아와 유수프 4세를 처형하고 재차 복위하였다. 카스티야는 유수프 4세의 복수를 명분 삼아 국경 지대를 공격, 1438년 우엘마를 점령하였다. 결국 무함마드 9세는 휴전 협상에 나서 1439년, 전보다 덜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1445년, 이번에는 무함마드 9세의 부관이던 조카 무함마드 10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재차 말라가로 도주한 무함마드 9세는 결국 양위를 표하였다. 다만 무함마드 10세 역시 6촌인 유수프 5세에 맞서야 했고, 혼란이 지속되던 1447년 무함마드 9세는 그들 모두를 폐위하고 또다시 복위할 수 있었다.
2.1. 무르시아 재정복 시도
1445년 ~ 1448년의 3년 간에 무려 3명이 술탄들이 (무함마드 10세, 유수프 5세, 이스마일 3세)이 4차례[2] 즉위와 폐위를 반복한 후 또다시 복위한 무함마드 9세는 조카 무함마드 10세가 시작한 무르시아 방면으로의 진출을 이어갔다. (1448년) 당시 무르시아 왕가인 파자르도 가문은 내분에 휩쌓여 있었기에 무함마드 9세는 세구라 강을 건너 무르시아 서북쪽의 치에자를 점령하였고, 반격에 나선 카스티야 군을 엘린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로써 무르시아가 톨레도에서 사실상 고립되자, 당시 비예나 후작 후안 파체코의 반란에 대처하던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는 1450년 휴전을 청하였다. 자신감이 가득하던 무함마드 9세는 카스티야가 분열된 틈에 재정복을 꾀하고자 이를 거부하고 이듬해 무르시아 일대를 약탈하였다. 1451-52년에는 해안의 카르타헤나를 집중 습격하여 가축 4만두와 여러 포로를 얻었다.풍전등화의 상황에서 그라나다와 무르시아 사이의 요충지 로르카의 성주 알폰소 파자르도 엘브라보는 일대의 카스티야 병사들을 끌어모아 3백의 기병과 2천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편성, 로르카 인근의 로스 알포르초네스에서 그라나다 군대에 맞섰다. 카스티야 측의 선공으로 벌어진 격전 도중, 알폰소는 그라나다측 장군 말리크 이븐 알-압바스와 결투를 신청하였다. 결투 결과 후자가 낙마하여 포로가 되자, 카스티야 군이 승기를 잡았고 그라나다 군은 4백의 포로와 다수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패배로 인해 그라나다의 무르시아 공격은 중단되었고, 무함마드 9세는 휴전 협상에 나섰다. 내전에 치중하던 후안 2세도 이를 수용하여 양측은 5년의 휴전을 맺었다.[3] 무함마드 9세는 이듬해 사망하였고, 그라나다는 1455년까지 또다시 내전의 혼란기를 보내게 된다. 당대 기록에 무함마드 9세는 '왼손잡이'란 뜻인 알-야이사르 혹은 엘주르도라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