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0:34:43

조반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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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a II
가문 앙주 왕조
생몰년도 1371년 6월 25일 ~ 1435년 2월 2일
출생지 헝가리 왕국 자다르
사망지 나폴리 왕국 나폴리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414년 - 1435년
아버지 카를로 3세
어머니 두라초의 마르게리타
형제 라디슬라오
배우자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 라마르슈 백작 자크 2세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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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9대 여왕.

2. 생애

1371년 6월 25일 헝가리 왕국 자다르에서 슬라보니아 공작 카를로와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의 막내 딸인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의 딸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라디슬라오가 있었다. 아버지 카를로는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와 산세베리노의 마르게리타 사이의 외아들로, 루도비코는 두라초 공작 조반니의 아들이고, 조반니는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막내아들이다.

1382년 아버지 카를로가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살해하고 카를로 3세로서 왕위에 오른 뒤 남동생 라디슬라오가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되자 곧장 헝가리로 진군해 1385년 12월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 입성한 뒤 12월 중순에 헝가리 여왕 마리어를 퇴위시키고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1386년 2월 7일 부더 궁정에서 마리어의 어머니 엘리자베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가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가격당해 중상을 입고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당시 9살이었던 라디슬라오는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 뒤 곧바로 나폴리 왕위에 추대되었고, 어머니 마르게리타가 섭정했다. 그러나 1387년 7월, 친 앙주파가 조반나 1세의 네번째 남편으로 카를로 3세와 맞서다가 패배한 뒤 숨어지냈던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를 앞세워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반나는 남동생 라디슬라오, 어머니 마르게리타와 함께 가에타 요새로 도주했고, 나폴리는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오토는 앙주 공작 루이 2세를 나폴리 국왕 루이지 2세로 받들었다.

그 후 동생이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시칠리아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루이지 2세와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 가에타 성채에 은거하던 조반나는 1399년 동생이 루이지 2세를 최종적으로 물리치고 나폴리를 탈환하자 나폴리로 귀환했다. 1401년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를 압박하려는 라디슬라오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의 후견인을 맡던 빌헬름 공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빌헬름이 1406년 7월 15일에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되었다. 그 후 대시종관 판돌펠로 알로포(Pandolfello Alopo)[1]를 애인으로 삼았다.

1414년 4월, 라디슬라오는 로마를 장악한 뒤 북부 이탈리아를 향한 원정에 착수해 시에나, 아시시, 볼로냐 등 여러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토디 공방전을 치르던 중 갑작스런 병에 걸려 페루자와 로마를 거쳐 나폴리로 돌아갔고, 1414년 8월 6일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왕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기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조반나가 '조반나 2세'로서 나폴리 여왕에 등극했다. 나폴리 왕국에 굴복했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라디슬라오의 사망 소식을 듣자 곧바로 독립했다.

나폴리 왕실 관료와 귀족들은 일전에 나폴리 왕위를 놓고 라디슬라오와 내전을 벌였던 루이지 2세가 또다시 나폴리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여왕에게 조속히 재혼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조반나 2세는 고심 끝에 라마르슈 백작 장 1세의 장남인 라마르슈 백작 자크 2세와 결혼하기로 했고, 결혼식은 1415년 8월 10일에 거행되었다. 조반나 2세는 남편에게 타란토 공작과 칼라브리아 공작의 칭호를 부여했지만, 왕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자크 2세는 여왕에게 끌려다니는 남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여왕의 애인인 판돌펠로를 체포한 뒤 그해 9월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데려온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나폴리를 통제했으며, 여왕을 별궁에 가두고 자신을 나폴리 왕으로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나중에 별궁에서 겨우 빠져나온 조반나 2세는 나폴리에 오자마자 오만하게 행동하는 남편에게 격분했고, 나폴리 귀족들 역시 자기들을 몰아내고 프랑스 귀족들을 정계의 핵심으로 삼아버린 것에 불만을 품었다. 1416년 9월, 조반나 2세로부터 은밀한 지시를 받은 귀족들은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제압된 자크 2세는 프랑스 측근들을 돌려보내고 작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조반나 2세는 조반니 카라촐로(Giovanni Caracciolo. 조반니의 애칭인 '잔니(Gianni)' 카라촐로로 불리기도 한다.)를 새 애인으로 두고, 그를 시니스칼코(siniscalco: 재상), 아벨리노 백작, 카푸아, 멜피, 베노사 등 캄파니아와 풀리아의 여러 영지의 영주로 삼았다. 1418년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된 자크 2세는 나폴리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고, 1438년 사망할 때까지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었다.

1419년 10월 19일, 조반나 2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해 나폴리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주권자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교황 마르티노 5세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교황은 명목상 나폴리 왕국의 주권자였는데, 마르티노 5세는 이 점을 근거삼아 교황군을 재건하기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반나 2세는 조반니 카라촐로의 부추김을 받고 이를 거부했다. 마르티노 5세는 이에 분노해 앙주 공작 루이 3세를 나폴리 왕으로 삼아 나폴리를 공격하게 했다. 루이 3세는 라디슬라오와 나폴리 왕위를 놓고 전쟁을 치른 루이 2세의 아들이었다.

1420년, 루이 3세는 캄파니아 해안에 상륙한 뒤 나폴리로 진군했다. 조반나 2세는 이에 맞섰지만 여의치 않자 1421년 아라곤 왕국-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알폰소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코르시카 섬에서 보니파치오 시를 포위 공격하던 중이던 알폰소 5세는 보니파치오 시 포위를 풀고 나폴리로 진군해 나폴리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루이 3세를 몰아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조반나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칼라브리아 공작에 지명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국왕을 자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알폰소 5세는 아라곤 통치를 아내 마리아에게 위임한 뒤 나폴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용병대장으로 고용해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3세와 밀라노 귀족 아텐돌로 스포르차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자,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하고,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파문된 뒤 입지가 위태롭던 베네딕토 13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얼마 후 전세가 불리해진 스포르차 가문이 루이 3세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면서, 알폰소 5세의 입지는 굳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알폰소 5세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조반나 2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을 철회하려 했다. 알폰소 5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1423년 5월 잔니 카라촐로를 체포하고 여왕 역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텐돌로 스포르차에게 아라곤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포르차는 군사를 일으켜 아라곤군을 기습공격해 크게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요새인 카스텔 누오보로 피신했다. 그 후 조반나 2세는 카스텔 누오보를 포위 공격했지만 아라곤군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아베르사 요새로 퇴각했고,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들였던 것을 취소하고 앙주의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폰소 5세는 라퀼라에서 조반나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카스티야 내전이 동생 후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단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하던 중 루이 3세가 소유한 마르세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1423년 말, 제노바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반 알폰소 동맹에 가담한 뒤 남부 티레니아 해로 진군해 가에타, 프로키다, 카스텔람마레, 소렌토를 공략했다. 형 알폰소 5세를 대신하여 나폴리 내 아라곤 영토를 지키고 있던 페드로는 1424년 제노바와 나폴리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카스텔 누오보에서 저항했지만, 1424년 8월 요새가 함락되려 하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아라곤군은 나폴리 왕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아라곤 왕국군을 축출한 후, 후계자로 지명된 루이 3세는 왕위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칼라브리아 영지에서 살았다. 여왕은 나폴리에서 통치를 행사했지만, 실권은 잔니 카라촐로에게 있었다. 잔니 카라촐로의 통치 하에 한동안 평온했다. 그러나 애인의 권세가 점점 강해져 나중에는 왕위까지 노릴 기미가 보이자, 조반나 2세는 1432년 8월 19일 암살자들을 고용해 잔니 카라촐로를 카스텔 카푸아노 성채에서 처단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알폰소 5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시가 군사 동맹을 맺고 그를 압박해오자, 어쩔 수 없이 1433년 조반나 2세와 10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1434년 11월, 나폴리 왕이 곧 되는 듯했던 루이 3세가 코센차에서 병사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자신이 죽으면 나폴리 왕위를 루이 3세의 동생인 앙주의 르네에게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435년 2월 2일, 여왕은 62세의 나이로 나폴리에서 사망했고,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ella Santissima Annunziata Maggiore)에 안장되었다. 이리하여 카를루 1세 이래 153년간 나폴리 왕위를 이어가던 앙주 카페 왕조는 단절되었다. 사후 르네가 나폴리 국왕 '레나토'로 즉위했지만, 알폰소 5세가 그를 몰아내고 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를 아우르는 아라곤 제국을 건설했다.


[1] 알로포(Alopo)는 대머리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