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0:08:59

로베르토(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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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베르토(나폴리).png
Roberto
가문 앙주 왕조
출생 1277년
베네치아 공화국 토레 마시밀라나
사망 1343년 1월 20일 (향년 65~66세)
나폴리 왕국 나폴리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309년 ~ 1343년
프로방스와 포르칼퀴에 백작 1309년 ~ 1343년
아버지 카를로 2세
어머니 헝가리의 마리어
형제자매 카를로 마르텔, 마르그리트, 툴루즈의 성 루이, 필리포 1세, 블랑슈 등
배우자 아라곤의 비올란테, 마요르카의 산치아
자녀 카를로, 루이지, 카를로 아르투아(사생아)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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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제3대 국왕.

2. 생애

1277년경 베네치아 공화국 토레 마시밀라나에서 나폴리 왕국 초대 국왕 카를루 1세의 아들인 살레르노 공작 샤를과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딸 마리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카를로 마르텔, 마르그리트, 툴루즈의 성 루이, 필리포 1세, 블랑슈, 레몽 베렝가르, 장, 트리스탄, 엘레오노르, 마리아, 피에르, 장 드 두라초, 베아트리스가 있었다.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아라곤 왕국 -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의 전쟁이 한창이던 1284년 6월, 아버지 샤를이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참패한 뒤 여러 나폴리 귀족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그 후 샤를은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287년 10월 막대한 몸값과 인질들을 바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는 조건하에 풀려났고, 곧바로 나폴리로 돌아가 카를루 1세 사망 후 공석이 되었던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로 등극했다. 이때 로베르토는 시칠리아 왕국에 인질로 보내졌다.

1295년 아니니에서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협약이 체결되었다. 아라곤 국왕이자 시칠리아 국왕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카를로 2세는 딸 블랑카를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시키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이때 로베르토는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나폴리로 돌아갔다. 마침 그의 형인 카를로 마르텔이 사망했기에, 그는 나폴리 왕위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카를로 2세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1299년, 로베르토는 형제 필리포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메시나를 공략한 후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지난날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기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대파했고, 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진입한 나폴리 왕국군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면서 더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1302년 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가 시칠리아로 진군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를 맺자고 제안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가 아니니 사건의 여파로 선종한 뒤 베네딕토 11세가 신임 교황에 올랐지만 1304년 7월 7일 재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선종했다. 그 후 신임 교황 선출을 놓고 구엘프 백파와 구엘프 흑파간의 갈등이 폭발해 로마와 토스카나 일대가 혼란에 휩싸이자, 로베르토는 아버지 카를로 2세의 지시를 따라 1305년 봄 디에고 데 라트가 이끄는 보병대와 아라곤, 카탈루냐 기사들과 함께 토스카나로 진군해 혼란 수습에 나섰다. 5월 20일 구엘프 백파가 다스리는 피스토이아를 포위한 뒤 공성전을 벌였지만, 1305년 6월 5일에 교황으로 선출된 클레멘스 5세가 피스토이아를 나폴리 왕국이 가지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309년 카를로 2세가 사망한 뒤 나폴리 왕에 즉위했다. 1310년 교황청으로부터 로마냐의 교황 대리자로 선임된 그는 13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하고 롬바르디아 일대를 복종시킨 뒤 1312년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향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구엘프 파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도시 내에 아직 남아 있던 기벨린 파벌과 함께 구엘프파를 공격했다. 로베르토는 이를 막기 위해 부관 조반니 디 그라비나에게 400명의 기병을 맡겨 로마로 파견했지만, 하인리히 7세는 이를 물리치고 구엘프 파를 로마에서 축출한 뒤 6월 29일 아비뇽에 가 있는 교황을 대신해 로마를 다스리던 추기경들에 의해 황제의 관을 썼다.

하인리히 7세는 토스카나의 구엘프 파벌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토스카나로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 그는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구엘프 지도격의 도시였던 피렌체는 함락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후 자신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 피사에 한동안 머무른 뒤 나폴리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하고자 로마로 향했지만 말라리아에 걸려 1313년 8월 24일 부온콘벤토에서 병사했다. 하인리히 7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구엘프 파는 환호하면서 로베르토를 가리켜 "이탈리아 왕국의 훌륭한 왕 로베르토"이라고 칭송했다.

한편,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는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남하했을 때 황제와 동맹을 맺고 나폴리 왕국과 전쟁을 벌여 레지오를 공략했다. 이후 나폴리로 남하하려는 황제와 합세하고자 토스카나로 진군했지만, 얼마 후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로베르토는 이에 보복하고자 시칠리아를 여러차례 습격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또한 구엘프 파가 로마에 복귀하고 기벨린 파와 전쟁을 이어가는 것을 지원했다.

1315년 로베르토의 형제인 타란토 공작 필리포 1세가 이끄는 구엘프 파가 몬테 카티니 전투(8월 29일)와 알토파시아 전투(9월)에서 참패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구엘프 파를 꿋꿋이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1317년 로마 원로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1318년에는 제노바의 영주가 되어 1334년까지 제노바의 종주권을 가졌다. 1319년에는 브레시아의 주권자가 되었다. 1325년 11월 25일에는 로베르토의 장남 카를로가 피렌체 공작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로는 3년간 구엘프 당을 이끌고 기벨린 파의 전쟁을 이끌었다.

1325년, 로베르토의 아들 카를로 휘하의 앙주 육군과 함대가 시칠리아로 쳐들어갔지만 조반니 데 키아라몬테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에게 팔레르모 인근에서 패배했다. 1326년과 1327년에 앙주군이 시칠리아를 잇따라 공격해 타격을 입혔으며, 시칠리아 항구들을 봉쇄해 시칠리아의 경제가 곤궁해지게 만들었다. 1328년 루트비히 4세의 이탈리아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롬바르디아 연맹을 지원했으며, 1330년에는 보헤미아 군주이자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얀 루쳄부르스키가 북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롬바르디아 연맹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얀이 보헤미아로 돌아가게 했다.

1336년 만프레디 5세와 조카 토마스 2세 사이의 살루초 변경백의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토마스가 대표적인 기벨린 파인 비스콘티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자, 로베르토는 만프레디를 돕기로 하고 살루초로 진군해 공략에 성공한 뒤 도시를 파괴하고 토마스를 감옥에 가뒀다가 토마스가 몸값을 지분한 후에야 풀어줬다. 1337년 페트루 2세가 시칠리아 국왕이 되자, 로베르토는 시칠리아 왕위가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던 칼타벨로타 조약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에 속했던 리파니(1339년), 밀라초(1342년)를 공략하는 등 공격을 퍼부었다.

1343년 1월 20일, 로베르토는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력한 후계자였던 아들 카를로는 1328년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 루이지는 1310년에 요절했기에, 남은 후계자는 카를로의 딸 조반나 뿐이었다. 조반나는 헝가리 왕국의 앙주 가문 출신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차남인 언드라시와 결혼한 바 있었다. 로베르토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반나의 왕위 계승을 명시하면서 언드라시가 나폴리 왕이 될 자격을 박탈하고 그 대신 살레르노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조반나가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조반나의 여동생 마리아와 마리아의 합법적인 후손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그리하여 조반나가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로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 아라곤의 비올란테(1273 ~ 1302):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와 시칠리아 여왕이자 아라곤 왕비인 쿠스탄차 2세의 딸. 로베르토가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생전에 나폴리 왕비가 되지 못했다.
    • 카를로(1298 ~ 1328): 칼라브리아 공작, 나폴리 부왕, 피렌체 공작.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아버지.
    • 루이지(1301 ~ 1310): 요절
  • 마요르카의 산치아(1281 ~ 1345):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의 딸. 로베르토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 사생아
    • 카를로 아르투아(1300 ~ 1346): 조반나 1세의 궁정 관리이자 후견인. 조반나 1세의 남편 언드라시를 살해한 뒤 장남 베르트랑과 함께 궁정을 탈출했으나 1346년 8월 또는 9월에 멜피에서 타란토의 루이지(루이지 1세)에게 체포된 뒤 독살당함.